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숨결 - 개정판
로맹 가리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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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를 읽고 최애 작가가 되었고,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던 <자기앞의 생>에 또 열광!

<유럽의 교육>에서는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절망을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한줄 희망을 놓지않던....

그러나 <레이디 L>을 읽으면서 잠시 손에서 떠나보냈던 작가!

<레이디 L> 전반에 걸쳐 흐르던 그 지독한 냉소를 좀 견디기 힘들었었다.

읽는 책마다 같은 작가가 쓴게 맞나 싶을 정도여서 오히려 매혹적인 작가가 로맹가리이다. 

최근 새파랑님 서재에서 로맹가리 유고작품집인 이 책의 매력적인 소개를 보고 다시 로맹가리에 불이 붙었다.


로맹가리 사후 그가 잡지 같은 곳에 발표했으나 책으로 묶이지 못했던 단편이나 미완결작으로 남은 그의 유고를 찾아내어 한권의 책으로 묶은 일곱 개의 이야기가 여기 이 책에 담겨있다.

왠지 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남긴 유산을 안는 느낌이라 애잔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읽은 책은 첫 이야기부터 강렬하다.

<폭풍우>는 남태평양에 사는 한 부부와 이 섬을 찾은 이방인의 이야기다.

폭풍우가 오기 전 미칠 것같은 후덥지근한 더위에 대한 묘사는 과연 로맹가리라고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모든 문장이 무엇인가 일어날 듯한 긴박한 감정과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간다.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문장이랄까?

그럼으로써 폭발하는 마지막 대사는 제목 그대로 폭풍우가 세상을 몰아치듯이, 독자의 감정을 몰아친다.

이 소설의 내용이 실제 상황이라면 자업자득이라며 냉소할지도, 또는 쌍욕을 퍼부을지도 모르겠지만,

로맹가리의 소설로 이야기를 읽노라면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첫 이야기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다음 이야기인 <마지막 숨결>은 미완성작이다.

이 책의 역자는 미완성작이지만 충분히 완성된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쉰셋이라는 나이에 한 때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레지옹 도뇌르 3등훈장을 수훈했으나, 이제는 구세대로 밀려나버린 주인공은 어쩌면 로맹가리가 인지하던 자신의 모습과 겹친다.

이 글을 쓰면서 어쩌면 로맹가리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꼭 생물학적인 죽음을 가리키지 않을 수도 있다.

적을 향한 돌격을 노래하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면 자유를 위한 투쟁에 젊은 시절을 바친 전사에게, '자유를 위한 투사'가 무슨 락그룹 이름이냐고 묻는 세대와의 간극은 극복하기 힘든 거리다.

한 인간이 시대에 따라 자기 생각을 유연하게 바꾸어가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나 젊은 시절 강렬한 기억과 경험을 가졌을 경우에는 더더욱.....

힘든 시절을 산 어르신들이 자꾸 내 때는 말이야며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그때 만들어진 자신의 가치관과 현재의 가치관의 충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과거의 한 지점에 박제되어버린 그의 연인 '일로냐'는 그런 과거 회귀의 극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과거의 유산이 현재를 이기지는 못한다.

주인공 남자는 그래서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의 손으로 닫고자 한다.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자신을 스스로 죽이기 위한 면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그것이다.

만약 마지막 순간에 고용한 살인청부없자가 그의 방에 나타났더라면 아마도 이 단편은 그 자체로 완결되었을 것이며, 그것은 사라져가는 한 세대에 대한 완전한 닫힘. 애도의 추모사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그저 평범한 추모사말이다.

그러나 로맹가리는 그런 쉬운 마침표를 허락하지 않는다.

마지막을 결심하고 뒤돌아선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으로 인해 과거에 대한 마침표는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인생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예기치 않은 부딪힘으로 항상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

어쩌면 이 작품은 미완성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어지는 3작품들은 분량도 많이 짧고, 내용이 어떤 특별한 상황 - 예를 들면 레지스탕스 추모의 날이라든가 뭐 이런 날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런 상황들 -을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 느낌이라 배경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 글들이었다.

