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often felt contempt for the shallow culture that equates hormonally driven, intense but fleeting sexual passion with ‘love’. Love cannot be such a trivial or profane thing. I learned that love is: patient, and kind; It does not envy, it does not boast, it is not proud; It does not dishonor others, it is not self-seeking, it is not easily angered, it keeps no record of wrongs; Love does not delight in evil but rejoices with the truth. Love embodies a more sublime behavior and thought. The banality of the frequently articulated notion of ‘love‘ everywhere, without any contemplation, has led me to feel deep sorrow from alienation; Nobody seems serious about defining love. Come to think of it, my strong faith and strict thought in the definition of love stemmed from my Christian cultural background and the inspiration I have obtained from Erich Fromm’s work *The Art of Loving*, which I read in my teens.

I have read this book twice. The first time was in Korean translation as a teenager and churchgoer, without any experience in relationships, yearning to be loved by someone due to the lack of affection during my childhood growing up in a strict family. The second reading was in English, as a feminist, beloved wife, mother, physician, and a Christian who believes in evolution yet has no faith in the eternal life afterlife; who still wants to live a religious life. These two readings were entirely different experiences. As Fromm pointed out, I longed to be loved but was not ready to love others. However, as a grown-up, after grappling with so many hardships like everyone else, I have learned how to derive the essential gratification from loving others, not just reserving it for my family. I am not saying that I have just become a nice person like a philanthropic saint who is always ready to turn the other cheek, as Jesus taught us. I have simply started to embrace love more consistently.

Fromm suggests that we, like ‘automatons‘ or ‘cogs‘ in modern capitalism, are easily influenced, anticipated, and standardized, leading us to materialize love into instinctual desire, as presented in Freud‘s idea, similar to our needs for other commodities we exchange in markets.
To overcome our narcissism and retrieve the nature of true love, we are encouraged to transcend our love from the mother-centered or father-centered level into more divine love. Note that the notion of God cannot be fully grasped from the traditional Aristotelian logic, aka dogmatic and scientific standpoint in Western culture; rather, we can understand God more profoundly through paradoxical logic, like dialectics from Hegel or the teachings of Lao-tse in Chinese philosophy. This perspective allows us to see others with greater tolerance and helps us recover self-love.

I do not know how long I will live, but I believe it would be helpful to read Fromm‘s *The Art of Loving* and Hooks‘s *All About Love˝ repeatedly periodically—perhaps every five years—so I can continue to live my life in love with my family and neighbors altogether.

finished reading on Aug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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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가 좀 있는 다른 책을 읽다가 머리 식히려 어려운 책을 잠시 덮어두고 하루 안에 뚝딱 읽어버린 책. 경제나 사회 돌아가는 것에 대해 너무 무지하고 꽃밭에서만 노닐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에 가끔 의무감으로 이런 책도 읽는다. 인간사와 경제 및 투자를 대하는 인간 심리에 대한 법칙이 설득력있게 제시된다. 투자에 성공하는 법칙 류의 책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거스르고 확실성을 얻으려고 고집하는 인간의 오류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다. 간단히 인상적으로 남았던 부분만 기억을 되살려 정리해본다.

-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것.
- 미시적 관점에서의 변화는 포착하기 어려울 수 있으나 변화는 지수함수적 스케일을 띠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거대한 결과물로 돌아온다
- 확률을 숫자 그대로 곧이곧대로 이해하지 말 것.
- 극히 희박한 확률의 사건 사고라 생각되어도 n의 수가 충분히 커지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
- 숫자를 넘어서는 스토리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
- 확실성에 대한 욕구(미래는 예측 가능하다는 믿음)야말로 환상을 좇는, 현실 세계의 작동 원리에 대해 무지한 인간의 인지적 오류에 불과하다
- 최고의 재정전략은 비관론자차럼 저축하고 낙관론자처럼 투자하는 것이다
- 진정한 장기적 사고를 하려면 인내심과 고집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야말로 이책의 맹점인듯. 인내심이었는지 고집이었는지야말로 결과론적인 사후 해석인 듯하다)

