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정글만리 1~3 세트 - 전3권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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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6월 1일, 동아일보에 소설가 횡보 염상섭이 칼럼을 썼다. "문학도 함께 늙는가" 라는 제목이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칼럼의 내용을 요약하면 '지금도 멋지게 연애소설을 써 낼 수 있는데 어찌 늙었다 할 것인가. 나는 늙었지만 나의 문학은 늙지 않았다.' 정도가 되겠다. 


그러자 1958년 6월 21일 약관 24세의 젊은 평론가 이어령이 경향신문에 "문학도 함께 늙는가를 읽고" 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칼럼의 내용을 요약하면 '전쟁 직후의 암울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젊음이 단지 연애나 하는 것으로 알고 계신 선생의 젊음에 대한 시각이 이미 늙었다.' 정도 되겠다. 거 참 대학 갓 졸업한 스물 네살 평론가가 예순 둘 먹은 노 소설가에 대해 쓴 글치고는 참 대담하다 해야할지 버릇없다 해야할지.


그러나 어쨌든 이어령의 말에 수긍을 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50년대 후반, 한국의 젊음은 연애 타령을 하고 있을만큼 여유있지 않았다. 당시의 젊은 작가군이라고 할 수 있는 하근찬, 선우휘, 송병수, 박경리 등등은 연애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전쟁 직후의 젊음에게 닥친 암울한 사회상에 대해 글을 쓰고 있었으니까. 그 시대의 대부분의 젊은이에게 연애는 사치의 감정일 수 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염상섭이 젊은 문학의 상징을 멋들어진 연애소설 정도로 생각한다면, 맞다, 그의 문학은 늙었다.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읽는데 문득 염상섭의 그 칼럼이 떠올랐다. 대하소설은 어쩔 수 없이 인물이 전형성을 띌 수밖에 없다, 라고 변명해 주기에는 그 자신의 소설 태백산맥이 말문을 막는다. 태백산맥의 인물 그 누가 전형적이던가. 그러나 이 소설의 주재원 전대광은 지나칠 만큼 전형적이다. 전대광이 되어도 되고 박대광이 되어도 되고 이대광이 되어도 된다. 주재원은 다 그만큼이지 않나, 라고 이야기 하기엔, 글쎄...... 장화 홍련같은 이야기를 2010년도에 읽게되면 당황스럽다. 


감히 조정래와 같은 대작가에게 젊은 김영하의 에세이를 들이대는 것은 이미 60년도 더 전의 늙은 소설가와 젊은 평론가의 지상 대담을 보는 것만큼이나 민망하지만 그래도 한번 들이대어 본다. 


부자를 정말 부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다. 

......

만약 가난한 사람을 정말 가난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싶다면 그 가난한 이로 하여금 부자들에 대한 엉터리 속설들을 말하게 하면 된다. 부에 대한 자기만의 터무니없는 오해와 과장이 그의 가난을 좀 더 실감나게 드러낸다. 


김영하, 보다, 문학동네, 2014, p.25-26,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


가진 것에 대한 나열로 부유함을 묘사하는 것은 이미 낡았다. 현대의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 시대로까지 진화해 나가는데, 조정래의 이 소설에서 부유함은 끊임없는 소유의 나열로 묘사된다. 김영하의 소설 작법이 정답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고, 2013년에 쓰여진 이 소설이 왜 이렇게 늙은 소설로 느껴지나 고민하다보니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는 거다. 이런 묘사법 때문인가, 너무나 전형적인 인물 때문인가. 각나라의 민족성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일본인은 너무나 지나치게 전형적인 일본인으로, 한국인은 또한 너무나 지나치게 한국적으로, 중국인은 백년 전 우리가 상상하던 중국인 그대로 형상화 되어 있는 인물들은 재미가 없다.


그래.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는 거기에 있다. 재미가 없다, 재미가. 


