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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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전, 완역 이런 말에 집착한다. 사실은 완역에 집착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몇몇 작품은 각각 다른 번역본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한국 작가의 경우 좋아하는 작품은 그 창작의 뒷이야기도 열심히 캐다 읽는다.  

그 중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집착은 유난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책은 다 샀고, 토마스 불핀치의 책도 몇가지 번역본으로 가지고 있으며, 책장 몇칸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섹션으로 아예 분리를 해 놓았다. 물론 그리스 로마 신화만 좋아하는 건 아니고 북구의 신화나 인도 신화도 좋아한다. 심지어 성경도 나에게는 히브리 신화서 또는 역사서의 개념이다.   

몇년 전, 생일 선물로 이 책을 사달라고 했을때, 남편은 그리스 신화는 애들이나 읽는 거 아니냐는 말로 나의 뒷골을 땡기게 했다. 그림형제의 동화도 성인판이 나오는 세상에 내 남편이라는 작자가 왜 그러느냐고.  

대학 신입생이 되었을 때, 담당교수님은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읽어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그 둘은 문학의 가장 베이스에 깔리는 거니까, 말하자면 서구 문학의 원전과 같은 것이라 읽지 않으면 문학 이해의 폭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대학 1학년, 3월의 어느날, 성당 다니던 친구에게 빌린 성경을 방에 엎드려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편의 문장들은 그 종교색과 관계없이 아름다웠고(지금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문학작품중의 하나로 꼽는다.) 묵시록의 문장들은, 그 어느 SF 소설보다 상상력 넘치고 박진감있게 무서웠다.  사실 그 숙제는 꽤나 지루한 숙제였고, 성경은 별로 읽기 쉽지도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책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도 그 숙제를 내 주고 억지로라도 성경을 읽게 해 주신 교수님께 두고두고 감사드린다. 뭐, 신화야 읽으라고 안해도 읽었을테니. (사실 우리과 우리 학년 50명중에 그 숙제를 한 사람은 열명남짓... 대학 신입생때라 아직 고딩때의 습관이 남아서 교수님이 하라는 건 다할 때였다, 난. ㅎㅎㅎ)

성경을 읽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그리스 신화는 그 뒤로도 꾸준히 내 주요 관심사의 하나로 있지만, 극단적으로 말해 내 독서는 성경과 신화를 읽기 전과 읽기 후로 나눌수도 있다. 성경을 읽고나니 갑자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변신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 전까지는 무심코 넘겼던 것들이 갑자기 의미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성경과 그리스 신화가 모든 서구 문학의 기본 베이스라는 교수님의 말은 틀림 없었다. 특별히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더 깊어졌다, 이런 말은 못하겠지만, 확실히 훨씬 재미있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예전같으면 무심코 넘겼을 구절들이 얼마나 말랑쫀득차진 재미를 가지고 다가오던지. 

그리스 신화는 신화 그 자체로도 참 재미있지만, 정작 중요한 효과는 그 후에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를 읽고, 어느정도의 지식을 베이스로 깔아놓은 뒤에 읽는 서구 문학작품들은 얼마나 재미있던지.  

이윤기의 책에 비해 삽화가 많은 것도 아니고(사실 이윤기 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는 삽화가 반~) 번역은 충실하고 매끄럽지만 이야기 자체가 그다지 말랑하지가 않아서 처음엔 좀 헤멜수도 있는데,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일사천리로 읽힌다. 

무엇보다 머릿속에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그리스 신들의 계보와 일의 순서가 앞뒤로 좌라락 정리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 원전이 꼭 최고인 것은 아니고, 그 원전에서 파생된 2차 3차 문학작품이 훨씬 문학성도 높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원전은 언제나 원전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이윤기는 읽기 전의 이윤기와는 또다른 재미를 가지고 온다. 이 책을 읽고나서 이윤기의 책이나 불핀치의 책을 다시 읽으면 그 재미는 이전의 백배가 될 거라 장담한다.

