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도에 한창 여성혐오가 화두가 되었을 때 산 책인데, 왠지
읽히지가 않아서 묵혀두었다가 2018년 말미에 읽기 시작하여 2019년 1월 초 처음으로 완독한 책. 결론은, 실망스러운 책이다. 비추천. 그나마 정희진, 시우의
글이 여성혐오에 대한 훌륭한 해석틀을 몇 가지 선물해 주어서 읽을 만 했고, 윤보라의 글도 넷페미사를
개괄하기 나쁘지 않았다. 나머지 글들은 중간 정도.
루인의 글은 거의 재앙급이었다.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해 개진하는 논지가 거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반지성주의 급의 글이라 이과계열 전공자 입장으로 보았을 때 너무 충격적이었다. 거의 불가지론 수준.
리버럴 페미니즘의 한계를 그야말로 잘 보여준 책이라는 말로 총평을 내리고 싶다. 여성해방에 대한 실천적 지식과 절실함이 녹아나는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 이론서들이 훨씬 파워풀한 인식론적 전환을
보여준다면, 리버럴 쪽은 그저 남성에 대한 2등시민으로서의 패배주의적 인식이 익숙한 상태에서 노론 학파들이 예송논쟁하듯 사상의 ‘정의로움’에 취해 ‘성평등’에
대한 지적 허영심으로 탁상공론하듯 현학적이며 때로는 궤변적인 논리로만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어쩐지 집에
있는 몇 권의 페미니즘 책들이 읽히질 않더라.
이 책을 14,000원이나 하는 돈을 주고 정가로
샀다니 진심 돈과 시간이 아까워 울고 싶다. 남는 것도 거의 없겠지만 다음 번에 알라딘 중고서적 갈
때 들고가서 팔아버려야겠다.
+
이런 류의 책들은 현학적으로 현란하게 사유를 전개하느라 바빠서 대개 큰 틀을 견고히 잡는 데는 오히려 미숙한 점들이 있는데, 기존의 주류 인식론적 경계를 해체하는 점은 강점이라 부분적으로는 좋은 해석틀이 많아서 옮겨 와봤다. 이 부분들만 건져내고 중고서적에 팔려고 한참 타이핑함.
마사 너스바움은 인간의 조건인 취약성fragility을
인정하지 않을 때 혐오감이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는 데 가장 위험한
두 가지 도덕 감정이 혐오disgust와 수치심shame이다. 이 두 가지 감정은 원초적 형태로 유년기에 발생하며, 인간의 조건인
필멸성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나약함은 불멸성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자들에게는 치욕스러운 조건이다. 그것은 인간의 삶을 취약하게 만드는 불안과 불안정의 원천이다. 이렇게
본다면 혐오는 자기 육신의 필멸성, 인간의 몸이 가지는 동물성을 굴욕으로 여기는 것에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악취와 부패에 거부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육신의 한계가 주는 불쾌와 혐오를 투사할 외부 집단을 끊임없이 찾는다. 인간의 언어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이 욕설이다. ‘썩어 문드러질
놈’, ‘끈적거리는 놈’하는 식의 욕설은 취약한 몸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몸은 여성적인 것, 마음은 남성적인 것이라는 이분법 아래, 남성이 혐오하는 모든 것은 여성적인 속성으로 투사된다.
불안과 주체는 나를 구성하는 타자(이물질, 기생물)를 미워하면서 토해낸다. 이런
이물질이 나를 구성하고 그것에 내가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야만 자족적인 ‘나’라는 환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를 구성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타자를 삼키면서도 동시에 토해내야 한다.
‘나’는 내가 살기 위해 타자를 삼키고 소화시키고 추방한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은 타자를
추방하고 뱉어내는 ‘윤리적 폭력’을 통해 형성된다. 삼킨 것을 토하고 추방하는 데 혐오감은 필수다.
-본문 73-74쪽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되 불평등 계약이다. ‘나’는
동의한 적이 없는 역사적 산물이어서, 우리는 일단 그것을 사회화, 교육, 공부라는 이름으로 전수받는다. (중략) 내가 아는 한, 말은 페미니즘의 시작이자 끝이다. 가부장제patri/archy와 젠더 체계gender system가 동의어는 아니지만, 가장 간명한 공통적 정의는
남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일치하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의 삶을 드러내는 언어는 없다. 이는 기본적으로 권력과 지식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종, 계급, 지역, 장애 이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언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규정하는 식민주의와 관계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노동practice이 남성의 노동과
다르다는 것, 여성의 삶이 어떻게 말의 근거가 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여성의 목소리가 기존의 언어를 재구성rethink, remap,
position, decolonize하는 데 어떤 윤리와 정치가 요구되는가? 당연시되던
인식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논의 구도를 재배치하고, 누가
말하는가보다 누가 듣는가를 고민하고,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 없음을 깨닫고, 인식 과정의 식민성에 직면하는 것. 그 작업은 매우 광범위하다.
