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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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내게도 작은 로망이 있었다.

연애 편지를 잘 썼으면 참 좋겠다라는.....

문과 출신임에도 감수성만은 이과쪽을 닮았으며, 툭툭 던지는 말투를 구사하는 100% 경상도 가시내였던 나는 연애를 하고 있음에도  연애편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낯간지러운 말들에는 알러지 반응까지 있었다.

그런 나에게도 연애편지를 쓸 수 밖에 없던 시기가 있었으니 애인이 군대를 가버린것이었다.

모든 군바리의 애인의 필수 임무라는 그 편지질을 내가 해야 하다니....

어쨌든 나는 참으로 정성스럽게 연애편지를 썼다. 한달에 한번쯤이었지만....

나중에 애인이 그랬다. "야 니 편지 다 남자편진줄 알더라. 솔직히 내가 내용을 봐도 그게 그냥 남자친구가 쓴거라고 생각해도 하나도 안 이상하다"

멋없게 쓴 편지봉투와 더 멋없는 주소를 쓴 나의 글씨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다 남자가 보낸 편지라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애인놈은 내 편지를 한마디로 웃기기만 한 내용이라고 했다. 연애편지가 아니라 무뚝뚝한 친구의 안부편지 정도랄까?

그에 반해 애인은 그야말로 문과감성 100%의 남자.

보내 오는 답장은 어떻게나 감성 충만하게 연애 편지의 정석을 그대로 밟는지, 어디 연애편지 대회라도 내보내야 할까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여서 나를 열등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심지어 글씨도 엄청나게 잘쓴다. ㅠ.ㅠ

애인이 제대를 하고 난 이후에야 나는 연애편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애인은 지금 뭐하냐고?

지금 내 눈앞에서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가끔 방귀도 뀌어주면서 핸드폰과 한몸이 되어있다.

 

그러니까 내게 이 책은 오래전에 잊어버리고 마음 깊은 어딘가에 쿡 쑤셔넣어버렸던 연애편지 감수성을 되살리고 있다.

아니 되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미미님의 표현대로 드잡이질 당해서 끌려갔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다.

노년의 학자가 자신의 첫사랑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편지, 평생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마지막 온힘을 다한 사랑의 노래가 이 책이다.

 

이제 막 소년에서 청년으로 첫 발을 내딛은 롤란트.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서 이제 막 다른 세계로 진입한 불안한 청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도, 면역도,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도 무엇도 모르는 롤란트에게 교수의 아름답고 다정한 부인은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소년이었어요. 이제 어른이 된 거예요."(144p)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소년이었다.

사랑이 무너진 순간에도, 마지막 연애편지를 쓰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나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그 시기의 사랑은 그저 맹목이고 혼란이고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휘둘림 아니었을까?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심장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내 자신이 스스로의 열정을 동원해 감각을 고양시킬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한 인간에게, 선생님에게 사로잡힌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나의 의무인 동시에 기쁨이었습니다.- P46

 

 한 눈에 반한 첫사랑. 그 운명을 순간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소설은 주인공 롤란트의 흔들리는 감정, 혼란스러운 성장을 따라간다.

사실 이 책의 줄거리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조금만 지나면 롤란트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교수의 변덕으로 보이는 행동이지만, 독자의 눈으로 보면 교수의 마음과 혼란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다 보인다.

롤란트를 혼란스럽게 하는 교수의 비밀스러운 잠적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심지어 내게는 교수 부인의 그 미묘한 감정까지도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교수와 교수부인 그리고 롤란트의 삼각관계 중 모두의 감정이 이해 되었고, 안타까웠다.

 

결국 이야기로만 본다면 이 소설은  뻔하디 뻔한 삼각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평생의 속울음을 담은 절절한 고백으로, 연애편지로 승화시키는 것은 순전히 작가인 츠바이크의 필력이다.

동성애자인 교수의 갈등과 절망, 이룰 수 없는 아니 말할 수 조차 없는 사랑앞에 선 인간의 비통함에 울컥하고,

불안하면서도 폭풍같은 저돌성,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니 몰라서 돌진하기만 하는, 그러다가 벽에 가로막혀 절망하는 청춘의 혼란.

관조적인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알고 느끼지만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어쩌면 빼앗는 것으로 교수와 롤란트에게 복수하고도 싶었던 교수 부인의 이중적인 감정들.

이 모든 감정들이 너무 생생해서 독자는 그저 끌려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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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4-04 07: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세 인물 저마다의 감정 다 이해하고 싶어 몰입해서 읽게 되더라구요.