Ps. 이 책을 내 책장에서 뽑아 빌려간 00아. 니가 돌려주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나는 또 산다. 그 책은 무려, 내 남편의 선물이기까지 했단다, 버럭버럭버럭. 책 빌려달란 말 좀 하지 마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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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2019-07-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병희 교수님의 팬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무지 무척 매니악하게 좋아하기도 하구요. 잘 읽고 갑니다^^
 
<내집 마련의 여왕>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집 마련의 여왕
김윤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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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집을 구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한번쯤은 하는 생각일 게다. 저렇게 많은 집이 있는데, 저 많은 집중에 내 집은 없구나 하는 생각.  

집을 구할때 내가 원하는 조건은 아주 간단했다. 학군도 필요없고 비싼집도 필요 없고, 넓은 집이나 편의 시설에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조용하고, 베란다로 산과 나무가 보이는 곳, 눈 앞에 회색빛 아파트가 떡하니 가로막고 선 집만 아니면 된다고 했다. 남편은 종종, 니가 원하는 그런 집이 서울 시내에선 얼마나 비싼지 알기나 하냐고 퉁박을 놓았지만, 어쨌든 그런 집을 찾아내 주긴 했다.  

그때가 2008년 9월, 지금 집사는 놈은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은때였다. 속된 말로 상투를 잡은 거였다. 베란다로 내다보는 공원 전망이 끝내주는 집이었지만 정서향의 집이어서 여름엔 끔찍하게 더웠다. 우리는 그 집을 남서향이라고 속아 샀다. 4차선 도로를 향해 베란다가 나있고, 기차길 옆이라 소음도 먼지도 지독했다.

집을 보러 다니면, 가끔 집이 나를 환영해준다는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흔히들, 내 집이 될 집은 느낌이 온다는데, 아마도 그런 느낌일 것이다. 무턱대고 밝고 환하게 집이 나에게 웃어보이는 것 같은 그런 집이 있다. 집과 나의 궁합이랄까. 남들에게는 단점으로 여겨질 부분이 나에게는 장점으로 치환되어 다가오는 그런 집. 이건 단순히 금액의 문제와는 다르다.  

정서향의 그 집은, 서향이어서 날이 길었다. 여름엔 저녁 7시까지도 환했다. 그래서 참 좋았다. 무턱대고 막 행복해지기까지 했다. 더웠지만 에어컨을 켜면 되었고, 소음에 취약한 나였지만, 그래도 그 집의 소음은 견딜만 했다. 어릴때 우리 외가가 기찻길가에 있었는데,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음이 들릴때마다 포근하고 만만했던 외가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하지만 6개월을 살았는데, 남편이 덜컥 해외 발령을 받아왔다. 1년도 살지 못한 집을 부동산에 내놨을때 서브프라임의 여파로 집값은 우리가 샀을때보다 2천만원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꽤나 오래 기다려, 우리가 산 가격 그대로 집을 팔았고, 베란다 확장비용은 고스란히 우리 손해로 남았다. 확장비용을 포함해서 세금이며 이자비용이며 웬만한 월급쟁이의 일년치 연봉을 고스란히 손해보고 1년 3개월만에 이사를 나온 집이지만 난 아직도 그 집에 대한 느낌이 나쁘지 않다. 

처음 그 집을 보러갔을때, 그 화사한 아파트 외관과 나를 환영해주는 듯한 느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 집이란,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남들이야 뭐라고 이야기를 해도 나는 마냥 그 집이 좋은, 그 집과 잘 사귈 수 있을 것 같고 이 집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집. 

이 책은 사람들에게 그런 집을 찾아주는 사람의 이야기다. 누군가가 가진 돈과 생활 조건에 맞춘 집을 찾아주는 일이 이 책의 주인공 송수빈에게 주어진 임무다. 직업이라고 하기엔 그녀가 그 일에 종사하는 기간도, 찾아준 집의 갯수도 너무 작으니까 일종의 미션정도로 생각하면 될듯. 모든 사람이 다 우와우와 할 집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단점이 될 부분이 본인에게는 장점으로 치환될수 있는 그런 집.   

