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등 대표작들은 이미 섭렵했으나, 작가님의 이번 노벨문학상 계기로 초기 장단편들도 모두 건드리고 싶어져 구매한 한강 작가 작품집들이다. 


 

































하룻밤만에 한강 작가님의 2002년작 <그대의 차가운 손> 을 탐독했는데 역시나 잔상이 강렬하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의 작품을 관통하는, 폭력에 희생당하는 육체와 이에 종내는 저항하게 되는 지점의 광기어린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유미주의적 표현력으로 승화하여 묘사하였다.



내가 알게 된 것이란, 진실이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거였다. 실제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어난 상황에 가장 잘 맞는 행동을 하고, 그러고 나서 나에게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인내한다거나, 잊어준다거나, 용서한다거나. 어쨌든 내가 소화해낼 수 있으며ㅡ소화해내야만 하며ㅡ결국 내 안에서 진실이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62쪽



손은 완벽하게 재생되어 있었다. 오직 한 가지, 그 안의 비어 있는 공간을 제외한다면, 누구라도 만져보고 싶을 만큼 정교했다. 잔주름과 손톱, 가느다란 핏줄과 뼈의 잔가지들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동안 내가 혼을 불어넣어 빚어냈다고 믿어왔던 어떤 형상들보다 강렬하게 그 손은 실재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을, 숨결을 훔쳐 감쪽같이 내 것으로 만든 듯한 전율을 나는 느꼈다. 

그러나 뻥 뚫린 손목의 입구로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공동 속에는 혈관도 근육도 뼈도 없었다. 그것은 철저하게 본질이 제거된 공간이었다. 그 때문에 그 손에서는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섬뜩했고, 차가웠으며, 비인간적이었다. 


-91쪽



그녀는 멍하니, 마치 지상에서 가장 낯선 물건을 보듯이 쌀밥을 내려다보았다. 쌀밥에서는 흰 김이 너울너울 피어올랐다. 그녀의 침묵과 저녁의 정적 위로 흰 김은 끝없이 높이 오르려 했고, 채 오르기 전에 찬 공기 속으로 흔적 없이 흩어졌다. 고요한 춤과도 같이, 비명과도 같이, 쓸쓸한 노래와도 같이. 숨결과도 같이. 침몰하고 또 생성되는 집요한 생명과도 같이,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 젊음, 더럽혀지지 않은 유년과도 같이. 무섭게 투명한 물, 더욱 투명한 시간과도 같이. 우리의 입술을 다물게 하는, 적요만 남게 하는 시간과도 같이. 


-153쪽



봄꽃들은 퇴색한 채 떨어지거나, 떨어진 뒤에 퇴색했다. 천천히 나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되고 있었다. 나는 철저히 내 과거 안에 있었고,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다. 기록이라는 습관은 은밀히 매력적이어서,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끊이지 않고 병행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실제의 삶과 이 기록 사이에 가로놓인 쓸쓸하고 단호한 침묵을 나는 느꼈고, 아마도 글 쓰는 사람들의 우울이나 염세는 그 지점에서 기인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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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 내 최애 한국 소설가.


기존 소설 작법의 문법을 파괴한 해체적이며 실험적 글쓰기로 탄생한 마치 무수한 파편같은 문장들의 집합체와 같은 그의 독특한 작품속에서, 파편들이 생채기를 내며 흐르는 의식 사이 왠지 뼈가 시린내가 물씬 풍기는 피폐한 문장들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자살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죽음에도 이유가 없듯 자살에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자살하고 싶었다.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기술의 발전으로 생각을 읽어낼 수 있게 되더라도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자살하고 싶다, 자살하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우리는 버릇처럼 자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우리가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이었다. 우리는 누구에게 당한 폭력보다도 더 큰 폭력을 스스로 행사하고 싶었다. 그게 우리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복수의 방식이었다.