다시한번 말하지만, 조정래는 태백산맥의 작가다. 내가 이미 열번도 넘게 읽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그 책을 잡으면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림을 작파하고, 인상깊은 구절에 밑줄을 긋는 것마저 잊게 만들고, 책의 면지에 읽은 날 기입을 하는 것마저 다음권을 읽느라 제껴버리게 만드는 그 태백산맥의 작가다. 태백산맥은 이미 30여년전에 쓰여진 소설임에도 지금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다. 


그 조정래가 쓴 책임에도 이 책은 재미가 없다. 세권의 책을 읽느라 진땀을 뺐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도 않았고, 매력있는 인물도 없었다. 그저 지겨웠다. 


이쯤되면 생각하는 것이다. 문학도 (작가와)함께 늙는가. 


도무지, 이 책이 왜 베스트 셀러의 목록이 이다지도 오래 이름을 올리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썩어도 준치라고 어쨌든 조정래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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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5-01-27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문학도 함께 늙는가, 제목도 멋지고 글 내용은 엄지 척 치켜세우고 싶네요!^^
조정래 작가님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정글만리는 땡기지 않아 사놓기만 하고 안 읽었는데...그 이유 중 절반은 광고를 너무 많이 해서 반발심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작가가 작품으로 증명하면 되지 뭔 홍보를 저렇게 많이...ㅠ

아시마 2015-01-28 10:16   좋아요 0 | URL
예전에 소설가 최일남 선생이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노년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작가와 함께 나이먹어가는(늙어간다는 것과는 의미가 좀 다른) 소설에 관한 이야기였죠. 그때 생각했던 거거든요. 젊었던 작가가 늙어가면서 작품이 변화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그렇다면 젊은 독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글은 젊은 작가가 쓴 글이거나 지금은 대가가 된 늙은 작가들의 젊은 시절에 쓴 글일수 밖에 없는 것인가 뭐 그런 저런 생각.

조정래의 소설작법 자체가 워낙 좀 고전적이기는 해요. 흔히 말하는 실험소설 같은 걸 쓰지는 않죠. 그런 소설들에 어울리는 문체도 아니고요. 흠...

소설가 김동리는 요즘으로 치면 참 젊은 나이에 절필 비슷하게 했는데요, 글을 쓰지 않으면서도 한국 문학계의 대부(아 이 식상한 표현이라니.)로 오래오래 계셨어요. 여러가지 생각들을 많이 해요. 황순원 선생님도 어느 시기 이후로는 글을 쓰지 않으셨죠. 이런 것들을 보면 문학은 결국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조정래 선생님 참 좋아하고, 정말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하지만, 이제는 어쩔수 없이 인정. 그분의 문학은 늙었나봐요.

다락방 2015-01-28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태백산맥을 안읽었어요. 조정래는 공교롭게도 정글만리로 처음 만났습니다. 정글만리를 재미있게 읽긴 했는데 음, 그렇지만 이런 식이라면 태백산맥을 읽지 않아도 되겠군 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책이라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까지 볼 필요는 없겠다 싶었던거죠.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친구들이 노여워했어요. 정글만리는 아니다, 태백산맥은 진짜 다르다, 태백산맥은 좋다, 태백산맥은 읽어라, 하고 말이지요. 크...그래서 작가의 첫 책으로 어떤 걸 읽느냐는 중요한 것 같아요.

아시마 2015-01-28 10:18   좋아요 0 | URL
으악! 태백산맥을 읽지 않고 조정래를 말할 수는 없어요. 태백산맥은 조정래 문학의 절정기예요. 그 이후 아리랑이 나오고 한강이 나오지만 그야말로 가파른 하향곡선이예요. 죄송하게도. 아리랑까지는 그럭저럭 읽어주지만, 한강은, 아. 한강은. ㅠ.ㅠ

물론, 소설가는 그 시대에 대한 기록의 의무가 있다, 라는 시점에서 한강의 작품적 가치는 인정하는 편이긴 한데... 참 재미가 없죠, 한강도.

