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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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니 낯이 익은 멋쟁이 아저씨가 날 빤히 보고 있다. 의 움직임, 의 생각, 의 인생을 언제나 주시하고 있던 저편의 ‘’는 세월의 주름을 하나씩 새기며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거울 속의 ‘’는 현재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존재의 증인이 아닌가. 시간의 화살을 묵묵히 증언하는 ‘’에게 말을 걸어 본다.

"기계적인 일상을 숨기기 위해 알코올을 흡수하고, 자본의 목마름이 나의 의지를 간섭할 때마다 유년의 감각을 하나씩 떨궈내더니 도대체 남은 게 뭐더냐?"

’가 대답하길,
"유년의 추억 속에는 놀이와 처벌의 역사가 대부분이다. 맞은 기억은 아픔으로. 비난의 기억은 상처로. 부끄러움은 나약함으로 부활할 테니 버리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다시 떠올리는 것은 이중 처벌이다.
보송보송한 과거, 세상의 시름이 비켜가던 그 시절...'
‘친구야 놀자’라는 암호로 그들을 호출하여 동네 여기 저기를 배회하다가 딱지, 구슬을 발견하면 열정과 도전 정신으로 ‘쇼부’를 보기도 하고, 놀이터에 가서 운동에너지와 위치에너지를 적절히 음미도 하고, 흙집을 두꺼비에게 분양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해는 저물던 그 때의 기억들은 현재의 삶에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니 이것 또한 무의미 하지 않는가. 세속의 굴레 속에서는 오직 현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미래를 결정 짓고 있음을 명심하라."

거울 속의 ‘’는 그렇게 삶에 적응해 왔다. 이 책은 ‘’의 목소리는 이미 노쇠하여 생명력이 없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 때는 ‘경험’이 ‘재미’였고, ‘시도’가 ‘흥분’을 불러왔다. 내 몸의 감각적인 반응을 넘어선 다른 차원의 문은 원하면 언제든지 열리고 나를 받아들였다. 세상에 규칙이란 없다. 나의 방식, 나의 시선은 창조 자체가 되었다.
프뢰벨은 "놀이는 어린이의 내적 세계를 스스로 표현하는 것이며, 아동기의 가장 순수한 정신적 산물이고, 인간생활 전체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놀이는 기쁨과 자유와 만족, 자기 내외(自己內外)의 편안함과 세계와의 화합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과 놀이의 실루엣은 너무나 흡사한 것이고, 이 책은 그것의 누드를 이 방향 저 방향으로 탐미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상상 속에서는 무의미하다. 기술과 문명은 이미 진화했고, 그것을 답보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될 수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무한 복제의 시대는 복제된 사고를 거부하고, 변형, 기형의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놀아라, 놀면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책의 7개의 단락은 특별한 연계성을 띄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도 끈끈한 유기성을 보이는 데 그것은 2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인식의 전환(시선, 빛, 공간, 시간, 의미, 왜곡, 숨김, 사라짐 등)을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인식의 전환은 형식, 의미, 전통, 규칙의 해체에서부터 시작한다. 공간에 대한 반전, 시간에 대한 역전, 왜곡된 형상, 빛의 반사와 굴절, 존재와 부재의 쉼 없는 교차는 극과 극을 대면하게 하여, 그것의 융합과 변이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진중권이 썼다는 점이다. 진중권은 사실 글의 구조에서 미적인 면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미장센을 괜히 두지는 않는다. 미술로 따지자면 설치 미술쯤이 아닐까.
무지개 빛으로 나뉜 각 단락은 정신분석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선형, 비선형의 교차를 통해 역동성을 강조하는 빨강, 왜곡과 역상의 광기를 보이는 노랑, 논리적 체계성과 감성의 날카로움 겸비한 수수께끼의 녹색, 신화적 상상과 예술적 미를 상징하는 보라 등 그 상징성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또한 '오즈의 마법사Over the Rainbow'가 연상된다면, 그리고 무지개의 건너편 땅 속에 난쟁이의 보물이 있다는 상상이 떠오른다면, 그래서 그것이 인간의 창조성을 의미한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일단은 방대한 지식의 배치와 구도는 읽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장엄함이 있다.