집다운 집. 
춥지도 덥지도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집. 딱 좋은 양질의 햇빛과 바람이 솔솔 드나들고 나무와 꽃과 구름과 새, 하다못해 도마뱀까지 모든 자연을 앉아서 그대로 만끽할 수 있는 집. 넓지 않은 간소한 테라스지만 직접 만든 나무 벤치에 걸터 앉아서, 또는 해먹에 누워서 하루 종일 기분 좋게 노닥거릴 수 있는 우리집.
p. 213 

집다운 집은 집은 이런 집이다. 실제로 수빈은 남편과 함께 그런 집다운 집을 짓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발리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은. 

예전엔 그랬었다. 누가 집을 샀다거나 이사를 했다 그러면, 모두들 축하해주며 이런 덕담들을 해 주었다. 누가 그러는데 그 동네 애 키우기 참 좋다더라, 어머 내 친구 아무개가 살았었는데....... 옛날에 거기 배 밭이 있었지, 빵공장이 있어서 냄새가 참 구수했는데, 지나가다 보니까 산이랑 개울 경치가 참 좋더군....... 
지금은 다르다. 누가 집을 샀다고, 정확히 표현하자면, 모 아파트를 샀다 그러면,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그 집의 시세와 호가, 입지, 평면도를 알아보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사는 동네 집값이 얼마나 거품이라거나 2006년 폭등으로 이제 폭락할 일만 남았다거나 임대아파트들이 많아서 거긴 막장이라거나 판교 입주하면 볼 장 다 봤다거나, 원래 주민 수준이 낮다는 둥의 그런 악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 것이다. 그 사람의 인격을 깎는 것 만큼이나 몰상식한 말이라도 사람들은 이제 별로 개의치 않는다. 무슨 집값 올림픽이라도 벌이듯, 너도 나도 더 높은 집값을 향하여 비교하고 깎아 내리고 분석한다. 교양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드러내놓고 험담을 하진 않지만, 그 정도 동네 그 아파트라면 레벨이 어느 정도인지 따져보며 회심의미소를 짓거나 배 아파하거나 둘 중 하나다.
p. 259-260 

누가 어떤집에 사는지보다 얼마짜리 집에 사는지가 더 궁금하고, 사는 동네가 수준을 말해준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청담동 도련님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는 세태는 분명 비정상이다. 이건 분명 주객전도다. 집이 사는(living)게 아니라 단순히 사는(buy) 게 되어버린거다. 이래서야 집다운 집이란 허명만이 있을 뿐.  

그 서향집을 팔고 또 다른 집을 사야했다. 외국 나가기전에 부동산은 하나 잡아두고 나가는 거라고, 세이브되는 주거비용까지를 포함해서 평수를 넓혀 사 놓고 나가는 거라고 한결같이들 조언을 하길래, 우리는 또다시 집을 보러 돌아다녀야 했다. 

나는 사는(living)집을 원했지 재테크를 위해 사는(buy)집을 원하지는 않았다. 서울 시내에 집은 왜 그리도 많던지, 서울이란 땅덩이는 이럴때 또 얼마나 크던지. 지방출신인 나도 남편도 다니던 학교 근처와 직장 근처외에는 아는 곳도 없어 우두망찰했다. 돈을 손에 쥐고 있으니 살(buy)집은 차고도 넘쳤는데 정작 살(living) 집은 없었다. 그럴때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누군가 부동산에 도통한 사람에게 집 사는 문제를 일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람을 붙잡고 우리가 가진 돈과 대출 가능한 규모는 얼마인지를 말해주고 내가 원하는 집의 조건을 세세하게 말을 해 주면 그 사람이 적당한 집을 구해봐 주는, 그런 시스템이 어디 없나.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세상엔 종종,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주인공 수빈이 누군가의 사연을 듣고 그 사람에게 맞춤집을 찾아주는 부분은 심윤경의 소설 <이현의 연애>를 떠올리게 했다. 영혼을 기록하는 여자 이진, 그녀를 사랑하는 이현과 이진의 기록속에 등장하는 영혼의 삶. 심윤경의 소설은 이 세가지가 어울려 일종의 옴니버스 액자소설을 만들어 낸다. 게다가 이진의 아버지, 이현의 장인이자 이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세.  