그렇지만 다락방님이 태백산맥을 좋아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_-;;; 정글만리가 재미있었다면 태백산맥엔 환장을 하실지도. ㅎㅎㅎ

말리 2015-01-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전형성과 일반성 이었든가, 뭐 그런 논쟁이 기억 납니다. 전형이란 무엇인가? 제 생각엔 이 책의 그 누구도 전형성조차 획득하지 못한 것 같아요. 모든 인물이 피상적이지요. 아직도 나오는 tv광고가 볼때마다 마음을 아득하게 합니다. 작가에 대한 회한보다 이런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우리의 문학적 감수성이 뼈아픕니다. ... 전 태백산맥 무척 좋아했지만, 7권부터는 그만큼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조정래는 태백산맥 6권까지만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시마 2015-01-29 15:09   좋아요 0 | URL
글쎄요. 우리의 문학적 감수성이란 아파야 청춘이다 따위의 책을 백만부 해 치우는 그런거니까요. 아플 뼈도 없단 느낌이라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 책의 일본인에 관한 묘사나 중국 주재원에 관한 묘사 등등은 각종 해외 주재 커뮤니티에서 읽을 수 있는 단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피상적이라는 말도 맞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그래서 저는 여전히 조정래라는 한 작가에 대한 회한이 들어요. 분명 이보다 더 잘 쓸 능력이 있으신 분인데요. 늙어서 힘이 딸리시나.
 

    


V.C. 앤드류스를 처음 접한 건 아마도 중학교 1학년쯤이었지 싶다. 그때 큰언니가 누군가에게 빌려 집에 가져온 책은 <오도리나>였다. 큰언니는 기를 쓰고 동생들이 그 책을 읽는 것을 막고자 했지만 나는 물러터진 큰언니의 반대를 뚫고 그 책을 읽었다. 나는 언니가 책을 읽는 속도의 (거짓말 조금 보태)세배쯤의 속도로 읽었으므로, 언니가 그 책을 읽다 덮어 두고 외출을 한 사이 다 읽어 버렸다. 언니보다도 빠르게. 


책은 재미있었다. 재미있었는데 몹시도 기괴한 느낌이었다. 오도리나는 아직 열살도 안된, 아니면 많아도 십대 초반의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어느날 숲 속에서 누군가에게 강간(또는 윤간)을 당하고 그녀의 부모님은 무슨 치료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정확히는 그녀의 기억에 듬성듬성 구멍을 낸다. 정신의학적 용어로는 해리쯤 되겠다. 그때부터 그녀의 집에는 두명의 오도리나가 산다. 말하자면 지금 살고 있는 오도리나는 강간의 경험(?!)이 없는 오도리나이고, 언니 오도리나가 있었는데 숲에 들어갔다 강간을 당해서 죽었다...는 것이 그들의 시나리오이다. 


그 집에는 오도리나의 고종사촌이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또한 기묘하다. 오도리나의 고종사촌은 오도리나의 고모 딸이기는 한데, 아빠는 알고보니 오도리나의 아빠였다. 그러니까 고종사촌이 아니라 근친상간에 의한 이복형제라고 해야하나. 그 탓인지 그 고종사촌은 뼈가 유리처럼 쉽게 부서지는 병이 있었고 마침내 계단에서 굴러 죽고 만다. (죽었나? 안죽었나? 확실하지 않다.)


그 뒤 중학생인 나에게 주어진 앤드류스의 책들은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였다. 그 즈음 붐이 일었던 책대여점에서는 표지가 날깃날깃 닳아 중간에 두꺼운 호지키스 심을 박은 그 시리즈의 책들을 빌려볼 수 있었다. 


반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그 책을 읽었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작가에 대한 설명이 나돌았다. 그러니까 V.C. 앤드류스 역시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났고, 그래서 그녀역시 오도리나의 사촌언니와 같이 뼈가 유리처럼 약한 병이 있어 평생 휠체어에 앉아 생활을 했다고.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늘 근친관계의 남자들만 보니 그녀의 소설은 항상 근친에 의한 관계들만이 소재가 된다는.


그런 소문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만큼 그녀의 책은 모두 근친상간이 소재였다. 으악 스러운 소재이긴 한데 엄청나게 재미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를 다 읽고 헤븐 시리즈도 다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도온 시리즈에 가서는 두손을 들었다. 읽다가 독서를 포기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더는 못읽겠다, 하는 느낌.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수록된 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의 말대로 '중학생인 나를 더럽힌 소설' 이었다.

