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서평단 알림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 이랜드 노동자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6
권성현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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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가?
송광수 검찰총장 : 이념은 그러하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사람은 저마다 인간답게 살 권리를 안고 태어나지만, 그것을 지켜내야만 하는 운명도 함께 쥐고 살아간다. 착취에 맛을 들인 금수 같은 억압자들이 존재하는 한 약자는 가혹한 환경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지배구조의 안정화를 위해 탄생했던 법이 자본주의를 만나더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만인에게 평등한 법은 사라지고 “만 명의 부자에게만 평등한 법”이 되었으니 믿을 것은 오히려 인간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시스템도 신도 구원할 수 없으니까.
   그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모두의 문제라는 공감대를 형성한다면 쉬운 문제가 일 수도 있었을 텐데… 비정규직 문제는 점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처럼 늘어나고 길어져 간다. 인간답게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이전에는 가능했던 것이 이제는 왜 불가능한 것이 되었을까. 다른 나라에서는 가능한데 왜 여기서는 안 되는 것일까. 자본의 탐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을 철저하게 소외시키고, 모두의 문제를 개인에게 떠 넘기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비정규직 노동자가 800만이 되었다.
너의 문제로만 생각했던 것이 진짜 우리의 문제였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 - 마르틴 니묄러

맨 처음 나치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 정부는 사회 민주주의자들을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 민주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다음, 정부는 노동조합원을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정부는 유태인들을 잡아갔다.
그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마침내 정부는 나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나를 위해 항변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위치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말이 새삼 피부에 와 닿는 요즘이다. 많은 이들이 경험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냉소와 무관심으로 반응하고 있으니 말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는 것이 두려워서 일까. 우리나라에 그토록 가진 자들이 많았던가? 납득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짐을 짊어지고 있지 않더라도 그것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점이다. 이랜드, 코스콤, 기륭, KTX에서 그러했듯이 그것은 일상처럼 우리를 덮칠 것이다. 예외는 없다. 언제나 선택 받은 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자본은 냉혹하다. 빗겨간다 하더라도 행복할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자신만의 파랑새를 쫓아 나선다고 확률적으로도 높아질까? 혼자 잘된 경우 과연 있을 수 있나? 천운으로 부모를 잘 만난 거 빼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인간은 상호부조를 해야 성공한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전문가 시스템이 발달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극히 소수를 위한 시스템일 뿐이다.

“개체들이 서로 협력을 유지할수록 서로를 더 돕게 되고, 지적인 발전을 더 진척시킬 뿐 아니라 종의 생존기회를 더 높인다.” -케슬러


스스로를 해방코자 하는 이들이 짊어진 짐의 무게가 우리의 일상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그 무게는 결코 줄지 않는다.

투쟁을 계속하실 수 있는 원동력이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지키는 거요. 114p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마저도 포기한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사람들인데, 어찌 그 무게에 쉽게 눌릴 수 있겠는가. 연대란 그 무게를 함께 감당하는 것. 그들이 겪는 고통의 분배가 진정한 투쟁, 승리를 위한 투쟁이 될 것이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자 스스로의 일이다.” -크로포트킨


그들의 희망에 우리의 희망을 걸 때다. 현재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미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다. 노동만이 왜 희망이어야 하는가. 불로소득으로 세상을 군림하려는 자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할 것이 우리에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의무이다.

“당신의 표를 모조리 던져라. 종이쪽지 한 장이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져라.”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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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8-08-2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인지 살짝 인터넷서점 뒤져봤는데 인터뷰식으로 엮은 글 같아요~
비정규직 보호한다고 입법한게 엉성해서 사실 사주들이 탈법행위도 많이 하고...
근로기준법이나 노동관계법이 사실 가장 진보적이기도 하고 법의 정신을 잘 살려놓은거기도 한데, 법하고 현실하고 가장 다르게 돌아가는게 또 이 분야이기도 하고...답답해요.
그래도 싸워야죠.