이 책의 유별난 재미는 책이 장난감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만화경마냥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단순히 책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책은 놀이의 장이 되어 준다.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이 yellow의 아나몰포시스, 인형 풍경이다. 누구나 빠져들 수 밖에 없는데 여기의 재미는 공간의 재해석을 느껴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지구의 중력이 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공간의 왜곡이 무엇인가를 의미한 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가장 웃겼던 페이지는 고흐의 ‘아를의 침실’을 정리한 베얼리의 작품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아들’의 방을 정리한 할머니의 행동을 예술의 파괴, 반달리즘에 비유하다니…. 우하하하 누구에게는 예술이, 누구에게는 번거로운 일이 될 수 있다는 엄청난 진실을 베얼리의 작품으로 설명한다. 그것이 진중권의 ‘언어 유희’와 ‘절묘한 비유’로써 책에서 얻게 되는 ‘숨은 그림 찾기’ 이자 ‘애너그램’이다. 다른 한 곳을 더 보자면, 137p의 왜상을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 정치 풍자도 가능할 것이라는 명제를 내놓고, 예를 드는 것이 ‘저 그림 속 네 인물의 자리에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을 그려넣고, 가운데에 피라미드 거울을 올려놓으니, 노무현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하면서 정치풍자를 하고 있다. 예를 드는 척하면서 실제로 정치 풍자를 하는 장난끼를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낸다.

어렵고 전문적인 주제, 방대한 자료를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미학을 쉽게 펼쳐보이는 이 책은 너무나 명랑하고, 놀이의 유흥을 한껏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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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류사 > 짜잔~~ 서평이벤트...

 
 
책은 공짜.. 그러나 읽은 소감은 꼭 써야지요.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딴지일보>기자, 의학박사 서민이 밝힌 현대 의학의 실태 

 그는 의사면허번호 46663호로 현재 단국대학교 기생충학과 교수로 있는 의사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의료 정보를 알려줌과 동시에, 의료계의 실상을 솔직, 담백하게 파헤쳐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의료 정보와 의료계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 딱딱한 실용서는 가라. 수필을 읽듯 가볍게 정보는 쏙쏙!

인터넷 서점 ‘알라딘’블로거 ‘플라시보’ 서평

독자들이 실용서에 바라는 것은, 너무 어렵지 않게 또 딱딱하지 않게 지식을 전달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서민 교수의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전하는 의학 상식들은 결코 가볍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겁고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는 저자 서민 교수 특유의 유머러스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히 붐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의학 상식의 홍수 속에 이 책은 정직한 등대와도 같다.

꼭 그래야만 한다고 겁을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무신경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식도 아닌 이 책은, 재미와 실용적인 지식의 전달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훌륭하게 잡아냈다. 근래에 보아왔던 의학 상식 책 중에서 감히 장담하건데 아마도 가장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 아닌가 싶다.


지은이

서민, 1967년 서울 출생, 의사면허번호 46663

서울대학교 의대 재학 중 방송대본 '킬리만자로의 회충'을 쓰는 등 기생충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명하다가 졸업 후 본격적으로 기생충학계에 투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최근 몇 년 간 '기생충의 대중화'를 위해 집필에 전념, <기생충의 변명>이란 에세이집을 냈고 딴지일보 기자로 데뷔해 '건강동화'를 절찬리에 연재, <대통령과 기생충>이라는 소설로 엮었다.

2004년 CBS <저공비행>이란 프로그램의 '헬리코박터 프로젝트'에 6개월간 출연, 의료정보를 알려줌과 동시에 의료계의 실상을 솔직, 담백하게 파헤쳐 약간의 인기를 모았다.

현재 단국의대 기생충학과 교수로 재직, 기생충을 사랑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며 인터넷 사이트 등에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

 

본문 중에서 몇 꼭지 발취해 보았습니다. ^^;;

 

무슨 과에 갈까 (41쪽)

서론

눈 다래끼가 난 친구, 안과를 가야하나 피부과를 갈까 고민하다 결국 병원에 안 가고 말았다. 결국 그는 저절로 나아 버리고 말았는데,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증상에 따라 어느 과에 갈 것인지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과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의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한다. 의사는 배운 기간에 따라 구별되며, 그 구분은 다음과 같다.