근데 군대애인하고 당연히(ㅋㅋ)헤어지시고 연애편지 잘 썼던 추억의 구남친으로 남았겠구나...했는데, 결국 끝까지 가셨군요~~^^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바람돌이 2021-04-04 09:50   좋아요 5 | URL
맞아요. 끌려가는거... ㅎㅎ 만약 롤란트가 실제 내 옆의 누군가였다면 이리저리 흔들리는 녀석을 한심해 할수도 있을텐데 누군가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본다는건 또 다른 이해를 가져오네요. 그래허 소설으루읽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ㅎㅎ

남편이 군대를 좀 늦은 나이에 갔어요. 그 때는 이미 너무 오래 사겨서 그놈의 정때문에 참.... ㅠㅠ

bookholic 2021-04-04 08: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문과감성이 없으셨다고 하는데, 지금 글들은 문과감성이 가득 하시고, 거기에 예능감각까지 더해져서 글이 찰지고 재미있습니다...^^

바람돌이 2021-04-04 09:59   좋아요 5 | URL
오늘의 저를 만든 것은 바로 알라딘의 서재지인들님입니다. 알리디너님들의 글을 보면허 자괴감에 시달리는 날이 얼마였던지.... 알라딤 처음 시작할 때 제 글은 지 인생의 흑역사입니다. 뭐 그렇다고 지금이 명문은 아니지만요. ㅎㅎ

미미 2021-04-04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몇번이나 소름이..몇번이나 웃음터지고요ㅋㅋㅋㅋㅋ아 이 리뷰는 거의 <감정과 혼란>책 뒷편에 실어도 좋을 듯한 수준입니다!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평생의 반려로 고정출연 시키신것도 감동이예요! 👍👍😍

바람돌이 2021-04-04 21:00   좋아요 4 | URL
최고의 찬사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책 뒤에는 츠바이크의 유서가 있어서 도대체 제 리뷰는 안 어울릴거라는.... ㅎㅎ 평생 반려는 방금도 제가 해준 봉골레 파스타를 맛나게 먹고 뿌듯하게 소파와 또 혼연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저 쌓인 빨래는 언제 갤건지.... ㅠ.ㅠ

scott 2021-04-04 10: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옹님의 감정의 혼란 번외편이네요 ㅎㅎ 미미님 말씀처럼 이책을 읽은 독자의 후기 편에 실려도 좋을 ㅎㅎ 바람돌이님은 순정파이셨어 ^ㅎ^

바람돌이 2021-04-04 21:01   좋아요 4 | URL
순정파의 숨은 뜻 중에 맹하다는 것도 있다죠. 네 제가 맹했습니다. 조금만 더 약았어야 했어요. ㅎㅎ

새파랑 2021-04-04 10: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롤란트의 감정, 기쁨과 슬픔에 너무 몰입해서 읽다보니 반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좋았던듯. 책을 다 읽고나서 세인물 모두의 감정과 행동을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연애편지라는데 공감합니다^^

바람돌이 2021-04-04 21:02   좋아요 2 | URL
아 저는 옛날 옛적에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가 그냥 전개과정은 다 보이더라구요. 결론이 다르고 필력이 다른 거 빼면 장르소설에서는 거의 클리세수준이거든요. ㅎㅎ

희선 2021-04-05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남편분이 됐지만, 예전에 바람돌이 님이 보낸 편지 받고 기뻐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겠지만, 사회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있기도 했군요 지금은 예전과 달라졌다지만,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05 10:16   좋아요 2 | URL
군바리가 뭐든 안 기뻤겠습니까? ㅎㅎ 좀 다른 사랑 하나도 포용못하는 사회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말입니다. 월요일 좋은 출발 하세요. ^^ 희선님 댓글로 저는 이미 좋은 출발 하고 있습니다. ^^

syo 2021-04-05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내 눈앞에서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가끔 방귀도 뀌어주면서 핸드폰과 한몸이 되어있다.˝ 이런 증언은 왜 세상 모든 곳에서 들리는 걸까요!

심지어 일생을 문과감성 1%도 없이 살던 三새끼조차 그 혼연일체의 경지에는 틀림없이 도착하였습니다.
시작은 달라도 끝은 같은 곳.....
중년의 남성들이 가는 곳....

바람돌이 2021-04-05 11:52   좋아요 1 | URL
글쎄말예요. 왜일까요? 우리집은 저와 딸들이 다 남편과 잘 놀아주는데도 말입니다.
역시 몸이 무거워져서 자꾸 중력이 끌어당기는게 아닐까라고 요즘 생각해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