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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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집을 나갔다. 선진국으로 가고 있다는 경제지표도 발표되고는 있지만 노동권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노동자들을 짓밟는 사태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며 살아가기에는 남은 인생이 너무나 길어 이책 저책 읽다가 이 책을 들었는데, 운이 좋은 건지 ‘시한부인생’을 선고 당했다. 인생의 꽃을 피울 확률도 줄어든 마당에 마무리는 전쟁으로 장식 할거라니…
날벼락 같은 경제학자의 정치학적 예언이 반갑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서 동공의 떨림을 쉽게 제압하고, 의사선생님께 ‘저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라는 심정으로 읽어보았다. 그러나 교육감 하나 제대로 못 뽑는 현실 꼬라지를 생각해 보니 땅이 패일 듯한 한숨만 나온다.

저자의 주장은 역시나 명쾌했다. 국내의 사회적 경제적 불균형이 커짐으로써 안정을 찾기 위한 대안으로 외부에 눈을 돌리게 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적 침탈로 이어질 것이다 라고 전망했다. 자원과 에너지, 식량을 국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다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팽배한 한국적 성향은 이에 대한 가능성을 더욱 가속화 할 것이며, 중국과 일본도 우리나라처럼 성깔이 만만치 않다는 점 때문에 제국주의적 본능을 깨우는 데에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적, 문화적 교류, 경제적통합 등으로 ‘평화’가 밥 먹여 주는 시스템을 가져와야 하며, 전쟁보다 평화를 외칠 수 있는 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도돌이표식 주장으로 가득 채웠다.

경제성장만 외치는 경제학자들이 청와대를 위해 일하는 요즘에 평화를 말하는 경제학자의 등장이 반갑기는 하다. 그의 저작들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시대가 목말라 했던 책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문제는 약자에게 돌아올 평화의 몫이 있을까라는 점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전쟁이 미국,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의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볼 때, 과연 한국이 시스템적으로 그들의 입김을 막을 수 있을까.
혹시 평화란 구걸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좀 더 암울한 궁금증이 생겨난다.
죽을 힘을 다해야 지켜질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처럼 지켜내지 못하면 죽는 것이 평화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아주 복잡하다.

힘이 지배하는 국제외교에 있어서 이것은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이다. 국내에 평화를 원하는 세력이 많다고 평화가 구축될까? 이라크 시민들은 전쟁을 원해서 미국의 700조짜리 미사일을 온 몸으로 받아낸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그루지아, 유고… 근래에 일어났던 전쟁 중에서 국민이 원해서 했던 전쟁이 과연 있었을까. 저자의 말대로 ‘전쟁으로 부유해지는 세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그들과 우리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함은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법과 질서라는 테두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약자의 선택은 철저히 무시된다. 비정규직, 미친소, 재개발 지역 ‘난민들’, 부안, 대추리 주민들, 등등등
먼 얘기 같다면 좀 더 가까운 현실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날이 더울수록 에어컨 가동률이 높아지는데, 사람마다 느끼는 온도가 다르니깐 온도조절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온도는 가장 파워가 있는 사람이 느끼는 적정온도에 맞춰지게 마련이다. 덥건 춥건 약자는 에어콘 온도를 선택할 수 없다. 18도에 맞춰져 있는 에어컨이 저주스럽더라도 18도에 맞춰진 그들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파워가 있을 경우라면 모를까. 직장사회는 인내를 미덕으로 요구하고 작동한다.
이건 대화와 타협의 문제가 아니다. 대화하는 순간부터 이것은 분쟁이고 갈등이 된다. 전적으로 누가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다. 어쩌면 이것이 평화의 진정한 모습일 수도 있다. 일방적으로 불편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평화의 성질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전쟁이 없다고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굴복과 좌절 위에 서 있는 평화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에 대해 기꺼이 눈을 감을 수 있다면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평화와 전쟁이 일부만 피를 흘리느냐 모두가 흘리느냐 단지 차이가 이것 뿐이라면?
가진 거라곤 애국과 민족뿐인 사람들에게 어떤 평화를 안겨줄 것인가..
그들이 바라는 건 단지 ‘경제적인 평화와 안정’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평화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 거대한 이념의 창을 열어 줄 수 있다는 착각은 위험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쟁은 지극히 이성적인 탐욕이 빚어낸 재앙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면, 인류의 역사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을 것이다.
유럽의 평화, 그것이 과연 영구적인 평화일까?. 100년도 안된 시스템이지 않은가. 또한 큰 흐름 속의 지금의 단기적 평화를 위해 흘려야만 피를 생각한다면 이 책에서 소개된 스위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스위스가 부를 축적하게 된 과정과 약소국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평화를 얻기 위한 방법 또한 그다지 평화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중립의 비열함도 가볍게 넘겨서는 안될 부분이다.

나의 배부름으로 타인의 배고픔을 잊는 현실에서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 보다 어떤 행동이 있어야 하는가는 여전히 물음으로 남는다.
그 행동의 앎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먹히는 ‘분위기 조성사업’을 이런 책들이 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과연…

결국은 덩치를 키우는 문제, 국방력 강화, 긴장 상승이라는 순환논리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전쟁을 막기 위한 장치로 부국강병 밖에 모르는 사회니까.
아이러니 한 것은 한반도 평화가 그나마 지켜지고 있던 것은 우리에게 전쟁할 권리가 없었다는 점이고(그럴 능력도 없었지만) 미국의 안보전략에 한국이 기생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친미 보수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부유해진 것도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한, 전쟁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더 이상 먹거리가 없어지고, 그들의 기반이 약해진다면 반드시 발생할 것이 전쟁이다.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찬이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평화 세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체타이밍도 중요해 보인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면 국제사회와의 연대만이 살길인 것은 맞다. 그런데 수구 꼴통들을 자꾸 국회로 보내냔 말이다. 아직도 우리는 국민 계몽 시대를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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