(1) 의사

흔히 일반의라고 한다. 의대 6년 졸업을 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한 사람을 일컫는데, 아는 것은 순전히 암을 비롯한 위중한 병밖에 없고, 임상경험도 없어서 환자를 보기 어렵다. 이런 사람이 병원을 하면 링거만 꽂아서 돈을 벌기 십상이니 가벼운 감기 환자만 가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라도 3년 정도를 버텼다고 하면 실력이 있는 의사로 인정해 주고, 신뢰를 보내도 된다. 그가 돌팔이라면 3년 안에 이미 사고를 내서 짐을 싸들고 도망갔을 테니까.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병과 그렇지 않은 병을 구분할 수만 있어도 좋은 의사겠지만, 대개 그렇지가 못하다. 폐암을 결핵이라고 우겨서 친구의 장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의사라든지, 림프종을 감기라고 우겨 오랜 기간 붙잡아둔 의사가 여기에 속한다.

(2) 인턴

고수에게 무술을 전도 받으려면 물을 길어야 하듯, 1년간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주로 하는 일은 환자에게서 피를 뽑는 거다. 처음에는 서툴지만 나중에는 사람을 보면 혈관만 보인다니, 얼마나 혹독한 트레이닝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엑스 - 레이 필름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고, 수천 장의 필름 중에 필요한 사진을 찾는 걸 보면서 인턴의 존재 의의를 만끽한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불어 닥친 전산화 바람 때문에 더 이상 엑스 - 레이를 찾을 일이 없어져 버렸다.

업무의 반이 날아가 버려 허탈해진 인턴들이 병원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 방황을 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눈에 초점이 없이 얼쩡거리는 사람에게 “혹시 인턴이세요?”라고 말하면 거의 적중한다.

옛날보다 편해졌다는 거지, 그렇다고 인턴이 노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수술장에서 레지던트와 교수를 돕는 일인데, 이거 역시 허드렛일이다. 간을 수술할 때는 몇 시간 동안 당기고 있는다던지, 환자가 엎드려 수술할 때 두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있어야 하는 등, 머리 쓰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주로 한다. 내 친구는 인턴 때 4시간 동안 간을 당기고 있어야 했는데, 그가 조는 바람에 간의 일부가 찢어져 수술장에서 쫓겨났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인턴의 장점은 거의 모든 과를 섭렵하기 때문에 어떤 증상을 호소해도 커버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인턴을 마친 의사가 개업을 했다면 어느 정도 믿어도 된다.

(3) 레지던트

교수에게 배정되지 않은 환자를 본다. 1990년 그 이전만 해도 레지던트 기간이 3년이었는데, 의사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취업이 어려워져 ‘보다 전문적인 의사를 양성한다’는 취지에 따라 4년으로 늘어났다.

너무 한 과만 보다보니 지나친 전문성을 갖게 된 나머지 다른 과를 물어보면 무조건 모른다고 하는 것이 단점이다. 레지던트를 마치고 나면 전문의 시험을 보는데, 대략 90% 이상이 합격해 전문의가 된다.

(4) 펠로우

원래 취지는 이런 거였다. 서울대학교 병원의 소화기내과가 담낭*에 금박을 씌우는 기술이 아주 유명하다고 치자. 다른 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며 전문의를 땄지만 저 기술은 꼭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돈을 조금 덜 받더라도 그 병원에 가서 환자도 보면서 그 비법을 배우겠다고 우겨가면서 1~2년간 그 병원에 있는 것, 이것이 펠로우의 본질이다.

하지만 그게 변질되어 교수로 가고 싶은데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어 버렸다. 병원 측에서 보면 고도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레지던트 월급 정도를 주면서 거느릴 수 있으니 대단한 이익, 결국 모든 과에서 펠로우를 2년간 하는 게 의무가 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병원에서는 싼 값에 사람을 부려서 좋고, 교수들은 대부분의 일을 펠로우에게 맡기고 음주, 가무 등 다른 일을 할 수 있으니 좋고. 심지어 월급을 안 줘도 되는 무급 펠로우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데 생활고에 찌든 얼굴을 한 사람에게 혹시 펠로우냐고 물어보라. 화들짝 놀라며 어떻게 알았느냐고 할 것이다.