- 한유주, 그해 여름 우리는, <연대기>, 31-32 쪽 - P32

손을 닦았는데도 땀과 크림과 비누가 뒤섞인 미세한 냄새가 났어요. 그런 냄새에도 이름이 있을까요. 내게는 의미나 상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내게는 이름이 필요해요. 구체적인 이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는 이름이. 모든 것의 모든 이름이. 나는 집 안을 둘러보았어요. 여전히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먼지 몇 점이 부유하고 있었어요. 내가 모든 것의 개수를 세려고 하게 된 이유가 그때 처음으로 궁금해졌어요.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그 처음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개수를 세고 다니지는 않았던 거예요. 존재하다 존재하기를 그만둔 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을 때부터 셀 수 없는 것들을 세려고 하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의 이름을 알려고 했던 거예요.
-한유주, 식물의 이름, <연대기> 83-84쪽 - P83

그건 도트였다. 도트 하나로는 아무런 의미로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했다. 도트가 작을수록, 그리고 도트가 많을수록 해상도가 높아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너는, 해상도가 높은 글을 쓰라고 했다. 수강생 하나가 정물화나 인물화, 풍경화 를 그리라는 말이냐고 물었다. 너는 반구상화나 추상화에 도 해상도가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네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너는 해상도를 초과한다.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아 야만 한다. 나는 너를 가까이서 보려고 네게 다가간다. 어 느 순간, 눈을 감았다 뜨면, 나는 너를 통과한다. 나는 너를 계속해서 통과하고 있다. 너는 몇 개의 도트로 이루어져 있는가.
- 한유주,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연대기> 144쪽 - P144

삼각형의 욕망은 사각형이 되었다가 원이 된다. 나의 욕망은 선이다. 나의 욕망은 선이 되어 너에게로 수직 상승한다. 나는 구체적인 소설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소설 쓰기 수업을 수강한 이유는 너를 보기 위해서다. 내 욕망에는 매개자가 없다. 내 욕망은 곧장 너에게로 향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어제는 오늘이 되었고 오늘은 내일이 되겠지만 나는 현재를 살 뿐이다. 나와 시간은 영원히 평행선을 그린다.
-한유주, 은밀히 다가서다, 몰래 추적하다, <연대기> 152-153 쪽 - P152

나는 언어를 낭비하고 싶다. 나는 언어를 경제적으로 운용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는 언어를 탕진하고 싶다. 어떤 의미를 적확한 한두 단어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묘사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너.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으로서의 너. 대단히 구체적인 주어로 자리하는 너. 나는 너를 설명하는 일에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웠다. 그래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운다. 맥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본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 저녁 하늘에 수많은 색이 있다. 저 색들을 하나씩 분리하는 일. 황혼. 어스름. 저물녘. 땅거미. 여명. Crepuscule.



-한유주, 처음부터 다시 짖어야 한다, <연대기>, 218-21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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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ed, I’ve been eager to explore genuine meaning beyond specific languages—a concept reminiscent of Plato’s ‘idea’ that we can never fully grasp. 



Sometimes, this quest leads me to deep pessimism. I particularly grappled with this when I was creating novels in my twenties, feeling frustration and agony over the inconsistencies between meanings and the random structures of words, including phonemes and sounds, used by different people from different backgrounds, social classes, or personal particular experiences accumulated throughout their lives, even among those who speak the same language.  For example, to me, ‘love’ encompasses the meaning of ‘humanity,’ ‘willingness to dedicate’ and ‘philanthropy’, but many people tend to reduce it merely to ‘sexual relationships’ driven by mischievous hormonal impulse, which I still find hard to accept. This disconnection was difficult for me to bear, and I grew frustrated with the arbitrary links between meanings, sounds, and words. I often created several protagonists in my novels who developed acquired aphasia due to their feelings of betrayal and mistrust regarding g this randomness in meaning and language.















After reading Han Kang’s *Greek Lessons,* I decided to stop writing on my own. The work offers stunning insights into the primitive anti-language realm of the unconscious mind, which lies hidden beneath the structured, language-driven human consciousness. Her protagonists tenaciously attempt to reveal inconsistencies of their world, often pushing themselves to extremes in their struggle against cognitive—and sometimes physical—violence. They drive themselves into ruthless self-experimentation to confront the contradictions of the world around them in this process. She articulates the topic I had been trying to explore with such intense beauty in her poetic prose. 


It felt perfect, and I no longer felt the need for my own work on this topic, although I still love my novels! lol



 © 2024 Isha Green. All rights reserved. 





The terror was still only vague, the pain hesitant to reveal its burning circuit from the depths of silence. Where spelling, phonemes and loose meaning met, a slow-burning fuse of elation and transgression was lit.

