고릴라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 / 평사리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늘 존재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비존재성은 인간을 지상 위의 유일한 존재로 격상시키는 착각을 유도한다. 자연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배경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인류는 마치 신처럼 무한한 팽창을 위한 정복과 파괴를 일삼고 있다. 그러나 세상의 중심에 서서 ‘인간 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장엄하게도 인류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으니……. 고릴라 이스마엘은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에 짱돌을 과감하게 던지면서 세상을 구할 ‘인간 제자’를 구하는 광고를 낸다. 인간이 고릴라의 제자가 되는 ‘하극상’. 이 책은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인간의 자존심부터 밟아주고 시작한다.

사실 결론은 너무나 뻔하다. 자기 기만과 오만에서 벗어나라. 너희가 사는 세상은 너희의 것이 아니니 함부로 하지 마라. 다른 생명체에 대한 경멸은 스스로의 존엄을 훼손한다. 그러니 농업혁명 이전의 공존과 환경 친화적인 삶을 모색하라. 인간 중심 문화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의식의 전파를 통해서 틀을 깨라.

환경주의자들이 보면 식상해서 그냥 덮어버릴 수도 있을 내용들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전개하는 산파법. 독백이 아닌 대화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가는 과정에 적극 동참한다면 쉽게 덮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읽고, 생각하고, 정리해야 다음 장을 넘길 수 있다. 논리성과 진정성으로 가득한 이들의 대화에 관객은 있을 수 없다. 읽는 이들 또한 치열한 사상 검증과 자기 성찰, 논리적 변증을 펼쳐야만 하는 게 이 책의 매력이자 힘이기 때문이다.

고릴라 이스마엘은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건드린다. 그러나 수 천년 전에서만 맴돌 뿐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다. 다만 질문 할 뿐이다. 그렇지만, 대답은 포괄적이고, 둥글둥글 하다. 인구조절, 식량, 인간을 지배하는 문화 같은 일부 소재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니 결국엔 원론적이고 막연한 결론으로 마무리를 지어버린다. 결과적으로 대중의 의식 전환만이라도 이룰 수는 있을지 몰라도, 머리에서 발까지의 거리는 아주 멀게 느껴진다.

책과 다른 생각을 좀 이야기를 한다면, 농업혁명은 먹이에 대한 만족을 준 정착문명의 시작일 뿐이다. 시작이 그러하더라도 중간에 많은 변화를 거쳤다. 따지자면 산업혁명이 인간을 자연에서 떼어낸 가장 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이전 시대에 대한 미련이 미래의 대안으로 삼기에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면이 있다.

이스마엘은 도처에 먹이가 있는데 왜 정착을 하여 재배를 하느냐고 묻지만, 정착은 먹이에 대한 욕구뿐만 아니라, 불안 요소(외부의 위협, 공급과 분배)를 감소시켜 안정을 유지하는 것과 삶의 질 향상에 의미가 있다. 개인보다는 집단, 유목보다는 정착이 불안 요소를 감소시켜 생존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약자’도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 아니던가.

‘역할을 맡지 않은 이들’의 대표적인 예로 유목민을 들고 있지만, 그들의 삶은 환경에 커다란 영향(목초지의 상태)을 받기에 정착을 할 수 없을 뿐더러 수많은 외부의 위협과 끊임없는 투쟁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다시 말하면, 생존력이 강한 자들만 살아 남았다. 이 둘의 차이는 자연을 지배할 것이냐, 자연에 순응할 것이냐가 아닌 삶의 방식의 차이(어떻게 적응하였는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불안 요소(미래를 위한)의 제거는 나약한 인간이 자연에 적응하는 방식이고, 지극히 본성적인 욕구이다. 보험과 저축으로 미래를 대비하고, 교육으로 인생을 설계하며, 전쟁으로 테러리스트를 제거하여 국가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까지 이르는 우리의 본능은 우리 사회의 기반이다. 신(자연)을 거부하고, 지배자로 나서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운명과 한계를 잘 알기 때문에 그 안에서 적응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선사시대의 인류가 3시간 수렵, 채취의 노력으로 살았다고,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는 현재의 사람보다 행복했다고는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땅을 파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고 안정적인 삶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인류는 1차원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살아가는 단계를 이미 훌쩍 뛰어넘었다.