기사 원문은 여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8059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뭔가 내 안의 깨끗하던 무언가가 좀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도온 시리즈는 읽기를 포기했음에도 (여러번 말했던 바, 내가 읽던 소설을 중단한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일이다. 나는 읽던 소설을 중단하는 일이 거의 없다. 약간의 강박증 같은 게 있어서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다 읽는다.) 역시 김용언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재간 소식에 책을 구매한다. 


이놈의 완역 덕후는, 내가 읽었던 번역서의 '완역본'이 출간되었다는 말에는 정신을 못차린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 읽기를 즐기는 나는, 심지어 드라마를 보던 중 등장인물의 대사 한마디를 놓치는 것도 질색을 해서 드라마를 실시간 본방이 아니라 VOD로 주로 본다. 드라마를 보던 중간에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드라마를 중지해 놓고 볼 일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더럽힌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고 탐독했던 이 책의 완역본이 나왔다는데 사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산다, 산다, 무조건 사고 본다. 


그런데, 사기는 사는데...... 다인이 없을 때 얼른 읽고 다락방(이 있다면) 어딘가에 깊숙히 숨겨둬야 겠다. 다인이가 스무살이 될 때까지는, 아니, 해인이도 스무살이 될 때까지는 풀어놓지 말아야지. 그래봐야 다인이도 중학생이 되면 엄마가 기겁할 책을 어디선가 찾아 읽을 테지만 아아, 내 책장에서 꺼내보는 건 좀 죄책감이 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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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5-01-2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오도리나도 생각나네요. ㅎㅎ 헤븐 시리즈도 가물가물 떠오르구요. 다시 읽으면 어떨까 정말 궁금해요.

아시마 2015-01-27 20:45   좋아요 0 | URL
오도리나...... 정말 기괴하기 짝이없는 책이었죠. 그 책중에 엄마가 아이를 욕실에 넣고 온몸을 박박 문질러 씻기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게 아마 강간을 당한 아이를 발견해 집에 데리고 온 직후였나.... 한동안 목욕할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올랐었다죠.

헤븐 시리즈는 도온 시리즈랑 내용이 좀 헷갈려요.

하여간 이 작가도 머릿속이 좀 애매모호한ㅎㅎㅎㅎ 재미있는 건 이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이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기 까지 했다는 사실이죠. 미국에서도 인기는 인기였나봐요.

blanca 2015-01-27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들 비슷한 연배. 비슷한 추억. 오도리나 저도 기억나요. ㅋ

아시마 2015-01-27 20: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70년대 중후반생은 거의 비슷한 추억일걸요? ㅎㅎㅎ

다락방 2015-01-28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락방의 꽃들 너무 충격이어서 헤븐시리즈, 도온시리즈, 오도리나 다 읽었었거든요. 오도리나, 정말 충격이었죠. 사실 강간을 당한 게 오도리나 본인이었다는 거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한테 무리지어 당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엄마가 집에서 욕조에서 오도리나를 되게 더럽혀졌다고 하면서 엄청 빡빡 씻기고, 그래서 기억을 잃는 걸로 기억해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등의 말을 해준 게 아니라, 너는 더럽혀졌으니 깨끗해져야 해, 하면서요. 크.

링크해주신 칼럼도 읽었어요. 아, 우리는 그러니까 다같이 그당시에 더렵혀진겁니까.

여기 댓글 달아주신 하이드님, 블랑카님, 저는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다 동갑일걸요? ㅋㅋㅋㅋㅋ 아시마님은 제가 잘 모르겠네요. 아마도 한두살 차이 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하하하하하.

아시마 2015-01-28 10: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 아마 동갑일 거예요. 학번만 하나 정도 빠를걸요. 제가 1월생이라. 우리, 아마 럭키한 숫자가 두개 겹쳐졌던 그해에 태어났죠?

