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하철에서 이런 얘 봤는뎅;;;;

 

근데....

크면 별로일거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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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여, 나라도 먼저 침을 뱉어 주마"    - 김영현

"비수가 '혀'에 꽂혔나? 독자 무시하지 말라!"   - 독자 이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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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10-26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이란 작가의 책을 봐야겠넹....

웽스북스 2008-10-26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며칠전에 이거 읽으면서 주이란 혀 궁금해지더라고요. 하지만 뭐, 난 조경란 혀도 안읽었음. ㅎㅎ 실은 그것보다 더 궁금한 건, 조경란은 도대체 무슨 베짱으로 가만히 있는걸까. 묻어가고싶은걸까. 뭐 이런거.

라주미힌 2008-10-26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부끄러움을 알기 때매.. 혀를 감추는걸까요;;;;
전 오늘 봤어요 이런 일이 있는줄도 몰랐넹;;;
이슈가 되는 것을 꺼리는 무리들이 많다는 얘기가 아닐지..

가시장미 2008-10-26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이란의 혀를 먼저 읽고 있습니다. 조경란의 혀도 곧 봐야하는데.. 왠지 사기 싫어진다는 ㅋㅋ 이런 일.. 알려지진 않았지만- 꽤 많지 않을까 하네요. 아무 이력도 경력도 없는 신인의 소설이 누군가에 의해 도용되거나 도절되는 일은 슬프지만 쉽게 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다락방 2008-10-26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조경란의 혀만 읽었어요. 끙. 정말 그런걸까요? 주이란의 혀도 읽어봐야겠어요. 아, 난 조경란의 혀가 좋아서 막 선물도 했는데 -_-
 

[김규항 칼럼] 촛불과 지식인들 1

 

촛불은 아름다웠다. 어른들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뇌까리며 느물거릴 때 촛불을 들기 시작한 여중생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이룬 거대한 대열도, 그들이 보인 유쾌한 직접 민주주의의 풍경도. 제정신을 가진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왜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고 행동했는데 이렇게 달라진 게 없을 수 있을까? 딱히 달라진 건 없더라도 사회 진보의 열기가 살아나는 계기라도 되었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다들 맥이 빠져버린 모습이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만 다들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 촛불 시위 피켓엔 '이명박 너나 미친 소 쳐먹어' '내 인생 좀 펼쳐보려고 하니 광우병 걸렸네' 등 내가 죽고, 내 이웃이 죽고 우리 국민이 죽는 문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나아간다 해도 친미 정부, 자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정부를 탓하는 지점에서 끊긴다. 대한민국 안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들이다. 그러나 지구 위 어딘가에서 미친 소와 병든 닭, 그리고 오리는 여전히 아프다. 이런 병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누가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집회현장에는 거의 없었다. 좁은 우리에 꽉꽉 채워 넣어 면역력을 떨어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충분히 먹을 만큼 많은 곡식을 소에게 먹여 소수가 먹을 고기를 만들고, 그도 모자라 소가 소를 먹어 병들게 만든 것.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데 말이다." (<인디고잉> 12호)
  
  촛불의 열기가 한창이던 즈음 나온 글이다. 글을 쓴 사람은 저명한 생태주의자도 논객도 아닌, 부산에 사는 한 고등학생이다. 우리는 이 '아이'의 견해를 통해 '광우병 소 반대' 구호는 '우리 동네에 쓰레기 소각장 반대' 구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쓰레기가 처리되는 방식을 되돌아보며 생태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에선 쓰레기를 처리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 광우병 소라는 현상을 통해 자본주의적 축산 산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자는 게 아니라 나와 내 새끼는 광우병 소를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말이다. 한국의 지식인들 가운데 이 '아이'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상적인 사회란 아이들이 지식인에게서 배우는 사회지 지식인이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사회가 아니다.
  

