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펠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지호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침팬지 6만 5천 달러, 기린 4만 달러, 호랑이-사자 2백 달러.
미국에서 인기 있는 ‘애완 야생동물’의 가격표이다. 일단 호랑이, 사자가 의외로 싸서 놀랍다. 당신도 그래? 이외에도 거북류, 파충류, 양서류, 조류, 영장류, 어류 등 종의 다양성과 형평성에 의거하여, 인간 앞에 무력한 모든 ‘미물’들은 마음만 먹으면 인간의 소유가 될 수가 있다. 원숭이, 개, 도마뱀 등의 ‘동물 육성 쇼’를 담당했던 연예인들의 대활약으로 한국의 애완시장도 많이 성장했으나, 아직은 미국을 따라잡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듯 하다.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를 생활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고 있자니, 야생 동물을 굳이 가까이 하려는 노력보다는 거울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새끼일 때는 귀엽다고 유희의 놀잇감으로 전유하다가 야생의 습성이 드러날 만한 덩치가 되면 방치하여 굶겨 죽이는 ‘야만성’은 ‘희귀 동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습성이니까. 이 책의 원제가 Savage and beasts인 이유는 이미 말해 버렸다.

그렇다고 야생 동물 보호를 위한 소수의 노력, 동물원이 가지는 일부의 긍정적인 효과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 책의 논조 또한 그러한 것의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주목적은 동물원의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되새겨 인간의 시선이 멈춰 선 그곳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채워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려져 있던 것은 벗기고, 보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보게 하자는 데에 있다. 이것은 상당한 지적 쾌감으로 다가오면서 인식의 재정립을 위한 노력을 요한다.

동물원의 탄생이라, 어떤 비화가 담겨있을까. 자! 빠져 봅시다.
희소성의 원칙, 인간의 호기심은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정복의 당위성을 성장시키는 발육제로 작용한다. 제국주의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원리를 충실히 이행하여 정치적, 군사적 행위로 수 많은 식민지 인민의 피와 행복, 자원 등을 쪽쪽 빨아먹게 된다. 강자와 약자 사이의 균형은 힘에 의해 좌우되고, 그 힘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승자의 전리품이 되었다. 그 중에 한 패키지 상품이 있었으니 ‘야생 동물’은 풍부하면서도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낮선 땅의 낯선 생물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귀족들의 부와 명성의 상징이 되었고, 제국의 식민지 지배력의 표상이 되었다. 이후에 꿈틀대는 자본주의의 망령은 대중의 욕망을 등에 업고, 자본주의적 감수성을 자극하여 야생 동물 거래로 이익을 창출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동물원은 바로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구축된 ‘거대한 사육장’이면서 ‘전시관’이었던 것이다. 포획자들은 때로는 영웅의 이미지로, 때로는 모험가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5마리의 새끼 코끼리를 잡기 위해서라면 50마리의 어미 코끼리라도 거리낌없이 도살하는 등의 만행들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것은 ‘문명인’들의 특권이었고, 거대한 죽은 코끼리 위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스스로의 존엄성에 대한 과시이기도 하다. 대중적 관심이 이러한 혐오스러운 살육행위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부터 거래상들은 세련미를 더하기 시작한다. 무질서한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서 ‘선한 문명’의 힘으로 보호하겠노라. 그들은 스스로를 노아의 방주이자 구세주로 선언한다. 창살이라는 부자연스러움을 제거하고, 자연상태 가까운 우리에 동물들을 사육함으로써 대중을 착각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동물들의 편의가 보장되고, 보호 받고 있구나’. 멸종 위기의 동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현대적인 동물원에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멸종의 이유와 보호의 이유는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혹은 우리는 그 관계를 어느덧 잊어버렸다.

동물원에서 동물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의 탐욕이 서려있고, 대중의 요구가 담겨 있다. 유희적 생명체, 정복의 대상체. 우리는 ‘그것’들을 보면서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느끼고 만족하는 것이다. 동물원의 역사는 이것을 포장하고, 미화하여 그 실체를 가리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

