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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테 콜비츠
캐테 콜비츠 지음, 전옥례 옮김 / 운디네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캐테 콜비츠, 그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 그렇지만 백지에서의 시작은 언제나 나에게 묘한 흥분과 기대를 쥐어준다. 겉 표지의 감촉부터 예사롭지가 않았다. 손에 검은 가루가 진하게 묻어날 듯한 까칠함을 거칠게 그어진 선들이 마구 뿜어내고, 하늘을 향해 꽂은 팔은 급진적이고, 단호하고 준엄한 목소리를 낸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비장함이 책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하다. 이 책의 첫 느낌은 이랬다.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이 많이 있다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저 평범한 딸, 아내, 어머니의 모습만 떠오른다. 책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캐테 콜비츠에 대한 왜곡된 또는 편향된 시선에 대한 항변을 확실히 하는 것 같다. 더 나아가 마치 그것을 강요하는 듯한 테마별 묶음은 일기의 색깔마저 묻어 버렸다. 작위적이다. 일기라는 소재를 통하여 한 개인을 드러내려면 일기라는 형식에 충실해야 했다. 가공은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본래의 의도를 다시 빗겨나가게 만들고, 독자의 가치 판단과 의식의 흐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게다가 그녀의 작품에 대한 난해하고 추상적이고 전문가적인 해석이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을 해버리니, 한참을 읽다 보면 글이 그림을 덮어버리는 사태를 맞이한다. 내가 보는 눈은 다른데, 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그림’일지도 모르나, 타인의 시선은 감상을 하는 나에겐 잡음이다. 넉넉히 볼 자유조차 없는 구성, 그림이 글의 장식이며 엑세서리로 전락해 버리는 이 책의 초반은 ‘아니다’ 싶었다.
아무 해석이 없는 작품들의 나열, 너무나 친절한 해석으로 짜증을 불러오는 부분, 그 뒤에 나오는 캐테 콜비츠의 일기. 이렇게 이 책의 마지막을 덮고 전체를 보니 편집이 의외로 재미가 있다. 작품, 전문적인 해석, 그리고 그녀의 삶을 엿보고 난 뒤에 다시 앞장의 작품들을 보게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각 작품에서 새롭게 느껴지는 감성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바로 이 책의 묘미이고, 읽기 포인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이 그녀의 혁명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시선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 책의 서문이 밝히는 맥락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진솔한 개인의 역사가 녹아 있는 일기는 정말로 적절한 소재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그것을 ‘너무나 친절하게 정리’를 해 놓지 않았던가.
일기에서 나타나는 주된 테마는 죽음과 번뇌이다. 1,2차 세계대전을 겪는 시점에서 어쩌면 죽음과 인간에 대한 고통은 가장 흔하면서 자연스러운 소재이며 삶 자체였을 것이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많은 이들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으니, 일기 보다는 죽음의 기록에 가깝다. 특히 아들의 죽음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늘이었다. ‘죽은 아이의 곁을 지키는 어머니’,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여자’라는 작품을 보면은 아이는 편안히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머니가 오히려 시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식을 상실한 고통은 죽음보다 더 죽음에 가깝다. 게다가 그녀의 일기는 그녀 자신의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죽음에 대한 집착, 민중의 아픔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거친 죽음의 그림자는 치열한 삶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가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언제나 생의 빛줄기와 맞닿아 있지 않던가. 민중의 고통이 오히려 삶의 의지를 더욱 더 고양시키는 것처럼. 소멸과 탄생, 그림자와 빛, 추와 미, 그것의 경계에서 예술가는 그렇게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캐테 콜비츠가 자화상이 많은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기,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벗어나기, 그렇게 타인을 보듯 자신을 보듯 인간을 보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에는 판화 특유의 거칠고, 무거운 분위기 뿐만 아니라, 인류애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타인의 고통은 타인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관 뚜껑을 닫듯이 덮은 이 책의 검은 겉 표지에는 아직도 그녀가 하늘을 향해 꼿꼿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No War.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부시는 지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