▲ "촛불은 아름다웠다. 어른들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뇌까리며 느물거릴 때 촛불을 들기 시작한 여중생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사람들이 이룬 거대한 대열도, 그들이 보인 유쾌한 직접 민주주의의 풍경도. 제정신을 가진 누구도 그 아름다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프레시안

  물론 지식인들은 말한다. "촛불은 광우병 소라는 일개 사인이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만들어낸 이명박 정권을 공격하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맞는 말이다. 촛불은 그랬다. 그런데 과연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모두 이명박이 만들어낸 것인가? 노동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불안정 노동층으로 전락하고 농민들은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뿌리 뽑히며 청년들은 실업자로 사회에 진출하며, 불안감에 젖은 부모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아이들을 '경쟁의 지옥'으로 내모는 이 현실은 말이다. 나 역시도 '이 모든 게 쥐박이 때문'이라고 말하면 마음만은 개운하겠지만, 사실은 아니다. 이명박은 나쁜 대통령이지만, 불과 몇 달 동안 이 모든 걸 뚝딱 만들어낼 만큼 전능한 대통령은 아니다.
  
  촛불을 음해하는 놈들은 말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는 이미 노무현 정권 시절 다 진행이 된 것이고 이명박 대통령은 사인만 했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더러운 의도와는 별개로 그 말은 사실이다. 오늘 우리의 삶을 옥죄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이명박이 뚝딱 만들어낸 게 아니라 꽤 긴 시간 동안 진행되어 온 어떤 거대한 흐름의 결과다. 올해 초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지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아니 미국 경제가 고작 하층 계급의 부실 대출 문제로 흔들린단 말인가? 그러나 그 문제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파급되자, 사람들은 세계의 경제가 하나로 구조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 구조가 근본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30여년 전, 레이건과 대처에 의해 시작되어 자라온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괴물이 말이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은 단지 이명박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 괴물의 아가리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 괴물의 아가리에 한국 사회를 집어넣은 건 '쥐박이'가 아니다. 한국이 군사 파시즘에서 빠져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탑승하면서 시작된 일이며, 본격적으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행된 일이다. 이명박에겐 책임이 없고 김대중 노무현 책임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그리고 이명박으로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민주적이고 개혁적인 정권이고 이명박 정권은 수구기득권 세력의 정권인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게 문제다.
  
  우리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할 때 늘 미궁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정권'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다. 마치 고대 사회에서 정치란 단지 '왕이 누구인가'의 문제였던 것처럼 우리는 '정권'과 '대통령'에 집착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는 '정권'이 아니라 '정권을 포함하는 훨씬 더 넓고 복잡한 체제'다.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은 분명히 '다른' 정권이지만 '같은' 지배 체제의 일원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배체제의 그런 '신묘한' 정체는 지난 10여 년 동안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서 입버릇처럼 뇌까려진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사실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은 개념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진보 세력이란 좌파를 일컫고 개혁 세력이란 자유주의 우파 세력을 일컬으니,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은 결국 '좌파우파' 세력이라는 말인 것이다. 그런 '말이 안 되는 말'이 그토록 진지하게 사용되는 연원은 과거 군사 파시즘 체험에 닿아 있다. 군사 파시즘 시절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은 물론 군사 파시즘 세력이었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군사 파시즘 세력과 민주화 운동 세력이 대립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군사 파시즘이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기 시작한 후에도, 말하자면 한국 사회의 문제의 본질이 군사 파시즘이 아니게 된 다음에도 여전히 그 구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통해 국가 권력이 자본(재벌!)을 거느리던 체제에서 자본이 국가 권력을 거느리는 체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은 파시즘이 아니라 '자본화'가 된 것이다. 자본화의 시절을 맞아 옛 군사 파시즘 세력은 대중들, 특히 젊은 세대의 지지를 잃고 급기야 10년 동안 정권을 잃기도 하지만, 탐욕의 결정체들답게 자본화의 흐름 자체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적응해나갔다. 그들은 처음엔 인민을 대놓고 누르고 밟을 수 없는 세상이 난감했지만 이내 더 자유롭고 효율적인 부의 축적이 가능한 세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옛 민주화 운동 세력은 두 가지 세력으로 분화했다. 하나는 자본화의 흐름을 수용하는 개혁 세력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화의 흐름을 거부하는 좌파 세력이다.
  