이스마엘이 인류와 다른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안정을 취함이 아니던가. 안정과 질서를 회복하여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함이 아니던가. 만약 고릴라의 말이 맞다면(인간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 이 책 또한 신(자연)을 거역하고 개체 수(인간)의 급격한 감소를 방해하는 ‘지배자의 논리’가 되어 버리는 모순이 발생한다.

가장 직접적인 문제는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먹이가 충족한 안정적인 삶은 여유를 주고, 다른 것에도 눈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문화와 문명을 발생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문명은 기술을 낳고, 기술은 문명화, 도시화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격리 시킨다. 자연과 멀어진 인간은 당연하게도 ‘자연 속의 인간’이 아닌 ‘조직 속의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의지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망각해버린 것이다. 지난 수백만년은 ‘생물적 진화’의 시기 였다면, 이젠 ‘사회적 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기술이 주는 자신감, 그리고 맹신은 자연을 도구화, 대상화 시키게 된 가장 큰 원인이다. 이것이 인간 중심 사상의 핵심이다. 원인을 알았으니 희망적인가?

그러나 비극적이다. 관성이 붙어버렸다. 65억의 입으로 들어가야 할 먹이는 멈추지 않아야 하며, 사회를 움직이는 에너지, 문화와 생활을 유지시키는 물질들의 불균형과 불안정한 공급과 수요로 인해 한 쪽에선 전쟁과 가난, 다른 한 쪽에서는 복지와 비만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이것을 엔트로피(제레미 리프킨)법칙으로 해석한다면 점점 더 무질서해지는 세상을 질서있게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은 환경을 더욱 더 개발이라는 야만적 문명화를 통하여 생명체들을 정복, 파괴해 나가야만 한다. 게다가 걷잡을 수 없는 인구를 눈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출산율 하락과 수명 연장으로 인한 고령화를 걱정해야 된다. 인구가 더 필요하다니…

나는 사회적 진화에 이어 다시 ‘생물적 진화’가 더 크고, 위험하게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줄기 세포와 유전자 정보를 이용한 ‘생명 연장의 꿈’이 전 세계 국가의 투자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투자는 이익을 목표로 한다. 인류의 고통을 덜기 위한 것이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혜택은 자본가들이 독점할 것이며, 생물학적,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인간 사회는 더욱 더 계급적이고, 갈등이 증폭 될 것 같다. 물론 이것이 지구상의 전 생명체의 고통이 증가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 정보는 인간을 위한 정보로 활용 될 테고, 모르모트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체들만 실험실에서 번성할 것이다. 벼와 밀이 지구상에서 가장 번성하고 있는 식물이듯이……. 지금은 옛날 얘기로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인권보다 경제가 우선이고, 짐승보다 인간이 우선이고,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인 세상이다. 누가 만든 질서인지는 몰라도 이 질서에 위협을 가하는 자들은 국가적, 조직적 폭압에 짓눌려야 한다. 이걸 보면 생태계 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인간 사회의 희생양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인간이 사라지면 고릴라에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문장을 해석해 보자. 처음 봤을 때부터 ‘고릴라가 사라지면 인간에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물음을 가졌었다. 나도 No라고 대답한다. 이웃의 평화 없이 나만의 평화는 오지 않듯이 다른 종의 종말은 우리의 종말을 예고할 것이다. 그리고 Yes라고도 대답한다. 인간은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뭔 짓을 해서라도……. 이라크에 몰려든 하이에나들을 보라. 인간이 인간을 뜯어먹으면서도 뻔뻔하게 인권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역할을 맡은 자들’ 아니던가. 하물며 지구상의 ‘미물’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는 없다’ 무기 만들 돈은 있어도, 가난한 자에게 줄 돈은 없는 자들 아니던가. 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 인간을 되돌아 보게 하고, 암울한 미래를 보여준다.

