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마블빠로서 #어벤져스엔드게임 을 기대하며 쓴 글인데 딱히 게재할 플랫폼을 찾지 못해 그냥 여기에 올린다. (아직 안 본 분은 없겠지만 인피니티워 및 전작들의 스포일러 많음)



곧 어벤져스 원년 멤버들의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다. 전 세계가 타노스에게 이를 갈고 있기에, 우리의 히어로들이 타노스를 어떤 전술로 어떻게 이기냐에 대한 관심과 추측이 각종 커뮤니티, 인터넷 매체와 유투브 등에서 난무하고 있지만 그건 감독들이 알아서 잘할 테니 아묻따 믿고 감상하고 싶고, 그보다는 도대체 어떤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그릴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그 이유에 대해 길게 주절거려보고자 한다.


해피엔딩보다는 잘 만든 비극 혹은 열린 결말을 좀더 좋아하는데, 특히 영화가 (물론 케바케이지만) 해피엔딩인 경우 “오, 사이다~” “개존잼!” 하고 극장을 나와서 길어야 하루 이틀 더 되새기면 끝으로 곧 잊히곤 했지만, 비극이나 열린 결말의 작품은 여운이 오래 남아 곱씹어보며 사유를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1년 내에 본 영화 중에서 플로리다 프로젝트, 『쓰리 빌보드어벤져스: 인피니티워와 같은 작품들을 거의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경우 몇몇 장면을 떠올리면 과장이나 섣부른 판단 및 자의적인 해석 없이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그려졌던 주인공들의 비극이 생생하게 떠올라 아직도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린다. 이런 수작을 두고 관음증 변태적인 영화가 미장센 운운하며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니 아직도 화가 난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위선적인 영화이다. 내러티브적으로는선함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작 영화에서 긴 시간을 할애하여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소위액션이라고 일컫는 폭력, 전투, 파괴, 살인 장면이고 관객은선함혹은정의를 명분으로 대리 만족하며 이를 즐기러 극장에 가는 것이니까. 물론,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 에서 소개했던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마냥, 정교한 사회와 도덕 시스템에 촘촘히 얽혀 폭력성을 맘놓고(?) 발휘하기 다소 힘든 현대인들에게 일견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 의 저작 『악마 같은 남성 Demonic males』 에서도 지적하듯이, 영장류 수컷의 폭력성은 DNA에 뿌리 깊이 새겨져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지성이라는 무기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고 잔혹하게 진화하였고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왔다. 내재된 폭력의 본성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축적되다 급물살을 타고 임계점에서 폭발하며 전세계적,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사건들이 굵직굵직한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니, 퍽이나 후진 옛날 이야기다.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등으로 유명한 세계적 석학 스티븐 핑커 가 제시하는 통계와 성찰에 의하면 통념과 달리 인간 사회는 점점 선해져 폭력과 전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소수자들이 점차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세계는 어떻게 다양성을 지니고 혐오 사회에서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느냐와 대한 화두를 놓고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씨름하고 있다. 핑커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넓게 보면 영장류 전체, 좁게 보면 호모 사피엔스에 내재된 폭력성을 발휘하려는 욕망까지 깡그리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초적 폭력성을 발산하는 방식은 시대적 흐름과 영화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타고 좀더 건전한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이드id는 전쟁과 폭력, 살인을 스크린을 통해 즐기고 있다. 초자아superego가 마음 속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하며 죄책감을 덜어주어 가볍게 즐기기 더욱 좋다. 이 명분을 부여하는 복잡한 작업을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다소 유치한 장르였던 슈퍼 히어로물을 수준 높게 만든 것이 #케빈파이기 산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큰 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는 것을 힘들어해 슈퍼히어로물을 극혐했던 나까지 팬으로 만들었으니. 최근엔 슈퍼 히어로 영화 장르의 문법만 빌려와서 더욱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스릴러물(『캡틴아메리카: 윈터솔져』), 인종문제(『블랙팬서』), 청소년 성장물(『스파이더맨: 홈커밍』), 유쾌한 가족 드라마(『앤트맨과 와스프』), #페미니즘(『캡틴마블』)까지.















『인피니티워』는 작년 2018년 한해 동안 영화 팬들에게 큰 충격과 배신감을 선사한 작품이다. 결국 악이 승리했으며 정의의 사도인 어벤져스는 명분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변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의 광팬으로 10번 정도 관람했다. 당분간은 후속작인 엔드게임 없이 이런 결말도 그냥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너무 좋아했다.




일단 액션 영화로서의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인물이 30명 가까이 나오는데 불협화음 없이 잘 어우러지고, 불필요한 대사는 단 한 줄도 없다. 정교하게 짜인 모든 대사와 상황 설정은 각 인물들의 개성, 가치관과 내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복선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부조화일듯했던 인물들의 앙상블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며 그 접점에서 고도로 계산된 유머가 빵빵 터진다. 악인의 일대기에 효과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서, 흉측한 보라색 괴물을 관객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만들었다. 콧대 높으신 각종 영화제에서 홀대 받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향후 100년 동안 손꼽힐 명작 중 하나가 되리라고 예상한다. 배드엔딩으로 유명한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국의 역습』과 『시스의 복수』 가 그러하듯이.














앞서 말했듯이 후속작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 동안 관객들을 몰입시키기 위해 도대체 히어로들에게 어떤 명분을 부여해줄까?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에서는 히어로들이 갈등으로 쪼개지고 서로 전술도 공유되지 않은 채 시작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처참하게 당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야기와 예고편에서 암시한 바로는 히어로들은 심기일전 중이며 남은 명분은 이제 복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복수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타노스는 이제 자신의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고 명예도 물욕도 없이 오두막에서 쉬고 있는데? 감독은 관객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초점은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일 텐데복수는 루소 형제가 그간 작품들에서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절대로 아니다(아이러니하게도 ‘avengers’는 복수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전작에서도 복수심에 눈이 멀었던 자들은 다 실패했었다. 1: 타노스 손에서 인피니티 건틀릿을 빼기 전에 연인 가모라를 잃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고 희대의 트롤러가 되어버린 스타로드. 2: 역시나 니다벨리르에서 힘들게 새로운 무기 스톰브레이커를 만들어 와 놓고도 아스가르드인들과 동생 로키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실패한 토르(감독 코멘터리에서 밝히기로도 도끼날을 타노스의 가슴에 꽂으며 타노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토르는 복수의 희열을 즐겼다고 한다). 괴로워하며 타노스는 말한다. “, 실수한 거야. 내 머리를 노렸어야지.” 그리고 있는 힘을 그러모아 핑거 스냅, ! 인류의 절반이 먼지가 되며 상황 종료.



