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성적 판타지, 그 홈파인 공간

*변강쇠가의 의문 - 변강쇠가가 사설만 전하고 판소리는 전하지 않는데 대해 그 내용이 당시 집권양반층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 하지만 역으로 신재효 전집의 판소리 12마당중 6마당이나 소실되고 전하지 않는 가운데 지독한 외설과 하드코어. 그리고 권선징악의 구도도 취하지 않는 변강쇠가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당시에는 열린마당에서 이것이 '말해졌다'는 것 그것이 진짜 미스터리가 아닐까?

흔희 <변강쇠가>의 외설은 주로 탈중세적인 것으로 해설되곤 했다.
중세는 성담론을 억압했고 성을 자유롭게 떠들어대는건 근대적인 것이라고 설정한것이다.
바로 여기에 근대적 망상과 편견이 작동한다.
근대에 들어 비로소 성이 해방되었다느 것은 중세를 억압과 질고의 암흑기로 설정할 때 가능하다.
하지만 중세 후기와 근대는 불연속적 지대이다.
욕망이 억압되었다가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마다 각기 다른 욕망의 배치가 있는것이다.

근대적 성담론은?
성담론에서 인종론 및 인구론적 관점이 새로운 척도로 작동되기 시작.
우수한 인종의 생산. 인구의 번성이 성의 목표로 설정되고 이제 성은 국가의 통제와 관리대상이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욕망의 불온성을 경계밖으로 축출하고 그자리에는 '민족'이라는 블랙홀이 등장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랑하라, 단 신과 민족의 이름 아래서만!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성욕에 대한 '거룩한 억압'을 유도하는 가운데,
자본은 성을 상품화하면서 성욕의 배설구를 다채롭게 마련하되,
원만한 관리를 위해 경찰과 위생제도를 적극 동원하는 식으로,
이렇게 하여 욕망의 이원적 양극화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3.1운동 이후 조선은 유례없는 이상 열기에 휩싸였다.
바로 연애열.
중세에서 가치들은 다원적이다.
연애감정, 충, 효, 사제간이나 도반들 사이의 우정과의리 같은 가치들이 백가쟁명하는 것.
하지만 근대에 들어 연애만이 삶을 떠받치는 지고한 가치가 되었다는 것은 연애 이외의 다른 관계들은 다 별볼일 없어졌다는 걸 의미한다.
존재를 걸고 욕망을 투여할 만한 다양한 경로들이 막혀버린 것이다.
연애열이 자라난 토양은 신과 민족이다.
연애는 신과 민족에 대한 숭배를 대체한 것이므로 거룩해야 한다.
숭고하기 위해 '욕정'을 배제한다.
육체가 지닌 우발적이고 불온한 힘들을 제어하려 한다는 점에서 애국, 신앙, 연애는 동일한 배치를 이룬다.

4. 연애의 정석, 죽거나 권태롭거나

1920년대의 연애 - 이광수의 <재생>을 통해서
근대적 사랑은 오직 영혼의 순수성으로만 승부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능한 한 육체성의 흔적을 지워버려야 한다.
근대적 '순결'관념의 탄생이다.
결국 이것은 연애의 열정과 성적 욕망을 결혼으로 흡수하기 위한 성정치학의 일환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애가 불멸의 위치로 상승하면 할수록 그것은 삶에서 멀어진다.
이제 연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데 죽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부재와 결여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입증한다는 점에서도 연애는 신과 민족이라는 기호와 '구조적 동형성'을 이룬다.

1930년대의 연애 -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를 통해서
1930년대 카프가 결성되면서 욕망은 혁명을 중심으로 재조직된다.
이제 연애는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으로 퇴각해버린다.
그럼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외부와 단절된 자기만의 방, 자의식 속에 갇혀 버린다.
자의식이란 인간이 자연과 단절되는 그 순간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의 타자화'는 가장 먼저 인간들 사이의 견고한 장벽을 낳는다.
단절은 고독을 낳고, 고독은 자의식을 낳고, 자의식은 다시 권태를 낳고 이 악순환의 고리가 바로 근대 도시인의 정체성이다.

멜로의 순정과 씁쓸한 권태, 근대적 연애는 이 두가지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1990년대 이후의 상황은 변한 것 같지만 멜로, 권태, 그리고 현대의 변태적인 섹스, 포르노의 범람 등등은 공통점을 가진다.
성적 욕망이 조금도 삶속으로 진입하지 않고 있다는 것.
즉 성이 삶의 능동적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향유되고 있는 것이다.
포르노가 판을 칠수록 멜로 또한 고양된다.
이 죽음 충동으로 가득찬 '홈파인 공간' 자체를 벗어나지 않는 한 출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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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침 도서관 가는 날이라 변강쇠전을 찾아봤지요. 검색해보니 딱 하나 나오더라구요.

1991년판 명문당에서 나온 이름도 지루할 것 같은 <한국고전문학대계 1권>



책조차도 고풍스럽지 않나요?

근데 안은 더 고풍스럽답니다.



공포의 2단 편집!!!

