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출간 즉시 이 책을 구입했을 때 끊임없는 화제를 몰고 오며 100만부가 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신간 코너에서 ‘82년생’ ‘김지영’ 두 단어의 조합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2016년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내다니, 이 작가 좀 천잰데? 제목만 봐도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할 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제목이 내용 그 자체라는 것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책이 출간된 2016년에 1982년생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한국식 나이’로 35세로 30대 중반에 자아실현이냐 가부장제로의 완전한 종속이냐의 두 갈래 사이 불안한 정체성을 걸어놓고 있었고 ‘김지영’은 그 나이대에 태어난 여아 중 가장 흔한 이름이었으니까. 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과업을 이루고 성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 하에서 기초교육과정을 밟았고, 경제성장/세계화/ IMF를 거치는 격변의 시대에 사춘기를 겪어 공동체가 무너지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대학에 진학하여, 개인들간의 무한경쟁시대의 사회 윤리를 내면적으로 체화하기 시작한 세대이다. 직장인이 된 후에는 성차별과 유리천장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다, 결국은 사회문화적 압력에 이게 내 꿈인지 긴가민가하며 결혼하고, 이후 경력이 단절되어 집단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거나, 비혼이라면 독한 김치녀로 보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사랑받기 위해 자기 검열을 내면화하한 세대이다.
어찌 잘 아느냐고? 그렇다. 나는 1982년생이고 거의 출간되자마자 제목을 보고 반가워서 바로 이 책을 샀다. 그러나 2년이 넘게 읽지 않았다. 무슨 내용을 다루고 있을 지 너무 잘 알았다. 보면 우울해질 것 같아서 손이 안 갔다. 2018년을 며칠 남겨둔 상태에서 또 해를 넘기고 못 읽은 책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 묵힌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김지영은 나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가방끈이 길어진 고학력 여성 이어도 직장 생활하며 직장의 꽃 취급받거나 술자리에서 대놓고 접대부 취급 받고, 나보다 훨씬 스펙과 기량이 떨어지는 남자 동기들이 남성 카르텔 안에서 승승장구하는 장면을 보며 상처받고, 결혼 전에는 여남이 평등하다고 믿었는데 현실과의 온도차에 당황해하다, 임신 출산 과정에서 배려받지 못하고 중요한 자리에서 치워졌으며, 약화된 공동체 사회에서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잠시 카페에 갔다가 맘충 소리를 듣는 김지영은 내 시대 여성들의 이야기다.
극도로 현실적이라는 폭발적 공감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나도 비슷한 나이대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너무 부정적인 것 아니냐”라는 사족도 보이는데 이는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기만적인 인식이다. 작가는 르포인지 소설인지 모를 실험적인 형식으로 작품을 진행하며, 주인공인 김지영 씨를 현대 소설의 인물로서 1982년생의 집단적 경험을 체화한 보편적이고 평범한 인물로 그려냈다. 즉 김지영 씨는 문자 그대로 ‘김지영’이라는 한 개인을 그린 것이 아니라 1982년에 태어나 2010년대 후반인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40만 명의 총합적, 보편적인 경험의 상징이라는 것이다(여기서 여성 억압적 서사가 본인의 경험과 얼마나 일치하느냐 아니느냐의 문제는 순전한 개인적인 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82년생 김지영》은 분명히, 개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여성의 집합적 서사이다. 이러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지점은 김지영 씨의 연대기 중간중간에 당혹스럽게도 제4의 벽이 무너지면서 작가가 뜬금없이 튀어나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지는 않는다) 건조하게 기존의 통계 자료를 근거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집합적 서사이므로 인물에 집중한 묘사와 감성적인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여기다 ‘개성적 주인공’이 등장하는 기존의 보편적 현대 소설을 비평하는 잣대를 들이대며 심리 묘사가 부족하네, 문학성이 떨어지네 어쩌네 하는 것은 공염불을 외는 격이다. (개인적으로 몇몇 에피소드는 아주 오래 전 기억을 상기시켜서 괴로울 정도로 세세한 억압의 결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뿌리깊은 성차별이 개인적인 노력과 제도의 개선으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성 억압의 핵심은, 가부장제가 가하는 여성 억압적 문화와 관습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부재한 개개인들의 관행의 답습과, 이를 통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초월적인 강력한 대물림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대개 이러한 여성 억압적 문화 관습에 대한 인지조차 하지 못하니 두말할 것도 없지만, 억압의 대상인 여성들 또한 어렴풋이(또는 적극적으로) 인지는 한다고 해도 문화적 아비투스로서 관행을 답습하며 또다른 억압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김지영 씨의 직장 상사인 김은실 씨는 여성 관리자급 간부로서 사내 여성 직원들의 커리어 지속을 위해 복지를 확대해 나가고 불합리한 직장 문화를 철폐하지만, 여성들 개개인이 가부장제 문화에서 억압받는 것까지 해결해 줄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억압과, 직장을 다니며 커리어를 쌓고 자아 실현을 하되 남성의 보조적인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 실제적인 임금 격차는 1980년대생 여성들이 사회적 메인스트림에서 치워지게 만든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은 대체로 악인 혹은 몰상식한 무뢰한이 결코 아니다. 모두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적당히 평범하며 적당히 예의 바르고 크게 사회적으로 모난 행동을 하지 않는 무난하며 상식적인 인물들이다. 문제는 바로 거기서 발생하는 것이다.