  한국 사회는 당연히 자본화,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누어져야 했다. 군사 파시즘 출신 세력과 민주화 운동 출신의 개혁 세력이 구우파와 신우파로서 우파 진영을 이루어, 좌파와 맞서는 구도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사 파시즘 시절의 구도가 그대로 이어졌다. 구우파가 우파를 맡고 신우파와 좌파가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좌파를 맡는 해괴한 구도를 이룬 것이다. 게다가 대형 시민단체를 비롯한 이런저런 개혁 운동이 대중들의 각광을 받으면서, 좌파 세력은 '철지난 몽상에 빠진 비현실적인 사람들'로 치부되어 버렸다. 말이 '진보개혁' 세력이지 그 주도권은 거의 전적으로 개혁 세력이 쥐게 된 것이다. 결국 한국 사회는 자본화의 시절을 맞아 정작 자본화를 반대하는 세력은 배제된 채 자본화를 찬성하는 두 세력이 각각 우파와 좌파를 자임하며 싸우는 괴상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게 김대중 정권 이후 10년 동안의 상황이다. 구우파와 신우파 세력은 옛 군사 파시즘 시절에 쌓인 감정과 정치적 민주화에 대한 입장 차이로 서로 '수구 기득권 세력'이니 '좌파 빨갱이들'이니 욕하며 원수처럼 으르렁거렸지만 신자유주의 자본화는 아무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자본화는 개혁 세력, 즉 신우파가 집권한 10년 동안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신우파는 한국의 거의 모든 양식 있는 사람들을 예의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구우파(수구기득권 세력이라 일컬어지는)와의 싸움에 전념하게 해놓고는, 차곡차곡 신자유주의 자본화를 진행한 것이다.
  
  인민들은 당연히 고단해져갔다. 인민들로선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데, 민주화가 되고 민주화 운동 출신 인사가 대통령이 되고 <조선일보> 따위 '수구꼴통들'이 젊은 세대에게서 외면 받는 형국까지 보이는데, 갈수록 삶은 고단해져만 가니 말이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리자 인민들은 이게 다 '좌파 정권 탓'이라고 믿게 되었다. 결국 이명박 씨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며 구우파 세력은 10년 만에 신우파 세력을 누르고 다시 집권한다. 상황은 좀 더 심각해져버렸다. 구우파가 집권하든 신우파가 집권하든 자본화가 지속되는 건 본질적으로 달라질 게 없지만, 구우파가 다시 전면에 부각되면서 자본화라는 지배체제의 본질은 훨씬 더 쉽게 은폐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슬프게도, 촛불의 열기 속에서 지성이란 그저 거대한 분노의 대열에 편승해 깃발을 꼽아대는 것을 뜻했다." ⓒ프레시안


  촛불 광장에서 진보적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고 소리쳤다. 물론 구우파들은 신우파에 비해 훨씬 더 거칠고 추악한 외양을 갖고 있다.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에서 금방 도착한 듯한 꼴통들도 적잖이 있고 그들에 의해 시대를 거꾸로 흐르는 엉뚱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꼴통들의 행태야말로 지배체제가 우리에게 던진 미끼다. 20년 전으로 되돌리고 있다면, 그렇다면 10년 전 5년 전은 괜찮았단 말인가? 이명박 정권은 부자 편만 드는 몹쓸 시장주의 정권이지만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와 서민의 정권이었다는 말인가? "이명박이 한국 사회를 20년 전으로 되돌리려 한다"는 말은 하나의 선동적인 수사로서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여 흥분하는 건 우리 스스로 20년으로 돌아가 주겠다는 말이며, 20년 동안 한층 세련되어지고 치밀해진 지배체제에 고스란히 먹히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혁이 사회 진보로 가는 현실적인 과정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오늘 이 현실을 낳았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인정하고 정신을 추슬러야 한다. 정치적 민주화를 근본적으로 되돌리기는 게 불가능해진 이후, 지배체제의 목표는 한국 사회를 군사 파시즘 시절로 되돌리는 게 아니라, 끝없는 자본화를 진행하여 무한정 부를 축적하는 데 있다. 현재 지배체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늘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이 자본화라는 사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은폐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지배체제 입장에서 이명박 정권은 대개의 진보 지식인들의 말하듯 '무능하고 쓸모없는 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 한국 사회에서 존재하는 모든 정의감과 사회 의식과 사회 진보의 열기를 모조리 흡수해주는 매우 '유능하고 기특한' 정권이다.
  