이외에도 원주민을 ‘원시인’으로 보는 ‘문명인’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 전시’, 정복과 복종, 길들이기와 순종의 미학 ‘서커스’로 수익 구조의 다양화로 불황을 극복하는 모습들이 펼쳐진다. 사실 ‘인간 전시’와 ‘동물 전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공유한다. 바로 착각이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점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고, 또 인간 속에서 문명과 비문명을 구분 지어 우등과 열등을 가려낸다. 결국은 제국주의 논리가 되어 ‘너의 자유’를 속박하더라도, ‘나의 문명’으로 ‘너의 야만’으로부터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왕자병이 문제인 것이다. 동양의 식용견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보인 동물 애호가 브리짓 바르도의 개사랑이 인종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와의 연계성을 생각해 볼만 하다. 우스갯 소리지만, ‘개만도 못한 놈’이란 욕은 자신을 개에 대한 우위적 지위를 전제로 삼아, 그것보다 못한 상대를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효과와 상대를 격하시키는 효과를 동시에 낼 수 있다. 브리짓 바르도는 그런 존재다. 그녀의 당당함은 생물학적 우위, 인종적 우위라는 자기 기만적 착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변태적인 역사인식 또한 같은 맥락이다. 서구열강에 먹히느니 같은 동양에 먹히는 것이 낫다. 그리고 우리의 문명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다고 하는 식의 주장 말이다.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에 보면 선택의 자유는 있으나 운명에 대한 자유 앞에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동물원의 탄생’에서 중요한 소재로 소개되는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는 대중의 속물적 기대에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술가의 고뇌를 엿 볼 수 있다. 이 두 이야기 모두 자유의 본질에 대한 탐색과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는데, 동물원 동물들의 자유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들을 위한 곳이라면 그들은 어디서 왜 왔는가? 같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관련 도서로 ‘스픽스의 앵무새’는 인간의 무자비한 밀렵과 거래로 인하여 앵무새가 마약 시장이나 불법 무기거래 시장 규모에 버금가게 된 현실을 비판한다. ‘비싸서’ 또는 ‘멸종 위기라서’ 보호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의 첨예한 대립을 통하여 인류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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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뉴스의 두 얼굴
제정임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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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이 2002년 말에 나온 것을 보니 한참 대선이다 뭐다 해서 시끄럽고, 보수 언론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한참 달아올랐던 시기였던 것 같다. 어수선할수록 인간의 야욕과 이해의 충돌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면, 그 혼란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은 곧은 목소리는 보석처럼 빛나기 마련이다. 비교되게도 같은 시기에 언론 개혁의 선봉장 강준만씨의 수많은 책들이 노무현 사수를 위해 날카로운 정치성을 드러낸 반면에, 같은 언론 개혁을 말하는 이 책은 그러한 정치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순수 언론 비판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제목에 있듯이 경제 뉴스로 한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국 언론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취약성과 오점은 변하지 않기에 비판의 칼날은 한국 언론 전체를 향한다. 때문에 정갈하고 당찬 느낌이 드는 책이다. 또한 아주 촌스러운 표지 디자인이 무색하게 보석 같은 내용을 담은 책이다.

14년 기자생활을 한 저자의 양심고백의 목소리를 담은 이 책은 진원지의 지진과도 같다. 지금은 경제 섹션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2002년에 따로 분리되어 두꺼워진 분야), 신문의 경제면의 영향력은 날로 커지고 있다. 재테크 돌풍은 서점을 휩쓸었고, 몇 억 만들기는 시민들의 꿈이 되었다. 주식 시장의 들썩임에 개미 투자자들의 가정 불화도 들썩이는 시대 아니던가. 그런데 경제 관련 기사들이 왜곡되고 잘못된 정보라면 독자들은 고스란히 피를 보게 된다. 따라서 심봉사의 눈보다 어두웠던 독자의 눈을 뜨게 하는 ‘경제 뉴스의 두 얼굴’이라는 지진은 꼭 필요한 재앙이 된다.