-본문 92-93쪽.
인류, 남성man/kind의
언어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들은 스스로 언어를 만들었을까. 물론
그런 언어는 없다. 인간의 가장 오래된 외부는 여성이다.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남성(one)을 제외한 나머지들, 타자다. 여성, 이 두 번째 인간The
second sex 는 모든 타자의 원형이 되었다.
-본문 95쪽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여성이라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여성이라는 기호는 어떻게 실제 사람이 되는가.
여기 두 종류의 ‘장르’가 있다. ‘여자란 무엇인가’류, ‘글쓰기 비법’류. 인류 역사상 웬만한 남자 지식인 치고 이 두
가지 책을 안 쓴 이가 드물다. 이 사례만큼 지식 생산과 성별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증거도 없다. 뮤즈는 성별화된 대상의 정점이다. 대상은 주체에게 재료를 제공하고
사라진다(의문을 품으면 ‘카미유 클로델’이 된다). 그래서
‘여성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이다.흑인은 무엇인가, 장애인은
무엇인가라는 말은 없다. 여성의 사물화는 가부장제의 역사다.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에게는
명명하고define 명명당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인식은
기본적으로 투사다. 아는 과정에는 자기 의견, 희망, 욕구가 반영된다. 아전인수는 ‘아전인수식 해석’의 문제라기보다 언어의
본질이다. 모든 사물에 관한 정의에는 그 대상에 대한 이해관계와 원망이 포함되어 있다. 말을 나드는 사람의 경험이 곧 말을 구성한다. 과학도 신도 조물주도
자기 입장이 있다. 이제까지 인류의 지식이 백인 남성의 것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시각이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협소한 렌즈로 본 세계가 유일한 진리로 군림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본문 102-103쪽
지금 우리가 사회적 약속이라고 믿는 언어는 서구, 백인, 중산층, 남성, 이성애자, 젊은 사람, 비장애인의 언어다. 통치
세력이 ‘관용’을 베풀어서 약자에게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허락한다 해도 약자가 곧바로 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양’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한국인에게 말의 자유를 허락하되 영어로 말하라는 식이다. 성별, 인종, 계급, 지식 자원 등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라고. 동시에, 네
주장은 시기상조이며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쓴다고 비난한다.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그들의 시각이 반영된 언어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불쾌해한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못 알아듣는다는 점이다.
-본문 106-107쪽
우리 인간은 젠더, 이성애 제도의 산물이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타자를 알아야 한다. 인간의 관계의 결과이며
무엇보다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는 자신을 주체로 만들기
위해 동원된 타자에 대해 알지 못하면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본문 112쪽
서구에서 중세가 지나고 ‘인간’의 개념이 등장하자 여성은 곤란한 존재가 되었다. 인간일 수 없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발명된 것이
공사 영역의 분리다. 여성은 인간이되 사적인 존재가 되었다. 혹은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 ‘비서구인’은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근대의 시작이요 전제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문제, 성별 제도에 대한 지식은
정치의 영역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소한 문제다. 우리
사회에는 장애, 성별, 이성애 제도에 대한 지식이 없다. 나는 ‘정상인’들의 무지가 차별의 엔진이라고 생각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매번 대응할 수도, 교정을 요구할 수도 없는 고단한 삶이다. 헌데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해결하기 어려운 권력은 ‘몰라도 되는 권력’이다.
-본문 113-114쪽
린다 맥도웰은 경계를 규정하는 사회적, 공간적 권력관계를
통해 장소가 만들어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와 같은 경계가 경험의 위치나 현장뿐 아니라 누가 어떤 공간에 속하는지, 누가 제외되어도 괜찮은지 등을 정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대학 공간에서 젠더화된 경계가 작동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작업은 공간의 젠더 정치학의 관점에서 중요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여학생 휴게실은 공간 경험이 젠더화 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여학생 휴게실을 마련하는 방침은 개별 남학생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는 정책이 아니라 공적 공간에서
작동하는 젠더 정치학을 고려한 합리적인 정책이다.