  촛불 광장 그 몇 달 동안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이라는 논리에서라도 벗어난 예는 단 한번, 불교 집회 때 수경 스님이 낭독한 108배 참회문뿐이었다. 기막힌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촛불 광장에 아이 손을 잡고 나온 모든 사람들을 지배체제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쥐박이' 욕만 했다고 비난할 순 없다. 사회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지식인들도 지난 10년 동안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말이나 뇌까리며, 개혁을 사회 진보로 가는 현실적인 과정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구우파와 싸우는 일을 사회진보의 충분한 실천이라고 생각한 판에, 사회 공부는커녕 먹고사는 일에 치어 정신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보다 나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모든 분노를 '쥐박이'에게 집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특히 진보 혹은 좌파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그 소중한 분노가 이명박이라는 인물에만 집중되어 소모되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야 했다. 물론 그런 행동은 분노의 열기에 젖은 사람들에게서 오해를 받거나 전선을 흐트러트리는 짓으로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해와 불편을 무릅쓰고' 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촛불의 열기 속에서 지성이란 그저 거대한 분노의 대열에 편승해 깃발을 꼽아대는 것을 뜻했다. 생각이 모자라서 그렇게 한 것이든, 누구 말마따나 포퓰리즘을 통해 제 세속적 이해를 도모한 것이든, 분명한 건 그 열기 속에서 지성은 작동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102018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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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할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금요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아나코-코뮤니즘의 의미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하승우 지음, 그린비 펴냄)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이 쓴 <상호부조론>을 소개하면서 지은이 나름대로 아나키즘을 한국 상황에 재접목하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은 'anarcho-communism'이다.
  
  지은이는 이를 아나코-코뮨주의(또는 아나코-코뮤니즘)로 부른다. 이때 아나키즘의 약자인 아나코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일상생활 전체를 변화시키자는 대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개인의 대립'이라는 좁은 해석을 의미하는 무정부주의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코뮤니즘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원리를 담고 있는 '코뮨'(commune)이라는 공동체를 건설,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적 코뮨 간의 연대'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고 지은이 역시 이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원리는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공산주의를 규정할 때 말한 것인데, 이 책에는 그런 언급이 따로 없다. 어쨌든 1910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아나키즘 항목을 직접 집필한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아나코-코뮤니즘은 문명사회에서 수용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공산주의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은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사회의 진화 방식을 지칭하는 두 가지 용어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공산주의와 아나코-코뮨주의로 대변되는 아나키즘은 확실히 닮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마르크스주의자(특히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는 상당 부분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 아나키스트의 쇠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기존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아나키즘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지은이는 생각하는 것 같다. 새로운 사회의 윤리이자 조직 원리로서의 상호부조, 그리고 그러한 대의를 전파할 수단인 '실행을 통한 선전'(테러리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서 도달할 새로운 사회인 코뮨, 이것이 아나코-코뮤니즘의 원리이자 목표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코뮨주의는 이진경의 코뮨주의(commune-ism)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진경은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한 당(조직)' 그리고 '아곤'(agon)이라는 '적대적이지 않은 경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진경의 코뮨주의는 국가 장치와 자본 축적을 연관시켜 파악하고 그 힘에 포획되지 않는 유목, 국가에 대항하는 전쟁기계, 소수자들의 투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유사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아나키즘 개념과 아나키스트의 실천
  