역시 오래도록 베스트셀러였던 이유가 있다. 인간행동과 불확실성에 대한 인사이트가 설득력있게 제시되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완독일 8월 15일, 20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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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존재로서 덧없이 살다 갈 인간의 본질인 존재론적 운명을 감히 대면하며 살아가기에 고통은 버겁고, 이러한 인간 실존적 문제는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외면하고 살고 싶으나 실시간으로 생의 유한성을 곧잘 감각하는 섬세한 실존적 감수성을 타고 난 탓에 회피란 불가능하다.
종교, 동양철학, 서양철학 등에서 답을 찾으려던 시절도 있었다. 한때 철학서적을 탐독하던 이과생이었으나 어설프게 알면 알수록 고통은 더 커져갔기에 철학서는 다시는 손도 대지 않겠다 다짐하고 결국 인체를 탐구하고 치료하는 응용과학쪽으로 진로를 확고하게 굳혀버렸다. 전인적 사고를 하자고 다짐함에도 불구하고, 생물학, 화학, 유기화학, 기초생리학, 발생학, 해부학 등을 공부하며 알게 모르게 환원론적 사고가 더욱 굳어간다. 인간은 DNA를 전파하는 생존기계에 불과할 뿐이나 끔찍하게도 자아라는 괴물을 가지게 된 진화론적 돌연변이와 같은 종種일뿐.

쳐다보지도 말자고 다짐했던 철학서들에 올해는 손이 다시 자주 가게 된다. 북클럽 모임에 기회가 닿아 서울대 철학과 박찬국 교수님의 하이데거 강의를 엮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를 접하며 뜻하지 않게 존재론적 위안을 얻게 된다.
스물한 살 풋내기 대학생 시절, 미학과 교양인 <시각매체예술론>을 들으며 학점 짜기로 악명 높았던 모 교수님께 발표수업 도중 실존주의에 대한 문답론적 폭격을 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발표하다 말고 문답론에 이끌려 존재자는 세계와의 존재연관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이 나는데 당시엔 몰랐(거나 잊어버렸)지만 이 주제가 바로 하이데거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이미 AI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고 레이 커즈와일 같은 미래학자들은 인류는 AI와 결합하게 되는 특이점이 곧 도래할 것이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인 현 시대에, 과학기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낡은 시적 유물인 것인가? 지배에의 의지, 즉 의지에의 의지는 강화와 증대의 목적만으로 질주하며, 맥락이 조금 다르지만 후에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인 장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차이표시기호는 소비자의 욕구를 절대로 만족시킬 수 없기에 무한대로 욕구를 증식시킨다고 했던 지적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과학과 기술은 이미 도구적 이성을 넘어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되어버렸다. 의지에의 의지가 증대할수록 존재자의 존재는 사라져가므로 만성적인 공허감에 시달리게 된다. 도구적 이성과 비판적 이성을 나눈 기존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반해 인간이 비판적 이성을 회복하여 이성적 주체가 된다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이에 종교적 회심이 필요하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여러모로 후대에 큰 영향을 남긴 실존주의의 대가이나 (본인은 실존주의자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던 듯) 나치 부역자라는 최악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고 제자이며 그 역시 저명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와의 열애로도 유명한 마르틴 하이데거. 얼마나 대단한 사상가이기에 모두가 딜레마로 고통받으며 그의 사상을 접한단 말인가? 본작은 그런 역사적 배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하이데거의 사상을 알기 쉽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중요한 개념에 한해 자주 동어반복적인 전개로 후반버 약간 피로감이 오는 점은 강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 저서라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유명한 ‘실존,’ ‘존재,’ ‘존재자,’ ‘현존재,’ ‘근본기분,’ ‘경이,’ ‘경악,’ ‘불안,’ ‘사역,’ ‘시적 이성,’ 하이데거의 건축론 등에 대한 개념에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어 전반적으로 만족스럽다. 용기를 얻고 최근 재출간된 *존재와 시간* 이기상 교수님의 번역본도 천천히 읽어나가는 중이다.

위대한 걸작을 남겼으나 윤리/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예술가에 대한 딜레마를 다룬 클레어 데더러의 문제작 *괴물들* 을 사두었었는데 다음 차례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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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일기
김지승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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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번도 세계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다. 아니, 인간이었던 적이 없었다. 시혜적으로 인류의 부속품 정도로 끼워줬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번성하는데 자원을 제공하는 제2의 성으로서.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집어든다. 그는 의문한다.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서문 첫 문장에서부터 한숨이 나온다. 실존에 대해 고민하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다시 집어든다. 부조리의 추론과 사유에 흠뻑 빠져 카뮈의 신랄한 냉소를 킥킥대며 즐기다 돈 후안의 사랑 운운하는 부분에서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편견을 버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나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자. 이분 ‘사랑’에 대한 정의부터 다 잘못되었네. 아무리 봐도 사랑이 아니라 그냥 발정난 바람둥이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한데. 저승에서 불려와 벨 훅스 선생께 사랑학에 대한 나머지 수업좀 듣게 시켜야 하겠다. 아닌가, 내가 인류의 일원인 줄로 또 착각했네. 책 읽기와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misogyny의 포화에 정신이 폐허가 되어가며 글을 읽은 게 한두번인가, 이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래서 여성주의 글 위주로 읽기로 다짐했는데, 기억력이 나쁘다.