『인피니티워』에 이어서 『엔드게임』에서도 보여줄 핵심 키워드는 타노스와 캡틴 아메리카의 가치관 싸움이라고 예상해 본다. 타노스는 비용·편익 분석을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양적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의 21세기적 후계자이자 맬서스 인구론의 실제적 집행자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칸트의 정언 명령의 충실한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인피니티 워를 본 관객들이라면 타노스에게 이길 뻔 했던 몇 가지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어차피 절반이나 다 죽을 거 마인드 스톤의 소유자인 비전을 좀만 더 일찍 죽였다면 몰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스타로드가 이성을 잃지 않아 건틀릿을 타노스의 손에서 벗기는데 성공했다면? 스타로드가 가모라를 일찍 죽였다면 소울 스톤은 아예 찾지도 못했을 텐데. 토르가 좀더 냉정하게 타노스의 머리를 노렸더라면? 뒤의 두 가정은 히어로들의 인간적이며 불완전한 면모와 복수심의 무용함을 보여줬다면, 앞의 두 가정은 비용 편익 분석적으로 보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나 최악을 막기 위해 차선책으로 절반을 죽여도 괜찮다는 타노스의 가치관과 진배 없는 섬뜩한 가정이다.















『인피니티워』에서 두 가치관의 격돌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된 기차 비상 선로에서의 도덕적 딜레마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무고한 1인을 고의적으로 살해하여 5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살인은 정당한가?” 세계 기아 문제 전문가인 장 지글러 는 유명한 저작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기근이 인구를 조절한다는 맬서스 이론에 대해자신들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자들의 전형적인 유럽적·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라며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를 의식했는지 감독들은 영리하게도 타노스를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실행하는 자로 묘사되며 스톤만 챙기면 전투를 멈추고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사라진다. 그는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랜덤으로 공평하게 절반만 죽인다’.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심지어 타노스 자신도 랜덤으로 살아남은 쪽에 속한다고.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놓기』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가 존중되는 존재자로서 생명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캡틴은 칸트 철학의 수호자이다. 『시빌 워』에서는 소코비아 협정에 반대하며 지성적인 존재로서 자율적인 의지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칸트의 도덕 철학의 핵심 정신을 실천한 바 있다. 『인피니티워』에서도 역시 그는 비전이 자신을 죽이라고 하자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We don’t trade lives(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결과론적인 비용 편익 분석으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정의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생각이며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캡틴은 졌고, 동료들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참혹한 와칸다 전투 현장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황망한 표정으로, 처음으로 신을 찾는다. 이보다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캡틴은 자신의 정의를 고수할 수 있을까? 지난 10년 간 캡틴의 여정을 그린 6편의 영화를 지켜보면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반드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 그 신념을 멋지게 그려낼 것인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개봉을 남겨두고 가장 흥분되는 지점은 두 가지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과, 캡아는 도덕 판단을 비용 편익으로 분석하며 생명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한 방 날려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은 얼마나 멋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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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에 한창 여성혐오가 화두가 되었을 때 산 책인데, 왠지 읽히지가 않아서 묵혀두었다가 2018년 말미에 읽기 시작하여 2019년 1월 초 처음으로 완독한 책결론은, 실망스러운 책이다. 비추천. 그나마 정희진, 시우의 글이 여성혐오에 대한 훌륭한 해석틀을 몇 가지 선물해 주어서 읽을 만 했고, 윤보라의 글도 넷페미사를 개괄하기 나쁘지 않았다. 나머지 글들은 중간 정도.

루인의 글은 거의 재앙급이었다.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해 개진하는 논지가 거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반지성주의 급의 글이라 이과계열 전공자 입장으로 보았을 때 너무 충격적이었다. 거의 불가지론 수준.


리버럴 페미니즘의 한계를 그야말로 잘 보여준 책이라는 말로 총평을 내리고 싶다. 여성해방에 대한 실천적 지식과 절실함이 녹아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 이론서들이 훨씬 파워풀한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준다면, 리버럴 쪽은 그저 남성에 대한 2등시민으로서의 패배주의적 인식이 익숙한 상태에서 노론 학파들이 예송논쟁하듯 사상의 ‘정의로움’에 취해 ‘성평등’에 대한 지적 허영심으로 탁상공론하듯 현학적이며 때로는 궤변적인 논리로만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어쩐지 집에 있는 몇 권의 페미니즘 책들이 읽히질 않더라.

이 책을 14,000원이나 하는 돈을 주고 정가로 샀다니 진심 돈과 시간이 아까워 울고 싶다. 남는 것도 거의 없겠지만 다음 번에 알라딘 중고서적 갈 때 들고가서 팔아버려야겠다.


+

이런 류의 책들은 현학적으로 현란하게 사유를 전개하느라 바빠서 대개 큰 틀을 견고히 잡는 데는 오히려 미숙한 점들이 있는데, 기존의 주류 인식론적 경계를 해체하는 점은 강점이라 부분적으로는 좋은 해석틀이 많아서 옮겨 와봤다. 이 부분들만 건져내고 중고서적에 팔려고 한참 타이핑함.


마사 너스바움은 인간의 조건인 취약성fragility을 인정하지 않을 때 혐오감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는 데 가장 위험한 두 가지 도덕 감정이 혐오disgust와 수치심shame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은 원초적 형태로 유년기에 발생하며, 인간의 조건인 필멸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나약함은 불멸성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는 치욕스러운 조건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취약하게 만드는 불안과 불안정의 원천이다. 이렇게 본다면 혐오는 자기 육신의 필멸성, 인간의 몸이 가지는 동물성을 굴욕으로 여기는 것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악취와 부패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육신의 한계가 주는 불쾌와 혐오를 투사할 외부 집단을 끊임없이 찾는다.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이 욕설이다. ‘썩어 문드러질 놈’, ‘끈적거리는 놈’하는 식의 욕설은 취약한 몸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몸은 여성적인 것, 마음은 남성적인 것이라는 이분법 아래, 남성이 혐오하는 모든 것은 여성적인 속성으로 투사된다.

불안과 주체는 나를 구성하는 타자(이물질, 기생물)를 미워하면서 토해낸다. 이런 이물질이 나를 구성하고 그것에 내가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야만 자족적인 ‘나’라는 환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를 구성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타자를 삼키면서도 동시에 토해내야 한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타자를 삼키고 소화시키고 추방한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은 타자를 추방하고 뱉어내는 ‘윤리적 폭력’을 통해 형성된다. 삼킨 것을 토하고 추방하는 데 혐오감은 필수다.

-본문 73-74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되 불평등 계약이다. ‘나’는 동의한 적이 없는 역사적 산물이어서, 우리는 일단 그것을 사회화, 교육, 공부라는 이름으로 전수받는다. (중략) 내가 아는 한, 말은 페미니즘의 시작이자 끝이다. 가부장제patri/archy와 젠더 체계gender system가 동의어는 아니지만, 가장 간명한 공통적 정의는 남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일치하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언어는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지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종, 계급, 지역, 장애 이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언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규정하는 식민주의와 관계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노동practice이 남성의 노동과 다르다는 것, 여성의 삶이 어떻게 말의 근거가 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여성의 목소리가 기존의 언어를 재구성rethink, remap, position, decolonize하는 데 어떤 윤리와 정치가 요구되는가? 당연시되던 인식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논의 구도를 재배치하고, 누가 말하는가보다 누가 듣는가를 고민하고,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 없음을 깨닫고, 인식 과정의 식민성에 직면하는 것. 그 작업은 매우 광범위하다.