라주미힌 2008-08-20 15:24   좋아요 0 | URL
예 ..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았어요... 투쟁하면서 느낀 좌절, 회의, 울분 등 솔직한 얘기들이 많아요. 가장 소박하지만 강건한 해방에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던 책입니다.. 꼭 읽어보세용.. :-)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 이랜드 노동자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6
권성현 외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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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안을 100퍼센트 따 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살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거를 알게 되었다는 것, 정치도 그렇고 내 권리가 뭔가, 내 권리는 내가 목소리 내야 되는구나. -68쪽

투쟁을 계속하실 수 있는 원동력이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나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지키는 거요
-114쪽

파격 세일 광고지를 들고 이랜드에 간다. 홈에버에 가고, 2001아울렛에 가고, 킴스클럽에 간다. 가까운 매장에서 카트를 밀고 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구둣발 밑에 무엇인가가 으깨어지는 소리를 감지할 수 있을까? 그건 당신의 인생일지도 모르는데… -129쪽

투쟁이 자꾸 장기화되면서 국민들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싸움으로 인식할까 봐 걱정이에요. -189쪽

오죽하면 저럴까 한 번쯤은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215쪽

이랜드의 기독교 기업 문화는 조합원들을 순치시키기 위한 기제였다. 단적인 예로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이유로 퇴사 종용, 전 사원에 대한 금연과 금주 강요, 기독교 기업임에도 주일영업을 강요했다. 또한 사내 기도실에는 신앙과 무관한 ‘목표 달성’이란 기도 제목이 버젓이 적혀 있으며, 기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신앙의 집단화를 통한 이윤 확보를 위해 노동자들의 희생과 봉사를 강요했다. ~ 중략 ~ 뿐만 아니라 손님으로 가장해서 업무를 비밀리에 감시하는 모니터링 제도, 점프 교육, 반장의 허가 없이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조차 금지되고, 심지어 립스틱 색깔까지 지정해 주는 등 비인간적인 노무관리를 자행했다. -276쪽

박성수 회장님, 아니 장로님
신앙인의 양심으로 돌아가셔서 장로님이 믿는 또한 내가 믿는 예수님을 욕보이지 마세요.
많은 복을 받으신 존경받을 장로님.
장로님을 복 주실 때는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소외된 자와 함께 하라고 복 주신 겁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마시고 가진 것 나누시고 더 많은 복 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요구는 소박합니다.
일자리, 안정되게 해달라는 것.
있는 자리에서 불안하지 않게 일하게 해달라는 것.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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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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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집을 나갔다. 선진국으로 가고 있다는 경제지표도 발표되고는 있지만 노동권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노동자들을 짓밟는 사태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며 살아가기에는 남은 인생이 너무나 길어 이책 저책 읽다가 이 책을 들었는데, 운이 좋은 건지 ‘시한부인생’을 선고 당했다. 인생의 꽃을 피울 확률도 줄어든 마당에 마무리는 전쟁으로 장식 할거라니…
날벼락 같은 경제학자의 정치학적 예언이 반갑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서 동공의 떨림을 쉽게 제압하고, 의사선생님께 ‘저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라는 심정으로 읽어보았다. 그러나 교육감 하나 제대로 못 뽑는 현실 꼬라지를 생각해 보니 땅이 패일 듯한 한숨만 나온다.

저자의 주장은 역시나 명쾌했다. 국내의 사회적 경제적 불균형이 커짐으로써 안정을 찾기 위한 대안으로 외부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적 침탈로 이어질 것이다 라고 전망했다. 자원과 에너지, 식량을 국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다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팽배한 한국적 성향은 이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가속화 할 것이며, 중국과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성깔이 만만치 않다는 점 때문에 제국주의적 본능을 깨우는 데에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적, 문화적 교류, 경제적통합 등으로 ‘평화’가 밥 먹여 주는 시스템을 가져와야 하며, 전쟁보다 평화를 외칠 수 있는 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도돌이표식 주장으로 가득 채웠다.

경제성장만 외치는 경제학자들이 청와대를 위해 일하는 요즘에 평화를 말하는 경제학자의 등장이 반갑기는 하다. 그의 저작들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시대가 목말라 했던 책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문제는 약자에게 돌아올 평화의 몫이 있을까라는 점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전쟁이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의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과연 한국이 시스템적으로 그들의 입김을 막을 수 있을까.
혹시 평화란 구걸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좀 더 암울한 궁금증이 생겨난다.
죽을 힘을 다해야 지켜질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처럼 지켜내지 못하면 죽는 것이 평화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아주 복잡하다.

