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 오래된미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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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를 낳고 얼마 안되었을 때였다. 강신재의 소설 <임진강의 민들레>를 읽는데, 전쟁중의 난리통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어느 여인의 시체 옆에 갓난 아기가 울면서 엄마의 가슴을 헤집는 모습이 그려진 구절이 있었다. 강신재의 소설을 좋아해서 <임진강의 민들레>도 서너번은 읽었는데, 이 소설에 그런 장면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었다. 그 구절을 읽은 직후에 부들부들 떨면서책을 내려놓고 아이가 고요히 잠든 방에 들어가 잠든 아이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내 목숨은 내 목숨이 아니구나, 뭐 그런 류의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을 조금 흘렸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되고, 한 생명을 이땅에 내어 놓는다는 건, 아이를 잃은 어미의 기막힌 슬픔보다, 어미를 잃은 젖먹이의 철없는 울음이 더욱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는 걸 의미했다. 나의 산후우울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책을 읽다가도, 몇번이나 책을 내려놓고 방에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러 들어갔다. 잠든 둘째놈의 통실통실한 팔이며 볼을 쓰다듬다가, 첫째놈이 걷어찬 이불을 다시 덮어주다가, 사는 게 하도 기가막혀서 좀 울었다. 살아 있다는 게 죄를 짓는 일 같다. 

사실 이 책은, 별로 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내용이며 책의 가치를 떠나 잘 쓰여진 글일거라는 믿음이 없어서였다. 이 책을 읽느니 차라리 UN이나 유니세프의 보고서를 읽고 말지. 했다. 차고 넘치는 연예인들의 어설픈 글줄일거라는 선입견 탓이었다. 그러나 이책은 나의 그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 부수었다. 

내용은 차치해두고라도, 글 참 잘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정하고도 호소력을 잃지 않는 경어체의 문장은 김혜자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글의 어디에도 연예인 김혜자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이 땅에, 아니 이 지구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한 여자의 생명에 대한 연민이 있을뿐이다. 누가 대신 써 준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문체는 안정되어 있고, 한편 한편의 글은 그 자체로 우아하고 아름답다. 진심으로, 놀랐다. 글 참 잘 쓴다. 고통받고 있는 어린 아이와 여성의 참상에 대한 전달은 생생하고, 수많은 통계 숫자들이 줄줄이 제시되고 있음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웬만한 기성작가 뺨치는 수준이다.  

그렇지. 내 아이 둘은 대한민국에 태어났고, 그 누군가는 아프가니스탄에, 방글라데시에, 아프리카의 어느 땅에 태어났을 뿐이다. 하늘에서는 다 같이 손잡고 둥글게 둥글게 노래 부르며 방글방글 웃고 있다가 어느 아이는 대한민국에 태어났고, 어떤 아이는 전쟁중인, 최빈국에 태어났을 뿐인데 똑같은 무게와, 똑같은 가치와, 똑같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한 생명인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가. 도대체 어른의 이기심에 왜 이 아이들이 병들고 굶주리고 죽어가야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통 알수가 없다. 하늘에서, 태어날 준비를 할땐 내 아이와 같이 손잡고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불렀을 그 천사가.  

김혜자는 집요하게 들이댄다. 네가 통계수치로 알고 있던 그 숫자들은 사실은 사람이라고, 네가 물고 빨고 불면 꺼질새라 쥐면 터질새라 애지중지 키우는 그 아이와 똑같이 이름을 가지고 얼굴을 가지고 꿈도 생각도 무한한 가능성도 있는 사람이라고, 그걸 숫자로만 인식하고 네 새끼나 잘 키우고 있는 너는 이기적이고 나쁜거라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 

그 집요하고 처참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경어체로 일관하고 있는 문장은 다정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더 슬프다. 내용은 지독하고 문장은 아름답다. 마치 난민촌 아이의 천진한 눈처럼.  

가슴이 막막해져온다. 어떻게해야 할까, 내가 지금부터 뭘 해야할까.  

숫자를 사람으로 바꾸고 기사를 장면으로 바꾸어 놓는, 그래서 지독하고, 그럼에도 아름다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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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2010-01-31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딸아이 초등이학년 담임에게 드린 책이에요..별에 별 딴지를 다걸어 딸아이를 괴롭히더니, 종국에는 지휘봉으로 아이를 때려 울게 만들었지요.피가 꺼꾸로 쏟고 온몸이 살기로 진저리쳐질 때 나를 지긋이 눌러준 책이랍니다. 그래요.책 제목만으로도 제겐 정말 지독하고 아름다운 책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