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부커상 수상작. 원서를 먼저 읽을까 고민하던 중 따끈한 번역본이 나와 사흘 밤에 걸쳐 곱씹으며 아쉬워하며 읽었다. 작품을 집어들면서 예상한, 미문으로 구성되었으리라는 나의 편견을 깨고, 외려 건조하게 우주정거장의 생활을 리얼리즘으로 구현하는 한편, 고배율 해상도의 현미경에서 망원경까지 가능한 올인원 (사기캐) 줌렌즈처럼, 우주적 시공간에서 미시적-거시적 관점을 순식간에 넘나들며 인간사를 관조하는 성찰에 탄복하게 되는, 장대한 우주 산문시와 같은 작품. 밑줄 그을 대목이 너무 많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두번 정도 더 읽어야지.





Rotating about the earth in their spacecraft they are so together, and so alone, that even their thoughts, their internal mythologies, at times convene. Sometimes they dream the same dreams -- of fractals and blue spheres and familiar faces engulfed in dark, and of the bright energetic black of space that slams their senses. Raw space is a panther, feral and primal; they dream it stalking through their quarters. - P1

드넓게 펼쳐진 겨울의 황량함, 진줏빛 구름, 그리고 남극권에서 떠내려가는 빙하의 낯익은 빛, 오른쪽에서는 플레이아데스성단이 대담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가끔은 개별적인 것이 보고 싶어진다. 피라미드나 뉴질랜드 피오르, 아니면 완전히 추상적이어서 인간 눈으로 헤아릴 수 없는 밝은 주황빛 사막 모래 언덕 같은 것들. 그런 이미지는 페트리 접시에 올라간 심장 세포처럼 손쉽게 확대해 볼 수도 있다. 가끔은 연극과 오페라가, 지구의 대기권과 대기광이 보고 싶다.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 그립기도 하다. 말레이시아 연안의 어선들이 별처럼 검은 바닷물에 점점이 박혀 반짝이는 모습 같은 것들. 그러나 지금 로만은 다들 일종의 육감으로 알고 있는, 자신은 반신반의했던 것의 존재를 목격하기 시작한다. 녹색과 붉은색의 오로라가 대기권 내부를 뱀처럼 감싸 안고 무언가를 가둬 놓은 듯 구부러지고 휘어지며 아슬아슬한 장관을 이룬다. - P72

넬은 가끔 숀에게 묻고 싶다. 우주비행사이면서 어떻게 신을, 그것도 천지를 창조한 신을 믿을 수 있느냐고. 하지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고 있다. 숀은 넬에게 우주비행사이면서 어떻게 신을 믿지 않을 수 있냐고 되물을 것이다. 결론은 나지 않는다. 넬은 끝없는 어둠이 맹렬하게 깔린 양쪽 창문을 가리킨다. 태양계들과 은하계들이 마구 흩어진 세계. 시공간의 왜곡이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시야가 깊고 다차원적인 세계. 이것 봐, 어떤 아름다운 힘이 아무런 의도 없이 내던져 놓은 게 아니면 이런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데?
숀도 끝없는 어둠이 맹렬하게 깔린 양쪽 창문을 가리킨다. 태양계들과 은하계들이 마구 흩어진 바로 그 세계, 시공간이 왜곡된 바로 그 깊고 다차원적인 시야를.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힘이 충만한 의도를 가지고 내던진 게 아니면 이런 게 만들어질까? - P80