그나저나, 현대문학(폴라북스)에서는 앤드류스의 작품들을 모두 줄줄이 재간해 낼까요? 과연? 일단 이게 궁금합니다. ㅎㅎㅎ 오도리나가 재간 된다면 그건 사고 싶고, 헤븐이나 도온 시리즈는 노땡큐.
그래도 앤드류스의 작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서, 출판사가 돈 많~~~~~~~이 벌어서 다이애너 개벌든의 책 아웃랜더 연작들이나 계속 출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제발 책 좀 내줘!!!

다락방 2015-01-28 11:14   좋아요 0 | URL
다이애너 개벌든의 아웃랜더 시리즈라면 저 역시 환영입니다만 ㅋㅋㅋㅋㅋ

프리강양 2015-02-1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던 객이 눈치없이 끼어들고 싶네요 ^^
당시 라디오 광고도 엄청 많이 나왔던 책이었는데, 전 책 줄거리 듣고 질색하며 거들떠도 안 봤어요. 할리퀸을 볼 지언정 이 작가는 제 취향과는 너무나 극에 있던 작가였거든요.
다이애너 개벌든의 아웃랜더 시리즈는 저 역시 환영입니다 ㅠㅡㅠ 애증의 제이미 ㅠㅡㅠ
아웃랜더가 미드로 만들어져 방영 중이기도 해요. 배우들도 스코티시에.
다만 책은 뒤로 갈수록 작가의 의욕이 더해져 문화사 책이 되어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아아
 
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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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의 말이 책의 서두에 있어도 가장 나중에 읽고, 에세이를 읽을 때는 작가의 말이 말미에 있어도 가장 먼저 읽는다.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 작가의 말이 나의 마음에 확 와 닿았다. 그래서 이 책의 리뷰는 이 책의 말미에 실린 김영하의 작가의 말의 일부를 따오는 걸로 시작해야 한다. 


2012년 가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생각보다 많은 것이 낯설었다. 사 년 남짓 해외를 떠도는 사이에 한국 사회는 또 많이 변해 있었다. 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는 없다. 그 전이 어땠는지부터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워낙 빨리 변화하는 나라여서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것이 거의 없다. 


p. 207, 작가의 말


2014년 여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일단은 나의 포지션이 변해 있었다. 미취학 영유아 둘을 데리고 떠났던 나라에,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와 곧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일곱살 아이 둘을 데리고 돌아왔으니까. 나의 스위치를 애엄마 모드에서 학부모 모드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남의 이야기같던 사교육 시장은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어지러웠다. 이곳이 내가 떠났던 그 나라 맞나 싶었다. 낯 설어도 이렇게 낯 설 수가 없었다. 


김영하는 변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는 없다 라고 말했지만 나는 적어도 한가지는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다. 떠나기 전만해도 외제차 옆은 주차를 하지 않는 것이 나의 원칙이었는데 불가능할 정도로 외제차가 넘쳐났다. 세대에 한대꼴로 외제차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우디와 벤츠 사이에도 주저없이 차를 넣는다. 피할 수가 없으니. 김영하라면 이 현상에 대해 뭐라고 설명을 할까. 뭔가 시크한 어조로 한국 경제의 현황에 버무려 멋들어진 설명을 내놓지 않았을까. 사 년 남짓 해외를 떠돌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 남자는 무엇이 가장 낯설었을지 궁금하다.


나는 김영하의 시크한 어조를 좋아하는데 김영하의 chic는 세련되고 멋있다기보다는 냉소적이다. 세상에서 한발쯤 발을 빼고 영화 관찰하듯 보는 느낌이랄까. 언제나 김영하는 그랬다. 그 사건의 현장에 뛰어든 당사자나 경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위치를 견지한다. 그런 어조는 소설을 쓰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찰자의 전달은 명쾌하고 산뜻했다. 그는 구질구질하게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작가의 말에 그대로 설명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가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p. 208-209, 작가의 말


그러니까, 김영하의 보는 방식은 곧 본 것에 대해 홀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다. 그 현상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가 된다. 관찰을 하고, 그 관찰에 대해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그야말로 놀라운 화학변화가 일어난다. 하나의 현상이 김영하라는 촉매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재탄생 되는 과정을 보는 것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이건 그야말로 연금술이다. 글을 읽는 내내 야~ 진짜 똑똑하거든 이 작가는. 어쩜 이런 생각을 다 해내냐. 하는 생각이 드는 거지. 


