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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4년 6월
평점 :
나는 원전, 완역 이런 말에 집착한다. 사실은 완역에 집착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몇몇 작품은 각각 다른 번역본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한국 작가의 경우 좋아하는 작품은 그 창작의 뒷이야기도 열심히 캐다 읽는다.
그 중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집착은 유난하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책은 다 샀고, 토마스 불핀치의 책도 몇가지 번역본으로 가지고 있으며, 책장 몇칸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섹션으로 아예 분리를 해 놓았다. 물론 그리스 로마 신화만 좋아하는 건 아니고 북구의 신화나 인도 신화도 좋아한다. 심지어 성경도 나에게는 히브리 신화서 또는 역사서의 개념이다.
몇년 전, 생일 선물로 이 책을 사달라고 했을때, 남편은 그리스 신화는 애들이나 읽는 거 아니냐는 말로 나의 뒷골을 땡기게 했다. 그림형제의 동화도 성인판이 나오는 세상에 내 남편이라는 작자가 왜 그러느냐고.
대학 신입생이 되었을 때, 담당교수님은 그리스 신화와 성경을 읽어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그 둘은 문학의 가장 베이스에 깔리는 거니까, 말하자면 서구 문학의 원전과 같은 것이라 읽지 않으면 문학 이해의 폭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대학 1학년, 3월의 어느날, 성당 다니던 친구에게 빌린 성경을 방에 엎드려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시편의 문장들은 그 종교색과 관계없이 아름다웠고(지금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문학작품중의 하나로 꼽는다.) 묵시록의 문장들은, 그 어느 SF 소설보다 상상력 넘치고 박진감있게 무서웠다. 사실 그 숙제는 꽤나 지루한 숙제였고, 성경은 별로 읽기 쉽지도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책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도 그 숙제를 내 주고 억지로라도 성경을 읽게 해 주신 교수님께 두고두고 감사드린다. 뭐, 신화야 읽으라고 안해도 읽었을테니. (사실 우리과 우리 학년 50명중에 그 숙제를 한 사람은 열명남짓... 대학 신입생때라 아직 고딩때의 습관이 남아서 교수님이 하라는 건 다할 때였다, 난. ㅎㅎㅎ)
성경을 읽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그리스 신화는 그 뒤로도 꾸준히 내 주요 관심사의 하나로 있지만, 극단적으로 말해 내 독서는 성경과 신화를 읽기 전과 읽기 후로 나눌수도 있다. 성경을 읽고나니 갑자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변신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 전까지는 무심코 넘겼던 것들이 갑자기 의미의 옷을 입고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성경과 그리스 신화가 모든 서구 문학의 기본 베이스라는 교수님의 말은 틀림 없었다. 특별히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더 깊어졌다, 이런 말은 못하겠지만, 확실히 훨씬 재미있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예전같으면 무심코 넘겼을 구절들이 얼마나 말랑쫀득차진 재미를 가지고 다가오던지.
그리스 신화는 신화 그 자체로도 참 재미있지만, 정작 중요한 효과는 그 후에 나타난다. 그리스 신화를 읽고, 어느정도의 지식을 베이스로 깔아놓은 뒤에 읽는 서구 문학작품들은 얼마나 재미있던지.
이윤기의 책에 비해 삽화가 많은 것도 아니고(사실 이윤기 샘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는 삽화가 반~) 번역은 충실하고 매끄럽지만 이야기 자체가 그다지 말랑하지가 않아서 처음엔 좀 헤멜수도 있는데, 어느 단계를 넘어서면 일사천리로 읽힌다.
무엇보다 머릿속에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그리스 신들의 계보와 일의 순서가 앞뒤로 좌라락 정리되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 원전이 꼭 최고인 것은 아니고, 그 원전에서 파생된 2차 3차 문학작품이 훨씬 문학성도 높고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원전은 언제나 원전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신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이윤기는 읽기 전의 이윤기와는 또다른 재미를 가지고 온다. 이 책을 읽고나서 이윤기의 책이나 불핀치의 책을 다시 읽으면 그 재미는 이전의 백배가 될 거라 장담한다.
Ps. 이 책을 내 책장에서 뽑아 빌려간 00아. 니가 돌려주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나는 또 산다. 그 책은 무려, 내 남편의 선물이기까지 했단다, 버럭버럭버럭. 책 빌려달란 말 좀 하지 마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