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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5년 3월
평점 :
나는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세대다. 지금도 고3때 국사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내게 국사는 시험 볼 때 벼락치기로 점수따던 과목이었기 때문에 시험때나 반짝 공부하곤 했는데 고3때는 학력고사(연식이 드러난다 ㅠㅠ)때문에 국사는 무조건 만점을 받도록 해주신다는 전설의 쪽집게 선생님이 등장하셨다.
선생님의 수업방식! 일단 수업시간에 초집중을 하게 하신다. 초긴장상태로 양손에 네가지색 필기구를 들고 선생님이 호령하시는대로 줄을 쫙쫙 그어야 했다. 그리고 '받아써!'를 외치면 교과서 여백에 써야한다. 노트도 안된다. 무조건 교과서 한권에 모든 엑기스를 때려넣는다. 교과서를 쭉 읽으면서 시험에 나오는 문장엔 중요도 순서대로 색깔펜으로 밑줄 쫙! 정말 더 중요한건 별 두 개, 세 개, 형광펜! '이런 건 읽지도 마라! 시험에 안나온다!' 하시는 문장은 과감히 지운다! 한반에 60명씩 모여있던 우리는 일사분란하게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 마치 군대에 온 기분이다. 그런 초긴장상태에서 희안하게 국사책의 문장들이 머리에 쏙쏙 와 박혔다. 선생님께서 수업하시고 삼개월만에 처음 치른 모의고사에서 우리반 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만점을 받았다. 그 선생님의 신화는 담당하는 학생들 모두를 만점받게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건, 오십분간의 수업시간동안 삼십분은 그렇게 점수용 수업을 해주시고는 남은 시간동안 "이제 진짜 역사를 가르쳐줄게. 시험에 안나오지만 이게 진짜 중요한거다. 정신차리고 들어라!" 하시는데 적절한 욕까지 섞어가시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너무 재밌고 흥미진진했다. 아무도 졸지 않았다. 아니 졸 수 가 없었다. 항상 시간이 모자랐기에 마무리는 "대학가면 꼭 찾아서 공부해라!"였는데 더 듣고 싶다고 졸라도 얄짤 없었다! 그때 나는 조금 깬 사람이 된 것 같다. 아! 교과서에 나온게 다 사실이 아니구나! 이 문장의 맥락속에는 다른 의미도 숨어있는거구나~ 이런 것들을. 그리고 대학에 가서 근현대사 책들을 다시 읽으며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교조와 참교육을 위한 시위가 한창일때라 그 놀라움의 동력으로 열심히 투쟁(ㅎㅎ)하러 다녔다. 요즘 교과서를 국정화 하는 세력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다. 역사는 가린다고 가려지는게 아니다. 언젠간 진실을 알게 되고 그 때 내가 배운게 어느 한쪽만 미화해 놓은 역사라는 걸 아는 순간 터져나오게 되는 분노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그때 우리는 그 기운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세대다! 지금 비록 한순간에 과거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하여 이야기가 많이 돌아갔지만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건 이 놀라운 책에 대해서다. 내가 배운 교과서엔 절대 없었던 사실들이 나열되어 있는 책. 그리고 내가 근현대사를 배우면서 가지게 되었던 의문들이 하나씩 풀리던 책. 한국의 근현대사와 세계가 만나는 순간의 경계면을 따라 부평초처럼 떠돌다 결국은 산산히 부서져버린 여자에 대한 책이다.
이야기는 한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듯 이 사진에 대한 진실을 하나씩 파고 들면서 한 여자의 삶을 따라간다. 그녀는 미국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추방당했고 북한에서는 박헌영의 애인으로 지목되어 간첩혐의를 받고 처형된 현앨리스다. 박헌영의 숙청 소식과 함께 전해져온 그녀의 소문때문에 한때는 남한의 신문에서 '한국판 마타하리'라 불리며 자극적인 가십거리로 소모되기도 했다.