저 깨알같은 글씨하며 에고 에고....
우리나라 고전들이 아무리 이해하기 쉽게 말을 바꾸고 어쩌고 해도 저 고어들때문에 독해가 상당히 어렵더라구요.
바로 바로 잘 안와닿아요.
그런데 마음의 부담을 듬뿍 넣어주는 저 편집까지.... ㅠ.ㅠ

아마도 이 책에서 변강쇠전 외에는 다른 건 안읽지 싶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야기들은 이 책 말고도 보기 좋게 편집된 책이 많으니까요.

어쨌든 목표로 한 책을 찾아냈으니 즐거운 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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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7-04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발견이셨겠어요.. 공포의 2단 세로 편집..^^ 저런 책 예전에 많이 있었죠. 제가 중학교 때 세계문학, 한국문학전집 저런 편집이었어요..ㅋㅋ

바람돌이 2006-07-04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옛적에 중고등학교 다닐때 저런 책 꽤 있었죠. 그때는 이렇게 공포스럽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 공포스러워요. ^^

아영엄마 2006-07-04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루지기 타령이랑 변강쇠전이랑 다른건가요? 저 책보니 예전에 한국고전문학전집이라고 사서 본 책이 생각나네요. 공포의 2단 세로 편집...^^;; (친정에 그 책이 남아 있으려나..)

세실 2006-07-04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헛..헷깔려서 읽기 힘드시겠어요~~~ 아직도 자료실에 있군요.
우린 서고에 보관되어 있는데 ㅋㅋㅋ

바람돌이 2006-07-05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제가 알기로는 같은걸라고 알고 있는데요. 정말 예전에는 저런 책도 많았죠. 경제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저런 편집도 괜찮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읽기가... ^^
세실님/도서관에서는 오래된 책들을 따로 보관하나보군요. 다행히 여기 도서관에서는 찾았는데... 예전에는 저런 책도 잘 읽었는데 사람의 습관이란건 참 무섭네요. ^^

미미달 2006-07-05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변강쇠전 꼭 읽으셔야 할 일이 있으신가봐요. +ㅁ+
왠지 내용 무지 강렬할듯 +ㅁ+ ㅋㄷㅋㄷ *^^*

바람돌이 2006-07-0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달님 그건 아니고요. 그냥 다른 책을 보다 변강쇠전의 내용이 나왔는데 거기에 인용된 표현들이 정말 끝내주는지라 갑자기 보고싶어진거예요. ^^대충의 이야기만 알지 제대로 본적이 한 번도 없어서요. ^^

조선인 2006-07-05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포의 2단 편집으로 읽어도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야합디다. ㅎㅎㅎ =3=3=3
 

지금 고미숙씨의 <나비와 전사>를 보고 있다.
3장에서는 '성적 판타지 그 홈 파인 공간'이라는 제목인데 글의 시작이 변강쇠전이다.
나역시 변강쇠전의 원본을 읽은 적이 없고,
대충의 이야기만 알뿐이었고,
사실 별 관심도 없었다.
근데 이 책에서 잠시 인용되는 구절들을 보니 갑자기
아주 꽤나 재밌을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우리 고전들은 흔히 아이들 옛날 얘기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춘향전 같은 얘기의 판소리본을 보면 그 표현들이 어찌나 굉장한지 어지러울 정도다.
돌돌 구를 정도로 재미있고 실감나는 표현들의 홍수라고나 할까?

요즘은 다행히 여러가지 고전들이 쉽게 번역되어 나오는데....
근데 변강쇠전은 본적이 없는것 같더만....
알라딘에 검색해봐도 제대로 안나온다.

마침 오늘 도서관에 가는 날이니 도서관 가면 찾을 수 있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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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0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강쇠전이라고 진짜 있어요???오옹~

바람돌이 2006-07-0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12마당의 하나가 가루지기 타령이예요. (변강쇠와 옹녀과 주인공인) 그니까 소설이라기보다는 판소리 대본이 있다는거죠. ^^

Mephistopheles 2006-07-04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루지기 타령이라고 대본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거 꽤나 원색적이였는데...
그리고 변강쇠는 X독에 죽는 어정쩡한 결말..그리고 딴 남자 찾아 떠나는 옹녀...^^

전호인 2006-07-04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 상당히 파격적이져!!!!
그게 가능할 까여? ㅎㅎㅎ

바람돌이 2006-07-0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옛적에 연극하셨어요. 대본도 읽게? 원색적이니까 읽고싶은거죠. ^^;;
근데 우리나라 고전이란게 워낙에 말투가 지금과 많이 달라서 어지간한 각색가지고는 내용 따라가기도 힘들더라구요. ^^
전호인님/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
 

 

 

 

 

2. 인간, '만물의 영장'이 되다.

기독교(개신교)  - 원래 개신교 자체가 프로테스탄티즘, 즉 자본주의와의 견고한 결탁속에서 성장했다.
프론티어 정신으로 무장하여 지구의 모든곳을 개발하고,
전 인류를 기독교인으로 삼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종교.
(이건 정말 태생적 한계라고 해야 하나? 모든 인류와 세계를 자신과 똑같은 색깔로 칠할 수 있으리라라니...)