순간 숀은 생각한다. 진공 우주 속 깡통에서 나 지금 뭐하는 거지? 깡통에 든 깡통 인간. 4인치 두께의 티타늄 밖에 죽음이 있다. 그냥 죽음도 아니다. 존재의 말살이다.
왜 이러고 있지? 절대 번영할 수 없는 세상에서 바득 바득 살아 보려고 하는 이유는 대체? 완벽한 지구가 저기 있는데 굳이 우주가 원치 않는 곳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갈망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배은망덕함일까. 숀은 절대 알 길이 없다. 이 기묘하고 뜨거운 열망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까 아니면 바보로 만들까. 딱히 어느 쪽에도 못 미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중략) 기운 차려, 아내는 이렇게 말했었다. 저 위에서 소멸 하더라도 당신은 수백만 개 파편이 되어서 지구 궤도 를 돌게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좋지 않아? 그리고 비밀을 모의하듯 웃는다. 습관처럼 그의 귓불을 어루만지며. - P88

지구를 떠나기 전 10대 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진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럼, 아름답지, 그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정말 아름답고말고. 그러면 원자폭탄은요, 기업 로고 모양으로 빛나게 우주에 쏘아 올리겠다는 위성은요, 프린팅 기술로 달의 먼지 표면에 세우겠다는 건물은요? 꼭 달에 건물을 세워야 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지금 이대로의 달이 좋은데. 그래, 그래 그는 대답했다. 아빠도 그래, 하지만 그 모든 게 아름다워. 왜냐면 아름다움은 선함에서 오지 않거든. 너는 진보가 선하냐고 물은 게 아니였지. 인간도 선해서 아름다운 게 아니란다. 살아 있으니 아름다운 거야. 어린애처럼. 살아 숨 쉬며 세상을 궁금해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에. 선한지는 상관없어. 눈에 빛이 감돌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야. 가끔은 파괴적이고 상처를 입히고 또 가끔은 이기적이지만, 살아 있기에 아름다워. 살아 숨 쉰다는 점에서 진보도 그렇단다. - P92

하지만 그가 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그리고 돌아가게 되면 해 줄 말은 따로 있다. 진보는 어떠한 실체가 아니라 느낌이라는 것. 배에서 꿈틀대기 시작해 가슴으로 북받쳐 올라오는 모험과 팽창의 느낌. 피에트로는 이곳에서 크고 작은 순간마다 거의 끊임없이 그걸 느낀다. 세상의 심오한 아름다움을, 빽뺵한 별들이 무성한 이곳까지 그를 쏘아 올린 믿기 힘든 은총을, 그는 배와 가슴으로 느낀다. 제어 패널과 환기구를 청소할 떄, 따로 점심을 먹고 함께 모여 저녁을 먹을 때, 지구로 발사되어 대기권에서 연소되며 사라질 쓰레기를 화물 모듈에 적재할 때, 분광계가 지구를 측정할 떄, 낮이 밤이 되고 또 빠르게 낮이 될 떄, 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떄, 저 아래 총천연색 대륙이 지나갈 때, - P96

공중에 떠다니는 치약 덩어리를 잡아 칫솔에 얹을 때, 머리를 빗고 일과를 다 마친 뒤 피곤한 몸을 끌고 끈이 풀린 침낭에 쏙 들어가, 이곳에서는 똑바른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떤 반발도 없이 머리가 받아들인 사실로 인해 똑바로도 거꾸로도 아닌 자세로 떠서, 밖에서 태양이 떠올랐다가 졌다가 하는 동안 인위적으로 정해진 밤에 지상 250마일 우주에서 잠을 청할 떄, 그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피에트로는 딸에게도 이걸 설명해주고 싶다. - P97

그러다 엇갈리고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훈련 때 불일치하는 감각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었다. 이음매 없는 지구를 계속 보다 보면 벌어지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들었다. 충만한 지구를, 땅과 바다 사이 말고는 어떤 경계도 없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따. 국가들은 지워지고, 쪼개질 수 없으며 전쟁은커녕 그 어떤 분리도 모르는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러면 한꺼번에 두 방향으로 당겨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기쁨과 불안, 황홀과 우울, 애정과 분노, 희망과 절망을 느낀다. 전쟁이 끊이질 않고 사람들이 국경을 지키느라 죽이고 죽어 나간다는 것을 당신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P127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에게 욕망이 싹튼다. 이토록 거대하면서 작디작은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욕망, 아니 (열정이 추동하는) 요구. 이렇게나 기적 같으면서 별나게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대안이 마땅치 않으므로 지구는 의심할 여지없는 집이다. 무한한 공간, 충격적일 만큼 환히 빛나며 우주에 떠 있는 보석. 인간들이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순 없는 걸까? 지구와도 잘 지내면 안 되나? 이건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 아니라 다급한 요구다. 우리 삶이 달린 유일한 세상을 탄압하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낭비하는 짓을 멈출 순 없을까? (중략) 이들은 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들이다. 그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다. - P128