-본문 92-93.

인류, 남성man/kind의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들은 스스로 언어를 만들었을까. 물론 그런 언어는 없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외부는 여성이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남성(one)을 제외한 나머지들, 타자다. 여성, 이 두 번째 인간The second sex 는 모든 타자의 원형이 되었다.

-본문 95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여성이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여성이라는 기호는 어떻게 실제 사람이 되는가

여기 두 종류의 ‘장르’가 있다. ‘여자란 무엇인가’류, ‘글쓰기 비법’류. 인류 역사상 웬만한 남자 지식인 치고 이 두 가지 책을 안 쓴 이가 드물다. 이 사례만큼 지식 생산과 성별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증거도 없다. 뮤즈는 성별화된 대상의 정점이다. 대상은 주체에게 재료를 제공하고 사라진다(의문을 품으면 ‘카미유 클로델’이 된다). 그래서 ‘여성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이다.흑인은 무엇인가, 장애인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없다. 여성의 사물화는 가부장제의 역사다.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에게는 명명하고define 명명당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인식은 기본적으로 투사다. 아는 과정에는 자기 의견, 희망, 욕구가 반영된다. 아전인수는 ‘아전인수식 해석’의 문제라기보다 언어의 본질이다. 모든 사물에 관한 정의에는 그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와 원망이 포함되어 있다. 말을 나드는 사람의 경험이 곧 말을 구성한다. 과학도 신도 조물주도 자기 입장이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지식이 백인 남성의 것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시각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협소한 렌즈로 본 세계가 유일한 진리로 군림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본문 102-103

지금 우리가 사회적 약속이라고 믿는 언어는 서구, 백인, 중산층, 남성, 이성애자, 젊은 사람, 비장애인의 언어다. 통치 세력이 ‘관용’을 베풀어서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허락한다 해도 약자가 곧바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에게 말의 자유를 허락하되 영어로 말하라는 식이다. 성별, 인종, 계급, 지식 자원 등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라고. 동시에, 네 주장은 시기상조이며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쓴다고 비난한다.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그들의 시각이 반영된 언어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불쾌해한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못 알아듣는다는 점이다.

-본문 106-107

우리 인간은 젠더, 이성애 제도의 산물이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타자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관계의 결과이며 무엇보다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는 자신을 주체로 만들기 위해 동원된 타자에 대해 알지 못하면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본문 112

서구에서 중세가 지나고 ‘인간’의 개념이 등장하자 여성은 곤란한 존재가 되었다. 인간일 수 없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공사 영역의 분리다. 여성은 인간이되 사적인 존재가 되었다. 혹은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 ‘비서구인’은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근대의 시작이요 전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문제, 성별 제도에 대한 지식은 정치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소한 문제다. 우리 사회에는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 나는 ‘정상인’들의 무지가 차별의 엔진이라고 생각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대응할 수도, 교정을 요구할 수도 없는 고단한 삶이다. 헌데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본문 113-114

린다 맥도웰은 경계를 규정하는 사회적, 공간적 권력관계를 통해 장소가 만들어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와 같은 경계가 경험의 위치나 현장뿐 아니라 누가 어떤 공간에 속하는지, 누가 제외되어도 괜찮은지 등을 정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대학 공간에서 젠더화된 경계가 작동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작업은 공간의 젠더 정치학의 관점에서 중요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여학생 휴게실은 공간 경험이 젠더화 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여학생 휴게실을 마련하는 방침은 개별 남학생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는 정책이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작동하는 젠더 정치학을 고려한 합리적인 정책이다.

공간을 구획하는 경계를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기에, 경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특권을 갖고 있는 이들이 경계를 인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상대새아가 주장하듯이 ‘벤치에서 쉬는 것 말고는 교내에서 휴식할 곳조차 찾기 어려운 남학생’에게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특권이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차별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남학생’은 노출된 장소에서 휴식하는 것과 성폭력 피해 가능성 내지는 피해 경험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젠더 이분법에 따라 남녀로 구분된 학내 기숙사, 샤워실, 화장실 등을 이용하는 일이 불편할 수 있다는 상상 또한 하기 어렵다. 이처럼 ‘여학생’에게 여학생 휴게실은 단순한 쉼터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본문 129-131

해당 교직원이 개념 없는 여성으로 비난받으면서 감정의 문화정치학이 작동하는 장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였던 것과는 달리, 개별 발언이 불쾌감을 발생시키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발언을 한 이들이 개념 없는 남성으로 지탄받지는 않는다. 즉 여성 발화자의 경우에 한해서 발화자의 젠더가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발언의 효과가 젠더화된 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은 남성 동성사회성 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이브 세즈윅은 남성 사이의 사회적 유대와 성적 유대를 연속체로 파악하면서 남성 동성 사회성이 성적 긴장과 사회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근대 유럽에서 사회적인 것과 성적인 것 사이의 연속성을 부정하면서 남성 간 성적 긴장을 제거하고 여성을 매개로 남성 사이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에 성적인 관계가 남성 내부의 위계를 교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성애 혐오가, 여성의 거래를 통해 남성이 지배적 위치를 공유하기 위해 여성 혐오가 요청된다. 즉 특권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남성의 동성사회성이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를 기초로 구성되는 것이다.

한편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로 해결되지 않는 남성 간의 차이는 남성 간 유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히 관리된다. 예컨대 앞서 제시한 키 큰 남성의 발언을 들었을 때, 키 작은 남성은 키 크면 다냐? 돈이 많아야지라면서 상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거나 키 작은 사람이 마시는 공기는 아주 맑습니다라며 상대를 비꼴 수도 있다. 키와 같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원이 불균등하게 나누어진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남성 간 유대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유대를 재확인하는 것이 남성 개인에게 더 큰 이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가 작은 남성들이 우리 학교 키 큰 남성들 수준은 이 정도인가요???’라는 글을 인터넷에 쓸 필요는 없다.

-본문 132-134

남성 피해자론과 역차별 주장이 기존의 권력관계를 가시화하거나 이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남성 간 유대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본문 140

또한 비를 피하다가 잠재적 성범죄자가 되었다는 식의 서사는 개인의 무고함을 앞세워 여학생 휴게실을 들여다본 사건의 중대함을 무화시킨다. 남학생들의 행동은 잠재적이지 않았으며, 성적 폭력은 물리적은 공격과 가시적인 위해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김애령은 타자의 모습을 그리는 많은 표상이 주체의 언어로 쓰인다는 점을 밝히면서, 주체의 언어가 타자를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시키는 한편 타자에게 극단적으로 다른 속성을 부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는 낯선 타자, 괴물, 파괴적인 힘, 강력한 매혹, 신비와 같은 속성들이 함께 주어지면서 여성은 적대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대상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성의 모순적인 속성을 파악하고 표상하는 존재는 주체의 자리에 있는 남성이다.