▲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하승우 지음, 그린비 펴냄) ⓒ프레시안

  '사실'은 '선택'되는 것이고 선택되는 이유는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념화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정치 조직·권력·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별로 시사해주는 바가 없다. 문제는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즘을 어떻게 실천했고, 또 그들의 실천에 동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 혁명에 적극 동참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볼셰비키가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라는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자 당황하기 시작했고, 1918년 봄에는 볼셰비키와 갈라설 것을 결의했다. 이후 혁명을 되돌리려는 백군과의 내전 때문에 양자는 일시 휴전하기도 했지만 아나키스트의 몰락은 예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은이는 아나키스트를 향한 볼셰비키의 잔혹성과 기만을 고발한다. 그러나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즘의 자유주의적 본성은 혁명을 지켜내고 완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볼셰비키의 판단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보기에 그것은 정치 조직이었고, 권력을 지향하는 볼셰비키에게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볼셰비키는 인간이 비정치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아나키스트들을 혁명의 걸림돌로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지도자들의 권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조직 여부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를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그 조직이 권위주의를 내포하고 있는가, 아닌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나키스트 사전>(1935)을 인용하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아나키스트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회조직에서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된 제도의 모든 규제를 증오한다는 것. 따라서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가 이런 실천을 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크로포트킨은 바쿠닌의 동지 기욤이 이끌던 쥐라연합을 만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바쿠닌이 죽고 기욤이 은퇴하자 아나키스트 운동이 급속히 구심점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1921년 2월 크로포트킨이 사망하자 러시아 아나키즘도 서서히 종말을 고했다는 점 등은 그 지도자들의 권위와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는 것이며 권위를 거부하는 아나키즘 운동이 사실은 상당 부분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지 지은이가 소개하는 아나키즘 개념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아나키즘의 어원이 되는 단어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했다. 이것은 흔히 생각되듯이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도자나 선장이 없다는 없음(無)의 실재보다 누구라도 지도자나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있음(有)의 여백이 바로 아나키의 질서이다. 고정된 질서를 억지로 강요하면 곧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순수한 혼돈, 그것이 곧 아나키즘이다."
  
  분명하고(clear) 정확한(distinct)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곤란한 개념이다. 선장의 필요성 여부가 모호하게(obscure)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장 없이도 선원들이 지혜를 발휘하여 배를 잘 이끌고 나갈 수 있다면 선장은 없어도 된다. 아마도 이것은 아나키스트의 이상일 것이다. '누구라도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있음의 여백'은 선장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아나키즘 개념이 후자라면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이 사망했을 때 왜 그를 잇는 지도자가 바로 등장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나 선장이 될 수 없는 구조, 권위에 의존했던 실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자가 아나키즘 개념이라면 그것은 실천된 바가 없고 실천할 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이 전쟁을 부르주아 권력 간의 식민지 시장 쟁탈전이라고 정확히 규정했음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총을 들었다. 제2인터내셔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아나키스트 운동에서도 오판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신간회와의 대립이 그것이고, 해방 후에는 당을 결성하고 선거에 나선 것이 또 하나의 사례이다. 선장이 있었든 없었든 아나키스트 배는 산으로 갔다.
  
  지은이는 아나키즘의 쇠퇴 이유를 각국 정부의 극심한 탄압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본다. 그렇지만 어디 아나키스트만 극심한 탄압을 받았겠는가. 아나키스트 스스로 자초한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나키즘을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남 탓'보다 '내 탓'을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상호부조론>과 진화론 그리고 유전자론
  
  지은이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윈의 진화론을 새롭게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도킨스류의 유전자 중심론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하는 것은 증명하기 어려운 가설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장이 갖는 사회정치적 의미일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이 서로 돕는 존재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생존에도 유리하니, '코뮨'을 건설하고 코뮨끼리 연대하여 아나코-코뮤니즘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아나키즘이 필요한 이유는 '선장의 폭력과 독선' 때문이다.
  
  <상호부조론>의 1차적인 목표는 다윈이 주장한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호부조론>에서 주목할 것은 다윈이 알고 있었지만 발전시키지 않았던 면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개체들 간의 생존 경쟁만이 아니라 협동과 도움이 최상의 생존조건을 확보하게 해 준다고 봤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를 많이 제시하지 않았고 추가적인 책을 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윈의 추종자들은 이론의 폭을 축소시켜 생존경쟁만을 강조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헉슬리이다.
  
