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 앤드류스를 처음 접한 건 아마도 중학교 1학년쯤이었지 싶다. 그때 큰언니가 누군가에게 빌려 집에 가져온 책은 <오도리나>였다. 큰언니는 기를 쓰고 동생들이 그 책을 읽는 것을 막고자 했지만 나는 물러터진 큰언니의 반대를 뚫고 그 책을 읽었다. 나는 언니가 책을 읽는 속도의 (거짓말 조금 보태)세배쯤의 속도로 읽었으므로, 언니가 그 책을 읽다 덮어 두고 외출을 한 사이 다 읽어 버렸다. 언니보다도 빠르게. 


책은 재미있었다. 재미있었는데 몹시도 기괴한 느낌이었다. 오도리나는 아직 열살도 안된, 아니면 많아도 십대 초반의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어느날 숲 속에서 누군가에게 강간(또는 윤간)을 당하고 그녀의 부모님은 무슨 치료를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정확히는 그녀의 기억에 듬성듬성 구멍을 낸다. 정신의학적 용어로는 해리쯤 되겠다. 그때부터 그녀의 집에는 두명의 오도리나가 산다. 말하자면 지금 살고 있는 오도리나는 강간의 경험(?!)이 없는 오도리나이고, 언니 오도리나가 있었는데 숲에 들어갔다 강간을 당해서 죽었다...는 것이 그들의 시나리오이다. 


그 집에는 오도리나의 고종사촌이 고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또한 기묘하다. 오도리나의 고종사촌은 오도리나의 고모 딸이기는 한데, 아빠는 알고보니 오도리나의 아빠였다. 그러니까 고종사촌이 아니라 근친상간에 의한 이복형제라고 해야하나. 그 탓인지 그 고종사촌은 뼈가 유리처럼 쉽게 부서지는 병이 있었고 마침내 계단에서 굴러 죽고 만다. (죽었나? 안죽었나? 확실하지 않다.)


그 뒤 중학생인 나에게 주어진 앤드류스의 책들은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였다. 그 즈음 붐이 일었던 책대여점에서는 표지가 날깃날깃 닳아 중간에 두꺼운 호지키스 심을 박은 그 시리즈의 책들을 빌려볼 수 있었다. 


반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그 책을 읽었고, 아이들 사이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작가에 대한 설명이 나돌았다. 그러니까 V.C. 앤드류스 역시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났고, 그래서 그녀역시 오도리나의 사촌언니와 같이 뼈가 유리처럼 약한 병이 있어 평생 휠체어에 앉아 생활을 했다고.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늘 근친관계의 남자들만 보니 그녀의 소설은 항상 근친에 의한 관계들만이 소재가 된다는.


그런 소문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만큼 그녀의 책은 모두 근친상간이 소재였다. 으악 스러운 소재이긴 한데 엄청나게 재미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다락방의 꽃들 시리즈를 다 읽고 헤븐 시리즈도 다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도온 시리즈에 가서는 두손을 들었다. 읽다가 독서를 포기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더는 못읽겠다, 하는 느낌.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수록된 김용언 영화 칼럼니스트의 말대로 '중학생인 나를 더럽힌 소설' 이었다.

기사 원문은 여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8059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뭔가 내 안의 깨끗하던 무언가가 좀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도온 시리즈는 읽기를 포기했음에도 (여러번 말했던 바, 내가 읽던 소설을 중단한다는 건 나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일이다. 나는 읽던 소설을 중단하는 일이 거의 없다. 약간의 강박증 같은 게 있어서 억지로라도 꾸역꾸역 다 읽는다.) 역시 김용언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재간 소식에 책을 구매한다. 


이놈의 완역 덕후는, 내가 읽었던 번역서의 '완역본'이 출간되었다는 말에는 정신을 못차린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 읽기를 즐기는 나는, 심지어 드라마를 보던 중 등장인물의 대사 한마디를 놓치는 것도 질색을 해서 드라마를 실시간 본방이 아니라 VOD로 주로 본다. 드라마를 보던 중간에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드라마를 중지해 놓고 볼 일을 볼 수 있도록.


그런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더럽힌다는 느낌에도 불구하고 참지 못하고 탐독했던 이 책의 완역본이 나왔다는데 사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산다, 산다, 무조건 사고 본다. 