이들의 존재가 수빈(이진), 그렉(이현), 정사장(이세 공)에 슬쩍 덧칠되어 읽혔다. 물론 두 소설은 전혀 다른 소설이다. 수빈은 기록하는 대신 성실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영혼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고. 단지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되는 집을 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수빈 자신의 사연이 두개의 이야기로 함께 진행되는 면이 비슷하다는 연상을 이끌어 냈을 뿐.  

처음에는 그저 그런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로 끝나는가 했다. 하지만 수빈의 사연을 풀어내고 그렉의 자취를 추적해가는 부분은 꽤나 긴박감 넘치는 재미를 가지고 온다. 끝까지 정확한 정체를 숨기고 있는 정사장이라는 존재의 미스테리도 그렇고. 소설의 말미의 극적 재회는 뭉클했다.  

액자식 옴니버스(이런 말이 가능한가? -_-) 형태라 이야기는 술술 재미있게 읽힌다. 동일한 주인공이 각각 다른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시리즈 소설처럼 읽기가 쉬운 소설이었다. 

그리고 집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해 보게 한다.  

누군가에게 맞춤집을 찾아주는 수빈, 수빈이 살고 있는 집 또한 수빈의 남편이 "소울 하우스"라고 칭할 만큼 수빈의 가족에겐 맞춤 집이었다. 남들이 다들 아파트를 선호 할 때, 수빈과 수빈의 남편은 그들에게 맞는 주택을 찾아내어 안착한다. 그 집에 남편은 밤나무를 심고, 그 밤나무 아래에서 아이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측두엽이 손상되어 기억을 잃었던 그는 아내와 아이 대신 그 밤나무를 먼저 떠올린다. 아마 그가 더 떠올리고 싶었던 건 그 밤나무 아래에서 안아주었던 아이와 아내였겠지만. 때때로 집은 가족의 대체물이 되기도 하니까.

사람은 그런 소울하우스에서 살아야 한다. 집은 누구나에게 소울하우스가 되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완벽했던 소울하우스에서 쿨하게 떠날 줄 아는 수빈의 모습과 결단이 또한 신선했다. 결국 집이 사람을 묶어두는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집은 살다 떠나는 곳이다. 정을 붙여도 결국은 나만의 집으로 남게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런 것을 생각해보면, 더 큰집, 더 비싼집, 재테크를 위한 수단의 집은... 삭막하다. 그 집에서 과연 행복할까. 사람들이 돈 대신 나에게 맞는 집 "소울 하우스"를 찾는다면, 모든 문제는 좀 더 쉬울텐데. 헌데 과연, 내가 사 둔, 몇년뒤에 들어갈 나의 집은 내 "소울하우스"가 맞을까. 

나의 소울하우스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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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힘 2010-02-0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엔 정말 저랑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 많네요. 어쩜 저랑 독후감이 똑같은지 놀랬습니다. 저는 글재주가 미천하여 이렇게 님처럼 감성적이고 콕 집어서 잘 쓰지못한다능....참 좋은 책 같아요. 말 그대로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당
 
데이지의 인생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나라 요시토모 그림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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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더라, 그때가.  

하루종일 정말 지독했다,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날이었다. 일은 안풀리고, 가는 데마다 핀잔 야단 또는 원망을 받았고, 친구와는 오해로 한참동안 말씨름을 했으며 끝이 보이는 연애는 그 정해진 수순을 차곡차곡 밟고 있었다. 정말 참담하다라는 말로밖에는 표현이 안되는 기분이 되어 어두운 길을 찬 바람을 맞고 터덜터덜 들어와 불도 켜지않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한바탕 울 참이었는데, 

거짓말처럼 침대가 따뜻했다.  
그 순간 이불 속의 그 온화한 온기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 괜찮다고,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이제 그만 푹 쉬라고 내일이 되면 더 나아질 거라고... 나의 어깨를 감싸고 다독여주는 듯한. 