- P10

The night is disturbed.
The roar of engines from a motorway half a block away makes incisions in her eardrums like countless skate blades on ice.
The lily magnolia, lit by the glow from the street lights, scatters its bruised petals to the winds. She walks past the voluptuous blooms straining the branches and through the spring night air, which is thick with an anticipatory sweetness of crushed petals. She occasionally raises her hands to her face, despite the knowledge that her cheeks are dry. - P13

There is evil in this world, and it causes the suffering of innocent people.
If God is good but unable to redress this, he is impotent.
If God is not good and merely omnipotent, and does not redress these things, he is evil.
If God is neither good nor omnipotent, he cannot be called God.
Therefore the real existence of a good and omnipotent God is an impossible fallacy. - P29

Your eyes widen when you are genuinely angry. Your thick brows rise, your lashes and lips quiver, and your chest heaves with every breath you gasp. As soon as I returned the pen, you hastily scrawled in the notebook:

In that case, my God is both good and full of sorrow. If you are attracted to such nonsensical arguments, one day your own real existence will become an impossible fallacy. - P30

That when the most frail, tender, forlorn parts of us, that is to say our life-breaths, are at some point returned to the world of matter, we will receive nothing in recompense.

That when the time comes for me, I don‘t see myself remembering the full range of the experiences I‘d accumulated up to that point only in terms of beauty.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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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마블빠로서 #어벤져스엔드게임 을 기대하며 쓴 글인데 딱히 게재할 플랫폼을 찾지 못해 그냥 여기에 올린다. (아직 안 본 분은 없겠지만 인피니티워 및 전작들의 스포일러 많음)



곧 어벤져스 원년 멤버들의 여정의 대미를 장식할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한다. 전 세계가 타노스에게 이를 갈고 있기에, 우리의 히어로들이 타노스를 어떤 전술로 어떻게 이기냐에 대한 관심과 추측이 각종 커뮤니티, 인터넷 매체와 유투브 등에서 난무하고 있지만 그건 감독들이 알아서 잘할 테니 아묻따 믿고 감상하고 싶고, 그보다는 도대체 어떤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그릴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그 이유에 대해 길게 주절거려보고자 한다.


해피엔딩보다는 잘 만든 비극 혹은 열린 결말을 좀더 좋아하는데, 특히 영화가 (물론 케바케이지만) 해피엔딩인 경우 “오, 사이다~” “개존잼!” 하고 극장을 나와서 길어야 하루 이틀 더 되새기면 끝으로 곧 잊히곤 했지만, 비극이나 열린 결말의 작품은 여운이 오래 남아 곱씹어보며 사유를 무한히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최근 1년 내에 본 영화 중에서 플로리다 프로젝트, 『쓰리 빌보드어벤져스: 인피니티워와 같은 작품들을 거의 광적으로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경우 몇몇 장면을 떠올리면 과장이나 섣부른 판단 및 자의적인 해석 없이 담담하게 거리를 두고 그려졌던 주인공들의 비극이 생생하게 떠올라 아직도 눈물이 줄줄줄 흘러내린다. 이런 수작을 두고 관음증 변태적인 영화가 미장센 운운하며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니 아직도 화가 난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위선적인 영화이다. 내러티브적으로는선함과 정의가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정작 영화에서 긴 시간을 할애하여 전시하는 이미지들은 소위액션이라고 일컫는 폭력, 전투, 파괴, 살인 장면이고 관객은선함혹은정의를 명분으로 대리 만족하며 이를 즐기러 극장에 가는 것이니까. 물론,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 에서 소개했던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 마냥, 정교한 사회와 도덕 시스템에 촘촘히 얽혀 폭력성을 맘놓고(?) 발휘하기 다소 힘든 현대인들에게 일견 필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인류학자 리처드 랭햄 의 저작 『악마 같은 남성 Demonic males』 에서도 지적하듯이, 영장류 수컷의 폭력성은 DNA에 뿌리 깊이 새겨져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지성이라는 무기와 더불어 더욱 정교하고 잔혹하게 진화하였고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왔다. 내재된 폭력의 본성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조금씩 축적되다 급물살을 타고 임계점에서 폭발하며 전세계적,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사건들이 굵직굵직한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니, 퍽이나 후진 옛날 이야기다. 『빈 서판』,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등으로 유명한 세계적 석학 스티븐 핑커 가 제시하는 통계와 성찰에 의하면 통념과 달리 인간 사회는 점점 선해져 폭력과 전쟁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소수자들이 점차 제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세계는 어떻게 다양성을 지니고 혐오 사회에서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느냐와 대한 화두를 놓고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씨름하고 있다. 핑커의 주장이 옳다고 해도, 넓게 보면 영장류 전체, 좁게 보면 호모 사피엔스에 내재된 폭력성을 발휘하려는 욕망까지 깡그리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초적 폭력성을 발산하는 방식은 시대적 흐름과 영화산업의 비약적 발전을 타고 좀더 건전한 방식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이드id는 전쟁과 폭력, 살인을 스크린을 통해 즐기고 있다. 초자아superego가 마음 속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럴듯한 명분을 부여하며 죄책감을 덜어주어 가볍게 즐기기 더욱 좋다. 이 명분을 부여하는 복잡한 작업을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다소 유치한 장르였던 슈퍼 히어로물을 수준 높게 만든 것이 #케빈파이기 산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큰 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는 것을 힘들어해 슈퍼히어로물을 극혐했던 나까지 팬으로 만들었으니. 최근엔 슈퍼 히어로 영화 장르의 문법만 빌려와서 더욱 다양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 않은가. 스릴러물(『캡틴아메리카: 윈터솔져』), 인종문제(『블랙팬서』), 청소년 성장물(『스파이더맨: 홈커밍』), 유쾌한 가족 드라마(『앤트맨과 와스프』), #페미니즘(『캡틴마블』)까지.