안톤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눈물 네 방울이 동동 떠다닌다. 안톤과 치에가 손바닥을 내밀어 눈물방울을 잡는다. 여기서는 액체가 돌아다니게 둬서는 안 된다. 그 점에 있어서는 모두가 철두철미하다. - P176

사랑해, 보고 싶어. 숀은 편지를 쓴다.
<시녀들>엽서 뒷장에는 아내의 손 글씨가 쓰여 있다. 왼손으로 꽉꽉 눌러 뒤로 비뚜름하게 기운 글씨들은 각졌고 씩씩하다. 이것이 그립다. 하지만 오늘 당장 집에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숀은 절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몇 달 후 돌아갈 날이 오더라도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고소 공포와 향수병을 일으키는 우주라는 약에 그는 중독되었다. 이곳에 있기 싫지만 동시에 늘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 갈망으로 긁힌 마음은 움푹 파였지만 텅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만큼 많이 채울 수 있다. - P180

여명의 파동이 밤을 뒤편으로 몰아내고, 구름은(소멸한 태풍의 잔해는) 보라색과 복숭아 색으로 물든 사나운 봉우리다.
갑작스러운 햇빛이 심벌즈 소리처럼 챙챙 요란하게 퍼진다. 몇 분 후 이들은 바다에서 몰디브, 스리랑카, 인도 끝자락이 아침 빛에 무르익는 곳으로 들어선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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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가 단지 문지문학상의 전초전 성격을 지니는 계간지인 것일 뿐을 잘 모르는 상황이라면, 싱그러운 빛깔의 청포도 일러스트 표지와 함께 ‘소설 보다 여름’ 이라는 기획으로 서점에 깔려있는 것을 보고 필시 여름을 테마로 한 신인들의 소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는다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여름, 이 계절의 소설’이라는 기획으로서의 이 시리즈의 콘셉트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빛 좋은 개살구’라고나 할까. 


무덤을 보살피다. 

여름 테마 소설인줄 알고 읽다가 한겨울에 선산에서 양식장을 운영하는 수상쩍은 인물과 대립하는 이야기가 나와서 일단 당황.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가족간에서 어떤 대립 구조를 만들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썩 개운치 않고 많이 아쉬웠던 작품. ‘가엾은 여자’니까 1번을 찍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노인 세대’를 대놓고 단순화하여 희화화하는 설익은 도식화가 썩 개운치 않았는데, 이어진 작가와의 인터뷰를 보니 역시나이다. 12/3 계엄의 의의가 우리 민주주의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많겠고 역사적 의의도 크겠지만, 작가의 교조적 스탠스가 은근히 불편하다.


방랑, 파도. 

유일하게 만족스럽게 읽었던 작품. 그리고 이서아라는 작가의 발굴. ‘여름, 이 계절의 소설’이라는 슬로건과도 들어 맞으며 등장인물들과 그들간의 관계성, 삶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소설이었고, 마술적 리얼리즘이 돋보이는 장면들도 설득력이 있었으며, 일상과 삶 속에서의 날카로운 관찰력에서 나온 표현과 묘사들도 적절하다. 


“어떤 방랑객들은 바닷가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일을 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들에게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사랑 가득한 따뜻한 둥지가 있거나, 이 세상의 원동력이나 다름없는 앳된 꿈이 있거나, 그 어느 순간에도 작별을 예고하지 않는 쓸쓸한 심장이 있는 것 같았다.” 68쪽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때.