그리고 나는 우는 것도 잊고 잠에 빠져들었었다. 세수는 커녕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잠에 골아 떨어졌다 눈을 떴을땐 이미 창밖이 환했고 기분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곧잘 전기장판의 스위치를 켜놓고 나가곤 했다.

이책은, 그때의 그 따뜻한 침대를 생각나게 했다.  

미혼모였던 엄마가 죽고, 데이지는 이모의 집에 얹혀산다. 이모와 이모부는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늘 내가 더부살이라는 걸 의식하고 사는 어린아이의 삶은 처량하다.  

나는 나이도 어린 데다 더부살이 신세였기 때문에 이모부부가 집에 없을 때는 스스로 전화를 쓰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한 가지에서 시작된 내 안의 응석이 몸을 다 파먹고 밖으로 튀어나오면, 그 흐름에 휩쓸려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12

나는, 더부살이를 해 본 경험은 없지만, 전화에 대해 저런 조심성을 가져본 경험은 있다. 그래서 전화를 조심하는 그 마음이 어떤건지 안다. 미움받지 않으려, 거슬리지 않으려 잔뜩 도사리는 그 마음을. 그게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지도. 

선수를 치는 것이 더부살이의 덕목이다. 선수를 치고 그 다음은 어디까지나 겸손하게, 눈에 띄지 않게 그림자처럼, 상대가 무슨 도움을 주더라도 과하게 고맙다 하지 않고, 이쪽에서 무언가를 해 주었어도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하며 지내는 것.
p. 30-32

 

능숙하게 응석을 부리는 것도 더부살이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p. 40 

자신의 말 하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살아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는지, 그 마음의 뒷면이 얼마나 외로운지도. 사실 아무도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고, 눈치 보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이런식으로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걸 알면 마음아파하고 슬퍼할 사람들이다. 그러지 말고 밝게 아이답게 천진하게 응석을 부리고 살라고 말해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게 안되는 걸.

그래서 밝게, 명랑하게, 자신의 일을 좋아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데이지가 사랑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와 친구 달리아가 그렇게까지 연결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할수는 없지만 짐작이 간다. 달리아에게는 마음껏 할 수있지 않았을까. 그 잔뜩 도사린 마음을 달리아에게만은 풀어놓고 살지 않았을까. 달리아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데이지의 저 마음은 위로받고 있지 않았을까.   

약간이나마 기운을 되찾고 새 생활에도 적응한 후에는 외로운 밤에도 달리아를 무턱대고 불러내지는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그랬지만 머리맡에 놓아둔 피리만 불면 언제든 그 마음씨 좋은 친구가 어둠을 헤치고 찾아와 줄 것이란 믿음 덕에 대개는 참아낼 수 있었다.
p. 70

분리불안을 유난하게 앓는 아이들이 있다. 그건 보통 이런 악순환으로 시작된다. 엄마에게 치대는 아이를 여하한 이유로든 귀찮아하는 엄마와, 거절당했다는 불안감으로 엄마에게 더욱 달라붙게 되는 아이. 이런 관계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부르고 당신을 필요로 할때 내 곁에 와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아이의 분리불안을 더욱 키우는 거다. 하물며 엄마와 자식도 그럴진대 고작 이웃의 친구일 뿐인 달리아에게 데이지가 갖는 저 신뢰가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정말로 달리아는 그랬을 것 같다.  

그런 달리아가 죽었다. 그렇지만 데이지는 또 살아갈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에 허한 구멍이 뚫리기는 했어도 여전히 씩씩하게 웃으면서.  