그런데, 사기는 사는데...... 다인이 없을 때 얼른 읽고 다락방(이 있다면) 어딘가에 깊숙히 숨겨둬야 겠다. 다인이가 스무살이 될 때까지는, 아니, 해인이도 스무살이 될 때까지는 풀어놓지 말아야지. 그래봐야 다인이도 중학생이 되면 엄마가 기겁할 책을 어디선가 찾아 읽을 테지만 아아, 내 책장에서 꺼내보는 건 좀 죄책감이 든단 말이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15-01-2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 오도리나도 생각나네요. ㅎㅎ 헤븐 시리즈도 가물가물 떠오르구요. 다시 읽으면 어떨까 정말 궁금해요.

아시마 2015-01-27 20:45   좋아요 0 | URL
오도리나...... 정말 기괴하기 짝이없는 책이었죠. 그 책중에 엄마가 아이를 욕실에 넣고 온몸을 박박 문질러 씻기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게 아마 강간을 당한 아이를 발견해 집에 데리고 온 직후였나.... 한동안 목욕할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올랐었다죠.

헤븐 시리즈는 도온 시리즈랑 내용이 좀 헷갈려요.

하여간 이 작가도 머릿속이 좀 애매모호한ㅎㅎㅎㅎ 재미있는 건 이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이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기 까지 했다는 사실이죠. 미국에서도 인기는 인기였나봐요.

blanca 2015-01-27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다들 비슷한 연배. 비슷한 추억. 오도리나 저도 기억나요. ㅋ

아시마 2015-01-27 20:45   좋아요 0 | URL
ㅎㅎㅎ 70년대 중후반생은 거의 비슷한 추억일걸요? ㅎㅎㅎ

다락방 2015-01-28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락방의 꽃들 너무 충격이어서 헤븐시리즈, 도온시리즈, 오도리나 다 읽었었거든요. 오도리나, 정말 충격이었죠. 사실 강간을 당한 게 오도리나 본인이었다는 거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한테 무리지어 당하는 거였어요. 그리고 엄마가 집에서 욕조에서 오도리나를 되게 더럽혀졌다고 하면서 엄청 빡빡 씻기고, 그래서 기억을 잃는 걸로 기억해요.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등의 말을 해준 게 아니라, 너는 더럽혀졌으니 깨끗해져야 해, 하면서요. 크.

링크해주신 칼럼도 읽었어요. 아, 우리는 그러니까 다같이 그당시에 더렵혀진겁니까.

여기 댓글 달아주신 하이드님, 블랑카님, 저는 아마도 제가 알기로는 다 동갑일걸요? ㅋㅋㅋㅋㅋ 아시마님은 제가 잘 모르겠네요. 아마도 한두살 차이 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하하하하하.

아시마 2015-01-28 10: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 아마 동갑일 거예요. 학번만 하나 정도 빠를걸요. 제가 1월생이라. 우리, 아마 럭키한 숫자가 두개 겹쳐졌던 그해에 태어났죠?

그나저나, 현대문학(폴라북스)에서는 앤드류스의 작품들을 모두 줄줄이 재간해 낼까요? 과연? 일단 이게 궁금합니다. ㅎㅎㅎ 오도리나가 재간 된다면 그건 사고 싶고, 헤븐이나 도온 시리즈는 노땡큐.
그래도 앤드류스의 작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서, 출판사가 돈 많~~~~~~~이 벌어서 다이애너 개벌든의 책 아웃랜더 연작들이나 계속 출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제발 책 좀 내줘!!!

다락방 2015-01-28 11:14   좋아요 0 | URL
다이애너 개벌든의 아웃랜더 시리즈라면 저 역시 환영입니다만 ㅋㅋㅋㅋㅋ

프리강양 2015-02-12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가던 객이 눈치없이 끼어들고 싶네요 ^^
당시 라디오 광고도 엄청 많이 나왔던 책이었는데, 전 책 줄거리 듣고 질색하며 거들떠도 안 봤어요. 할리퀸을 볼 지언정 이 작가는 제 취향과는 너무나 극에 있던 작가였거든요.
다이애너 개벌든의 아웃랜더 시리즈는 저 역시 환영입니다 ㅠㅡㅠ 애증의 제이미 ㅠㅡㅠ
아웃랜더가 미드로 만들어져 방영 중이기도 해요. 배우들도 스코티시에.
다만 책은 뒤로 갈수록 작가의 의욕이 더해져 문화사 책이 되어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