(5) 교수

온갖 역경을 이기고 자리를 차지한 사람을 일컫는다. 교수가 되면 레지던트를 거느린 채 폼도 잡을 수 있고, 수술을 할 때도 레지던트들이 배를 다 열어놓으면 그 때 중요한 부위만 싹둑 자르면 되니 아주 편하다. 배를 닫는 건 다시 레지던트의 몫. 예전에는 환자만 보면 됐지만 지금은 연구도 하고 논문도 써야 하기 때문에 힘들어지긴 했다. 그래도 펠로우의 등장으로 별 어려움이 없다.


아아, 뱅상! (99쪽)

 

프랑스에 사는 열아홉 살 뱅상 왕베르는 소방서에 근무하는 건실한 젊은이였다. 일직 근무를 서던 일요일 저녁, 급한 일이 있다는 동료 때문에 한 시간 더 소방서에 머무르는 와중에 전화가 왔다. 여자친구였다.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안 오고 뭐하냐는 것. 서둘러 소방서를 나와 집으로 가는 시골길을 달리던 뱅상 앞에 대형 트럭이 나타났다. 차를 피하려 갓길로 올라선 순간 타이어가 터졌고, 뱅상의 차는 트럭의 트레일러 뒷바퀴에 부딪힌다.

구조대원들이 ‘이송이 끝날 때까지 환자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고 했을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은 뱅상은 병원 측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목숨을 건진다. 의사의 말은 이랬다.

“회복이 된다고 해도 식물인간으로 남아야 한다.”

그 뒤 뱅상은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있어야 했는데, 9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는다. 하지만 의식만 있을 뿐 움직일 수도, 볼 수도 없는 상태는 여전했는데, 뱅상과 비슷한 처지의 자식을 둔 다른 부모들은 엇갈리는 반응을 보인다.

“뱅상 엄마는 운이 좋소. 정신이 멀쩡하니 대화도 할 수도 있잖아요.”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난 우리 아들이 제 정신을 찾는다면 못 견딜 거예요. 그 애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하지만 환자 가족에게 있어서 의식을 되찾는 건 희망을 품게 해주는 일, “의식 회복에 대한 진단이 틀렸다면 나머지도 맞는다는 보장이 없잖아?”

환자 가족들은 뱅상이 두 발로 딛고 침대를 걸어 나오는 것까지 기대를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뱅상의 회복은 거기까지였다. 딱 하나, 엄지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지만 엄지손가락의 회복은 불가능하게 보였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줬다. 이런 식으로.

[환자의 엄지와 중지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은 후, 천천히 알파벳을 불러줌. 맞는 철자가 나오면 뱅상이 손가락을 누를 것임. 그러면 그 철자를 다시 한번 불러 뱅상에게 ‘예’ 와 ‘아니오’로 확인을 받음.]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서 글자 수만큼 알파벳을 불러야 하는 지루한 작업, 뱅상이 처음으로 만든 문장은 이거였다.

“엄마, 난 엄마가 곁에 계셔서 좋아요.”

당연한 얘기지만 엄마는 그 문장을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환자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가족들에게 그 메시지가 얼마나 큰 감동을 줬을까. 하지만 그런 것도 한 두 번이지, 3년을 침대에만 누워 있다 보면 환자는 물론이고 보호자도 지친다.

“그 사람들(간호사)이 알기나 할까. 십분도 못 참겠다는 것을. 아프지 않은 데가 없다는 것을. 숨쉬기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고통에 지친 뱅상은 결국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내가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천국은 나를 맞이할 하얀 천국이다. 매일매일 나는 그 곳을 생각한다. 미치도록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곳에 갈 수 있으려면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나를 짜증나게 한다.”

의사를 원망하기도 했다. “왜 의사들은 악착스레 내 목숨을 연명시키려 하는가? 무슨 권리로? 나를 살린 것은, 어떻게든 목숨만 건져내고자 운명을 비튼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는 죽고자 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안락사가 금지된 나라, 뱅상은 할 수 없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다.