또한 제법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사랑스러운 여인>역시 사랑스러운 여인의 캐릭터가 너무 작위적이라 공감수치가 확 떨어지는.... 이 글들은 작가가 굳이 책으로 이 이야기들을 펴내지 않은 이유를 알려준달까?


하지만 유고집이라는걸 염두에 두고 읽을 때 가장 아쉬운 글은 역시 마지막에 실린 <그리스 사람>이다. 

정말 미완성이라는걸 나타내듯이 곳곳에 인물들의 이름이나 행동이 종종 정리되지 못하고 헷갈리고 있기까지 하다.

또한 장면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작가가 각 장면들을 따로 쓰고 그 이어지는 부분은 나중에 보충하려고 써놓은 딱 초고 그대로인듯한 글이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솔직히 이걸 작가가 제대로 정리했더라면 꽤 긴 이야기가 되었을거 같은데 이야기는 한 순간에 탁 끊어진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예고편을 본 느낌이랄까? 

마지막 문장에 한 문장을 더 써 붙인다면 To be continued.......


로맹가리는 자신의 유서에 마지막 말로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라고 썼다.

<그리스 사람>은 결국 작가로부터 버림받은 작품이다. 

민주주의를 처음 만든 나라에서 벌어지는 군부쿠데타와 독재,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저 수영을 잘한다는 것만으로 의도치 않은 일에 휘말리는 주인공 빌리와 그에 엮이는 사람들.

그냥 봐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쏟아질 수 있을것인가?

<마지막 숨결>처럼 이야기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결말이 내려졋을것이라는 기대를 와장창 깨면서 진정한 미완으로 남아버리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 <밤은 고요하리라>와 <노르망디의 연>을 얘기하면서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무슈 가리 아 정말 이건 아니잖아요. 

아예 쓰지를 말든가, 이건 끝내셨어야 당신 자신을 완전히 표현한게 될거란 말예요. 

그의 유서의 저 말을 이해하기 위해 로맹가리가 언급한 책들을 찾아야겠다. 



다음에 보기 위해 로맹가리의 유서를 적어둔다.




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하리라>라는 내 자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말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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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13 21:00   좋아요 9 | 댓글달기 | URL
저의 소개로 읽으셨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도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작품이 <그리스 사람> 이었어요. 딱 미완성이라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ㅋ 저도 어서 레이디L, 밤은 고요하리라, 노르망디의 연을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폭풍우>와 <마지막 숨결>은 정말 좋더라구요 ^^

로맹가리가 그렇게 가서 너무 안타까워요 ㅜㅜ

바람돌이 2022-02-13 21:17   좋아요 6 | URL
새파랑님 소개로 제 보관함에 넣은 놓은 책이 이 책만은 아니라죠. ^^ 그리스 사람은 진짜 아쉬웠어요. 로맹가리는 어쨌든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그의 죽음조차도....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와의 사랑을 그린 책에 보면 로맹가리가 자살한 해가 딱 그들의 아들이 미성년자를 벗어난 때였어요. 저는 어쩌면 로맹가리가 훨씬 전에 자살을 결심했지만 그의 아들이 미성년을 벗어나길 기다렸다는 느낌도 들더라구요. 그리고 진 세버그와 헤어진 이후 진 세버그가 딸을 출산하는데 - 아마도 로맹 가리의 아이는 아니었던듯요. - 그럼에도 그녀의 아이의 법적인 부친을 자임해요. 작가들이 보면 일상에서는 무책임한 경우가 진짜 많은데 로맹가리는 어쩌면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을듯해요. 그래서 그의 죽음이 더 안타깝기도 하고요.