한국에서의 기독교(개신교) - 당연히 문명과 근대, 제국의 표상으로 이 땅에 들어왔다.
조선에서 기독교는 미국의 우월성으로 바로 연결됨.
근대 문명에 열광하듯 기독교에 열광하라.
기독교의 원래적 배타성과 선악 이분법은 기독교가 한국의 민족주의와 굳게 결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예를 든다면,
문명과 구국의 길을 가로막는 반민족적인 것들은 모두 마귀로 설정
마귀는 화해나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피의 응징'의 대상일 뿐...
(결국 적과 나를 완전히 분리하는 이분법 -한국인의 의식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다.)

적과 나의 이분법은 인간과 세계의 이분법에서 유래.
인간 이외의 존재들은 침묵, 배제시키는 원초적 이항 대립을 제시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창조주를 향해 나아갈 수 있고 그 교량은 바로 '이성'이다.
창조주가 인간에게만 부여한,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바로 그 '이성'
(아이들에게 최초의 인간이 왜 원숭이에서 분리되어나왔을까를 물으면 누구도 노동에 주목하지 않는다. 모두 생각을 할 줄 알아서요라는 정해진 대답을 내놓는다. -근대적 의식의 위대함(?)
이러한 사유의 뒷면 - 그럼 이성적이지 않은 인간은?
당연히 배제의 대상이고 교화(포섭)의 대상이다.
자연역시 인간의 세계로 적극적으로 포섭되지만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다.
자연의 '인간화' - 인간을 위한 은유의 재료, 우화의 재료로서 자연.

결국 인간의 삶만이 유일한 가치가 있다는 철저한 인간 중심주의 - 그 인식론적 원천에 기독교가 있다.

 * 문체 반정 -정조대 노론은 명말 청초 소품문을 적극 수용했고, 남인들은 천주학을 주로 받아들인다.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유교적 윤리와 충돌하는 일이 잦아지자 정조는 남인 세력을 보호하기 위해 노론층의 문체를 전면적으로 문제삼기에 이른다. 국가의 근간이자 사대부의 전범이 되는 고문의 권위를 뒤흔든다는 명분. 정조의 탕평책을 위해 남인들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사건.

**18세기 노론 내부에서의 호락논쟁과 다산 - 인물성동론(낙론)의 입장(박지원, 홍대용) : 모두 인간중심적 사고를 와해시키는 한편 物의 지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

*** 다산 정약용의 경우 -  훨씬 근대적이다.
인간과 天에 대해 상제관이라는 아주 명료한 입장을 견지함.
상제관을 표방함으로써 다산의 사상은 인간가 자연사이의 연속성은 해체되고 인간 중심주의 귀결된다.
인간중심주의와 근대성은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인간이 만물로부터 독립하여 홀로 우뚝 설 때, 정신이 육체로부터 이탈하여 그 위에 군림하기 시작할 때, 근대문명은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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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속도의 경이, 시공간의 재배치

근대는 시간을 재구성했다.
근대의 시간은 철도와 함께 왔으면 기차를 닮았다.
오직 출발점과 목적점만이 존재하며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해버리는.....
근대의 시간은 속도의 문화를 낳았고 그것은 화폐화된 시간의 단선성을 표상한다.
화폐화된 시간의 단선성은 우주와 자연과 인간사이의 수많은 주름을 단번에 펴버린다.
이제 밤도 잠도 동양사상의 우주적 변이와 사유의 이동도 모두 부질없는것, 그야말로 폐기처분되어져 버린다.

이렇게 탄생한 근대적 시공간은 '사이성'이 사라진, 대상간의 위계관계가 확연한 공간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주인은 이제 인간이다.
우주와의 공명은 없어졋고 다만 그 우주를 소유하고자하는 욕망만 남는다.

단선적 시간개념은 세상을 진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게 하며, 그 진보는 양적으로 계량화될 수 있다.
기차의 세계관 - 진화론은 이제 세계를 생존경쟁의 틀로 파악한다.
우승열패의 신화가 탄생한다.
이제 경쟁이다. 경쟁만이 진보를 승리를 생존을 보장한다.
역사는 그러한 승리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
현재가 과거보다 나았고, 미래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획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는 인과관계를 분명히 하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옛적에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일본 역사논문이나 서적들을 읽으면 그 앞뒤 분명한 논리성과 일관성에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그 도식성에 갑갑한 면이 많았는데 아마도 일본이나 우리나라에서의 근대성 수용이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수학공식처럼 정리되는 역사라니 웃기지 않는가 말이다.)

시간의 유목주의는 가능한가? - 속도에 대한 신앙체계를 전복할 것. 속도는 빠른 것과 다르며 느림 역시 느리지 않다. 느림 또는 시간의 유목주의란 이 '얼빠진' 근대의 일정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느림 또는 느리게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조급증과 결별하여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들을 구성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
 
(음~~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말들. 요 말도 나비일려나?)

 

내적 오리엔탈리즘 - 근대적 시간개념이 낳은 사생아. 현재를 척도로 이전의 시간들을 다 저급한 시간으로 매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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