  헉슬리는 다른 국가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물을 더 좋게 만들어야 하는데, 노동비용은 생산비의 큰 요소이므로 임금 수준을 일정 정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 역시 자연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생존 경쟁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헉슬리의 주장은 다른 인종을 착취하는 백인이나,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크로포트킨으로서는 그와 논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은이가 이 책에서 공헌한 것은 <상호부조론>과 유전자 중심론의 관계를 보여주고 유전자 중심론이 갖는 사회정치적 의미를 밝힌 것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크로포트킨이 관찰한 자연계의 상호부조는 유전자가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이기적인 행위의 일종일 뿐이다. 유전자에게서 발견되는 이타성은 본성이 아니라 어떤 보답을 고려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복지국가는 이기적 유전자가 지배하는 자연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적자생존을 통한 자연도태를 막으며, 더구나 바로 그 이타성 때문에 이기적인 개체들에 의해서 악용되고 남용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는 도킨스의 논의를 확장시킨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협동적인 인간은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라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타심이란 이기심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미덕'이며, 사적 소유권을 명확하게 하면 할수록 그것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이기심을 억누르고 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도킨스나 리들리의 논의는 복지국가의 활동 범위를 축소하자는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기여할 위험이 있기도 하다.
  
  아나키즘과 접속 가능성이 있는 운동들
  
  지은이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아나키스트들이 보여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자본의 세계화'를 거부하는 운동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운동은 반(反)세계화운동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이라는 것이다. 세계화 그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연대' 때문일 것이다.
  
  지은이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이 아나코-코뮨주의와 일정 정도 친화성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조정환의 <아우또노미아>(2003)를 인용하면서 자율주의운동과 아나키즘은 여러 면에서 아나키즘과 접속가능성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을 토대로 국가에 맞서 코뮨을 부활시키려는 이진경의 코뮨주의도 아나키즘과 접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접속 가능성이 아나키즘 개념의 모호성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늘날의 운동은 확실히 엘리트에 의한 지도나 전위를 거부하고 대중들의 자율과 자기 결정을 존중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습 속에는 대중들을 자율적 주체로 호명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가 있을지도 모른다. 대중들이 자신을 주체로 판단하면 운동 지도부는 '지도하지 않는 지도부'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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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10-2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리뷰 쓰려고 했는데... 벌써 1년이 지났네;;;
대중적인 나같은 사람이 읽기에 아주 좋았다;;;;
 

인도 코시 강은 비하르의 슬픔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강이다.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코시는 히말라야 신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버림을 받아 평생을 눈물로 보냈고, 그녀의 눈물이 홍수를 일으켰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고 있다...
.....
인도는 모성사망륭이 높은 국가다.
.....
비하르의 거대한 난민촌에는 너무 많은 어머니와 아기들이 있었다. 그들 중 어떤 한 사람이 아닌 모두를 우리는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사리타와 아기가 당장 살아남는다 해도 지속적인 도움이 없다면 건강한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다."
......
비하르에서 마주친 가장 경이로운 사실은 엄청난 홍수 속에서 생명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놀라운 곳에서 놀라운 방법으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방이 물로 가득찬 좁은 지붕 위에서 사리타가 기적처럼 아기를 낳았듯이 말이다.

-유니세프인도사무소의 어린이 생존/보건 전문가 jorge caravotta

 

5세 미만 어린이 사망자 수 1990년 1270만 명에서 2007년 920만 명으로 감소...

-유니세프

 


홍수같은 슬픔을 박차고 나온 생명의 경이로움을 기적이라 불러도
인간들 틈 속에서 방치된다면 그 흔한 통계적 수치로 전락하고야 만다...
작아지는 숫자... 진정한 기적은 스파크가 아닌 군불처럼 데워지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 빚어낸 지극히 인간적인 현상 속에 있다.
우연이란 없다.. 이유있는 미래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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