한때 김국진이 우리나라 최고의 개그맨이었을 때, 누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김국진을 혼자 방에 가두어 놓고 뭐하고 있나 몰래 관찰하고 싶은 느낌이라고. 이 생각을 현실로 옮기면 미저리 버금가는 호러물이지만, 상상만을 하면 최고의 개그물이 된다. 때때로 나는 김영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 똘똘한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나? 뭐 이런 느낌. 


이 책을 출간 된 직후에 읽었다. 그러니까, 2014년 9월에. 그리고 한강의 소설 <소년이 간다>를 읽고 나서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챕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이천팔백여 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p. 115-116,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은, 광주의 이야기가 왜 역사나 다큐가 아닌 영화나 소설로 기록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진실을, 진심을 가장 잘 전달하는 최고로 효과적인 매체이니까. 내가 김영하를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이런 똑똑한 통찰력 때문이다. 이 낯선 세상에 아직까지는 반드시 필요한 촉매라서. 이 낯선 세상을 이해하고 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니까.


ps.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책에 이어 '읽다' 와 '말하다' 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약 석달 간격으로 출간할 예정이라는데 석달 지났다! 작가와 출판사는 약속을 지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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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마미식 수납법 - 매일매일 조금씩 내게 필요한 것만 남기는 인간적인 집정리
까사마미 지음 / 동아일보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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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엄마는 깔끔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걸레는 언제나 수건과 동일 수준의 청결도를 유지했고, 방바닥은 늘 보송했다. 하도 여러번 삶아 희끗한 색으로 변질된 엄마의 수건에서는 늘 햇살의 냄새가 났다. 초록색 3M 수세미는 엄마의 최고 애용품이었고 덕분에 투명한 유리컵은 얼마되지않아 자잘한 기스덕에 희뿌옇게 되었지만 깨끗함만은 보장할 수 있었다. '쓰뎅' 냄비부터 크리스털 컵까지 엄마의 초록색 수세미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엄마는 정리 정돈엔 젬병인 사람이었다. 좁은 집에 많은 아이들, 그만큼 많은 살림이었지만 수납공간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은 집에서 엄마는 늘 짐을 들었다 놨다 먼지만을 닦았다. 깨끗했지만 어질러진 집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엄마의 집을 떠난 게 20년 전이다. 하숙을 하다 자취를 하고, 다시 신접살림을 꾸리고, 친구와 둘이 쓰던 하숙방에서 원룸으로, 다시 복도식 구형아파트에서 먼 외국 낯선 구조의 집에서 다시 새아파트로. 그 사이 둘이었던 가족은 셋에서 넷이 되고 짐은 점점 늘어났다. 오천권이 넘어가면서 헤아리기를 포기한 책들과, 어느새 세대로 늘어나 버린 재봉틀과 엄청나게 사들인 그릇들의 틈바구니에서 더는 엄마식 살림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정리 정돈은 보고 배우는 것이 가장 크다. 요즘같이 시어른을 모시고 살지 않는 것이 보편화 된 환경에서 엄마의 살림법은 딸에게로 전수되었다. 새로 살림을 시작하는 딸은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엄마의 방법 외의 방법을 모르므로 엄마의 방법대로 집안을 정돈한다. 나의 경우에 그건 최악의 방법이었다. 살림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도 있으면 당장 등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사람들은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한다.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나는 알라딘을 찾는다. 알라딘 검색창에 살림법, 수납법 등등의 검색어를 입력했고 열권이 넘는 책을 주문했다. 음, 나는 스케일이 크다.(스파르타의 페르시안 왕 '나는 관대하다' 어조로 읽어야 한다.)