너무 염세적인가. 환경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1회용 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무장하고, 밥벌이 전선에 임해야 한다. 이게 인간이고, 인간 사회다. 그래 여기가 감옥인 건 맞다. 하지만 감옥에 익숙해진 이상 나는 기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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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보다 무섭고, 조폭보다 싸나운 농촌 사람들...이라는 독특한 설정이
아주 마음에 든다.

순간 순간의 위트와 재치가 영화의 맛을 살려주고, 조연들의 연기 또한 흠 잡을데가 없다.
특히 나이 많은 막내 조폭.. 왠지 이상한 정신세계를 가진 듯 하고, 조폭과 어울리지 않은 행동과
말투. 냉장고를 열고 김치통 냄새를 맡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다이아몬드와 물질에 사람이 변하는 모습에서 귀신보다 무서운 공포,
귀신과 주먹질 해대면서 싸우는 난투극, 조폭의 배를 가르는 사람들을 보면,


이 막나가는 마을에서 조폭이 이기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드는 말도 안되는 심적 동요를 일으킨다.

어설픈 마무리만 아니였더라면, 정말 창의성과 개성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오래 기억될 만한 영화였다. 


 


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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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식이 불편하다 - 어느 국어선생의 쓸모 없는 책읽기
김보일 지음 / 소나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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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친구한테 한 권 선물하고 읽어보니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좋다고 한다. 뭐가 좋은데? 하고 물으니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읽긴 읽었는데, 잔상만 남고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서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고 한다. 황당하지만, 나도 그렇다. 기억과 이해의 틈은 아주 가늘면서도 길게 이어진 느낌이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의 많은 생각이 담긴 책. 수 많은 책의 융합과 변이가 만들어낸 사고작용의 흔적들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성과 음율, 목소리가 공명의 떨림으로 문장이 되었다. 사실 난 그 소리에 집중이 잘 안되었다. 내가 읽은 책이 아닌 것을 남의 시선으로 잘 포장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낯선 집에서 주인 행세하는 것 마냥 불편하다. 바다를 보지 않고, 바다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뛰어난 상상력과 자기 기만이 만들어낸 조화이다. 감성과 이해의 틀은 결코 주입되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글에 공감은 할 수 있어도 내 몸은 불감증으로 얼어버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적지 않게 교집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이 책의 의도는 단순한 책 소개도 아니오, 독서 편력에 대한 저자의 독백도 아닐 것이다. 내가 느낀 바로는 전혀 에로틱하지 않으면서도 적나라한 책과의 애정 행각에 대한 진솔한 고백성사 같다. 바람둥이답게 이 책 저 책과의 불륜으로 낳은 자식들의 모습은 하나하나 제 각각이다. 생태를 닮은 아이, 인권을 닮은 소녀, 평화를 닮은 녀석, 철학, 행복, 동심,낭만의 네 자매 등. 족보를 따질 수 없는 그의 모종행위는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정체를 좀처럼 드러내지는 않을 것 같지만, 그의 글쓰기는 섬세하고 풍부한 표현력으로 자기를 은근히 노출한다. 노출증까지 있는 듯 하다. 따지자면 그 표현력의 정체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하늘만 보고 있어도, 삼라만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은 눈매, 책 앞 표지 안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끊임없는 관심과 대화의 연속이다. 무관심과 침묵의 언어는 파경의 지름길. 