설마 저렇게 언론이 지저분할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했다. ‘찌라시’는 조중동에만 해당되는 줄 알았더니 한국 언론의 구조적인 문제이며,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권력, 정치권력의 감시자가 되야 할 언론이 그들의 마이크 노릇으로 목숨을 연명하고 있으니 ‘찌라시’ 레벨은 귀납적인 결과였다. 죽은 언론은 사회정의의 죽음을 의미한다. ‘부패의 비용이 수익보다 훨씬 낮았기 때문에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것이다. 171p’. 누구 때문에 부패의 비용이 낮을까? 마땅히 항생제가 되어야 할 언론이 사적인 관계에 얽매여 있고, ‘빠르고 부정확한 정보’라도 좋으니 특종만을 추구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카드라’ 뉴스, 껍데기만 핥고 깊이는 없는 기사들, 여기 저기서 휘둘리고 치이고 꼴이 말이 아니다. 마땅히 미생물, 세균의 번영을 돕고, 공생을 추구한 죄는 불신과 일갈로 다스려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명확히 지적해 줄 수 있다는 것은 해결방안 또한 명확히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단은 독자의 높은 의식 수준을 의식하여 언론도 수준이 높아져야 할 것이다. 독자의 높은 의식 수준을 드러내려면 망하는 찌라시를 만들어야 한다. 망해도 싼 찌라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아직 망한 곳이 없으니 아직 그러한 희망은 요원한 것 같다. ‘특종경쟁보다는 뉴스의 이면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심층분석, 세상의 흐름을 집어내 주는 기획기사, 감춰진 비리를 고발하는 탐사보도 등 질적으로 차별화 된 정보를 기대한다. 285p’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러한 기대를 만족 시켜준다면 제대로 된 언론이라 하겠다. 언젠가는 신문기사가 학술자료로 인용될 만큼의 신뢰와 깊이를 지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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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7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은 적극 동감입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역사학의 명제에 반기를 드는 책이다. 과거가 아닌 미래의 역사를 서술하겠다니, 무속신앙적인 예언서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저자의 시도가 아주 잘해봐야 흥미를 돋구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결과론적인 가치판단이 앞서기에 그러한 선입견을 어떻게 떨쳐내려 했는가는 이 책에 흥미를 가지게 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또 다른 이유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 후자가 이 책을 펼치게 된 대부분의 이유였을 것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나 종교적 신앙에 기반을 둔 예언서에 불과했다. 무엇을 믿고 숭배하느냐? 과학 저널리스트라는 저자의 직업을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과학 기술’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론은 흥미를 나름대로 잘 돋구었으니 성공은 했다고 본다. 종합한다면 들이킬 때는 청량음료처럼 시원한데, 마시고 나면 살만 찐다. 두세번 읽을 만한 영양가가 있는 책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영양가가 없어도 대중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매력은 무시할 수 없다. 학교 앞의 불량식품이 히트 상품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하니까. 시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인공색소, 미각을 자극하는 화학성분, 그리고 턱관절과 턱근육을 흥분시키는 탄력적인 질감은 단점이면서 장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선상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 봐야 할 ‘자세’를 이 책은 필요로 하고 있다.

일단 이 책은 치밀한 상상이 돋보인다. 생뚱맞은 내용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적 개념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기술들을 기반으로 하여 확장된 미래를 펼쳐놓기 때문이다. 유전자 공학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줄기 세포나 배아 복제, IT산업에서는 유비쿼터스, 나노 로봇, 인공지능 로봇, 양자 컴퓨터, 우주 공학의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우주엘리베이터, 우주 여행 등 이젠 너무나 흔한 주제가 되어버린 것들을 다룬다. 어떻게 보면 식상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 식상함을 덜어주는 것은 대중성을 의식해서인지 일반인들의 생활 풍경을 소설 쓰듯 표현했다. 그렇게 해서 딱딱하기 쉬운 기술 동향을 생활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읽기 쉽고 친근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이면서 읽어 본 독자들이 ‘생생하다’, ‘영화같다’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 부분이 가장 뛰어나게 표현된 곳은 1부 생물학 혁명과 2부 핵전쟁이다. ‘치밀하다’, ‘현실감 있다’라는 표현 이외에는 적당한 표현이 없다. 1부 생물학 혁명에서는 근래에도 많이 이슈가 되었던 생명 윤리에 관한 논란이 현란하게 펼쳐진다. 인간 복제의 상업성에 매몰된 과학자와 순수하게 인간 생명의 가치를 지키면서 기술을 접목시키려는 과학자. 이 두 형제 과학자들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가는 식의 이야기 전개는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지만 적절한 비유,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을 거의 대부분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고 긍정적으로 바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휴머니즘과 상업성의 조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다. 기적의 항암제라는 초국적 기업 노바티스사의 글리백이라는 약품을 두고 일어났던 사회적 논란을 기억한다면,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생명권이 기업의 이윤에 희생되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그늘은 유전자 공학이 주는 달콤함 열매에도 해당 될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책 전체적으로 봐서는 기술의 발전과 생활 풍경에 대한 상상이 치밀한 반면에 그것을 받쳐주는 제도와 문화에 대한 상상은 빈곤하다는 점이 매우 아쉽다. 예를 들면, 지적 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논란을 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술의 발전 속도를 제도와 법규, 시민 의식이 따라가지를 못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현상이다. 산업, 유통, 기술, 소비자, 문화의 균열은 점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은 정보 사회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는 한국 사회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위 정도의 문제는 독자의 판단과 고민에 맡겨도 되는 사안이지만, 3부 대혼란, 4부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보여지는 저자의 어리숙한 국제감각은 황당하게 펼쳐진다. 차라리 쓰지를 말았어야 했다. 미국의 MD가 중국 견제용이 아니라 깡패국가 이라크와 북한 때문이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미국인과 영국인이 썼다는 걸 너무 티내는 것 같다. 1조 달러 이상을 써도 될까 말까한 MD사업을 하는 이유가 1달 만에 점령한 이라크와 국제 지원 없이는 언제 망할지 모르는 북한 때문이라니… 그 외에도 중국의 위세에 눌린 일본의 외교 자세 또한 엉성한 누더기의 형상이다. 미국 몰락의 전조를 나타내는 부분은 유치함의 극을 친다. 화산, 지진, 주식 시장 급락, 심지어 점술가와 사이비 종교 지도자까지 등장하여 불안을 외친다. 마치 그것 같다. 국운이 쇄하면 신성한 나무가 울고, 부처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샘이 마르고…