[저는 대통령님께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내려달라고 청원합니다. 대통령님만이 제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편지는 언론에 공개되었고, 뱅상은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의 청을 거절한다.

“당신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줄 수가 없군요. 대통령에게 그러한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맞다. 법은 대통령이 만드는 게 아니며, 네덜란드처럼 안락사를 인정하도록 법이 바뀌지 않는 한 대통령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뱅상의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도 대통령은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 하는 말입니다. 삶의 의욕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해 주세요. 이건 대통령이 내리는 명령이라고 전해주세요.”

대통령이 뭔가 해줄 줄 알았던 뱅상은 그 말을 듣고 의욕을 되찾기는커녕,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런 뱅상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네가 원한다면 네가 죽는 걸 도와줄게.”

그 남자는 에이즈 환자로,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터였다. 살아생전 좋은 일을 해본 적이 없던 그는 ‘단 한번이라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바람에 그 일은 수포로 돌아간다. 죽는 것만이 소원이었던 뱅상은 어머니를 설득해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한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이들은 분명 슬퍼할 것이다. 오해하지 말기를. 마침내 떠날 수 있게 되어 내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제발 알아주기를!”

어머니는 설득에 못 이겨 그의 청을 수락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가 내게 해주실 행동은 틀림없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증거일 것이다.”

결국 뱅상의 어머니는 링거에 다량의 신경안정제를 투입하여 아들의 긴 고통을 잠재웠다. 그녀는 지금도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상은 뱅상 왕베르가 병상에서 쓴, 《나는 죽을 권리를 소망한다, 빗살무늬》의 내용이다. 식물인간이 되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생각, 웬만한 사람이면 다 한번씩 해볼 것이다. 하지만 남의 도움 없이는 죽지도 못할 상황에서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사정하는 것밖에 없고, 안락사를 인정하지 않은 사회적 현실은 그의 소망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나.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을 과연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세계 최초로 동성간의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답게 네덜란드는 안락사를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안락사는 불법이다. 미국의 잭 케보키언Jack Kevorkian 박사를 기억할 것이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주장한 그는 1990년 6월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한 여성을 안락사 시킨 것을 시작으로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죽음을 선사했는데, 폐암 말기로 케보키언의 100번째 안락사의 주인공이 된 환자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신 같은 의사가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하지만 케보키언은 2급 살인 혐의로 유죄평결을 받아야 했는데, 이 사례는 안락사를 금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생각하게 해준다.

안락사는 시술 방법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누어진다. 뱅상의 어머니나 케보키언처럼 호스에 독극물을 주입해서 생을 단축시키는 게 적극적 안락사라면, 생명유지에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음으로써 환자를 죽게 하는 것이 소극적 안락사다.

우리나라는 소극적 안락사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데, 심지어 앞에서 이야기 했던 보라매병원 사건의 의사에게 살인방조죄를 적용시킬 정도다.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단축시킬 수 없다는 종교계의 반대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논리라면 신이 정해놓은 죽음의 시간을 무시한 채 산소 호흡기를 달아매어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 역시 반대해야 옳지 않겠는가?

케보키언이 한 것 같은 적극적 안락사를 당장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면, 소극적 안락사 정도는 인정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죽음 뒤에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아무도 모르고, 삶에서 보다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인간은 누구나 죽는 존재, 이왕이면 고통의 순간을 조금 줄이고 죽음을 맞겠다는 마지막 소망을 외면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안락사, 무조건 막는 게 옳은 것은 아니다. 지금은 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에서도 소극적 안락사는 인정되는 분위기다. 다음 기사를 보자.

[미국 연방대법원은 24일, 1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탱해온 테리 시아보(41세)의 급식 튜브를 다시 연결시켜 달라는 시아보의 부모 쉰들러 부부의 청원을 기각했다. 이로써 지난 18일 급식 튜브가 제거돼 서서히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시아보의 회생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의료진은 ‘시아보에게 탈수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 1~2주 안에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밝혔다. 급식 튜브 제거를 주장해온 남편 마이클의 변호인은 ‘시아보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마이클은 “시아보가 의식이 있을 때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며 안락사를 주장해 왔다.