김은영 씨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어머님, 죄송해요,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따뜻하게 며느리를 위로했다.
“괜찮다. 둘째는 아들 낳으면 되지.”
김지영 씨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아가, 미안하다,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따뜻하게 며느리를 위로했다.
“괜찮다. 셋째는 아들 낳으면 되지.”
(중략) 하지만 김은영 씨와 김지영 씨를 받아 준 산부인과의 할머니 의사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몇 번이나 초음파 기계로 아랫배를 훑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애기가, 참, 참, 예쁘네 언니들을 닮아서……”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울다 울다 먹은 것을 다 토해냈고, 할머니는 구역질하는 며느리에게 화장실 문 너머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은영이 때도, 지영이 때도, 입덧이라고는 안 하더니 이번에는 웬 입덧이 이렇게 요란하다니? 쟤들하고는 다른 애가 들어섰는갑다.” (중략)
“만약에, 만약에, 지금 배 속에 있는 애가 또 딸이라면, 은영 아빠는 어쩔 거야?” (중략)
“말이 씨가 된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 어머니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소리 없이, 베개가 흠뻑 젖도록, 밤새 울었다. (중략) 어머니는 혼자 병원에 가서 김지영 씨의 여동생을 지웠다.
-본문 27-29쪽.
학교생활 첫 번째 난관은, 많은 여학생들이 경험한 바 있는 ‘남자 짝꿍의 장난’이었다. 김지영 씨에게는 그저 장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장난보다는 괴롭힘보다 폭력으로 느껴졌고 너무 괴로웠는데 언니와 어머니에게 울면서 하소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언니와 어머니가 문제를 해결해 준 것도 아니었다. 언니는 남자애들이 원래 유치하다며 별수 없으니 그냥 무시하라고 했고, 어머니는 친구가 놀자고 장난치는 걸 가지고 울고불고한다며 오히려 김지영 씨를 혼냈다. (중략)
“근데 지영아, 선생님은 벌써 눈치채고 있었는데 지영이는 모르는 것 같네? 짝꿍이 지영이를 좋아해.”
(중략)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꾸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본문 38-41쪽.
김지영 씨의 할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역경을 돌이키며 ‘며느리를 진심으로 아끼는’ 시어머니이며, 김지영 씨의 어머니 또한 남자 형제들을 뒷바라지 하느라 마치지 못한 학업에 대한 한이 있어서 딸들이 자신과 달리 여성으로서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는 좋은 어머니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선의의’ 압력은 어머니가 여아 낙태를 하는 계기가 되고, 어머니의 ‘선의의’ 압력은 김지영 씨의 언니인 김은영 씨가 ‘PD와 같은 여자에게는 거친 직업’이 아닌 ‘결혼해서도 여자가 하기 좋은 직업인 교사’를 택하게끔 만든다. 김지영 씨의 국민학교 담임 선생님은 반 친구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라는 ‘선의’에서 김지영 씨에게 ‘남자애가 좋아서 너를 괴롭히는 거다’라고 말하여 여학생들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 참고 견디게끔 만든다. 김지영 씨의 아버지나 남동생, 남편 또한 악인이 아니다. 그들은 점잖은 방관자에 가깝다.