그냥 이 모든 것들이 슬프면서도 위로가 된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딱 맞는 구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대단한 아포리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앞 뒤 없이 온화하던 그 침대시트처럼. 엄청나게 용기를 주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용기를 주기는 커녕 그냥 맥없이 있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지만, 오히려 그게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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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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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를 겪으신, 33년생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내전이 가장 나쁜 건, 나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되는 거라고. 그 일이 반복되다보면 적과 아군의 분별이 없어져서 결국 양민 학살이 일어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좋은 전쟁이란 아예 성립될 수 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세계대전때, 언어가 다른 이국의 병사를 향해 총을 갈기던게 좀 더 견딜만하지 않았을까(아, 도대체 이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어제까지 한동네 아래 윗집에 살던 사람이 하나는 국군에 징집되고 하나는 북한군에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뜬금없이 전장에서 마주쳐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총을 쏠까, 쏘지 않을까, 쏘지 않고는 지휘관에 의해 죽을테고, 쏘면 나의 영혼이 죽을텐데, 도대체가. 

이 책의 저자, 이스마엘 베아는 정부군 소년병이었다. 정부군이건 반군이건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쩌다 정부군에 소년병으로 끌려갔을 뿐이고, 반군에 끌려갔더라면 그는 반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군에 소속되었거나 반군에 소속되었거나 그 이후의 행보는 동일하다. 마약과 강간, 학살. 전쟁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한다고 해도, 인간의 모든 기본적인 신뢰를 깡그리 깨 부순다는 점이 참 나쁘다.  

부모가 죽었다면 부모를 대신하여 아이를 보호해야 할 정부가 소년을 납치해 마약을 먹이고 학살과 강간을 저지르게 만들다니. 어느날 청와대를 점령해버린 쥐새끼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지,라고 말로는 그래도 나의 진심은 아무리 쥐새끼라도, 아니, 쥐새끼야 그러거나 말거나 나머지 제정신 가진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반군과 똑같은 짓을 하는 정부군이라니, 나에겐 이 부분이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충격이다. 아마도 나는 헐리우드식의 건전하고 용맹하고 국민을 철저히 보호하는 정부라는 개념에 너무 익숙해져있나보다.  

글의 내용은 더할나위없이 참혹한데도 서술하는 태도는 냉정하다. 이스마엘의 감정 어느 부분은 분명 파괴되었고, 그 파괴가 역설적으로 이스마엘을 살렸다. 그 감정이 온전하게 남아있었다면, 이스마엘의 영혼은 파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일종의 방어기제의 작용이었을까. 그래서 이 글은 냉정하고 담담할수록 가슴아프다. 어떻게 이런 일들을 이렇게 담담하게 서술할수가 있니, 이건 이스마엘에 대한 연민이다. 비난이 아니라. 어떻게 이 아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이스마엘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의 행위에 대해 감정의 개입없이 서술함으로써 최고의 현장감과 역설적인 비현실감을 동시에 이끌어낸다. 차라리 거짓말이기를, 과장이기를 바라게 되지만 때때로 현실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곳에 있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시에라리온 내전에 대한 최고의 르포이고, 가장 현실적인 기록이다. 그리고 이 현실적인 기록은 말한다. 

전쟁은, 랩퍼를 꿈꾸던 12세 소년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노라고. 나는 그저, 평범하고 천진한 소년이었을 뿐이라고. 그 천진하던 소년이 마약 중독자가되고, 학살자가 되고, 살인마가 되는 그것이 전쟁이라고. 이래도 당신들은 전쟁을 할 참이냐고.  

왜 하필... 소년이었을까. 왜 이렇게 어린아이들이었을까. 인간이 진화하는 만큼 인간의 잔인성도 진화하고 도덕성은 퇴화하는 모양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되지만 그래도 책 뒤 저자의 천진하고 밝은 미소는 희망을 제시한다. 회복의 희망을.  

제발. 이 지구상에서 전쟁이 사라지기를. 