주체의 세계는 타자로의 모험을 통해 풍요로워질 뿐 깨지지 않으며 주체는 타자를 자기 세계, 자기 체계에 포함함으로써 더 강한 주체가 된다. 이처럼 여성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이나 여성에게 인정받는 일은 남성이 자기 자신을 확증하는 데 필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본문 148-149쪽

남성 징병제로 인한 역차별 주장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성 징병제를 둘러싼 논쟁의 구도는 누구에게나 삶에서 중요한 시기인 20대에 2년 남짓 군대에서 복무했음에도 사회적 인정이나 제도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남성과, 그런 남성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복무 기간 연장을 주장하는 여성으로 설정된다. 남성의 군대 경험을 피해로 서술할 때는 징병제가 역차별의 상징이 되지만, 군대 경험이 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자 거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이해될 때는 문화자본이 되는 맥락 역시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남성 일반이 군대를 아직 가지 않은 미필자와 이미 경험한 군필자로 구획되는 상황은 유지되고, 비필자-비남성-여성의 연쇄고리는 남성 징병제로 인한 불이익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기호로 구성된다.

따라서 많은 경우 군필 남성에게 중요한 것은 군대 경험을 피해와 차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이 아니라 군대 경험에 대한 비필자-비남성-여성의 인정이 된다.

 

정리하면, 남성 피해자론 내지 역차별 주장이 전제하는 성평등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 내지 젠더 다원주의 실현이 아닌 여성을 매개한 남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남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 범주는 규범적 남성 젠더를 승인하는 기호이자 이성애 규범적 경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내부의 타자로 등록되게 된다. 남성 동성사회성이 여성 혐오를 기초로 남성 내부의 차이를 지우고 규범적 남성 범주를 직조하듯이, 남성 피해자론은 여성의 인정에 대한 요청을 통해서 피해가 구성되는 복잡다단한 맥락을 단순화하며 남성의 피해를 자연적인 사실로 만들어낸다. 남성이 피해와 맞서 싸우는 존재이자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가 되면서, 피해의 책임은 여성에게 지워지고 여성에 대한 적대와 혐오는 강화되며 규범적 남성성은 재생산된다.

-본문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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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에 읽은 마지막 책에 대한 지각 독후감. 2018년 초 전 세계를 강타한 문제작이고 거의 1년이 지나 시의성은 좀 떨어지지만 몇 주 전에 지역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오? 싶어서 빌려와서 단숨에 다 읽었다. 4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적지 않은 분량이며,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첫 몇 장은 관계도를 파악하느라 조금 힘들지만 이후로는 술술 넘어간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트럼프 대통령 집권 첫 해 백악관 내부의 희극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군상들의 권력 암투와 광대놀음은 그야말로 블랙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 주며,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21세기 논픽션 버전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여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때로는 빵 터져서 육성으로 낄낄거리기도. 스티브 배넌과 같은 트럼프 정부 초기 핵심 인물을 비롯하여 200명이 넘는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집필한 책이라고 하는데, 작가의 날선 sarcasm과 유머 감각, 인간에 대한 이해, 발로 뛴 수고와 취재에 경의를 표한다.



이 책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다. 그래도 뭔가 있으리라고 믿었던 미합중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고 읽는 내내 오한이 등을 타고 내렸다. 일단은 첫 장부터 충격적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트럼프는 처음부터 진심으로 대통령이 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그 자신은 물론 주변 참모진들 역시 선거에서 이기리라고 예측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선거 캠프는 오합지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문가들이 합류하여 준비된 참모들로 구성된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캠프와 대조적으로 말이다.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역대 메이저 정당의 대선 후보라면 대통령이 되었을 경우를 대비하여 당선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는 국정 로드맵을 그리는 태스크포스 팀을 꾸리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트럼프 진영은 이런 대비는 커녕 실질적으로 선거전략을 효과적으로 세우는 유능한 참모들마저 전무하여 주먹구구식으로 굴러가는 부실한 선거캠프를 운영하고 있었다. 공화당 쪽에서도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게,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의 측근이었다는 경력이 자신들에게 별로 명예롭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자리가 주어져도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인종 차별에 성차별에 여성혐오자로 유명한 인물이니). 트럼프 자신조차도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자기애적 인격’을 지닌 인물이 자신이 주목받는 것을 즐기며 대중으로부터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 것에 대해 집착하여 대선 후보가 된 것 뿐인데 덜컥 당선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는데 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신드롬급 인기를 몰고 왔었던 허경영 후보와 비슷한 사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둘의 인기는 기존 정치에 대한 냉소를 반영한다는 점이 비슷하니 말이다. 다른 점은 트럼프는 막대한 재벌이라 선거에서 져도 잃을 것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게 큰 차이지만.


기성 정치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트럼프의 배경은 러시아 스캔들과 같은 파문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는 저자의 설명을 읽으니 수긍이 간다. 영향력이 큰 정치인일수록 살벌한 정치판에서 적에 둘러싸여 살아가기 마련이고, 그의 지난 행적이 앞으로의 정치 생명의 발목을 잡는 큰 약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기성 정치인들이라면 본인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행동 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의식이 상식선에서 항시 있었을 것이다. 부동산 재벌로서 자신의 왕국인 트럼프 타워 안에서 모든 이가 자신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던 삶을 살았던 트럼프는 조심할 이유도 없었고, 선거에서 승리하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스캔들과 같은 빌미가 적들에게 쉽게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장군으로 은퇴하고 한 해 몇십만 달러의 연금을 받고 있던 플린은 어떤 돈도 거절하지 않았다. 다양한 친구와 조언자들이 플린에게 러시아나 더 큰 ‘컨설팅’ 의뢰를 하는 터키로부터 보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중략) 대통령과 그의 가족들을 포함해 트럼프의 세계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부주의를 저질렀다. 그들은 두 개의 평행 현실 속에 살았다. 한편으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선거운동을 계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도널드 트럼프가 결코 대통령이 되지 않을 훨씬 더 큰 가능성이 높은 세계--확실한 세계--에서 살아야 했다. 따라서 예전에 하던 그대로 했던 것이다. 

