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긍정
어머니에 대한 부정과 긍정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부정과 긍정
이 마지막 긍정에까지 이르기 위해 넘어서야할 가족이라는 큰 암벽에 대해 차례로 이야기하는 그래픽 노블 시리즈이다.
혹시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위의 순서대로 읽어주는게 좋을듯.... (실제 발간된 순서이기도 하다)
어떤 집이든 비밀스런 또는 남에게 말하기 창피한 가족사 하나쯤 가지고 있겠지만 그걸 세상에 다 까발리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창피하기 때문이고 - 특히 우리나라같은 곳에서는 가족의 치부가 나의 치부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하므로 더 그러하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슨 벡델의 <펀 홈>은 대단하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이런 글을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작가의 아버지를 뭐라고 해야 할까?
1980년에 사고사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는 숨겨진 동성애자였다.
이 사실만으로만 생각하면 참으로 애잔하다.
아무리 미국이라 하더라도 1960년대 70년대 친척들이 드글거리는 시골마을에서 가업인 장의사업과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던 백인 남자가 커밍아웃을 하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억압된 욕구는 가끔 10대 후반의 남자아이들을 유혹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한번은 이 사건 때문에 재판까지 가기도 한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기겁했는데 10대 후반의 남자아이라니..... 범죄잖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억압할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동정심이 몽땅 다 날아가버리는 대목이다.
아버지로서도 그는 최악이다.
지적인 욕구가 강하고 자기애가 강한 아버지는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오로지 아버지의 역할은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만 진행된다.
엘리슨이 처음 시를 썼을 때 아버지는 그것보다는 이런 표현이 더 좋잖아라면서 딸의 시를 난도질 해버리고 자신의 시로 만들어버린다. 아버지로서는 솔직히 최악이다.
이런 아버지에 대한 정말 솔직한 표현은 오히려 <펀홈>이 아니라 <당신, 엄마 맞아?>에 나온다. 비록 꿈속에서지만......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죽음은 엘리슨이 부모에게 레즈비언 커밍아웃을 하고 난 4개월 후였다.
엘리슨으로서는 인과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명시되지 않는 죄책감에 짓눌린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성정체성을 부정당하고 살면서 그것을 숨기고 살았던 삶 앞에, 그 사실을 몰랐던 딸은 당당하게 레즈비언 커밍아웃을 하는 것을 보며 아버지는 어떤 맘이었을까? 딸로서는 당연히 생각해볼 수 밖에 없는 지점이겟지......
이 평범하지 않은 부녀관계는 아버지의 죽음마저 딸의 삶을 짓누르는 억압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딸의 커밍아웃에 대해 침묵했던 엄마와 달리 아버지는 그녀의 결정을 인정한다.
각자 따로 자기 세계에 파묻힌 자폐가족같은 이 집안에서 작가가 아버지와의 화해 지점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눈물겹다.'

두번째 이야기는 <당신, 엄마 맞아?>
엘리슨 벡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3권의 책 중 가장 난해했지만 가장 좋은 책이었다.
예상하기로는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시인이든 배우든 뭐든 될 수 있던 빛나는 미래를 모두 포기했는데, 남편은 게이이고,
그녀의 삶은 시골마을에서 붙들려있고, 아이들 양육과 살림이고 뭐고 다 맡겨져버린 어머니의 삶에 대한 비가 정도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천만의 말씀.
이 어머니 역시 만만치 않은 자존심과 확고한 자기 삶의 태도를 가진 독립적인 여성이다.(다만 아쉬운건 게이 남편과 이혼할 결심을 하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는 거지만 그건 정말 그 시대의 여성의 위치, 여성의 삶을 생각하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사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엘리슨 벡델 자신의 이야기이다.
우울증과 강박, 누군가가 자신에게 집착한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찾는 자신의 사랑 방식, 어머니 대신이 될 정신과 의사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어릴 적부터 엄마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다.
사랑받기 위해서 조용히 해야 하고,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너무도 잘아는 그녀는 정신과 상담과 심리 상담을 끝도 없이 하는 와중에 스스로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며 그 이야기를 책 속에 풀어놓는다.

그런 엄마와 화해하는 지점 - 물론 엄마와의 화해가 아니라 작가의 마음속 엄마와의 화해이다.
온갖 결핍을 제공했던 엄마이지만 그녀가 딸에게 준건 어릴 적 "절름발이 아이 놀이"에 진진하게 대응해주면서 상상의 힘을 가르쳐 주었던 것. 즉 엘리슨 벡델이 지금 그림과 글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드디어 독립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을 준것이다.
그것을 작가는 출구라고 표현한다.
솔직히 이 정도 되면 정말 눈물겹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결핍이 지금의 나의 삶을 규정짓고 억압한다면, 제대로 살기 위해서 이토록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노력이 이 작가의 삶을 어떻게 규정지었는지가 3번째 최근작인 <초인적 힘의 비밀>로 이어진다.
사실 <초인적 힘의 비밀>을 제일 먼저 읽었는데, 처음 읽으면서 이 작가는 도대체 왜 이렇게 자신을 끝까지 몰아부치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런 맘이 들었다.
하지만 앞선 <펀홈>과 <당신 엄마 맞아?>를 읽고 난 이후면 이 작가의 삶의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제대로 수용되고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삶은 무언가 집중하고 몰입할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육체적 활동은 사실상 가장 몰입하기 쉬운 대상이기도 하다.
스키, 요가, 가라데, 크로스컨트리, 권투, 러닝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강도 운동들에 작가가 아니라 내가 질릴 정도.
불교에 대한 열정도 역시 이해하기 힘들정도로 몰입하고 있고,
육체와 정신을 모두 초월하고자 하는 삶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질릴정도다.
그럼에도 지금의 작가가 초월할 것은 초월할 것이 있다는 생각뿐이라는 것들 드디어 깨달았다는데 다행의 한숨을 같이 내쉬게 된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처럼 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3권의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너무나도 내밀한 일생을 엿보는 느낌이다.
그러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고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삶의 건강함을 찾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은 숭고하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