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의 인생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나라 요시토모 그림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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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더라, 그때가.  

하루종일 정말 지독했다, 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날이었다. 일은 안풀리고, 가는 데마다 핀잔 야단 또는 원망을 받았고, 친구와는 오해로 한참동안 말씨름을 했으며 끝이 보이는 연애는 그 정해진 수순을 차곡차곡 밟고 있었다. 정말 참담하다라는 말로밖에는 표현이 안되는 기분이 되어 어두운 길을 찬 바람을 맞고 터덜터덜 들어와 불도 켜지않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한바탕 울 참이었는데, 

거짓말처럼 침대가 따뜻했다.  
그 순간 이불 속의 그 온화한 온기를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 괜찮다고,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이제 그만 푹 쉬라고 내일이 되면 더 나아질 거라고... 나의 어깨를 감싸고 다독여주는 듯한. 

그리고 나는 우는 것도 잊고 잠에 빠져들었었다. 세수는 커녕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잠에 골아 떨어졌다 눈을 떴을땐 이미 창밖이 환했고 기분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곧잘 전기장판의 스위치를 켜놓고 나가곤 했다.

이책은, 그때의 그 따뜻한 침대를 생각나게 했다.  

미혼모였던 엄마가 죽고, 데이지는 이모의 집에 얹혀산다. 이모와 이모부는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늘 내가 더부살이라는 걸 의식하고 사는 어린아이의 삶은 처량하다.  

나는 나이도 어린 데다 더부살이 신세였기 때문에 이모부부가 집에 없을 때는 스스로 전화를 쓰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한 가지에서 시작된 내 안의 응석이 몸을 다 파먹고 밖으로 튀어나오면, 그 흐름에 휩쓸려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p.12

나는, 더부살이를 해 본 경험은 없지만, 전화에 대해 저런 조심성을 가져본 경험은 있다. 그래서 전화를 조심하는 그 마음이 어떤건지 안다. 미움받지 않으려, 거슬리지 않으려 잔뜩 도사리는 그 마음을. 그게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지도. 

선수를 치는 것이 더부살이의 덕목이다. 선수를 치고 그 다음은 어디까지나 겸손하게, 눈에 띄지 않게 그림자처럼, 상대가 무슨 도움을 주더라도 과하게 고맙다 하지 않고, 이쪽에서 무언가를 해 주었어도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하며 지내는 것.
p. 30-32

 

능숙하게 응석을 부리는 것도 더부살이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p. 40 

자신의 말 하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살아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간절한 마음에서 나왔는지, 그 마음의 뒷면이 얼마나 외로운지도. 사실 아무도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고, 눈치 보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이런식으로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걸 알면 마음아파하고 슬퍼할 사람들이다. 그러지 말고 밝게 아이답게 천진하게 응석을 부리고 살라고 말해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게 안되는 걸.

그래서 밝게, 명랑하게, 자신의 일을 좋아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데이지가 사랑스러우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녀와 친구 달리아가 그렇게까지 연결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할수는 없지만 짐작이 간다. 달리아에게는 마음껏 할 수있지 않았을까. 그 잔뜩 도사린 마음을 달리아에게만은 풀어놓고 살지 않았을까. 달리아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데이지의 저 마음은 위로받고 있지 않았을까.   

약간이나마 기운을 되찾고 새 생활에도 적응한 후에는 외로운 밤에도 달리아를 무턱대고 불러내지는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그랬지만 머리맡에 놓아둔 피리만 불면 언제든 그 마음씨 좋은 친구가 어둠을 헤치고 찾아와 줄 것이란 믿음 덕에 대개는 참아낼 수 있었다.
p. 70

분리불안을 유난하게 앓는 아이들이 있다. 그건 보통 이런 악순환으로 시작된다. 엄마에게 치대는 아이를 여하한 이유로든 귀찮아하는 엄마와, 거절당했다는 불안감으로 엄마에게 더욱 달라붙게 되는 아이. 이런 관계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부르고 당신을 필요로 할때 내 곁에 와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아이의 분리불안을 더욱 키우는 거다. 하물며 엄마와 자식도 그럴진대 고작 이웃의 친구일 뿐인 달리아에게 데이지가 갖는 저 신뢰가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정말로 달리아는 그랬을 것 같다.  

그런 달리아가 죽었다. 그렇지만 데이지는 또 살아갈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에 허한 구멍이 뚫리기는 했어도 여전히 씩씩하게 웃으면서.  

그냥 이 모든 것들이 슬프면서도 위로가 된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딱 맞는 구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대단한 아포리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앞 뒤 없이 온화하던 그 침대시트처럼. 엄청나게 용기를 주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용기를 주기는 커녕 그냥 맥없이 있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지만, 오히려 그게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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