2월 초 샐리 예이츠와 친한 오바마 행정부의 한 변호사가 상당히 정확하면서도 재미있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신경 쓰지 않고 살았는데 결국 당선이 됐다면 그건 확실히 묘한 상황이지요. 그리고 적들에게는 큰 기회이고요”


-본문 177쪽



재미있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꼽기가 힘들다. 일단 트럼프가 언론의 인정을 항상 갈망해왔다는 점이 잊을 만하면 계속 나오는데 너무 웃겼다. 취임식때 존재하지도 않는 100만 명이 참가했다고 트위터로 자랑하다가 빈 좌석의 사진을 보여주는 언론의 비아냥거림에 상처받기도 했고, 그래서 CIA의 관계자들과 첫 미팅에서 CIA와는 전혀 관계없는 자신의 취임식 이야기만 늘어놓는 부분은 걸작이다. 뜬금없이 취임식 참가 인원에 대한 언론과의 견해 차에 대해 횡설수설하며 오랜 시간동안 장광설을 늘어놓아 당시 마이클 폼페이오 국장 및 CIA 직원들이 힘들어하며 맞장구치는 장면은 이 책의 몇 가지 대폭소 포인트 중 하나.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것이다. 보고서와 파워프린트를 이용한 각종 통계와 근거 자료, 그를 통한 정책의 구상과 같은 피드백을 받는 것을 싫어했다. 집무실에서 쉴 새 없이 트위터를 하고 하루종일 여기저기 전화통화를 하는 것이 주요 일과이고, 신문을 읽기도 싫어해서 헤드라인 정도만 보고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만 초집중하는 전형적인 관종이라는 것. (이전에 실제로 궁금해서 그의 트위터를 팔로우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트위터를 해 본 이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트럼프는 정말 하루 종일 트윗을 날려댄다!) 따라서 진지하게 논의된 정책마저도 그의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극과 극 사이에서 요동을 치기도 하고, 따라서 추진한 내용이 완전 물거품이 되는 과정도 빈번하여 참모진들은 예측불허인 그가 무슨 트윗을 날리는지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데에 온 정신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대목은 현실 코미디보다 훨씬 웃겼다.


배넌이 여행금지 조치를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 첫 백악관 성명으로 추진했다면 쿠슈너는 장인이 선거운동 내내 협박하고 모욕했던 멕시코 대통령과 장인을 만나게 하는 것이 자신의 지도력을 보여주는 첫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추진했다.

쿠슈너는 93세의 키신저에게 조언을 구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나이 많은 키신저를 치켜세우고 대통령 앞에서 그의 이름을 들먹여보려고 한 전화였지만 또한 실제로 진정한 조언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멕시코 대통령과 문제를 일으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선거운동 때의 가혹한 입장에서 물러서는 전환은 없다는 배넌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대통령을 백악관에 데려오는 것은 진정으로 의미있는 전환이며 (그것을 전환이라고 부르지는 않아도) 쿠슈너가 그에 대한 공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었다. (중략)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불러오기 위한 협상은 정권인수 기간 중에 시작됐다. 쿠슈너는 국경 장벽 이슈를 이민 문제에 관한 양자 협정으로 전환해 트럼프식 정치의 역작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보았다. (중략) 그날 오후 쿠슈너가 장인에게 보낸 전갈은 페냐 니에토가 백악관 회담에 오기로 동의했고 방문 계획이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트럼프는 이런 트윗을 날렸다. ‘미국은 멕시코와 무역에서 600억 달러의 적자를 보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시작 때부터 줄곧 일방적인 거래였다….’ 그리고 다음 트윗에서 계속했다. ‘엄청난 수의 일자리와 기업들을 잃었다. 멕시코가 절실하게 필요한 장벽의 건설비용을 기꺼이 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회담을 취소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 순간 페냐 니에토는 바로 그렇게 했다. 쿠슈너의 협상과 정치수완은 바닥에 버려진 쓰레기처럼 되고 말았다.


-본문 134-135쪽.


재러드와 이방카는 트럼프에게 영향을 미치려면 내부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두 사람은 웨스트윙 내 공식적인 직위와 외부 자문 역할이 갖는 권력과 영향력을 비교할 때 그 점을 고려했다. 전화 통화와 통화 사이에서--트럼프의 하루는 조직된 회의를 빼고는 거의 전부가 전화 통화였다--그를 놓쳐버릴 수 있다. 이는 엄청나게 미묘한 부분이다. 트럼프는 흔히 마지막으로 그에게 이야기한 사람에게 영향을 받았지만 그가 실제로 누군가의 말을 듣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움직인 건 개별적인 주장이나 청원의 힘보다는 단지 그와 함게하는 누군가의 실재였다. 물론 그가 집착이 많고 일관된 견해가 거의 없다고 해도,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들이 누구와 연결돼 있고 그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 그를 움직였다.

결국 트럼프는 그의 근본적인 유아론적 태도에 있어서는 인생의 대부분을 대단히 통제된 환경에서 살았던 부호들 중 누구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차이는 그가 습득한 공식적인 사회적 규율은 거의 전무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심지어 예의를 지키는 시늉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를 들어 정보를 교환한다는 의미에서 혹은 대등하게 주고받는 식의 진정한 대화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각별히 듣지도 않았고 그에 대해 특별히 신경 써서 응답하지도 않았다. (이는 그가 그토록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이유중 하나다.) 그는 또한 누구에게든 어떤 기본적인 예의나 믿을 만한 정중함도 갖추지 않고 대햇다. 자신이 뭔가를 원할 때면 그는 예리하게 초점을 맞추고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지만 누군가가 그에게 뭔가를 원할 때면 그는 성마르고 금세 흥미를 잃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다른 이들더러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하고는 그들이 약해서 굽실거린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직감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엄청나게 성공한 배우 같았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종복이거나 그의 주의와 연기를 이끌어내려고 애쓰는--그가 화를 내거나 까다롭게 굴지 않도록 하면서 그 일을 해야 하는--영화 제작 고위 관계자였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그의 열광과 급하고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이었다. 그리고--그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데서 잠시 벗어날 경우--종종 찾아오는 상대의 허약함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그들의 가장 깊숙한 욕망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정치는 너무 많이 아는 사람들의 점진주의 때문에 약해졌다. 그들은 시작하기도 전에 그 모든 복잡성과 이해충돌 때문에 패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는 게 거의 없는 트럼프는 그런 체제에서 괴상한 새 희망을 줄 수도 있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렇게 믿으려고 애썼다. 


-본문 124-125쪽


트럼프의 백악관이 미국 역사상 어느 행정부 못지않게 불안한 상태였다면 대통령의 외교정책, 그리고 더 크게는 세계관은 가장 무작위적이고 무지하며 변덕스러워 보이는 축에 속했다. 그의 자문역들은 그가 고립주의자인지 군국주의자인지, 아니면 그 둘을 구분이라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본문 298쪽


대통령은 취임 이후 직관적인 국가안보관을 개발해왔다. 행복하지 않으면 미국을 괴롭힐 수 있는 독재자들이 가능한 한 행복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스트롱맨을 자처하는 그는 기본적으로 타협가였다. 그러니 이번 경우에 왜 러시아와 부딪치려 하겠는가?


-본문 308쪽.