『인피니티워』는 작년 2018년 한해 동안 영화 팬들에게 큰 충격과 배신감을 선사한 작품이다. 결국 악이 승리했으며 정의의 사도인 어벤져스는 명분마저도 지키지 못했다. 변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의 광팬으로 10번 정도 관람했다. 당분간은 후속작인 엔드게임 없이 이런 결말도 그냥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너무 좋아했다.




일단 액션 영화로서의 테크닉은 말할 것도 없고, 중요한 인물이 30명 가까이 나오는데 불협화음 없이 잘 어우러지고, 불필요한 대사는 단 한 줄도 없다. 정교하게 짜인 모든 대사와 상황 설정은 각 인물들의 개성, 가치관과 내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복선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부조화일듯했던 인물들의 앙상블이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내며 그 접점에서 고도로 계산된 유머가 빵빵 터진다. 악인의 일대기에 효과적으로 몰입하게 만들어서, 흉측한 보라색 괴물을 관객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만들었다. 콧대 높으신 각종 영화제에서 홀대 받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향후 100년 동안 손꼽힐 명작 중 하나가 되리라고 예상한다. 배드엔딩으로 유명한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국의 역습』과 『시스의 복수』 가 그러하듯이.














앞서 말했듯이 후속작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도덕적인 딜레마와 갈등 구조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그려낼 지가 내게는 최대 관심사이다. 3시간이라는 긴 러닝 타임 동안 관객들을 몰입시키기 위해 도대체 히어로들에게 어떤 명분을 부여해줄까? 『어벤져스: 인피니티워』에서는 히어로들이 갈등으로 쪼개지고 서로 전술도 공유되지 않은 채 시작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처참하게 당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야기와 예고편에서 암시한 바로는 히어로들은 심기일전 중이며 남은 명분은 이제 복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복수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타노스는 이제 자신의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고 명예도 물욕도 없이 오두막에서 쉬고 있는데? 감독은 관객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초점은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일 텐데복수는 루소 형제가 그간 작품들에서 담고자 했던 메시지가 절대로 아니다(아이러니하게도 ‘avengers’는 복수자들이라는 뜻이지만). 전작에서도 복수심에 눈이 멀었던 자들은 다 실패했었다. 1: 타노스 손에서 인피니티 건틀릿을 빼기 전에 연인 가모라를 잃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일을 그르치고 희대의 트롤러가 되어버린 스타로드. 2: 역시나 니다벨리르에서 힘들게 새로운 무기 스톰브레이커를 만들어 와 놓고도 아스가르드인들과 동생 로키에 대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실패한 토르(감독 코멘터리에서 밝히기로도 도끼날을 타노스의 가슴에 꽂으며 타노스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토르는 복수의 희열을 즐겼다고 한다). 괴로워하며 타노스는 말한다. “, 실수한 거야. 내 머리를 노렸어야지.” 그리고 있는 힘을 그러모아 핑거 스냅, ! 인류의 절반이 먼지가 되며 상황 종료.