그러나 집착은 권태로 가는 막차. 권태와 파경의 경계에 있는 그는, 그래서 그의 사랑은 잡을 수 없고, 잡으려 하지 않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역마살 사랑이어라. 그리하여 목마름은 끝이 없나보다. 노래로도 있지 않은가.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남의 과거를 들었으면, 자신의 과거도 들추는 것이 진실게임의 룰이렸다. 나는 책에 어떤 존재였는가, 나는 책에 사랑을 얼마나 주었는가를 적다 보면 이만큼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책은 서서히 스며들어 어느새 나의 영혼을 잠식해 버렸다. 기억은 나지 않아도 잔상은 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잔상이 나의 피 속에 계속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고백하듯 책에 다가서는 사람의 모습에서 난 아름다움을 느낀다.
특히 지하철에서 긴 생머리를 넘기며 책장을 넘기는 숙녀를 볼 때는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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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테 콜비츠
캐테 콜비츠 지음, 전옥례 옮김 / 운디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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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캐테 콜비츠, 그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 그렇지만 백지에서의 시작은 언제나 나에게 묘한 흥분과 기대를 쥐어준다. 겉 표지의 감촉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손에 검은 가루가 진하게 묻어날 듯한 까칠함을 거칠게 그어진 선들이 마구 뿜어내고, 하늘을 향해 꽂은 팔은 급진적이고, 단호하고 준엄한 목소리를 낸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비장함이 책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하다. 이 책의 첫 느낌은 이랬다.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이 많이 있다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저 평범한 딸, 아내, 어머니의 모습만 떠오른다. 책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캐테 콜비츠에 대한 왜곡된 또는 편향된 시선에 대한 항변을 확실히 하는 것 같다. 더 나아가 마치 그것을 강요하는 듯한 테마별 묶음은 일기의 색깔마저 묻어 버렸다. 작위적이다. 일기라는 소재를 통하여 한 개인을 드러내려면 일기라는 형식에 충실해야 했다. 가공은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본래의 의도를 다시 빗겨나가게 만들고, 독자의 가치 판단과 의식의 흐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게다가 그녀의 작품에 대한 난해하고 추상적이고 전문가적인 해석이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을 해버리니, 한참을 읽다 보면 글이 그림을 덮어버리는 사태를 맞이한다. 내가 보는 눈은 다른데, 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그림’일지도 모르나, 타인의 시선은 감상을 하는 나에겐 잡음이다. 넉넉히 볼 자유조차 없는 구성, 그림이 글의 장식이며 엑세서리로 전락해 버리는 이 책의 초반은 ‘아니다’ 싶었다.

아무 해석이 없는 작품들의 나열, 너무나 친절한 해석으로 짜증을 불러오는 부분, 그 뒤에 나오는 캐테 콜비츠의 일기.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을 덮고 전체를 보니 편집이 의외로 재미가 있다. 작품, 전문적인 해석, 그리고 그녀의 삶을 엿보고 난 뒤에 다시 앞장의 작품들을 보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각 작품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감성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묘미이고, 읽기 포인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이 그녀의 혁명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 책의 서문이 밝히는 맥락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진솔한 개인의 역사가 녹아 있는 일기는 정말로 적절한 소재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그것을 ‘너무나 친절하게 정리’를 해 놓지 않았던가.