“오면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우리 식구들 앞에서 네가 서운한 상황이 생겼을 때는 내가 나서는 게 맞는 거 같다. 너보다는 내가 더 편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반대로 너희 식구들 앞에서는 네가 상황 정리해 주고. 그렇게 하자. 오늘 일은 내가 사과할게. 미안해.”
정대현 씨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김지영 씨도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눈치를 보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잔소리 안 듣는 방법이 있긴 한데……”
“뭔데?”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 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중략)
“내가 많이 도와줄게. 기저귀도 갈고, 분유도 먹이고, 내복도 삶고 그럴게.”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중략)”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본문 134-136쪽.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와,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그럼 너도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본문 138쪽.
어린 시절부터 남녀가 평등하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 새로운 세대는 윗세대와 달리 불평등한 성차별적 결혼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에서 자라온 것이 1980년대생들이다. 정대현 씨는 김지영 씨 아버지의 적극적인 방관보다는 진일보한 면모를 보인다. 결혼 전에 앞으로 잘하겠다는 김지영 씨의 다짐을 받아왔고 나름 노력하는 좋은 남편이지만 그 또한 아내인 김지영 씨의 수난을 막을 수 없었는데, 이는 남성은 억압받는 쪽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의 역경에 굳이 감정 이입을 할 필요가 없는 특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지영 씨는 혼란을 느끼다 결국 기존 가부장제에서 맡겨진 역할들에 답습하게 된다.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다.
80년대생보다는 90년대생 혹은 00년대생 여성들 사이에서 반향이 크다고 들었다. 바로 윗 세대 선배들인 우리들이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른바 ‘비혼/비출산/비섹스/비연애’ 이른바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4B’ 운동이 활발하다고 하다. 여성들의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목소리를 키우는데 역할을 했다는 데에서 평범한 여성의 삶을 다뤘을 뿐인 이 소설은 충분히 문제적이다.
+
사족.
이 소설을 읽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남성분들도 많지만, 대체로 많은 남성들은 (읽지도 않았으면서) 발끈해한다. 내가 뭘 어쨌는데? 한 연예인은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고 밝혔다는 이유로 사이버 집단 린치에 시달리기도 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권력이라는 한 트위터 유저의 명문을 가져와 본다.
밥을 먹으려면 요리를 해야 한다.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 한다. 사랑을 했으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꾸준히 친밀감을 유지하고 서로 타협해가며 귀찮더라도 지리한 과정을 통해 같이 성장해야 한다. 아기를 키우려면 더 많이 해야 한다. 이 모든 걸 여자들만 미친듯이 한다. 그 이득은 남자들이 모두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얻어간다. 제삿상이 차려지고, 가정이 유지가 되고, 부부사이가 유지가 되고, 가족의 화목이 도모되고, 아이가 자란다. 아무것도 안 한 남자들은 그것이 자기가 잘해서, 잘나서 생긴 성과라고 느낀다. (중략) 고부갈등이 발생해도, 아이가 태어나도, 부부사이가 멀어져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내가 뭘 어쨌다고?”라며, 혼자 종종대고 오만 방법을 다 찾는 여자를 비난할 권리를 가진다. (중략) 남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한발 물러서서 냉철하고 이상적이고 객관적인양 판단을 하며, 당장 산재한 문제들 사이에서 해결을 해보려고, 좀 더 나아져보려고 미쳐 날뛰는 사람에게 태도를 문제삼고 훈계를 할 권력도 획득한다. (중략) 자기 원가족들로 고통 당하는 아내를 보며 “너도 너무한다. 어른인데 좀 참아라. 아무튼 여자의 적은 여자라니까”라고 지껄일 수 있는 것도, 아이가 뭔가 맘에 안들때 “참 가정교육 잘 시켰네 니가 그러니까 애가 저러지”라고 지껄일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들이 아무 것도 안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친구 관계 파악도 하지 않고, 아이 친구 부모와 교류도 하지 않는다. (중략) 그런데 그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큰 힘을 가져 여자를 후드려팬다.
출처 트위터 @inselsein
+
2018. 2. 24. 추가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문화적 장벽을 뛰어 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아웃사이더 집단이며 가장 긴 시간 동안 메인스트림에서 배제되어 온 집단은 여성이다. 여성들의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연대의 끈을 진하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