이처럼 정상에 있는 자들이 느끼는 불안의 공통점은 정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전교 1등 하는 학생이 2등 했다고 자살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투머로우’는 사실 공포 영화였다. 세계 최강의 부국이 자연재해로 멕시코에 신세를 진다는 상황 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설정인가! 헐리웃의 수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불안은 늘 영웅을 필요로 했고, 이 책 또한 영웅을 생산해 낸다. 개인의 삶을 비춘다지만, 이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가상의 인물들은 엘리트적 영웅들의 모습이다. 세계 평화를 위해, 환경을 위해, 국가를 위해 리더가 되어 불안을 잠재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반세계화를 외치고, 국가 정책, 기술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을 아나키스트, 반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을 생산하는 세력이니까! 불안은 공공의 적이니까!

본인처럼 이것저것 따지면 재미없는 책이다. 상상이란 즐기는 데에 있다는 점을 숙지하고 그것에 충실하게 따라가면 몰입감은 꽤 클 것이다. 분량도 꽤 되고, 많은 정보를 다뤄야 했지만, 저자가 즐겁게 썼다는 것을 글에서 은근히 느낄 수 있다. 상상하면 상상할수록 빠져드는 가상의 역사 아닌가. 청소년기의 성적인 상상처럼 말이다.


쥘 베른 서거 100주년이라고 한다. 쥘 베른이 상상했던 오늘. 그리고 이 책이 상상한 미래.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미래에 대한 상상은 자기 투영이다. 자기가 바라는 유토피아적 환상. 내가 발견한 그곳에는 내가 바라던 것들이 있기를 기대하는 그런 심정이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당신들과 우리가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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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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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끔 상상한다. 아주 커다란 날개를 기지개 하듯 쭈욱 펼치는 상상을… 내 등의 살갗을 뚫고 나온 백색의 빛은 바람에 흐트러지고, 하늘은 가까워지고 마음은 편안해진다. 공허함이 나를 채우지만, 꼭 의미가 있어야 할 필요는 못 느낀다. 이번에는 우주의 반대편을 내 앞으로 잡아 당겨 지구를 뒤로 놓아 본다. 찰나의 힘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미세한 틈에 현실을 밀어 넣고, 만고의 기억을 더듬게 한다. 미래가 어제에 일어났다 해도 놀라울 것은 없으며, 과거 없이 나아가는 운명에 나직한 미소 한 방울 적선하는 여유는 신의 영역을 넘나든다.

환상, 몽상, 공상, 망상, 상상. 다양한 듯 하지만, 그 뜻을 형상화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단어에 가두어 둘 수 있는 성향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조하는 본인에게 있는데, 그것을 담아낼 그릇을 들이대는 것은 무모함이다. 그래도 그 안의 세상, 또 그 밖의 세상. 이 세상 저 세상에 양 발을 걸치고, 왼발 오른발을 딛었다 떼었다 하는 즐거움은 건조한 일상의 단비가 되어 준다.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은 알이 꽉 찬 열매의 과즙이 아니다. 대신 사막의 저편에서 거대한 갈증을 업은 자의 머리 속의 과즙에 가깝다. 상큼하고 입안에 싸악 퍼지는 달콤함에 대한 기억은 상상 속의 실재적 의미를 만들어 낸다. 입안에 가득 고인 침은 사막의 샘이 되고, 생의 기억을 이어가게 하는 힘이 된다. 그것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책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단편이라 그런가. 툭툭 던지는 상상의 나래는 짧아서 더욱 강렬하다. 이 책에 실린 8편 중에 하나인 ‘미스라임의 동굴’은 그 맛의 절정을 보여준다. 황홀한 기쁨의 탄성과 슬픔의 탄식. 모호한 경계에 독자를 놓아두고, 판단을 저 멀리 던져버린다. 너무 가혹해서 너무 좋다. 메조키스트도 아닌데 즐거운 고통이 황홀하다.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진실과 거짓에 대한 불가지론적인 세계관. 알 수 없으면, 알 수 없음을 즐겨라. 그런 것인가?