대통령인데 실질적으로 정책에 대한 관심이 없고 철학도 없기 때문에 아랫 사람들의 말이 길어지면 듣지도 않으며, 자기애적 인물이라 현안과 큰 관계 없는 자신의 무용담만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원래 현안으로부터는 크게 궤도를 벗어나기 일쑤니, 상식적으로 위에서 내려오는 정책이 아래에서 실행되는 게 아니라 완전 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충격적이었다(아니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이 이래도 돼???). 트럼프는 남의 말을 듣지 않으므로 회의에서 발언의 배분은 대통령 9, 나머지 1 정도로 진행되는데 이 과정도 역대급 코미디다. 참모들은 자신에게 겨우 주어지는 5분 남짓의 시간동안 대통령이 원할 것 같은 정책을 무엇이 먹히는지 보자는 식으로 재빨리 제안한 다음 대통령이 자신도 그 생각을 했었다고 생각하기를 바라게 만드는 은밀한 설득을 하는 식으로 의사 결정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의사 결정과정이 이렇게 해괴하니 대통령을 통해 자신의 정치 철학을 펼치려는 세력들 간에 권력 암투가 극심하게 진행되는 데 이 지점이 이 책의 가장 재미있는 포인트이다. 대개는 극우주의자인 스티브 배넌과 민주당원인(!) 재러드 쿠슈너와 이방카 트럼프 부부라는 큰 두 축(초기에는 프리버스까지 세 축)으로 권력 암투가 진행되었고, 어떤 날에는 극우파들이 좋아할 만한 이민금지 행정명령이 내려왔다가, 어떤 날에는 민주당에서도 환영할만한 정책이 발표되기도 하는 등 정책이 완전 널을 뛰게 된다. 가히 막장드라마급이다.


분석이나 토론이나 파워포인트는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누가 무엇을 말했고 언제 말했는지는 중요했다. 배넌이 부추겨 레베카 머서가 트럼프에게 전화를 하면 효과가 있었다. 프리버스는 트럼프에 대한 폴 라이언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쿠슈너가 꾸며서 머독이 전화를 하면 접수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이어지는 전화는 대부분 다른 전화를 무효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비현상 때문에 세 명의 조언자들은 대통령을 움직이는데 특별히 효과가 있는 다른 방법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것은 언론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로써 세 사람 모두 상습적이고 세련된 정보 유출자가 되었다. (중략) 백악관에서 첫 달이 끝날 무렵, 배넌과 쿠슈너는 각자 정보를 흘릴 주된 창구들과 그 창구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시선을 돌릴 부차적인 창구들의 네트워크를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백악관은 언론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를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언론에 정보를 흘릴 강한 의지를 갖는 꼴이 됐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획기적인 투명성을 달성했다.


-본문 203-204쪽


이런 상황이기에 통상적으로 다른 행정부라면 했을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까지 벌어지자, 딸인 이방카 트럼프가 묘책을 생각해낸 부분도 재미있다. 스티브 배넌의 대통령에 대한 영향 때문에, 시리아의 화학무기 사용에 대해 제제를 가하기는 커녕 용납할 수 없다는 성명을 내는 것도 힘들어 이에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던 때였다. 군사 문제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 대통령 때문에 브리핑을 하기도 힘들자 이방카는 대통령의 주의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입에 거품을 문 아이들의 사진을 가지고 만든 프리젠테이션을 브리핑한다. 이 자료를 보고 충격을 받은 대통령의 결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건 물론이고 말이다.


트럼프의 조직보다 군의 규율과 잘 맞지 않는 조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곳에는 실질적인 위계 구조가 없고 단지 맨 위에 한 사람이 있고 그 아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주의를 끌려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이는 과업을 기반으로 하기보다는 보스의 반응을 따르는 조직이었다. 그것은 트럼프타워에서 작동하던 방식이었다. 이제 그와 똑같은 방식이 트럼프 백악관에 적용되고 있었다.

대통령 집무실 자체는 전임자들이 궁극적인 권력의 상징이자 의식의 정점으로 활용해왔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일단의 전장 깃발들을 들여와 책상에 앉은 자신의 모습을 연출했고, 집무실은 곧바로 트럼프의 일상적인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전의 다른 어떤 대통령보다 이번 대통령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는 것 같았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회의에 수많은 가신들이 둘러섰고 들락거렸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모든 회의에 앞다투어 참석했다. 그곳에는 엉큼한 사람들이 뚜렷한 목적 없이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배넌은 언제나 한구석에서 서류를 검토할 구실과 마지막 한마디를 할 구실을 찾았다. 프리버스는 계속 배넌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쿠슈너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트럼프는 힋, 콘웨이, 그리고 종종 그의 〈어프렌티스〉 동료였던--지금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백악관 직함을 가진--오마로자 매니골트Omarosa Manigqult까지 언제나 그의 주위에서 맴돌게 하고 싶어 했다.늘 그렇듯이 트럼프는 열렬한 청중을 원했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능한 한 가까이 가능한 한 자주 오려고 애쓰도록 부추겼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는 자신에게 가장 열심히 알랑거리는 듯한 사람들을 알아보고 조롱하기도 했다.

훌륭한 경영자는 에고를 제어한다. 그러나 트럼프의 백악관에서는 흔히 그가 있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한마디로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는 뭔가 거꾸로 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트럼프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그는 그 일에 신경 쓰지 않았고 거의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그럴 때 그의 반응은 보통 그저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웨스트윙과 행정부 전반에 걸쳐 사람들을 채용하는 작업이 왜 그토록 느린지 설명하는 논리 한 가지를 제공했다. 거대한 관료조직을 채우는 일은 그의 시야 밖에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약속을 하고 웨스트윙에 온 방문자들은 직원이 너무 없어서 당황했다. 웨스트윙 출입문에서 해병대 복장의 군인에게 날렵한 경례로 인사를 받은 다음, 이 건물에는 정치 현안과 관련한 약속으로 찾아온 방문자를 맞는 안내원이 보통 없다는 걸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손님들은 서방세계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곳에서 스스로 미로를 헤쳐가야 했다.


-본문 183-185쪽



이 책을 읽은 지 몇 달이 지났다. 며칠 전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었다는 뉴스를 듣고도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인간이 힐러리 클린턴을 떨어뜨리고 당선되었다는 데에 대해 환멸감이 느껴지기도 하다. 영부인, 국방부 장관, 상원의원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풍부한 정치적 경험, 연륜, 인적 네트워크 등등 모든 면에서 잘 준비된 후보였고, 전 세계 여성들이 세계 최강대국의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을 진심으로 응원했다가 좌절했던 2년 반 전의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백인 남성들을 주축으로, 버락 오바마 시대를 거치며 소수자들이 메인스트림에 진출한다는 공포와 반발로 인한 명백한 백래시이다. 역시나 인종 차별보다 성차별의 벽이 더 견고하다는 걸 알리는 차가운 현실이기도 했다.

마초적이고 파토스적이며 정치인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나르시스트가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을 대체해줄 구원 투수’라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채 대통령이 되었고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오랜 기간동안 민주주의 절차를 잘 다듬어왔고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여 시스템이 안정적인 나라는 그래도 막장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어도 잘 돌아가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부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내용을 잘 요약해준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옮긴다.


게리 콘의 견해를 나타낸다고 하는 이메일은 백악관의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끔찍함을 간결하게 요약했다. 이메일 내용은 이랬다.