감히 말하건대, 종이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할 책이 태반이었다. 집안을 정리하고자 쓰레기를 생산하는 형국이니까. 살림 관련 책들을 집필하고 출간하는 집필자들과 출판사들에게 이르노니, 볼만하고 쓸만한 수납도구를 만드는 능력이 그리 흔한 능력이 아니라네. 책에서 나오는 수준의 수납도구를 만들 수 있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면 수납관련 책을 사지도 않을걸세. 이미 필요 없을테니.


그 와중에 걸려든 책이 이 책이다. 


까사마미는 네이버의 유명 수납, 살림, 인테리어 블로거....라고 한다. 난 블로그를 잘 방문하지 않으므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는 모르겠고, 이 책은 도움이 된다. 단, 살림 레벨 중급 이상자들에게만.


초기의 나처럼 완전 쌩초짜로 맨땅에 헤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난해하다. 집이 좁은 사람들에게도 맞지 않다. 수납의 기본중에 기본은 공간의 확보다. 공간이 확보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책은 쓸모가 없다. 그래서 별 반개 뺐다. 


자, 이제 나 살림 좀 잘 하고 싶어서 살림하려고 애 좀 써 봤어, 우리집 그럭저럭 빈공간은 있어.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펼쳐보자. 구석구석 요긴하고 쓸만한 아이템들이 꽤 있다. 좁은 공간에 많은 물건을 사용하기 편하게 수납하는 법이 많다.


역시나, 옷 접는 방법은 대체 옷을 이렇게 공들여 접어서 뭘 어쩌겠다고, 싶긴 하지만. 그래서 별 반개 또 뺐다. 


157개의 아이디어로 나누어서 정리된 책의 구성도 찾아 보기 좋아서 도움이 된다. 


이제, 엄마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주택과 나의 아파트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엄마는 여전히 깨끗하지만 어질러진 집을 가지고 있고, 나는 깨끗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정돈 된 집을 가지고 있다. 


까사마미,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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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나라
한창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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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항구에서 태어났다. 말만 앞 세우는, 말 외에 행동이라고는 무차별 폭력밖에 없는 아버지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항구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적어도 하기 싫다는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 어른 중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소년이었다. 그저 그것이 전부였다. 섹스보다는 키스가 해 보고 싶었던 열일곱살의 소년이 열 여덟살이 되고, 그 도시에 다시 봄이 왔을 때, 이해못할 폭력도 함께 왔다. 


"육하원칙으로 해 보자."

우리는 그렇게 했다. 먼저 '누가?' 부터 시작했다. 답은 바로 나왔다.

"정글복 입은 군인들이."

정글복 입은 군인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알고 있었다. 패거리 중에는 이미 그 부대에 자원해서 복무를 하고 있다는 이도 있었고 지원 신청을 해두고 시험을 기다리는 이도 있었다. 그다음은 '언제?'였다. 이것의 답도 간단했다.

"지금."

"어디서?"

"여기서."

"무엇을?"

"사람들을."

"어떻게?"

"때린다."

모두 쉬웠다. 단 하나를 빼고. 남은 것은,

'왜?'였다.

거기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다. 영식이 말했다.

"데모 진압하러 왔을 거야."

"그렇다면 더 이상하잖아. 왜 군인이 온 거지? 경찰 많은데."

"그러게 말이야. 그게 경찰들 밥 먹고 하는 일이잖아."


..........


"뭔가가 잘못되어서 여기가 이렇게 돼버린 거 아닐까?"

육하원칙으로 해보자던 이가 자기 머리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사치 대답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대답이 불가능했다.


p.177-179


한창훈은 서사에 강한 작가다. 그는 그 도시의 시민들이 맨주먹의 시위를 하다 보도블럭을 깨 돌을 들고, 끝내 총을 들기까지의 과정을 차근차근 서술해간다. 