시아보는 1990년 사고로 심장 박동이 잠깐 멈추면서 뇌에 치명적 손상을 입어 급식 튜브로 생명을 연장해왔다. 그는 겉보기에는 웃음을 짓고 눈도 깜박이는 등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반사적 행동일 뿐 실제로는 두뇌활동을 상실해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게 의료진의 평가다. 그러나 시아보의 부모는 ‘딸의 의식이 돌아올 수 있다’며 안락사에 반대했다. <인터넷 한겨레 2005.03.25>]

 

서평이벤트는 www.readersguide.co.kr 에서 하고 있습니다.

 

투표기간 : 2005-08-11~2005-08-25 (현재 투표인원 :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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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08-04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책이니 재미는 보장되겠네요. 많이들 보셔용.
 

5세 :대부분 기억 안남. 사람들과 의사소통 문제는 없었음.

6세: 가나다라마바사... 조금 배움. 책읽기에는 많이 부족했음.

7세: 구구단 조금 배움. 연산능력 많이 부족. 아직 책 제대로 못 읽음.

8세: 초등학교 입학, 가나다라 제대로 배움. 구구단은 7단까지. 받아쓰기 평균 60점(애들이 너무 떠들어서 ^^;;)

(우리 때 이 정도는 지극히 정상 레벨 ㅡ..ㅡ; 절대 떨어지는게 아니었음,
정규과정 그대로 밟으니 평범한 인간 되드라 ^^;)

 

아프락사스, 물만두님 받으세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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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8-04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5단이었던가...

마늘빵 2005-08-0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게 머에요.... 이어받기 놀이네..ㅋ
 

여덟살, 대학 문 두드리다
[좃선일보 2005-08-04 08:28]    


송유근군 대입검정고시 치러…
합격땐 2006학년도 수시 지원

[조선일보 안석배 기자]

만 7살3개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한 영재소년 송유근(8)군이 빠르면 내년에 대학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송군은 3일 서울 광장중학교에서 대입검정고시를 치렀다. 올 5월 고입검정고시에서 최연소로 합격한 지 3개월 만이다. 송군이 29일 발표하는 합격자 관문을 통과하면 오는 9월부터 실시되는 2006학년도 2학기 수시모집에 지원할 수 있다.

현재 초등학교 2학년 나이인 송군은 대입에 합격하면 만8살에 대학생이 되는 셈이다. 국내 최연소임은 물론이다. 3년 전 12살 학생이 모 대학에 조건부 합격한 적은 있으나 이 학생은 중도탈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군의 아버지 송수진(46)씨는 “오늘 (시험에서) 큰 실수는 하지 않은 것 같다”며 “일단 국내 20여개 대학 물리학과를 염두해 두고 있다”고 말했다. 송씨는 “아들이 시험을 앞두고 2개월 정도 집에서 독학했다”며 “4·19, 5공화국 같은 단어와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해 사회과목 공부에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송군의 영재성은 지난 2003년부터 나타났다. 구구단을 배운 지 7개월 만에 미·적분을 풀어냈던 송군은 현재 양자역학(입자수준의 미시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물리학분야)을 이해·연구하는 수준이다. 독학으로 공부한 물리학은 대학1학년 교과서(원서)를 지난 6월에 마쳤다. 수학도 대학교 1학년 수준. 영어원서를 읽고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영어실력도 상당하다.

어려운 수학·물리 문제를 거뜬히 푸는 신동(神童)이지만, 교실을 벗어나면 또래와 같이 장난치고 뛰어다니기 좋아하는 ‘어린이’다. 인하대 박제남(朴濟男·수학통계학부) 교수는 “영재수업 때 말을 잘 듣거나 문제를 잘 풀었을 때 사탕을 한 주먹씩 쥐여 주면 좋아한다”고 말했다.

송군이 ‘8살 대학생’이 되어도 대학생활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은 과정이 있다. 송군은 수학·물리는 대학생 수준이지만, 다른 과목(사회·국어 등)은 그 정도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또 한 가지 과제를 떠안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공부스타일이다.