『인피니티워』에 이어서 『엔드게임』에서도 보여줄 핵심 키워드는 타노스와 캡틴 아메리카의 가치관 싸움이라고 예상해 본다. 타노스는 비용·편익 분석을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양적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담의 21세기적 후계자이자 맬서스 인구론의 실제적 집행자이다. 캡틴 아메리카는 칸트의 정언 명령의 충실한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인피니티 워를 본 관객들이라면 타노스에게 이길 뻔 했던 몇 가지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어차피 절반이나 다 죽을 거 마인드 스톤의 소유자인 비전을 좀만 더 일찍 죽였다면 몰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스타로드가 이성을 잃지 않아 건틀릿을 타노스의 손에서 벗기는데 성공했다면? 스타로드가 가모라를 일찍 죽였다면 소울 스톤은 아예 찾지도 못했을 텐데. 토르가 좀더 냉정하게 타노스의 머리를 노렸더라면? 뒤의 두 가정은 히어로들의 인간적이며 불완전한 면모와 복수심의 무용함을 보여줬다면, 앞의 두 가정은 비용 편익 분석적으로 보면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나 최악을 막기 위해 차선책으로 절반을 죽여도 괜찮다는 타노스의 가치관과 진배 없는 섬뜩한 가정이다.















『인피니티워』에서 두 가치관의 격돌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소개된 기차 비상 선로에서의 도덕적 딜레마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무고한 1인을 고의적으로 살해하여 5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살인은 정당한가?” 세계 기아 문제 전문가인 장 지글러 는 유명한 저작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에서 기근이 인구를 조절한다는 맬서스 이론에 대해자신들은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자들의 전형적인 유럽적·백인 우월주의적 정당화라며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를 의식했는지 감독들은 영리하게도 타노스를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는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신념을 실행하는 자로 묘사되며 스톤만 챙기면 전투를 멈추고 불필요한 살생은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사라진다. 그는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랜덤으로 공평하게 절반만 죽인다’.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심지어 타노스 자신도 랜덤으로 살아남은 쪽에 속한다고.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에 대한 기초놓기』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의지가 존중되는 존재자로서 생명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캡틴은 칸트 철학의 수호자이다. 『시빌 워』에서는 소코비아 협정에 반대하며 지성적인 존재로서 자율적인 의지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여 칸트의 도덕 철학의 핵심 정신을 실천한 바 있다. 『인피니티워』에서도 역시 그는 비전이 자신을 죽이라고 하자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We don’t trade lives(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저울질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결과론적인 비용 편익 분석으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정의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생각이며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캡틴은 졌고, 동료들의 절반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참혹한 와칸다 전투 현장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황망한 표정으로, 처음으로 신을 찾는다. 이보다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캡틴은 자신의 정의를 고수할 수 있을까? 지난 10년 간 캡틴의 여정을 그린 6편의 영화를 지켜보면서 자신 있게 말하건대, 반드시 그럴 것이다. 어떻게 그 신념을 멋지게 그려낼 것인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개봉을 남겨두고 가장 흥분되는 지점은 두 가지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과, 캡아는 도덕 판단을 비용 편익으로 분석하며 생명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한 방 날려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나의 새로운 우상 캡틴 마블의 활약은 얼마나 멋질까?!


 © 2019 Isha Green.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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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에 한창 여성혐오가 화두가 되었을 때 산 책인데, 왠지 읽히지가 않아서 묵혀두었다가 2018년 말미에 읽기 시작하여 2019년 1월 초 처음으로 완독한 책결론은, 실망스러운 책이다. 비추천. 그나마 정희진, 시우의 글이 여성혐오에 대한 훌륭한 해석틀을 몇 가지 선물해 주어서 읽을 만 했고, 윤보라의 글도 넷페미사를 개괄하기 나쁘지 않았다. 나머지 글들은 중간 정도.

루인의 글은 거의 재앙급이었다.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해 개진하는 논지가 거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반지성주의 급의 글이라 이과계열 전공자 입장으로 보았을 때 너무 충격적이었다. 거의 불가지론 수준.