교사가 아무런 설명 없이 한 아이를 때리면 첫날은 그냥 얻어맞는다. ... 하지만 둘째 날 교사의 매질이 되풀이 되고, 여전히 맞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불만이 쌓인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억울함은 아픈 것만큼이나 참기 힘든 것이다. 셋째 날은 매 맞기를 거부하며 이유를 말해달라고 항변한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억울함은 모범생을 하루아침에 문제아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p.189


평범하고 소박했던 한 도시의 소시민들은 그렇게 변해갔다. 억울하니까. '왜?'라는 질문에 도저히 대답할 길이 없는 폭력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게 만든다. 시민들은 총을 들었다. 군대를 가 본 적도 없는 어린 소년이 돌을 던지고 총을 잡게 만들었다. 한강의 소설에서 나온 바, 한번 쏘아보지도 못할 그 총을. 


소년은 동호가 지키고 있었을 시체 영안실을 찾아간다. 소년의 친구, 진숙의 연인 영기는 그 곳에 누워 있었다. 목과 쇄골이 만나는 지점에 총을 맞고. 동호의 친구 정대가 그랬던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폭력에 희생되어.


소년은 자신이 어찌 해야 하는지를 학교와 교사에게 묻는다. 집에 가만히 있는데도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군인에게 어찌 대처해야 하는지를. 그러나 학교로 대표되는 사회와 정부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학교, 소년은 졸업도 하기 전에 사회인이 되어버린 것 같다. 무정부 사회는 사람들의 반란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부가 그들의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생겨났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하는 국가가 무슨 국가의 자격이 있을까. 


소년은 시위 현장에서 만난 생물교사에게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묻는다. 학생은 묻고 교사는 답을 하는 존재이니까. 그러나 그 생물교사역시 자신의 선생님에게 들은 말을 학생에게 들려줄 뿐이다. 


"그분의 말에 따르면 에스키모들이 썰매에 개를 묶을 때,"

생물교사는 잠깐 동안 말을 끊고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시 이었다.

"젊고 튼튼한 개들 사이에 늙고 병든 개 한 마리를 끼워넣는다고 한다."

"......."

"그리고 채찍질을 하는데 그 늙고 병든 개만 집중적으로 때린다는 거다."


.....


"그 개는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게 되지. 그 개의 처절한 비명이 다른 개들에게 공포심을 준다는 거야. 그래서 찍소리 못 하고 썰매를 끌게 되는 거야."


......


"그 사령관은 그게 필요한 거야. 공포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혼란이."

나는 공포와 혼란, 이라는 단어를 되뇌어보았다. 그가 그것을 원했다면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똑같은 의문점이 남았다. 왜?


p.203-204


이 소설의 리뷰를 쓰는 것은 힘들다. 나 역시 소년과 똑같이 끊임없는 왜? 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답을 듣고도 또다시 왜? 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그래도 왜? 라는 질문을 해야하니까. 그런데 왜? 그러나 왜? 왜? 왜? 도대체 왜???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p.206


그 도시의 소년들이 묻는다. 죽어버린 정배가, 영기가, 그 죽은 시체를 지키고 있던 동호가, 이유없이 연행되어 죽을만큼의 폭행을 당하고 도망친 인호가, 친구의 시체를 찾으러 갔던 소년이. 그러니 이제는 어른들이 대답할 차례다. 답은 교사의 몫이라기보다는 어른의 몫이니까. 그러하기에 노인들은 대답하기가 궁해서 죽어버리는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궁한 대답이라도 대답하라. 그 대답에 또 다시 왜? 라는 질문이 이어지더라도 그 왜? 라는 질문이 끝날 때까지.


당신들은 응당 그러해야 한다. 죽지 말고 대답하라. 왜? 라는 질문이 끝나기 전에는 당신들은 죽을 자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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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01-2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었나요,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었다, 로 끝나잖아요. 그게 정말 너무 답답했어요, 아시마님.

아시마 2015-01-27 12:09   좋아요 0 | URL
솔직히, 광주 이야기인줄 알았으면 안 집어들었을 거예요. 소년이 온다가 너무 힘들어서, 한창훈의 건강한 생명력으로 힐링해야지 하고 집어든 소설이... 이게 뭐예요. 괴로워요. 괴롭다는 말 밖에는 지금은 정말 할 말이... 없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