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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산
겐유 소큐 지음, 박승애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0월
평점 :
2011년 3.11 대지진은 가까이 있는 우리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잊혀져 가던 체르노빌을 소환한 것도 이때쯤이었는데,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고 방사능 오염의 실상에 살떨렸고 그런 비극이 다시 되풀이된 것에 대해 분노했다.
당장 우리에게도 경주 핵 방폐장 문제나 노후한 원전 재가동 문제 등 핵발전의 위험성이 항상 노출되어 있는데 그제서야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방송에서는 일본산 수산물이 오염되었다고 했고 일본산 맥주 화장품 심지어 생리대까지 불매운동이 일어났으며 매일 우리가 사는 곳의 방사능 수치가 계산되어 나왔고 음식물의 방사능 오염정도를 측정하는 기계까지 불티나게 팔려서 '저걸 나도 사야 할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모든것이 그렇듯이 서서히 잊혀져갔다. 일본에서는 정부에서 스리슬쩍 국민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원전을 재가동했다.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갔고 재난의 결과는 후쿠시마 주변의 사람들만의 문제가 되었다.
이 책을 고른 건 한국 독자에게는 처음 소개되는 '후쿠시마 이후 문학'이기 때문이다.
대재해와 원전사고를 겪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차마 죽음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 궁금했다.
작가 겐유 소큐는 후쿠시마 현내에 있는 사찰의 주지스님으로 3.11 당시 재난의 중심에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 생생한 재난의 실상을 표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들의 치유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모두 여섯편의 단편을 통해 재난 이후 후쿠시마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굉장히 비극적이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삶의 희망을 붙잡아보려는 모습들이 보인다.
책을 읽다가 조금 불편해지는 대목이 있는데, 저선량 피폭에 대한 견해에 관한 것이다. 무턱대고 방사능을 무서워하고 피하는게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접근 금지구역이 아니라면 얼마간의 방사능 측정치는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나올 수 있는 수치니까 괜찮다는 태도가 많이 보였다.
심지어 [빛의 산]이라는 단편에서는 할아버지가 방사능 오염 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에서 나온 방사능 쓰레기들을 자기 마당 한 곳에 모아둔다. 다들 자기 동네에는 쓰레기 가설 처리장이 들어오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점점 할아버지의 마당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쓰레기까지 쌓여서 이상한 빛을 내는 방사능 산을 이루게 되는데, 결국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 그 곳을 자신의 화장터로 삼고, 삼십년이 지난 후에는 그곳이 방사능 투어 관광지가 된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이었다. 그 산에서는 매시 10마이크로시버트가 넘는 방사선이 나오는데, 완전 벨라루시 수준이라고 질겁한 아들에게 할아버지는 말한다.
"체르노빌 사고 나고 이십팔년이 지나서야 벨라루스는 그 정도로 내려갔다지. 그래도 죽 사람들이 살고 있었잖냐? 그런데 삼 년 전 같은 방사선량이 나온 이이타테무라는 마을이 통째로 피난을 갔잖냐."(185쪽)
뭐야, 방사능 좀 쐬도 죽지 않으니 호들갑 떨지 말라는건가 하고 처음엔 이런 분위기가 좀 이상했는데 마지막에 이 단편 [빛의 산]에서 아들의 입을 빌려 노골적으로 불만을 말한다.
실로 많은 학자들이 양극단의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 양보를 안 해. 어떤 사람은 자연 방사선량의 십만배까지는 몸에 좋은 거라며 우주 비행사도 모두 건강하지 않느냐고 주장을 하고, 다른 쪽에서는 몇 조 엔 씩이나 써가며 미량이라도 전부 제거해야 한다고 기를 쓰잖아. 아마 호르메시스(다량의 방사선은 생물체에 피해를 주지만 소량의 방사선은 오히려 생명체의 생리활동을 촉진해 수명을 연장시키거나 성장 촉진 또는 종양 발생률 저하 등 유익한 효과를 준다는 주장)파와 예방의학파라고 했던가? 양쪽 다 차분하게 대화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우리 부부만 해도 그게 안되더라고.(189쪽)
작가가 이 단편을 책의 제일 마지막에 배치한 것도 그렇고 아마도 그곳 후쿠시마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가 제일 심각할 수 있겠다 싶었다. 학자들이나 정부에서 명확히 밝혀준다면 그들도 혼란이 적을텐데 자기들의 체면만 중시하고 서로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니 결국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채 결정은 오로지 주민들의 몫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가족들은 재해로 세상을 떠서 해체되었거나 방사능에 대한 극심한 공포로 고향을 버리면서 해체되거나 극심한 우울증으로 서로 소통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힘을 모으고, 방사능 제거 작업을 하고, 마을의 축제도 열리고 새로 결혼하는 커플도 생긴다. "뭐야,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냐고..."하면서도 "안돼, 안돼. 끝까지 노력해야지. 포기라니 말도 안돼." 라고 한다. 그들이 후쿠시마 이후를 살아가는 모습이 이 한마디에 녹아든것 같다.
엠마누엘 르파주가 그린 <체르노빌의 봄>을 보면, 시종 무채색이던 그림이 어느 순간 화사한 색을 입는다. 참사를 증언하러 간 작가는 오히려 눈부신 생명력을 보고 온다. 죽음의 땅에도 결국 봄은 왔고 그곳에는 그 땅을 터전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그림이 화사해지면서 삶의 희망이 느껴지던 그 순간처럼 후쿠시마에도 환한 생명의 빛이 퍼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