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펠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지호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침팬지 6만 5천 달러, 기린 4만 달러, 호랑이-사자 2백 달러.
미국에서 인기 있는 ‘애완 야생동물’의 가격표이다. 일단 호랑이, 사자가 의외로 싸서 놀랍다. 당신도 그래? 이외에도 거북류, 파충류, 양서류, 조류, 영장류, 어류 등 종의 다양성과 형평성에 의거하여, 인간 앞에 무력한 모든 ‘미물’들은 마음만 먹으면 인간의 소유가 될 수가 있다. 원숭이, 개, 도마뱀 등의 ‘동물 육성 쇼’를 담당했던 연예인들의 대활약으로 한국의 애완시장도 많이 성장했으나, 아직은 미국을 따라잡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듯 하다.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를 생활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고 있자니, 야생 동물을 굳이 가까이 하려는 노력보다는 거울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새끼일 때는 귀엽다고 유희의 놀잇감으로 전유하다가 야생의 습성이 드러날 만한 덩치가 되면 방치하여 굶겨 죽이는 ‘야만성’은 ‘희귀 동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습성이니까. 이 책의 원제가 Savage and beasts인 이유는 이미 말해 버렸다.

그렇다고 야생 동물 보호를 위한 소수의 노력, 동물원이 가지는 일부의 긍정적인 효과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 책의 논조 또한 그러한 것의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주목적은 동물원의 역사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되새겨 인간의 시선이 멈춰 선 그곳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채워주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자면, 가려져 있던 것은 벗기고, 보지 못했던 것을 제대로 보게 하자는 데에 있다. 이것은 상당한 지적 쾌감으로 다가오면서 인식의 재정립을 위한 노력을 요한다.

동물원의 탄생이라, 어떤 비화가 담겨있을까. 자! 빠져 봅시다.
희소성의 원칙, 인간의 호기심은 끊임없는 인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정복의 당위성을 성장시키는 발육제로 작용한다. 제국주의는 역사 속에서 이러한 원리를 충실히 이행하여 정치적, 군사적 행위로 수 많은 식민지 인민의 피와 행복, 자원 등을 쪽쪽 빨아먹게 된다. 강자와 약자 사이의 균형은 힘에 의해 좌우되고, 그 힘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당연하게도 승자의 전리품이 되었다. 그 중에 한 패키지 상품이 있었으니 ‘야생 동물’은 풍부하면서도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낮선 땅의 낯선 생물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귀족들의 부와 명성의 상징이 되었고, 제국의 식민지 지배력의 표상이 되었다. 이후에 꿈틀대는 자본주의의 망령은 대중의 욕망을 등에 업고, 자본주의적 감수성을 자극하여 야생 동물 거래로 이익을 창출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동물원은 바로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구축된 ‘거대한 사육장’이면서 ‘전시관’이었던 것이다. 포획자들은 때로는 영웅의 이미지로, 때로는 모험가의 이미지를 가지고서 5마리의 새끼 코끼리를 잡기 위해서라면 50마리의 어미 코끼리라도 거리낌없이 도살하는 등의 만행들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것은 ‘문명인’들의 특권이었고, 거대한 죽은 코끼리 위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스스로의 존엄성에 대한 과시이기도 하다. 대중적 관심이 이러한 혐오스러운 살육행위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면서부터 거래상들은 세련미를 더하기 시작한다. 무질서한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서 ‘선한 문명’의 힘으로 보호하겠노라. 그들은 스스로를 노아의 방주이자 구세주로 선언한다. 창살이라는 부자연스러움을 제거하고, 자연상태 가까운 우리에 동물들을 사육함으로써 대중을 착각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동물들의 편의가 보장되고, 보호 받고 있구나’. 멸종 위기의 동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현대적인 동물원에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멸종의 이유와 보호의 이유는 뗄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혹은 우리는 그 관계를 어느덧 잊어버렸다.

동물원에서 동물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의 탐욕이 서려있고, 대중의 요구가 담겨 있다. 유희적 생명체, 정복의 대상체. 우리는 ‘그것’들을 보면서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느끼고 만족하는 것이다. 동물원의 역사는 이것을 포장하고, 미화하여 그 실체를 가리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

이외에도 원주민을 ‘원시인’으로 보는 ‘문명인’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 전시’, 정복과 복종, 길들이기와 순종의 미학 ‘서커스’로 수익 구조의 다양화로 불황을 극복하는 모습들이 펼쳐진다. 사실 ‘인간 전시’와 ‘동물 전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공유한다. 바로 착각이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점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고, 또 인간 속에서 문명과 비문명을 구분 지어 우등과 열등을 가려낸다. 결국은 제국주의 논리가 되어 ‘너의 자유’를 속박하더라도, ‘나의 문명’으로 ‘너의 야만’으로부터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왕자병이 문제인 것이다. 동양의 식용견에 대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보인 동물 애호가 브리짓 바르도의 개사랑이 인종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와의 연계성을 생각해 볼만 하다. 우스갯 소리지만, ‘개만도 못한 놈’이란 욕은 자신을 개에 대한 우위적 지위를 전제로 삼아, 그것보다 못한 상대를 정의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효과와 상대를 격하시키는 효과를 동시에 낼 수 있다. 브리짓 바르도는 그런 존재다. 그녀의 당당함은 생물학적 우위, 인종적 우위라는 자기 기만적 착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일본의 변태적인 역사인식 또한 같은 맥락이다. 서구열강에 먹히느니 같은 동양에 먹히는 것이 낫다. 그리고 우리의 문명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다고 하는 식의 주장 말이다.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에 보면 선택의 자유는 있으나 운명에 대한 자유 앞에서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동물원의 탄생’에서 중요한 소재로 소개되는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는 대중의 속물적 기대에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술가의 고뇌를 엿 볼 수 있다. 이 두 이야기 모두 자유의 본질에 대한 탐색과 철학적 고민이 담겨 있는데, 동물원 동물들의 자유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들을 위한 곳이라면 그들은 어디서 왜 왔는가? 같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관련 도서로 ‘스픽스의 앵무새’는 인간의 무자비한 밀렵과 거래로 인하여 앵무새가 마약 시장이나 불법 무기거래 시장 규모에 버금가게 된 현실을 비판한다. ‘비싸서’ 또는 ‘멸종 위기라서’ 보호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의 첨예한 대립을 통하여 인류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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