이곳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안 좋아. 한 바보가 어릿광대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트럼프는 아무것도 읽지 않아. 한 장짜리 메모도, 짤막한 정책 브리핑도, 아무것도. 그는 세계 지도자들과 만날 때 중간에 일어나. 지루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직원들도 더 나을게 없어. 쿠슈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금수저 아기야. 배넌은 자신이 실제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건방진 놈이야. 트럼프는 한 명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끔찍한 특성들의 집합체지. 그의 식구들 아니면 누구든 첫해럴 버텨낼 수 없을 거야. 나는 이 일을 싫어하지만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실마리를 가진 사람은 내가 유일하기 때문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다고 느껴. 


-본문 301-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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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 출간 즉시 이 책을 구입했을 때 끊임없는 화제를 몰고 오며 100만부가 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신간 코너에서 ‘82년생’ ‘김지영’ 두 단어의 조합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2016년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내다니, 이 작가 좀 천잰데? 제목만 봐도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할 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제목이 내용 그 자체라는 것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책이 출간된 2016년에 1982년생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한국식 나이’로 35세로 30대 중반에 자아실현이냐 가부장제로의 완전한 종속이냐의 두 갈래 사이 불안한 정체성을 걸어놓고 있었고 ‘김지영’은 그 나이대에 태어난 여아 중 가장 흔한 이름이었으니까. 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과업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 하에서 기초교육과정을 밟았고, 경제성장/세계화/ IMF를 거치는 격변의 시대에 사춘기를 겪어 공동체가 무너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대학에 진학하여, 개인들간의 무한경쟁시대의 사회 윤리를 내면적으로 체화하기 시작한 세대이다. 직장인이 된 후에는 성차별과 유리천장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다, 결국은 사회문화적 압력에 이게 내 꿈인지 긴가민가하며 결혼하고, 이후 경력이 단절되어 집단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거나, 비혼이라면 독한 김치녀로 보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사랑받기 위해 자기 검열을 내면화하한 세대이다.

어찌 잘 아느냐고? 그렇다. 나는 1982년생이고 거의 출간되자마자 제목을 보고 반가워서 바로 이 책을 샀다. 그러나 2년이 넘게 읽지 않았다. 무슨 내용을 다루고 있을 지 너무 잘 알았다. 보면 우울해질 것 같아서 손이 안 갔다. 2018년을 며칠 남겨둔 상태에서 또 해를 넘기고 못 읽은 책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 묵힌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김지영은 나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가방끈이 길어진 고학력 여성 이어도 직장 생활하며 직장의 꽃 취급받거나 술자리에서 대놓고 접대부 취급 받고, 나보다 훨씬 스펙과 기량이 떨어지는 남자 동기들이 남성 카르텔 안에서 승승장구하는 장면을 보며 상처받고, 결혼 전에는 여남이 평등하다고 믿었는데 현실과의 온도차에 당황해하다, 임신 출산 과정에서 배려받지 못하고 중요한 자리에서 치워졌으며, 약화된 공동체 사회에서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잠시 카페에 갔다가 맘충 소리를 듣는 김지영은 내 시대 여성들의 이야기다.

 

극도로 현실적이라는 폭발적 공감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나도 비슷한 나이대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너무 부정적인 것 아니냐”라는 사족도 보이는데 이는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기만적인 인식이다작가는 르포인지 소설인지 모를 실험적인 형식으로 작품을 진행하며, 주인공인 김지영 씨를 현대 소설의 인물로서 1982년생의 집단적 경험을 체화한 보편적이고 평범한 인물로 그려냈다. 즉 김지영 씨는 문자 그대로 ‘김지영’이라는 한 개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1982년에 태어나 2010년대 후반인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40만 명의 총합적, 보편적인 경험의 상징이라는 것이다(여기서 여성 억압적 서사가 본인의 경험과 얼마나 일치하느냐 아니느냐의 문제는 순전한 개인적인 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82년생 김지영》은 분명히, 개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여성의 집합적 서사이다. 이러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지점은 김지영 씨의 연대기 중간중간에 당혹스럽게도 제4의 벽이 무너지면서 작가가 뜬금없이 튀어나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지는 않는다) 건조하게 기존의 통계 자료를 근거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집합적 서사이므로 인물에 집중한 묘사와 감성적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여기다 ‘개성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기존의 보편적 현대 소설을 비평하는 잣대를 들이대며 심리 묘사가 부족하네, 문학성이 떨어지네 어쩌네 하는 것은 공염불을 외는 격이다. (개인적으로 몇몇 에피소드는 아주 오래 전 기억을 상기시켜서 괴로울 정도로 세세한 억압의 결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뿌리깊은 성차별이 개인적인 노력과 제도의 개선으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성 억압의 핵심은, 가부장제가 가하는 여성 억압적 문화와 관습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부재한 개개인들의 관행의 답습과, 이를 통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초월적인 강력한 대물림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대개 이러한 여성 억압적 문화 관습에 대한 인지조차 하지 못하니 두말할 것도 없지만, 억압의 대상인 여성들 또한 어렴풋이(또는 적극적으로) 인지는 한다고 해도 문화적 아비투스로서 관행을 답습하며 또다른 억압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김지영 씨의 직장 상사인 김은실 씨는 여성 관리자급 간부로서 사내 여성 직원들의 커리어 지속을 위해 복지를 확대해 나가고 불합리한 직장 문화를 철폐하지만, 여성들 개개인이 가부장제 문화에서 억압받는 것까지 해결해 줄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억압과, 직장을 다니며 커리어를 쌓고 자아 실현을 하되 남성의 보조적인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 실제적인 임금 격차는 1980년대생 여성들이 사회적 메인스트림에서 치워지게 만든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대체로 악인 혹은 몰상식한 무뢰한이 결코 아니다. 모두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적당히 평범하며 적당히 예의 바르고 크게 사회적으로 모난 행동을 하지 않는 무난하며 상식적인 인물들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김은영 씨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어머님, 죄송해요,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따뜻하게 며느리를 위로했다.

“괜찮다. 둘째는 아들 낳으면 되지.”

김지영 씨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아가, 미안하다,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따뜻하게 며느리를 위로했다.

“괜찮다. 셋째는 아들 낳으면 되지.”

(중략) 하지만 김은영 씨와 김지영 씨를 받아 준 산부인과의 할머니 의사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몇 번이나 초음파 기계로 아랫배를 훑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애기가, 참, 참, 예쁘네 언니들을 닮아서……”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울다 울다 먹은 것을 다 토해냈고, 할머니는 구역질하는 며느리에게 화장실 문 너머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은영이 때도, 지영이 때도, 입덧이라고는 안 하더니 이번에는 웬 입덧이 이렇게 요란하다니? 쟤들하고는 다른 애가 들어섰는갑다.” (중략) 

“만약에, 만약에, 지금 배 속에 있는 애가 또 딸이라면, 은영 아빠는 어쩔 거야?” (중략)

“말이 씨가 된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 어머니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소리 없이, 베개가 흠뻑 젖도록, 밤새 울었다. (중략) 어머니는 혼자 병원에 가서 김지영 씨의 여동생을 지웠다.


-본문 27-29쪽.