리버럴 페미니즘의 한계를 그야말로 잘 보여준 책이라는 말로 총평을 내리고 싶다. 여성해방에 대한 실천적 지식과 절실함이 녹아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 이론서들이 훨씬 파워풀한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준다면, 리버럴 쪽은 그저 남성에 대한 2등시민으로서의 패배주의적 인식이 익숙한 상태에서 노론 학파들이 예송논쟁하듯 사상의 ‘정의로움’에 취해 ‘성평등’에 대한 지적 허영심으로 탁상공론하듯 현학적이며 때로는 궤변적인 논리로만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어쩐지 집에 있는 몇 권의 페미니즘 책들이 읽히질 않더라.

이 책을 14,000원이나 하는 돈을 주고 정가로 샀다니 진심 돈과 시간이 아까워 울고 싶다. 남는 것도 거의 없겠지만 다음 번에 알라딘 중고서적 갈 때 들고가서 팔아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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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들은 현학적으로 현란하게 사유를 전개하느라 바빠서 대개 큰 틀을 견고히 잡는 데는 오히려 미숙한 점들이 있는데, 기존의 주류 인식론적 경계를 해체하는 점은 강점이라 부분적으로는 좋은 해석틀이 많아서 옮겨 와봤다. 이 부분들만 건져내고 중고서적에 팔려고 한참 타이핑함.


마사 너스바움은 인간의 조건인 취약성fragility을 인정하지 않을 때 혐오감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는 데 가장 위험한 두 가지 도덕 감정이 혐오disgust와 수치심shame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은 원초적 형태로 유년기에 발생하며, 인간의 조건인 필멸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나약함은 불멸성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는 치욕스러운 조건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취약하게 만드는 불안과 불안정의 원천이다. 이렇게 본다면 혐오는 자기 육신의 필멸성, 인간의 몸이 가지는 동물성을 굴욕으로 여기는 것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악취와 부패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육신의 한계가 주는 불쾌와 혐오를 투사할 외부 집단을 끊임없이 찾는다.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이 욕설이다. ‘썩어 문드러질 놈’, ‘끈적거리는 놈’하는 식의 욕설은 취약한 몸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몸은 여성적인 것, 마음은 남성적인 것이라는 이분법 아래, 남성이 혐오하는 모든 것은 여성적인 속성으로 투사된다.

불안과 주체는 나를 구성하는 타자(이물질, 기생물)를 미워하면서 토해낸다. 이런 이물질이 나를 구성하고 그것에 내가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야만 자족적인 ‘나’라는 환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를 구성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타자를 삼키면서도 동시에 토해내야 한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타자를 삼키고 소화시키고 추방한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은 타자를 추방하고 뱉어내는 ‘윤리적 폭력’을 통해 형성된다. 삼킨 것을 토하고 추방하는 데 혐오감은 필수다.

-본문 73-74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되 불평등 계약이다. ‘나’는 동의한 적이 없는 역사적 산물이어서, 우리는 일단 그것을 사회화, 교육, 공부라는 이름으로 전수받는다. (중략) 내가 아는 한, 말은 페미니즘의 시작이자 끝이다. 가부장제patri/archy와 젠더 체계gender system가 동의어는 아니지만, 가장 간명한 공통적 정의는 남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일치하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언어는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지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종, 계급, 지역, 장애 이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언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규정하는 식민주의와 관계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노동practice이 남성의 노동과 다르다는 것, 여성의 삶이 어떻게 말의 근거가 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여성의 목소리가 기존의 언어를 재구성rethink, remap, position, decolonize하는 데 어떤 윤리와 정치가 요구되는가? 당연시되던 인식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논의 구도를 재배치하고, 누가 말하는가보다 누가 듣는가를 고민하고,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 없음을 깨닫고, 인식 과정의 식민성에 직면하는 것. 그 작업은 매우 광범위하다.


-본문 92-93.

인류, 남성man/kind의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들은 스스로 언어를 만들었을까. 물론 그런 언어는 없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외부는 여성이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남성(one)을 제외한 나머지들, 타자다. 여성, 이 두 번째 인간The second sex 는 모든 타자의 원형이 되었다.