여성적 글쓰기에 천착해온 김지승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의 최근작 <마지네일리아의 거주자>가 인스타그램 피드에 많이 뜬다. 이전 작품부터 차근히 읽어야 할 것 같아 <짐승일기>를 먼저 주문했다.

#음악은 밤의 그림자, 꿈의 대변인. 아주 잠깐 음악이 표상의 세계에서 의지의 세계로 향하는 도구라고 했던 쇼펜하우어를 떠올린다. 동시에 그가 평생 여성과 동등하게 관계해본 적 없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여성혐오의 문장들을 떠올린다. 음악에 묻은 쇼펜하우어를 털어낸다.
31쪽

#그들이 표현하게 놔둬라. 죽고 싶어, 살고 싶어, 멈추고 싶어, 잊고 싶어, 사랑하고 싶어, 무서워, 아파, 힘들어, 행복해, 고마워…… 뭐든. 마땅한 출구의 표현을 막지 말고. 아프지 않은 사람에게도 요원한 긍정적 사고를 아픈 사람에게 강요하는 일이 아픈 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은 분명하다. 완치의 시간을 향해 있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말들은 치료와 회복 기간을 마치 삶에서 재빨리 지나쳐야 할 어두운 시간으로만 규정한다. 64쪽

#놓친 물고기 같은 언어들이 있다. 적확하게 써본 적 없거나, 몸으로 경험한 적 없거나, 한동안 어둠 속에 있던 것들이 그렇다. 긍정적이란 말은 셋 모두에 해당된다. 사전적 의미로는 그러하거나 옳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바람직한 것. 나도 모르게 턱을 치켜든다. 옳고 바람직한 것이란 무엇인가. 철학에서는 사물의 존재 방식을 있 는 그대로 승인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반대로 그 존재 방식을 의심하고 비판을 가하면 부정을 실행하는 게 된다. 그러니까 아픈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란 말은, 당신이 앓고 있는 그 병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자신의 관계 방식이 어떤지 객관적으로 파악한 후 유지하려 애쓰십시오, 라는 말일 수 있다. 63쪽

#당신은 또 놀란다. 아픈 이를 수식하는 그 많은 말에. 수식에 앞선 평가들에. 강하다, 긍정적이다, 성격이 좋아 회복이 빠르다, 생의 의지가 남다르다, 씩씩하다, 씩씩한 척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아프지 않은 그들의 안심을 위한 말임을 알게 되지만 그전까지는 이런 말들이 아픈 몸을 쉽게 억압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몰랐다. 76쪽

#당신은 유난히 놀란다. 아픈 몸에 깃드는 새 지도들과 언어에. 어떤 말은 영영 예전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걱정 어린 안부와 가벼운 호기심의 차이도, 기쁜 일과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함께하는 이들과 ‘도움이 되는 나‘에 취해 힘든 일에만 반응하는 이들의 차이도 더없이 선명하고 분명하지만 아픈 이의 감정적 반응은 대개 ”아파서“로 해석되므로 당신은 다만 조용히 기록한다. 통감 이외의 다른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긍정적‘이지 않은 모든 감정의 방에 램프를 켜둔다.
77쪽

여성. 비혼인. 싱글. 관병중(‘투병중‘ 아님 주의, 224쪽 참조). 소수자성이 겹겹이 덧씌워져 명명되는 일종의 인식적 폭력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글쓰기. 함부로 명명되고 정의되지 않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함을, 살아있음을 소리내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전체집합에서 주류 집합이 쓰는 언어를 덜어 내고, 그 여집합 속에서 또 다른 주류에서의 여집합과의 교집합을 살펴보고, … 몇 차례 이를 반복하며 여집합들의 교집합을 뒤져보면 거름망 사이로 다 주르르 새어나가 나 자신을 상처내고 찌르는 칼날같은 단어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여집합인 여성으로서의 언어도 이처럼 한계가 뚜렷한데. 그의 관병일기를 이루는 문장들은 언어를 고르고 골라 신중하고 성실하게, 고통스럽게, 장인처럼 갈고 닦은 문장들임이 분명하다. 관병중인 자에 대한 예리하고 정교한 추체험을 가능케 하는, 마치 카프카가 말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은” 벼르고 벼른 언어들이다. 인류의 주인공인 남성들이 인식론적으로 결코 경험해봤을 리 없는 감정들이 해소된다. 타자화. 소외. 예외로서의 존재. 잉여. 그런 해묵은 감정들이.