학교생활 첫 번째 난관은, 많은 여학생들이 경험한 바 있는 ‘남자 짝꿍의 장난’이었다. 김지영 씨에게는 그저 장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장난보다는 괴롭힘보다 폭력으로 느껴졌고 너무 괴로웠는데 언니와 어머니에게 울면서 하소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언니와 어머니가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아니었다. 언니는 남자애들이 원래 유치하다며 별수 없으니 그냥 무시하라고 했고, 어머니는 친구가 놀자고 장난치는 걸 가지고 울고불고한다며 오히려 김지영 씨를 혼냈다. (중략)

“근데 지영아, 선생님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는데 지영이는 모르는 것 같네? 짝꿍이 지영이를 좋아해.”

(중략)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본문 38-41쪽.


김지영 씨의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역경을 돌이키며 ‘며느리를 진심으로 아끼는’ 시어머니이며, 김지영 씨의 어머니 또한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마치지 못한 학업에 대한 한이 있어서 딸들이 자신과 달리 여성으로서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는 좋은 어머니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선의의’ 압력은 어머니가 여아 낙태를 하는 계기가 되고, 어머니의 ‘선의의’ 압력은 김지영 씨의 언니인 김은영 씨가 ‘PD와 같은 여자에게는 거친 직업’이 아닌 ‘결혼해서도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인 교사’를 택하게끔 만든다. 김지영 씨의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은 반 친구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김지영 씨에게 ‘남자애가 좋아서 너를 괴롭히는 거다’라고 말하여 여학생들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참고 견디게끔 만든다. 김지영 씨의 아버지나 남동생, 남편 또한 악인이 아니다. 그들은 점잖은 방관자에 가깝다.


“오면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우리 식구들 앞에서 네가 서운한 상황이 생겼을 때는 내가 나서는 게 맞는 거 같다. 너보다는 내가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반대로 너희 식구들 앞에서는 네가 상황 정리해 주고. 그렇게 하자. 오늘 일은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정대현 씨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김지영 씨도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눈치를 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잔소리 안 듣는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 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중략)

“내가 많이 도와줄게. 기저귀도 갈고, 분유도 먹이고, 내복도 삶고 그럴게.”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중략)”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본문 134-136쪽.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와,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그럼 너도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본문 138쪽.


어린 시절부터 남녀가 평등하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 새로운 세대는 윗세대와 달리 불평등한 성차별적 결혼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에서 자라온 것이 1980년대생들이다. 정대현 씨는 김지영 씨 아버지의 적극적인 방관보다는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결혼 전에 앞으로 잘하겠다는 김지영 씨의 다짐을 받아왔고 나름 노력하는 좋은 남편이지만 그 또한 아내인 김지영 씨의 수난을 막을 수 없었는데, 이는 남성은 억압받는 쪽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의 역경에 굳이 감정 이입을 할 필요가 없는 특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지영 씨는 혼란을 느끼다 결국 기존 가부장제에서 맡겨진 역할들에 답습하게 된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다.


80년대생보다는 90년대생 혹은 00년대생 여성들 사이에서 반향이 크다고 들었다. 바로 윗 세대 선배들인 우리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른바 ‘비혼/비출산/비섹스/비연애’ 이른바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4B’ 운동이 활발하다고 하다. 여성들의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목소리를 키우는데 역할을 했다는 데에서 평범한 여성의 삶을 다뤘을 뿐인 이 소설은 충분히 문제적이다. 




+

사족.


이 소설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남성분들도 많지만, 대체로 많은 남성들은 (읽지도 않았으면서) 발끈해한다. 내가 뭘 어쨌는데? 한 연예인은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고 밝혔다는 이유로 사이버 집단 린치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권력이라는 한 트위터 유저의 명문을 가져와 본다.


밥을 먹으려면 요리를 해야 한다.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사랑을 했으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꾸준히 친밀감을 유지하고 서로 타협해가며 귀찮더라도 지리한 과정을 통해 같이 성장해야 한다. 아기를 키우려면 더 많이 해야 한다. 이 모든 걸 여자들만 미친듯이 한다. 그 이득은 남자들이 모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얻어간다. 제삿상이 차려지고, 가정이 유지가 되고, 부부사이가 유지가 되고, 가족의 화목이 도모되고, 아이가 자란다. 아무것도 안 한 남자들은 그것이 자기가 잘해서, 잘나서 생긴 성과라고 느낀다. (중략) 고부갈등이 발생해도, 아이가 태어나도, 부부사이가 멀어져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내가 뭘 어쨌다고?”라며, 혼자 종종대고 오만 방법을 다 찾는 여자를 비난할 권리를 가진다. (중략) 남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한발 물러서서 냉철하고 이상적이고 객관적인양 판단을 하며, 당장 산재한 문제들 사이에서 해결을 해보려고, 좀 더 나아져보려고 미쳐 날뛰는 사람에게 태도를 문제삼고 훈계를 할 권력도 획득한다. (중략) 자기 원가족들로 고통 당하는 아내를 보며 “너도 너무한다. 어른인데 좀 참아라. 아무튼 여자의 적은 여자라니까”라고 지껄일 수 있는 것도, 아이가 뭔가 맘에 안들때 “참 가정교육 잘 시켰네 니가 그러니까 애가 저러지”라고 지껄일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들이 아무 것도 안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친구 관계 파악도 하지 않고, 아이 친구 부모와 교류도 하지 않는다. (중략) 그런데 그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큰 힘을 가져 여자를 후드려팬다.

출처 트위터 @inselsein





+

2018. 2. 24. 추가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문화적 장벽을 뛰어 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아웃사이더 집단이며 가장 긴 시간 동안 메인스트림에서 배제되어 온 집단은 여성이다. 여성들의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연대의 끈을 진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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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 신호를 차단하고 깊이 몰입하라
정주영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야망을 가진 이들이 보고 배울 바가 많은 좋은 책인데, 아, 제목을 잘못 지은 책이라는 한탄이 터져나온다.
‘하버드’라는 키워드는 교육열이 높은 대한민국에서 어그로를 끌기 정말 좋은 주제이긴 하다. 하지만 제목만 언뜻 보면 세계 최고의 명문 하버드에서도 가장 상위집단이 되기 위한 엘리트가 되는 비법을 쓴 천박한 자기계발서 따위로 생각이 드는데, 그렇게 가치절하될 책이 결코 아니다.
남들과 다른 가치를 지녔으며 ‘신호를 차단하고’ 뚝심있게 밀어붙여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각 인물들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조사한 수고와 굉장한 성의가 페이지마다 넘쳐나서 자기계발서보다는 종합 평전을 읽은 기분이다. 하지만 냉철한 분석보다는 작가의 가슴이 뜨거운 서술이 돋보였고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 심지어 예술가가 글을 썼다는 느낌마저 든다. 마치 슈테판 츠바이크 의 저작(예를 들면 <광기와 우연의 역사> 등)을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과 비슷하달까. 책을 읽을 때 몰입도가 굉장히 높았다. 꿈과 야망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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