일기에서 나타나는 주된 테마는 죽음과 번뇌이다. 1,2차 세계대전을 겪는 시점에서 어쩌면 죽음과 인간에 대한 고통은 가장 흔하면서 자연스러운 소재이며 삶 자체였을 것이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많은 이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으니, 일기 보다는 죽음의 기록에 가깝다. 특히 아들의 죽음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늘이었다. ‘죽은 아이의 곁을 지키는 어머니’,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여자’라는 작품을 보면은 아이는 편안히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머니가 오히려 시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식을 상실한 고통은 죽음보다 더 죽음에 가깝다. 게다가 그녀의 일기는 그녀 자신의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죽음에 대한 집착, 민중의 아픔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거친 죽음의 그림자는 치열한 삶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가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언제나 생의 빛줄기와 맞닿아 있지 않던가. 민중의 고통이 오히려 삶의 의지를 더욱 더 고양시키는 것처럼. 소멸과 탄생, 그림자와 빛, 추와 미, 그것의 경계에서 예술가는 그렇게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캐테 콜비츠가 자화상이 많은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벗어나기, 그렇게 타인을 보듯 자신을 보듯 인간을 보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는 판화 특유의 거칠고, 무거운 분위기 뿐만 아니라, 인류애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타인의 고통은 타인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관 뚜껑을 닫듯이 덮은 이 책의 검은 겉 표지에는 아직도 그녀가 하늘을 향해 꼿꼿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No War.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부시는 지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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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haGreen 2004-11-1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군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부시는 지옥으로’에 올인입니다. 하하^^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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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사회에 대한 갈망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오래된 요구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양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충족시켜 줄 사회이길 바라는 많은 이들의 희망은 ‘이상(理想)’에서 이상(異常)으로 바뀌었다. 어떤 사람들은 인물론을 내세워 인물의 리더쉽과 능력이 된다면 이상 사회로 이끌 수 있다고도 했고, 어떤 이들은 시스템을 잘 갖추는 것이 우선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분쟁과 폐단, 사회적 갈등은 이들의 주장을 허무하게 만들곤 한다. 그래서일까? 역사 속에서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가려고 했는가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이 ‘책문’이란 이 책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책만 보던 선비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과거시험은 전통사극을 통해서 자주 접했으면서도 책문은 왠지 낯설다. 붙고 나면 땡인가? 인물의 됨됨이를 알기 위해서는 글재주와 학식만을 따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500년 왕조를 유지했던 조선의 임금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임금이 과거시험의 합격자들에게 정치 민생 현안에 대해 질문하고 이에 대한 답을 듣는 시스템은 입사 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면접하고 비슷하다. 다만 차이점은 책문은 글로써 면접은 말로써, 책문은 직언을 면접은 감언을, 책문은 자신의 이상을 면접은 자신의 상품성을 늘어놓는다는 것이겠다.

이것은 결국 소통의 방식과 코드의 차이이다. 고용주와 사원 같은 계약적 관계에 있어서는 코드를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맞출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인륜적 가치와 실천을 중시한 성리학을 사회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임금과 신하는 각자의 예를 다하고 진실되게 고민하고 교류하여 ‘내 안의 왕’이 되는 것을 서로가 경계를 했다. 이것은 백성과 나라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가장 근본적인 코드가 맞아 떨어지면서 현명한 군주와 충직한 신하의 태도를 보여준다.

그렇다고 원론적인 대책(어찌보면 너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만 400페이지 이상 내놓은 선비들의 깊은 학문적 소양과 덕망에 감복하려고 읽는 책은 아니다. 임금의 겸허한 자세와 고민을 들어보려는 것도 아니다. 그 속에서 발견한 것은 영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은 희망적인 삶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보면 정치의 부패는 적당량의 정치적 도덕성을 주입하여 그 뒤에 숨는다는 내용이 있다. 결국은 모든 힘의 관계는 그런 식으로 숨음으로써 모든 힘을 갖는다. 가끔가다 대중의 도덕성에 대한 요구를 고발 또는 법에 의해 처벌하지만 그것은 그들에 대한 자발적 봉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수기치인을 실천하기 위해 학문을 닦은 조선의 선비들도 붕당정치로 온갖 패악질을 해댔는데, 무릇 권력과 부를 위하여 살아오면서 국회에 자주 출몰하는 '무법자'들에게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은 망측한 바람일 뿐이다.

시작은 언제나 아름답다. 시작하는 사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때가 덜 묻은 ‘정치 초년생’들이 윤리책을 또박또박 적은 듯한 구절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비애는 우리 시대의 물음일 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이것이 시대의 물음에 답하는 정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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