힘이 지배하는 국제외교에 있어서 이것은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이다. 국내에 평화를 원하는 세력이 많다고 평화가 구축될까? 이라크 시민들은 전쟁을 원해서 미국의 700조짜리 미사일을 온 몸으로 받아낸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그루지아, 유고… 근래에 일어났던 전쟁 중에서 국민이 원해서 했던 전쟁이 과연 있었을까. 저자의 말대로 ‘전쟁으로 부유해지는 세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그들과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함은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법과 질서라는 테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약자의 선택은 철저히 무시된다. 비정규직, 미친소, 재개발 지역 ‘난민들’, 부안, 대추리 주민들, 등등등
먼 얘기 같다면 좀 더 가까운 현실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날이 더울수록 에어컨 가동률이 높아지는데, 사람마다 느끼는 온도가 다르니깐 온도조절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온도는 가장 파워가 있는 사람이 느끼는 적정온도에 맞춰지게 마련이다. 덥건 춥건 약자는 에어콘 온도를 선택할 수 없다. 18도에 맞춰져 있는 에어컨이 저주스럽더라도 18도에 맞춰진 그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파워가 있을 경우라면 모를까. 직장사회는 인내를 미덕으로 요구하고 작동한다.
이건 대화와 타협의 문제가 아니다. 대화하는 순간부터 이것은 분쟁이고 갈등이 된다. 전적으로 누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다. 어쩌면 이것이 평화의 진정한 모습일 수도 있다. 일방적으로 불편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평화의 성질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전쟁이 없다고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굴복과 좌절 위에 서 있는 평화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에 대해 기꺼이 눈을 감을 수 있다면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평화와 전쟁이 일부만 피를 흘리느냐 모두가 흘리느냐 단지 차이가 이것 뿐이라면?
가진 거라곤 애국과 민족뿐인 사람들에게 어떤 평화를 안겨줄 것인가..
그들이 바라는 건 단지 ‘경제적인 평화와 안정’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평화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거대한 이념의 창을 열어 줄 수 있다는 착각은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쟁은 지극히 이성적인 탐욕이 빚어낸 재앙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을 것이다.
유럽의 평화, 그것이 과연 영구적인 평화일까?. 100년도 안된 시스템이지 않은가. 또한 큰 흐름 속의 지금의 단기적 평화를 위해 흘려야만 피를 생각한다면 이 책에서 소개된 스위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스위스가 부를 축적하게 된 과정과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 또한 그다지 평화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중립의 비열함도 가볍게 넘겨서는 안될 부분이다.

나의 배부름으로 타인의 배고픔을 잊는 현실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보다 어떤 행동이 있어야 하는가는 여전히 물음으로 남는다.
그 행동의 앎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먹히는 ‘분위기 조성사업’을 이런 책들이 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과연…

결국은 덩치를 키우는 문제, 국방력 강화, 긴장 상승이라는 순환논리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전쟁을 막기 위한 장치로 부국강병 밖에 모르는 사회니까.
아이러니 한 것은 한반도 평화가 그나마 지켜지고 있던 것은 우리에게 전쟁할 권리가 없었다는 점이고(그럴 능력도 없었지만) 미국의 안보전략에 한국이 기생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친미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부유해진 것도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한, 전쟁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더 이상 먹거리가 없어지고, 그들의 기반이 약해진다면 반드시 발생할 것이 전쟁이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평화 세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체타이밍도 중요해 보인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면 국제사회와의 연대만이 살길인 것은 맞다. 그런데 수구 꼴통들을 자꾸 국회로 보내냔 말이다. 아직도 우리는 국민 계몽 시대를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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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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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테오도르 칼루자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3차원만이 아닌 그 이상의 차원으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다차원에 관한 아이디어는 기존 물리학의 기반을 흔들었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론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사는 차원이 다른 차원의 일부일 뿐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은 차원을 확장하면 할수록 스펙터클한 변화를 맞게 된다. 그렇다고 여분의 차원이 우리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 인하여 우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띄게 된다. 선과 면, 공간, 시간.. 그 이상의 차원을 알게 된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세계를 기존의 관념대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공간의 틈을 메워 좀 더 견고한 세계관을 갖추는 일은 어쩌면 우주적으로 숭고한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행동과 삶의 양식에 일어나는 잔잔한 파장에 몸을 맡기는 것도 흥이 나는 일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양한 차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차원 속의 차원… 우리는 모두 같은 시대,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착각을 최규석이 가볍게 부셔버렸다. 나와 1살 차이인데, 그와 나의 경험은 반세기를 넘나들었다. 그의 말마따나 시간은 마디마디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겹쳐져서 진행되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를 생각치도 못한 곳에서 마주하게 되니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역사책에 있던 그런 이야기들과는 때깔부터 다르고, 국가와 기관, 엘리트 계급이 만들어낸 시대의 논리가 전혀 닿지 않은 곳의 이야기는 감동이라 부를 수 없는 어떤 다른 차원의 감흥을 안겨준다. 이 불완전한 세계의 다른 한 켠에서 기록된 역사,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것을 품으로 당겨올 수 밖에 없는 끌림이 묘한 매력이라고나 할까.