무기 만들어 파는 니들이 제일 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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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 오래된미래 / 200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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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를 낳고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강신재의 소설 <임진강의 민들레>를 읽는데, 전쟁중의 난리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어느 여인의 시체 옆에 갓난 아기가 울면서 엄마의 가슴을 헤집는 모습이 그려진 구절이 있었다. 강신재의 소설을 좋아해서 <임진강의 민들레>도 서너번은 읽었는데, 이 소설에 그런 장면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그 구절을 읽은 직후에 부들부들 떨면서책을 내려놓고 아이가 고요히 잠든 방에 들어가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내 목숨은 내 목숨이 아니구나, 뭐 그런 류의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을 조금 흘렸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되고, 한 생명을 이땅에 내어 놓는다는 건, 아이를 잃은 어미의 기막힌 슬픔보다, 어미를 잃은 젖먹이의 철없는 울음이 더욱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는 걸 의미했다. 나의 산후우울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책을 읽다가도, 몇번이나 책을 내려놓고 방에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러 들어갔다. 잠든 둘째놈의 통실통실한 팔이며 볼을 쓰다듬다가, 첫째놈이 걷어찬 이불을 다시 덮어주다가, 사는 게 하도 기가막혀서 좀 울었다. 살아 있다는 게 죄를 짓는 일 같다. 

사실 이 책은,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용이며 책의 가치를 떠나 잘 쓰여진 글일거라는 믿음이 없어서였다. 이 책을 읽느니 차라리 UN이나 유니세프의 보고서를 읽고 말지. 했다. 차고 넘치는 연예인들의 어설픈 글줄일거라는 선입견 탓이었다. 그러나 이책은 나의 그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 부수었다. 

내용은 차치해두고라도, 글 참 잘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하고도 호소력을 잃지 않는 경어체의 문장은 김혜자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글의 어디에도 연예인 김혜자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이 땅에, 아니 이 지구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한 여자의 생명에 대한 연민이 있을뿐이다. 누가 대신 써 준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문체는 안정되어 있고, 한편 한편의 글은 그 자체로 우아하고 아름답다. 진심으로, 놀랐다. 글 참 잘 쓴다. 고통받고 있는 어린 아이와 여성의 참상에 대한 전달은 생생하고, 수많은 통계 숫자들이 줄줄이 제시되고 있음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웬만한 기성작가 뺨치는 수준이다.  

그렇지. 내 아이 둘은 대한민국에 태어났고, 그 누군가는 아프가니스탄에, 방글라데시에, 아프리카의 어느 땅에 태어났을 뿐이다. 하늘에서는 다 같이 손잡고 둥글게 둥글게 노래 부르며 방글방글 웃고 있다가 어느 아이는 대한민국에 태어났고, 어떤 아이는 전쟁중인, 최빈국에 태어났을 뿐인데 똑같은 무게와, 똑같은 가치와, 똑같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한 생명인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가. 도대체 어른의 이기심에 왜 이 아이들이 병들고 굶주리고 죽어가야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통 알수가 없다. 하늘에서, 태어날 준비를 할땐 내 아이와 같이 손잡고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불렀을 그 천사가.  

김혜자는 집요하게 들이댄다. 네가 통계수치로 알고 있던 그 숫자들은 사실은 사람이라고, 네가 물고 빨고 불면 꺼질새라 쥐면 터질새라 애지중지 키우는 그 아이와 똑같이 이름을 가지고 얼굴을 가지고 꿈도 생각도 무한한 가능성도 있는 사람이라고, 그걸 숫자로만 인식하고 네 새끼나 잘 키우고 있는 너는 이기적이고 나쁜거라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 

그 집요하고 처참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경어체로 일관하고 있는 문장은 다정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더 슬프다. 내용은 지독하고 문장은 아름답다. 마치 난민촌 아이의 천진한 눈처럼.  

가슴이 막막해져온다. 어떻게해야 할까, 내가 지금부터 뭘 해야할까.  

숫자를 사람으로 바꾸고 기사를 장면으로 바꾸어 놓는, 그래서 지독하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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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2010-01-3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딸아이 초등이학년 담임에게 드린 책이에요..별에 별 딴지를 다걸어 딸아이를 괴롭히더니, 종국에는 지휘봉으로 아이를 때려 울게 만들었지요.피가 꺼꾸로 쏟고 온몸이 살기로 진저리쳐질 때 나를 지긋이 눌러준 책이랍니다. 그래요.책 제목만으로도 제겐 정말 지독하고 아름다운 책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