-본문 95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여성이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여성이라는 기호는 어떻게 실제 사람이 되는가

여기 두 종류의 ‘장르’가 있다. ‘여자란 무엇인가’류, ‘글쓰기 비법’류. 인류 역사상 웬만한 남자 지식인 치고 이 두 가지 책을 안 쓴 이가 드물다. 이 사례만큼 지식 생산과 성별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증거도 없다. 뮤즈는 성별화된 대상의 정점이다. 대상은 주체에게 재료를 제공하고 사라진다(의문을 품으면 ‘카미유 클로델’이 된다). 그래서 ‘여성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이다.흑인은 무엇인가, 장애인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없다. 여성의 사물화는 가부장제의 역사다.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에게는 명명하고define 명명당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인식은 기본적으로 투사다. 아는 과정에는 자기 의견, 희망, 욕구가 반영된다. 아전인수는 ‘아전인수식 해석’의 문제라기보다 언어의 본질이다. 모든 사물에 관한 정의에는 그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와 원망이 포함되어 있다. 말을 나드는 사람의 경험이 곧 말을 구성한다. 과학도 신도 조물주도 자기 입장이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지식이 백인 남성의 것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시각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협소한 렌즈로 본 세계가 유일한 진리로 군림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본문 102-103

지금 우리가 사회적 약속이라고 믿는 언어는 서구, 백인, 중산층, 남성, 이성애자, 젊은 사람, 비장애인의 언어다. 통치 세력이 ‘관용’을 베풀어서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허락한다 해도 약자가 곧바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에게 말의 자유를 허락하되 영어로 말하라는 식이다. 성별, 인종, 계급, 지식 자원 등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라고. 동시에, 네 주장은 시기상조이며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쓴다고 비난한다.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그들의 시각이 반영된 언어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불쾌해한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못 알아듣는다는 점이다.

-본문 106-107

우리 인간은 젠더, 이성애 제도의 산물이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타자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관계의 결과이며 무엇보다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는 자신을 주체로 만들기 위해 동원된 타자에 대해 알지 못하면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본문 112

서구에서 중세가 지나고 ‘인간’의 개념이 등장하자 여성은 곤란한 존재가 되었다. 인간일 수 없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공사 영역의 분리다. 여성은 인간이되 사적인 존재가 되었다. 혹은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 ‘비서구인’은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근대의 시작이요 전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문제, 성별 제도에 대한 지식은 정치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소한 문제다. 우리 사회에는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 나는 ‘정상인’들의 무지가 차별의 엔진이라고 생각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대응할 수도, 교정을 요구할 수도 없는 고단한 삶이다. 헌데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본문 113-114

린다 맥도웰은 경계를 규정하는 사회적, 공간적 권력관계를 통해 장소가 만들어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와 같은 경계가 경험의 위치나 현장뿐 아니라 누가 어떤 공간에 속하는지, 누가 제외되어도 괜찮은지 등을 정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대학 공간에서 젠더화된 경계가 작동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작업은 공간의 젠더 정치학의 관점에서 중요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여학생 휴게실은 공간 경험이 젠더화 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여학생 휴게실을 마련하는 방침은 개별 남학생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는 정책이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작동하는 젠더 정치학을 고려한 합리적인 정책이다.

공간을 구획하는 경계를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기에, 경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특권을 갖고 있는 이들이 경계를 인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상대새아가 주장하듯이 ‘벤치에서 쉬는 것 말고는 교내에서 휴식할 곳조차 찾기 어려운 남학생’에게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특권이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차별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남학생’은 노출된 장소에서 휴식하는 것과 성폭력 피해 가능성 내지는 피해 경험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젠더 이분법에 따라 남녀로 구분된 학내 기숙사, 샤워실, 화장실 등을 이용하는 일이 불편할 수 있다는 상상 또한 하기 어렵다. 이처럼 ‘여학생’에게 여학생 휴게실은 단순한 쉼터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본문 129-131

해당 교직원이 개념 없는 여성으로 비난받으면서 감정의 문화정치학이 작동하는 장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였던 것과는 달리, 개별 발언이 불쾌감을 발생시키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발언을 한 이들이 개념 없는 남성으로 지탄받지는 않는다. 즉 여성 발화자의 경우에 한해서 발화자의 젠더가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발언의 효과가 젠더화된 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은 남성 동성사회성 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이브 세즈윅은 남성 사이의 사회적 유대와 성적 유대를 연속체로 파악하면서 남성 동성 사회성이 성적 긴장과 사회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근대 유럽에서 사회적인 것과 성적인 것 사이의 연속성을 부정하면서 남성 간 성적 긴장을 제거하고 여성을 매개로 남성 사이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에 성적인 관계가 남성 내부의 위계를 교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성애 혐오가, 여성의 거래를 통해 남성이 지배적 위치를 공유하기 위해 여성 혐오가 요청된다. 즉 특권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남성의 동성사회성이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를 기초로 구성되는 것이다.