작품 내 특이한 공간과 특이한 집단과의 대립적인 묘사와 긴장감에 재미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기괴하다. 정말 기괴하다. 상징으로 가득찬 작품인데 뭔가가 작위적인 느낌에 급피로해져서 분석조차 않으련다. 나는 좀더 직관적인 작품을 선호한다.


총평: 빛 좋은 개살구 / 이서아의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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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이지 않는 법 How not to kill yourself 














책이나 저자에 대한 정보도 무엇도 없는 채로 대형 서점 신간 코너 매대에 쌓여 있는 제목을 보고 몇 페이지 후루룩 넘겨본 후 바로 집어왔다. 흡입력이 대단하여 이틀만에 다 읽었다. 강추 ⭐️⭐️⭐️⭐️⭐️


저자는 철학을 전공하였으며 니체 및 키에르케고르를 영어로 번역해 온 저명한 교수이나, 열 번이 넘는 자살 시도 생존자이자 오래된 우울증 환자라는 이면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용감하게도 자신의 투병과 과거의 자살 시도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울증과 자살 사고 및 시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풍부한 예시, 심리학적 및 철학적 성찰, 문헌적 고찰, 건설적인 해결책까지 성실하게 풀어놓는다. 


느낀 점이 많으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얻은 깨달음 몇 가지만 적는다.



#자살 사고도 일종의 알코올 중독처럼 중독이다. 


#실존적 사고, 즉 인간은 언제라도 죽을 수 있으며 언젠가 죽는다, 이 사고가 뚜렷할 수록 자살 사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시지프 신화” 참조) 그러나 제4장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자살하지 않았다. "죽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문제는 모든 중요한 윤리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속한다"고 독일의 실존주의자인 파울 루트비히 란츠베르크가 분석한 바 있으며, 이는 일차 욕구인 '자살을 원하는 것'과 이차 욕구인 '자살하고 싶은 상태를 원하는 것'간의 차이를 구분해서 이해하여야 알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실존적으로 이차 욕구를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긍정하는 과정에서 자유의 중요성을 도출하여 도리어 삶을 긍정하게 되는 역설을 강조하는 것 같다. 또한 동반 자살의 강압적 성격을 분석하며, 이에 대해 강요당하는 자살은 자유의 포기라는 점 또한 지적한다.


#자기 통제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일 수록 작은 실패에 낙담하고 자살 사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자살 성공자(?)이냐 생존자냐는 한 끝 차이이다. 많은 이들이 죽기 직전 순간 후회하며 살아 남으려 애쓰다 실수로 죽기도 한다.

: 특히 이 성찰은 2장 "충동과 주저가 공존한다"에서 잘 풀어내고 있다. 자살 생존자들은 이따금 결단력이 부족했다는 몹쓸 조롱을 받기도 하는데, 통념과 달리 자살 시도자들 모두에게는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삶에 대한 욕구인 에로스와 죽음에 대한 욕구 타나토스의 충돌로 인한 긴장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삶이 이어지는 것이 그러한 긴장의 연속이며 죽음이 열반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입증하기 위함이 자살 시도인 것인데 이에 대한 주저 또한 공존한다는 것이다. <자살의 연구>의 저자이기도 한 알 앨버래즈는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 바 있으며, 본인이 자살을 시도한 사실 자체를 기억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뇌의 복잡하고 기묘한 성질과, 자기 자신의 신념/동기를 근본적으로 알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공자들만이 결단력을 가지고 자살한다는 통념은 매우 그릇된 것인지도 모른다.