#명사는 권력이고 권력 가까이 선 것들이고 권력으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들이다. 명명은 명사가 권력과 손잡고 하는 행위의 핵심. 너는 여자다. 그러면 나는 그들의 필요에 따라 긴 시간 조형된, 여자라는 개념 안에 갇힌다. 118쪽

여성주의적 글 읽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집요하고 성실한 사유를 따라가며 고통스럽게 맞닥뜨리는 인식적 해방의 달콤한 쾌감 때문이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이런 문장들은 더 많이 쓰여야 하고, 더 많이 이야기되어야, 소리내어 말해져야 해요. 그래서 별볼일 없지만 저도 제 공간에나마 씁니다.
수요일의 문장들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술래 바꾸기>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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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최신 원전 완역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시리즈 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미영 옮김, 김선형 / 코너스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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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품이지만 스포일러 주의🚨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16세였던 나의 내면을 묘한 흥분, 갈망, 설렘 등의 낯선 파동으로 어지럽혔던 문구.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다. 소녀는 알을 깨뜨리고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가 자신의 알레고리인 듯 괜스레 비장한 마음으로 일기장이나 책상 앞 메모지, 교과서 여백 귀퉁이에 글귀를 반복해서 옮겨 적곤 했다.

정작 소녀는 <데미안>이라는 작품을 다 읽고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외려 맘 한구석 미세한 균열을 내는 이물감이 섬뜩하고 불편했다. 종교적 계율이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신성모독의 묘한 흥분을 단죄하는 내면의 단호하고 끈질긴 죄의식 때문이었을까, 작품에서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마치 주인공 싱클레어의 뒷걸음질처럼, 어릴적 최초의 성장통의 원흉인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구원해준 데미안을 뒤로 하고 안온한 유년의 세계로 달아나버렸듯이.

이십여 년전 느꼈던 이물감이 남아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데미안>을 집어들었다. 매혹적이고 아름답다. 정신을 고양시킨다. 성장기의 고뇌가 발원하는 지점을 적확하게 파악해서 묘사한다. 균열에서 찬란한 빛 한줄기가 매혹적으로 새어나와 익숙함과 낯섦에 주저하게 되나 이물감은 더 이상 없다.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 신이다. 선/악 또는 이성/본능을 절대적으로 구분하고 서구 세계를 이천 년간 지배해온 이원론적 세계관을 철학적 독단론이라 비판하고 의문을 던지며 도전한 니체의 사상이 떠오른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인도하는 세계이다. 역시나 니체의 이름이 작품 곳곳에서 자주 짧게 언급된다.

성장 소설인만큼 십대 혈기 왕성한 청소년의 성욕 문제가 자연스레 언급된다. 허나 성욕과 정욕으로 괴로워한다고 건조하게 서술될 뿐, 정욕의 발현에 대해 연대기적 혹은 포르노적으로 소비하게끔 묘사하지 않았고 십대 때 읽을 때에도 이점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었다—거의 모든 남류작가의 작품들이 정도의 차이일 뿐 성장통에 여체를 소비하는 성행위 묘사 최소 한 줄쯤은 넣어주지 않았던가. 성욕의 고뇌가 음탕하게 포르노적으로 여성을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개진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다.

이십여 년 전보다 울림은 훨씬 크고, 이해도도 깊어 왜 두루 사랑받는 걸작인지 새삼 절감한다. 도덕, 종교, 성애, 사랑, 모든 것에서 이원론을 거부하기에 싱클레어의 사랑은 성별의 이분법도 초월하여 베아트리체에서 데미안, 자기 자신, 에바 부인의 형상을 넘나든다. 유년시절, 피스토리우스와 각각 결별했듯이 결국은 데미안도 극복하고 싱클레어 홀로 서는 과제를 이룩해야 하기에 작품 말미에서 데미안과 이별의 입맞춤을 나누는데 해석이 분분한 모양이다. 궁극적으로 에바 부인과의 사랑인 것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나는 결국엔 데미안이라는 어떤 초월적인 인간과의 사랑과 이별, 극복과 성장의 서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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