작가는 어떻게 그녀가 미국과 북한에서 그렇게 상반된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그리고 열심히 독립운동을 하던 그의 가족들이 아버지는 독립유공자로, 그녀는 북한에서 미제의 앞잡이로, 그녀의 형제들은 미국에서 끊임없이 추방의 위기에 몰려야 했는지 궁금해서 모든 자료들을 뒤져 그녀의 삶의 퍼즐을 풀어나간다.
결연한 의지로 기념사진을 찍던 그 청춘들은 모두 어떤 삶을 살았을까. 다가올 운명의 가혹함을 전혀 몰랐을 그들의 삶이 너무 궁금하여 짠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엄두가 안난다. 정리해서 전달할 능력이 안되니 다들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목사의 딸로 하와이에서 태어났고,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성장했고, 3.1운동을 겪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고, 1920년대 초반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면서 미국에서 인종차별과 노동차별에 맞서 싸우고, 해방후 남한에 와서 미군정에서 일하며 통일을 위해 애쓰지만 그 어디에서도 그녀는 끊임없이 정체성을 의심받아야 했다. 항상 선택을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결국은 북한까지 들어갔지만 이상향인줄 알았던 그곳에서마저 그녀는 사회에 젖어들지 못하고 내쳐졌다. 그녀의 동지들과 가족들의 삶도 제각각 파란만장하다. 이 책을 읽으며 그녀의 삶을 다룬 제대로된 영화나 소설이 나와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책에서 한줄 암기거리였던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펼쳐지는데 그것은 곧잘 상상을 초월한다.
이 시대의 좌편향된 역사교육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도대체 몇명이나 그런 사람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더욱더 읽어보기 바란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지워버리고 싶은, 또한 부각하고 싶은 장면들이 많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체로 현명하다. 이런 역사를 읽었다고해서 종북이 되진 않는다. 오히려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 이승만이 비겁하게 정권을 잡는 과정이 그려지고, 미국이 우리가 생각한 만큼의 우방이 아니었다는게 드러나지만 북한도 결국 독재정권을 위해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들을 어떻게 피의 숙청을 단행하는지 그 면모가 속속들이 밝혀진다. 이데올로기에 연연해서 얼마나 바보짓들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 역사적 교훈을 잊고 이데롤로기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바보짓을 한다.)
그나마 이 책을 읽다가 미국을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건 공산당을 색출한다고 눈에 불을 켜고 쫓아내려고 하는 그 시대의 와중에서도 그들은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존중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들의 경우, 그들의 이상향을 찾아 북으로 간 경우는 거의 행방을 모르거나 숙청을 당했다. 하지만 미국 시민권자이거나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그당시 정부에서 청문회를 대대적으로 열며 그렇게 쫓아내고 싶어했지만, 내게 불리한 증언은 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인정한 수정헌법과 신체적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나라로 추방할 수 없다는 매케런-월터법 같은 법적인 장치들이 있어서 버텨낼 수가 있었다. 공산주의자로 몰려 추방 위기에 있을때마다 그들의 이웃들이, 친구들이 법조문을 무기로 탄원해주고 힘을 모으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마침 냉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스파이 브릿지>가 개봉하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라 그 영화를 더욱 재밌게 볼 수 있을 듯하다. 톰 행크스가 주인공으로 나온다는데 소련의 스파이를 변호하는 역할이라고 한다. 그도 수정헌법에 기초하여 스파이를 적극적으로 변호한다고 한다. 영화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나는 이 책에서 보았던 우리의 재미한인동포들의 청문회장면이 떠올랐다. 한참 역사 문제로 시끄러운 이 때, 현앨리스의 시대를 한번 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교과서가 좌편향 되었다고 걱정이 태산같은 0.1퍼센트의 사람들이여,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 안심하라! 지금은 국민들을 흑백으로 나누어 몰아갈 때가 아니라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인정할 때이다. 그렇게도 자신들이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