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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죽어가는 한 나치의 참회를 들어야만 했던 한 유대인의 불안과 고민, 참상을 담은 실제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받아들이고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를 당신에게 질문하며, 이에 대한 많은 지식인과 종교인, 학자들의 포럼으로 2부를 장식한다.
이 책의 질문은 다수의 다양한 사람들과 고민을 하게 하고, 그것이 우리의 역사와 삶에 투영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죽어가면서 남긴 한 나치의 반성을 용서해 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질문이었지만, 질문 그대로를 쓰기엔 약간 핀트가 안 맞기 때문에 좀 더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고, 당사자(피해자, 가해자)도 아니며 그 자리에서 벌어진 일들이 갖는 의미는 지극히 미시적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참회를 역사적인 것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역사적인 사실로 각인되어야 할 것을 개인의 용서로 축소하는 식으로 하나의 논의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가령, 2차 세계대전 중에 아시아에서 저질러졌던 제노사이드와 반인륜적인 범죄를 참회하는 몇몇의 일본인들의 반성을 국가적인 것 또는 역사적인 것으로 피해국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용서의 사전적 정의는 ‘잘못이나 죄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끝냄’이다.
‘공익을 목표로 하는 사회라면 용서 받을 일을 저지르기보다 용서하기가 더 쉬워서는 안 된다’고 이 책에 쓴 홍세화씨의 글은 명확하고도 날카롭게 이를 지적한다. 용서는 결코 남발될 수 있는 성향을 지니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용서할 수 없는 것조차도 용서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기만행위의 결과로 나타났지, 위대한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사형은커녕 사면된 전두환,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도 말짱한 사회 지도층, 부유층들…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용서한 자들 또한 용서될 수 없다.
난 이렇게 질문을 바꾸겠다. ‘용서할 수 없는 짓들을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만 하는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으로 처벌, 보상, 복원이라는 조건을 미래 지향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하겠다. 처벌은 단순한 복수 차원이 아닌 훼손된 정의와 역사적 진실을 되돌리기 위한 당연한 권리라고 본다. 처벌에 의한 가해자의 죄의식과 참회는 그렇게 역사적인 것이 되고, 은폐와 망각에 지워질 수 없는 의미로 남을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며, 미래의 참상을 방지하려는 예방적 보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은 과거를 닫고 미래로 향하는 현재의 정상성을 복원하는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이것 한 가지는 확실하죠. 바로 독일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비록 개인적인 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최소한 수치심만큼은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죄를 저지른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마치 승객이 전차에 올라탔다가 내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연 누가 죄를 지었는지 찾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독일인 모두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5p
독일인을 이스라엘의 유대인으로 바꿔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에 대해 똑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누구보다도 그 고통을 잘 안다는 것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나치와 별반 차이가 없다. 게다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위와 같은 고민은 사치스럽다. 피해의 역사를 뒤집어 쓰고서 가해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으로 뻔뻔하게 포장한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듣기 싫다. 인간의 비인간성을 인간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실례를 그들이 보여주기에 곤혹스럽다.
이 책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나치와 유대인의 무덤에 사이 좋게 피는 해바라기를 소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