한편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로 해결되지 않는 남성 간의 차이는 남성 간 유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히 관리된다. 예컨대 앞서 제시한 키 큰 남성의 발언을 들었을 때, 키 작은 남성은 키 크면 다냐? 돈이 많아야지라면서 상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거나 키 작은 사람이 마시는 공기는 아주 맑습니다라며 상대를 비꼴 수도 있다. 키와 같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원이 불균등하게 나누어진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남성 간 유대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유대를 재확인하는 것이 남성 개인에게 더 큰 이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가 작은 남성들이 우리 학교 키 큰 남성들 수준은 이 정도인가요???’라는 글을 인터넷에 쓸 필요는 없다.

-본문 132-134

남성 피해자론과 역차별 주장이 기존의 권력관계를 가시화하거나 이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남성 간 유대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본문 140

또한 비를 피하다가 잠재적 성범죄자가 되었다는 식의 서사는 개인의 무고함을 앞세워 여학생 휴게실을 들여다본 사건의 중대함을 무화시킨다. 남학생들의 행동은 잠재적이지 않았으며, 성적 폭력은 물리적은 공격과 가시적인 위해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김애령은 타자의 모습을 그리는 많은 표상이 주체의 언어로 쓰인다는 점을 밝히면서, 주체의 언어가 타자를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시키는 한편 타자에게 극단적으로 다른 속성을 부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는 낯선 타자, 괴물, 파괴적인 힘, 강력한 매혹, 신비와 같은 속성들이 함께 주어지면서 여성은 적대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대상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성의 모순적인 속성을 파악하고 표상하는 존재는 주체의 자리에 있는 남성이다.

주체의 세계는 타자로의 모험을 통해 풍요로워질 뿐 깨지지 않으며 주체는 타자를 자기 세계, 자기 체계에 포함함으로써 더 강한 주체가 된다. 이처럼 여성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이나 여성에게 인정받는 일은 남성이 자기 자신을 확증하는 데 필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본문 148-149쪽

남성 징병제로 인한 역차별 주장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성 징병제를 둘러싼 논쟁의 구도는 누구에게나 삶에서 중요한 시기인 20대에 2년 남짓 군대에서 복무했음에도 사회적 인정이나 제도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남성과, 그런 남성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복무 기간 연장을 주장하는 여성으로 설정된다. 남성의 군대 경험을 피해로 서술할 때는 징병제가 역차별의 상징이 되지만, 군대 경험이 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자 거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이해될 때는 문화자본이 되는 맥락 역시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남성 일반이 군대를 아직 가지 않은 미필자와 이미 경험한 군필자로 구획되는 상황은 유지되고, 비필자-비남성-여성의 연쇄고리는 남성 징병제로 인한 불이익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기호로 구성된다.

따라서 많은 경우 군필 남성에게 중요한 것은 군대 경험을 피해와 차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이 아니라 군대 경험에 대한 비필자-비남성-여성의 인정이 된다.

 

정리하면, 남성 피해자론 내지 역차별 주장이 전제하는 성평등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 내지 젠더 다원주의 실현이 아닌 여성을 매개한 남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남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 범주는 규범적 남성 젠더를 승인하는 기호이자 이성애 규범적 경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내부의 타자로 등록되게 된다. 남성 동성사회성이 여성 혐오를 기초로 남성 내부의 차이를 지우고 규범적 남성 범주를 직조하듯이, 남성 피해자론은 여성의 인정에 대한 요청을 통해서 피해가 구성되는 복잡다단한 맥락을 단순화하며 남성의 피해를 자연적인 사실로 만들어낸다. 남성이 피해와 맞서 싸우는 존재이자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가 되면서, 피해의 책임은 여성에게 지워지고 여성에 대한 적대와 혐오는 강화되며 규범적 남성성은 재생산된다.

-본문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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