#long-term goal 보다는 short-term goal을 세우고 조금씩 survive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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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면, 그건 무엇보다 우선 제법 뚜렷하고 그럴 법한 기쁨의 파편들을 모아놓고 싶어서라고,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서라고. 이 기쁨이,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별처럼 폭발해 그 별가루들을 우리 안에 퍼트렸을 것만 같다. 시선 속에서 빛나는 약간의 별가루들, 우릴 뒤흔들어놓고, 홀리고, 기어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분명 이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섬광을, 이 파편화된 반사광을 자연 속에서 불시에 포착하는 것이 더 놀라운 것일지 모른다. 적어도, 이 반사광들이 내겐 결코 빈약하다 할수 없는 수많은 몽상들의 기원이니까."



퇴근길에 있어 거의 매일 지나치는 대형 서점에서 집어왔다. 구매 당시 출간일이 이틀 밖에 지나지 않은 신간이었다. 

감각이 뚝뚝 떨어져 언어가 된 건지 태초에 언어와 관념부터 존재하여 (그럴 리가 없잖아) 감각화가 된 건지 도무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집요하게 물성을 탐닉하고 직조해낸 황홀한 감각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아름답다’는 ‘닳고닳은’ 형용사를 쓰기도 죄스러운 자연을 찬미하며. 문학, 특히 운문을 읽고 느끼고 감상한다는 즐거움과 희열을 느끼고 싶다면 소장해야 할 작품.


#초록수첩 #필리프자코테 #초록수첩_필리프자코테 #난다출판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참고로 아래 밑줄긋기에 첨부한 문장들에 관하여 사족을 붙인다.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미문의 향연이 펼쳐져 밑줄을 긋자면 끝이 없는데 더 인상깊은 문장들도 많으나 결정장애로 인하여 이하는 랜덤으로 집어온 문장들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일 내가 아직도 글을 쓰고 있다면, 그건 무엇보다 우선 제법 뚜렷하고 그럴 법한 기쁨의 파편들을 모아놓고 싶어서라고, 아니 그럴 수밖에 없어서라고. 이 기쁨이, 아주 오래전 어느 날, 별처럼 폭발해 그 별가루들을 우리 안에 퍼트렸을 것만 같다. 시선 속에서 빛나는 약간의 별가루들, 우릴 뒤흔들어놓고, 홀리고, 기어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분명 이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섬광을, 이 파편화된 반사광을 자연 속에서 불시에 포착하는 것이 더 놀라운 것일지 모른다. 적어도, 이 반사광들이 내겐 결코 빈약하다 할수 없는 수많은 몽상들의 기원이니까. - P11

이 열매들은 모든 것을 품어 공중에 유예하고 있었고, 열매 자체도 초록빛 날개 품속 알처럼 잎사귀 은신처에 멈춘 채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잎사귀들은 곧 검어질 것이다. 저 아래 하늘보다 훨씬 더 검어질 것이다. 하늘 아래 잎사귀들은 겨우 잠들었나 싶은데, 자면서도 가볍게 몸을 떤다…….

이 열매들을 바로 따러 가는 게, 의식을 치르듯 이런 말의 성찬을 늘어놓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나도 이 열매를 딸 줄 안다. 나도 밝은 대낮에 그들의 터지는 빛, 건강한 둥근 뺨이며, 때론 시고 때론 수분 많은 그 맛을, 그 진홍빛을 사랑한다. 그것은 그저 또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낮의 열기 속에, 태양은 가득한데, 다른 과일을 깨물고 싶은 욕망이 득달같이 이는 가운데, 천사들이 아니라 천사보다 훨씬 나은 것들이 여름 초 눈부신 하늘을 향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그런 이야기. - P18

오늘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별들을 후려친다.
별들 또한
더 탐욕스럽게 불타오르는 것 같다. - P60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권한이 이젠 우리에게 없어 보인다. 사실 이 단어는 닳고 닳았다. 물론, 나도 아름다움이라는 게 뭔지 잘 안다. 그렇긴 해도, 생각을 해보면 나무들에 대한 이런 판단은 이상하다. 나로선, 그러니까 정말이지 세상에 대해 별반 아는 게 없는 나로선 ‘가장 아름다운 것’ 이 본능적으로 느껴지면, 그게 바로 세계의 비밀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기를 거쳐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전언을 가장 충실히 번역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P31