‘자유의 감옥’편을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이성적 판단에 조롱을 보낸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몰려온 억지성의 깨달음은 식상하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독특한 동화적 상상을 이끌어 낸다. 환상 소설의 제 역할을 충분히 했으니 그 선에서 만족한다. 사실 부실한 단편들도 몇몇 보이지만, 단 한편의 글, 단 한 문장이라도 건졌다면 충분히 성공한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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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배부른 식당
김형민 지음 / 키와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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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시청자의 위장을 농락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작된 맛집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종종 있었다(지금도 있나?). 볼 때마다 의문이 드는 것은 요란스럽게 먹어대던 그들의 입에 거짓이 담겨 있지 않은가?였다. 본인이 불신사회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 게시판이나 정보를 나눌 수 있는 곳을 가보면 ‘그 집 가봤는데 맛 없다’, ‘불친절하니깐 더 맛 없다’, ‘양은 적고 가격만 비싸다’, ‘방송국에 어떤 로비가 있었는가?’라는 글들을 꽤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도 있는데 가서 먹어보니 평범했다. 맛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척도 중의 하나이니깐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길을 가다 가끔 보이는 ‘어느 방송국에 소개된 맛집’이라는 간판들을 보면 머리 속에 물음표, 느낌표 백만스물한개가 둥둥 떠다닌다. 맛의 향기보다는 돈 냄새가 더 나는데 어쩔 수 없다. 그냥 가는 길 계속 걷는다.
‘요리왕 비룡’이라는 에니메이션을 보면 ‘요리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데 있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하물며 아이들이 즐겨 보는 에니메이션에도 철학이 담겨있는데, 수 십년이 녹아 있는 장인의 요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고작 맛이란 말인가? 오락성에 찌든 방송의 가벼움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난 것 같다. 사실 맛만 따진다면 엄마의 음식을 따라 올 수 없다(물론 예외는 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이전과는 차별화 된 성격을 지닌다. 맛보다는 사연, 인생, 철학, 마음을 퍼주는 식당들을 소개한다. 식당이라기보단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소개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먹는 장사가 남는 장사’라고 현대 사회에 있어서 음식점이란 상업성이 빠질 수 없는 경제활동이다. 그러나 욕심이 있었다면 나눌 수 없는 것이고, 철학이 없었다면 깊이가 없었을 삶이 아닌가.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은 음식이지만,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은 마음 뿐이란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훈훈한 인정을 엿볼 수 있다.

좋은 내용을 담은 좋은 책인데, 조금 불만족스러운 점은 저자가 PD라서 그런지 카메라를 들이대는 느낌을 들게 한다. 인터뷰를 하고, 장면을 설명하고, 마무리를 짓고… 방송에서 보던 그대로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사실적이고, 현실성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어쩌면 이 책의 성격에 잘 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용의 빈약성을 드러낸다. 분량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쫓기듯(마치 방송시간처럼) 이야기를 하다 말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설마 그것이 전부라고? 읽다 보면 뭔가가 더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접어야 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많은 이야기를 소개하려는 저자의 욕심 때문에 그런지, 아니면 더 듣고 싶은 나의 기대가 커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짧아서 더 좋을 수도 있고, 간결한 메시지만을 전달해서 좋을 수도 있겠지만,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먹는 것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소화 능력에 따라 그 시간이 좌우된다. 위에 들어 갈 수 있는 음식물의 양은 대략 2리터라고 한다(‘스티프’ 메리 로취 저). 그 이상을 먹으면 위가 터진다. 인간의 욕심은 우주의 끝까지 도달할 만큼 무한한대 겨우 2리터라니 좀 허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인생의 단골이 되어 찾게 되는 그 식당들에서는 생물학적 시간은 무의미하다. 게다가 마음의 배부름은 누적되고 영혼에 각인되어 이렇게 책으로도 널리 퍼진다. 마음은 얼마나 채울 수 있을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심그릇의 크기를 가늠해 보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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