대한민국의 원주민… 오스트레일리아나 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격리 보호’라는 이름으로 구경거리나 배제의 다른 이름으로써의 원주민이 아니라. 자신에게 익숙했던 것들과 타의적으로 격리된 사람들을 지칭하기에 적절한 의미를 갖는 단어인 것 같다. 이데올로기의 격전에서 살아 남아 산업화, 도시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어슬렁거리는 이 땅 위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으나, 그 존재의 흔적들마저 지워져 가는 사람들. 마치 소립자처럼 현대인에게 관측되기 힘든 돌돌 말려있는 차원에 사는 수 많은 원주민들을 최규석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끄집어내려 한다.

1차원의 시간과 9차원의 공간… 우리가 사는 세계를 당연하다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은 사연과 이름들이 있다. 그것 하나 하나의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우리의 시야는 3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나 싶다. 시간에 쫓기고, 바둥거리는 공간 속에서 욕망 하나 움켜쥐고 퀭한 눈을 번뜩이며 과잉 식욕과 파괴적 발전에 가열차게 전진만을 외치는 현인류에게 그는 은근히 날카로운 비수를 들이댄다.
‘니들이 우리 세계를 알간?’

최규석의 경험과 기억, 아마도 그것을 공감하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19세기 하겐베크가 인간을 전시 했던 동물원처럼 이 책이 읽힌다면 심각한 오독이다. 먼 시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난과 결핍, 모두가 몸서리치는 그것에 익숙해지는 법도 있음을 진지하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막연히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 없고 스스로가 강한 자가 아님을 깨닫고 웃어넘기는 최규석 작품에서 물씬 풍기는 인간적 원숙함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세상에 의해 길러졌으니까.

"원주민들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뚜렷하게 인식한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최규석은 빈궁함 때문에 우리 시대를 더욱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책에서 느껴지는 종이에 베인 살갗의 느낌은 섬세하게 혈도를 짚어가는 그의 시선에 있지 않나 싶다.



올림픽이 열리고 있으니깐 국가와 정부에 대한 증오가 넘쳤던 광장에 '죽어 버린 국가'의 이름을 목놓아 외치는 빨간 남방의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까.
이들은 뭘로 불려야 적당할까… 대한민국 좀비?
하여간 재미있는 세상이다... 다양한 차원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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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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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는 없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도시에서 태어나 유치원이나 피아노학원을 다녔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엄마와 함께 가봤거나
생일파티란 걸 해본 사람들에 대한 피해의식, 분노, 경멸, 조소 등이 한데 뭉쳐진 자그마한 덩어리가 있다.
부모님이 종종 결혼을 재촉하는 요즘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어쩌면 존재하게 될지도 모를 내 자식을 상상하게 된다.

상상하다보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 아이의 부모는 모두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고
~중략~

그 아이의 환경이 부러운 것도 아니요,
고통 없는 인생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소리도 아니다.
다만 그 아이가 제 환경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것으로 여기는,
그것이 세상의 원래 모습이라 생각하는,
타인의 물리적 비참함에 눈물을 흘리 줄은 알아도 제 몸으로 느껴보지는 못한
해맑은 눈으로 지어 보일 그 웃음을 온전히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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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8-11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는 오늘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 리뷰 올렸는데...

라주미힌 2008-08-11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봤어요.. :-)

Alicia 2008-08-1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책 웬디님 소개받고 알았는데 아직 읽진 못했어요. 한번 보고싶은 책이에요. 이즈음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자주 올라오는 것 같아요.^^

라주미힌 2008-08-1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먼 다큐멘터리 같아서 읽다가 푹 빠지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