밤 내내, 지평선 전체에, 아주 드문 일이지만, 천둥이 굴러간다. 저 먼 동방 오케스트라의 집요하고 긴 타악기 소리처럼.
아니면 다시 움직여 맞춰야 할 해골들 소리처럼. - P56

시간이라는 담쟁이덩굴이 질식시켜
주름지고, 손상된 나무 몸통,
장미 한 송이가 살짝 건드려만 준다면, 다시 푸르러질텐데.





폐허라기보단 강물이라고 말해.
아니, 모든 폐허가 실은 이 강물 같은 폐허.

자리에 없는 목동들이 해야 할 것.

구름들이 잘못 조언해 달아나고 있는
암사슴들을 붙잡아둘 것.
강물이 땋아놓은 머리를 풀어놓을 것.
협곡에 난 저 희귀한 풀들을 아껴둘 것.
산속 나무들 하나하나가 리라처럼 몸을 꼬고 있으니
돌들 상아를 울려서라도 연주할 것.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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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개정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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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작가 #여수의사랑 #어둠의사육제 #붉은닻


글쓴날 1월 30일, 2025년


한강 작가의 초기 단편집 <여수의 사랑> 완독. 사실 제일 마지막 단편이자 작가의 등단작인 “붉은 닻”만 남겨놓고 작년에 거의 다 읽었긴 하지만. 


분명 문학적으로는 수작임에 틀림없으며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부터 좋아했던 작가의 못 읽어본 작품이라 기대했음에도 개인적 평점은 박하게 주고 싶다. 생의 원초적 고단함과 시대적 우울, 존재론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적 우울 앞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 실존과 같은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시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불행 포르노처럼 가차없이 난도질하는 과정은 정당한가, 아무리 그들이 허구적 인물이라도. 


대개 빈민층이거나, 사회 구조적으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한, 가장 약자이자 세파에 내동댕이쳐진 등장인물들의 삶에, 감히, 발도 들여보지 못했을 엘리트인 20대 초반의 젊고 명석한 작가가, 소외 계층의 삶을 어루만진다기엔 잔인하게 난도질 시켜놓는 과정이, 과연 윤리적인가, 라는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함이다. 이 근원적 폭력에 개인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꾸역꾸역 살아감을 감내하는 가운데, 누구도 가해자는 없다. 작가는 시스템마저 비판하지 않는다. “어둠의 사육제”에서 불청객 조카에게 서울 도심 아파트 한채를 지닌 부유층이지만 선심쓰듯 베란다를 거주 공간으로 내어놓는 이모조차도 나름의 변론의 여지가 있고 선량하게 그려진다. 반복하지만 이는 실존적 고단함이자 폭력적 실존이기에. 


다만 이는 물론 숙명론과는 다르다. 초기 작품집인 <여수의 사랑> 과 달리 인식론적 폭력과 그 구조화가 더욱 빛을 발하며 직조되어 능란하게 쓰인 <채식주의자> 연작은 분명 좋아하는 작품이었지만, 당시 읽으면서 뭔가 극한까지 망가져가는 영혜의 이야기를 보면서 들던 알듯 모를듯한 불쾌감의 근원을 더욱 잘 확인할 수 있던 작품집이었다. 빛나는 주제의식 속 가차없이 '사고 실험'에 난도질당하는 허구적 개인들의 불행 포르노 전시이다. 작품 말미에 이르러서는 비슷한 구조의 반복에 피로감마저 느낄 정도. 사실 나도 한때 비슷한 나이에 소설 지망생으로서 비슷한 만행(?)을 허구적 인물들에게 저질렀던 과거에서 비롯한 자기 혐오가 투영된 리뷰일지도 모르겠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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