송군에 대한 영재교육을 맡고 있는 인하대 박 교수는 “유근이는 수학문제를 10시간 이상 집중해서 풀 수 있는 아이”라며 “보통의 대학수업처럼 ‘1교시 수학, 2교시 물리…’ 등의 커리큘럼은 유근이에게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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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화 기획위원
후덥지근한 날씨에 ‘대연정’이라는 끈적끈적한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무엇을 위한 연정인지, 왜 하필 지금인지 등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연정 상대가 한나라당이라는 점이다. 개혁을 내걸고 집권한 노무현 대통령은 끝내 ‘개혁’이라는 거추장스런 옷을 벗어던졌다. ‘지역구조 해체’라는 시대적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과대망상의 나르시시즘일까, 아니면 바보스러움을 가장한 독선과 오만일까, 벌거벗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점을 알려고 하지 않듯, ‘대연정’을 제안한 노 대통령에게 국민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프랑스의 좌우동거 사례를 들지만 한참 헛짚었다. 대통령 임기 7년, 의원 임기 5년이던 프랑스에서 대통령은 국회의 동의를 얻는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 헌법에 의해 좌우동거를 강요받았다. 그나마 3년 전에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줄이는 개헌을 통하여 앞으로 좌우동거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연정이건 소연정이건, 그것은 국민의 선택에 따르는 것이지 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임의로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독일의 사민당과 기민당의 대연정 경우도 마찬가지다.

‘민주당=반개혁 세력’, ‘열린우리당=개혁 세력’이라며 민주당과의 분당을 관철시킨 집권세력이다. 그들의 눈엔 영남의 지역주의와 호남의 지역주의가 똑같은 것인가. 그러나 팽창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가 같을 수 없듯이, 영남의 공격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는 같을 수 없다. 민주당을 공격하면서 ‘자, 우리를 봐라, 우리처럼 해야 하지 않니!’라고 영남과 한나라당을 향해 시위를 벌였지만, 역사과정의 산물인 이 땅의 공격적 지역주의는 그 정도 시위로 없어지지 않으며, 선거구제를 바꾼다고 해도 없어지는 게 아니다. 개혁만이, 오직 개혁만이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지난한 과제의 해법이며, 그 때문에 개혁을 주장한 정치세력에게 국민이 표를 주었던 것이다.

지역주의에 대한 노 대통령의 태도는 이라크 파병 과정에서 미국을 대했던 태도와 흡사하다. 힘센 깡패에게는 꼼짝 못하고 약한 동네 약골에게만 큰소리치는 격이다. 집권세력에게서 영남의 공격적 지역주의를 개혁으로 돌파하려는 의지를 볼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역주의가 망국병인 것은 그것이 사회개혁과 건강한 시민의식의 형성을 가로막는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곧, 개혁이 궁극적 목적이지 지역주의 해소가 목적일 수 없다. 따라서 개혁을 저당잡혀 지역주의를 극복한다는 발상은 본말 전도 그 자체다. 그러나 지역구조 해체라는 역사적 위업을 떠맡은 노 대통령의 고정관념은 한나라당과 정책적 차이가 그리 크지 않으니 연정 못할 이유가 없다는 발언으로까지 나아간다.

지금 시민사회는 ‘엑스파일’과 관련해 정-경-언-검 유착을 고발하면서 가장 중요한 고리인 이건희 삼성 회장을 조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착의 한 당사자인 검찰은 불법도청만 조사하며 이상호 기자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바로 그 삼성이 무노조 원칙을 관철하기 위해 자행했던 위치 추적에 대해서는 맥없이 물러섰던 검찰이다. 그런데 집권 초기에 검사들과 토론을 벌였던 노 대통령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대통령 되기 전과 후의 변화무쌍함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따를 집권자가 또 있을까. 미국 앞에서 옷을 벗고 재벌 앞에서 옷을 벗더니, 마침내 영남의 지역주의 앞에서 옷을 벗고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를 뽑은 국민이 초라할 따름인데, 더 벗을 옷이 남아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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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8-04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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