페넬로페 2022-02-13 21: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늘 바람돌이님과 새파랑님, 두 분께서 로맹 가리의 세계로 절 인도하시네요.
새들은 페루에서~~와 자기 앞의 생은 정말 같은 작가가 쓴 책이 맞나 싶었어요.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어요^^

바람돌이 2022-02-14 01:03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소개하신 새벽의 약속 저도 보고 왔어요. 지금 그 책은 제 읽어야할 책들 쌓아놓은 책탑속에서 제 손길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는..... 저도 빨리 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22-02-13 22: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로씨야 출신 유대인이
프랑스로 건너가 레지스탕스-
외교관 그리고 작가에 이르는
다양한 변신을 했다는 점만으
로도 그야말로 소설 같은 삶
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전히 로맹 가리의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는 점도 놀랍네
요.

바람돌이 2022-02-14 01:05   좋아요 1 | URL
유럽 작가들 볼 때 그들의 삶에서는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겠지만, 우리나라 작가들과 딱 비교되는 지점이 저런 글로벌입니다. 자신이 온갖 배제의 경험을 뼛속까지 느끼고, 어떤 사회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경험들이 작가적인 성숙과 사유의 깊이로 이어지는 걸 자주 느껴요. ^^
저는 로맹가리의 읽어야 할 책 아직 아주 많습니다. 다 읽은 분이 부럽지 않은 이유는 로맹가리를 읽을 즐거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

책읽는나무 2022-02-14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책 주문을 하면서 로맹 가리 책을 사다 모으리라 다짐하고 장바구니 넣었다가 막판에 다시 보관함으로 빼버린 로맹 가리였는데, 좀 아쉽네요^^
담달부터 다시 로맹 가리 책을 시도해야 겠습니다^^

바람돌이 2022-02-21 01:17   좋아요 1 | URL
로맹가리는 실망하지 않으실겁니다. 굉장히 다양한 스타일로 책을 쓰는 작가라 작품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워낙에 글을 잘 쓰는 작가라서요. 저는 한때 로맹가리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 요즘 좀 뜸해졌어요. 그런데 이 책이 또 저에게 로맹가리 불을 당기네요. ㅎㅎ

다락방 2022-02-14 10: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폭풍우> 읽고 대충격 받았던 게 떠오르네요. 너무 충격 받아서 ‘헉, 이제 이 여자 어쩌지?‘ 했던.. 휴. 로맹 가리, 대단해요.

잠자냥 2022-02-14 11:05   좋아요 2 | URL
아니 전 이거 사둔지만 몇 년째인데! <폭풍우> 궁금해서 오늘 챙겨갑니다! ㅋㅋㅋ

다락방 2022-02-14 11:09   좋아요 2 | URL
아이참, 너무 기대하셨다가 실망하시는 거 아닌가 몰라요! ㅎㅎ

잠자냥 2022-02-14 13:45   좋아요 2 | URL
잘 읽었습니다. 그 여자 이제 어쩌죠….;

다락방 2022-02-14 13:58   좋아요 2 | URL
엄청 빨리 읽으셨네요. 아놔 ㅋㅋ 책귀신 잠자냥 님.
저도 그 단편 읽고 진짜 계속 그랬어요. ‘이제 이 여자 어떡하지?‘ 으으...

잠자냥 2022-02-14 17:09   좋아요 2 | URL
어쩜 좋아요. 어휴 그놈도 참….

바람돌이 2022-02-21 01:17   좋아요 0 | URL
그놈 나쁜 놈!!! ㅎㅎ

희선 2022-02-16 01: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는 제대로 끝맺지 못한 소설을 책으로 묶은 걸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네요 죽은 사람이 말이 없는... 죽기 전에 그때까지 쓴 것만으로도 쓸 건 다 썼다 생각했던가 봅니다 쓰던 것도 다 쓰지... 죽으려고 하는 사람이 그런 것까지 마음 쓸 여유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바람돌이 2022-02-21 01:19   좋아요 0 | URL
그럴수도 있을거 같아요. 자신의 미완성작이 출판으로 묶여 나온다는건 어쩌면 좀 발가벗겨지는 느낌이랄까 그런게 있을것도 같네요. 에휴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하나라도 더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는게 행복이니 아이러니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