공간을 구획하는 경계를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은 아니기에, 경계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특권을 갖고 있는 이들이 경계를 인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상대새아가 주장하듯이 ‘벤치에서 쉬는 것 말고는 교내에서 휴식할 곳조차 찾기 어려운 남학생’에게 특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특권이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차별이 없는
상태에 가깝다. ‘남학생’은 노출된 장소에서 휴식하는 것과 성폭력 피해 가능성 내지는 피해 경험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젠더 이분법에 따라 남녀로 구분된 학내 기숙사, 샤워실, 화장실 등을 이용하는 일이 불편할 수 있다는 상상 또한 하기 어렵다. 이처럼
‘여학생’에게 여학생 휴게실은 단순한 쉼터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본문 129-131쪽
해당 교직원이 ‘개념 없는 여성’으로 비난받으면서 감정의 문화정치학이 작동하는 장에서 열등한 위치에 놓였던 것과는 달리, 개별 발언이 불쾌감을 발생시키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발언을 한 이들이 ‘개념
없는 남성’으로 지탄받지는 않는다. 즉 여성 발화자의 경우에
한해서 발화자의 젠더가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발언의 효과가 젠더화된 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은 남성 동성사회성 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이브 세즈윅은 남성 사이의 사회적 유대와 성적 유대를 연속체로 파악하면서 남성 동성 사회성이
성적 긴장과 사회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근대 유럽에서 사회적인 것과 성적인 것 사이의 연속성을 부정하면서 남성 간 성적 긴장을 제거하고 여성을 매개로 남성 사이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에 성적인 관계가 남성 내부의 위계를 교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성애 혐오가, 여성의 거래를 통해 남성이 지배적 위치를 공유하기 위해 여성 혐오가 요청된다. 즉 특권적 지위를 재생산하는 남성의 동성사회성이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를 기초로 구성되는 것이다.
한편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로 해결되지 않는 남성 간의 차이는 남성 간 유대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히 관리된다. 예컨대 앞서 제시한 키 큰 남성의 발언을 들었을 때, 키 작은 남성은 ‘키 크면 다냐?
돈이 많아야지’라면서 상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거나 ‘키
작은 사람이 마시는 공기는 아주 맑습니다’라며 상대를 비꼴 수도 있다.
키와 같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원이 불균등하게 나누어진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남성 간 유대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유대를 재확인하는
것이 남성 개인에게 더 큰 이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가 작은 남성들이 ‘우리 학교 키 큰 남성들 수준은 이 정도인가요???’라는 글을 인터넷에
쓸 필요는 없다.
-본문 132-134쪽
남성 피해자론과 역차별 주장이 기존의 권력관계를 가시화하거나 이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남성 간 유대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본문 140쪽
또한 ‘비를 피하다가 잠재적 성범죄자가 되었다’는 식의 서사는 개인의 무고함을 앞세워 여학생 휴게실을 들여다본 사건의 중대함을 무화시킨다. 남학생들의 행동은 잠재적이지 않았으며, 성적 폭력은 물리적은 공격과
가시적인 위해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김애령은 타자의 모습을 그리는 많은 표상이 주체의 언어로 쓰인다는 점을 밝히면서, 주체의 언어가 타자를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시키는 한편 타자에게 극단적으로 다른 속성을 부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는 낯선 타자, 괴물, 파괴적인 힘, 강력한 매혹, 신비와 같은 속성들이 함께 주어지면서 여성은 적대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대상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성의 모순적인 속성을 파악하고 표상하는 존재는 주체의 자리에 있는 남성이다.
주체의 세계는 타자로의 모험을 통해 풍요로워질 뿐 깨지지 않으며 주체는 타자를 자기 세계, 자기 체계에 포함함으로써 더 강한 주체가 된다. 이처럼 여성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이나 여성에게 인정받는 일은 남성이 자기 자신을 확증하는 데 필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본문 148-149쪽
남성 징병제로 인한 역차별 주장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남성 징병제를 둘러싼 논쟁의 구도는 누구에게나 삶에서 중요한 시기인 20대에
2년 남짓 군대에서 복무했음에도 사회적 인정이나 제도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남성과, 그런 남성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복무 기간 연장을 주장하는 여성으로 설정된다. 남성의 군대 경험을 피해로 서술할 때는 징병제가 역차별의 상징이 되지만, 군대
경험이 남자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자 거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이해될 때는 문화자본이 되는 맥락 역시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남성 일반이 군대를 아직 가지 않은 미필자와 이미 경험한 군필자로 구획되는 상황은 유지되고, 비필자-비남성-여성의
연쇄고리는 남성 징병제로 인한 불이익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기호로 구성된다.
따라서 많은 경우 군필 남성에게 중요한 것은 군대 경험을 피해와 차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일이
아니라 군대 경험에 대한 비필자-비남성-여성의 인정이 된다.
정리하면, 남성 피해자론 내지 역차별 주장이 전제하는
성평등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 내지 젠더 다원주의 실현이 아닌 여성을 매개한 남성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남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 범주는 규범적 남성 젠더를 승인하는 기호이자 이성애 규범적 경제를 작동시키기
위한 내부의 타자로 등록되게 된다. 남성 동성사회성이 여성 혐오를 기초로 남성 내부의 차이를 지우고
규범적 남성 범주를 직조하듯이, 남성 피해자론은 여성의 인정에 대한 요청을 통해서 피해가 구성되는 복잡다단한
맥락을 단순화하며 남성의 피해를 자연적인 사실로 만들어낸다. 남성이 피해와 맞서 싸우는 존재이자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가 되면서, 피해의 책임은 여성에게 지워지고 여성에 대한
적대와 혐오는 강화되며 규범적 남성성은 재생산된다.
-본문 1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