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 중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스져춘 외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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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둘째를 낳던 그해에 손윗동서가 몇달 먼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던 중에 큰 아이의 이름이 유리(따로 한자를 쓰지 않고 그냥 한글로만 유리다.)이니 둘째 이름은 벼리가 어떨까 했다. 벼리를 별이로 잘못 알아들은 시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쳐 (시어머니가 알던 별이는 잔병치레가 많았단다.) 다른 이름이 되고 말았지만. 그랬거나 말았거나 나는 벼리란 이름의 어감도 뜻도 너무 좋아서, 아직 성별도 모른채 뱃속에 있던 내 아이의 이름으론 어떨까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이번엔 남편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남편은 큰놈과 작은놈의 이름에 돌림자를 쓰고 싶어했다.  

한동안 잊고 있던 "벼리"라는 단어를 형님이 잠시 생각나게 했고, 그 뒤로 잊고 있던 그 단어를 이 책이 생각나게 했다.

벼리는 그물의 제일 윗코를 주욱 꿰어 그물을 폈다 오무렸다 조절하는 줄을 이르는 순우리말이다. 흔하게는 "벼릿줄" 이라고 많이 쓰인다.  

다독을 넘어 남독을 할 정도이면서도 나는 의외로 책이나 작가에 대한 낯가림이 좀 있다. 새로운 작가나 새로운 장르, 낯선 나라의 작가의 책에 도전할 때 많이 망설이는 편이다. 모르는 작가의 책과 기존에 즐겨 읽었던 작가의 신작이 두권 나란히 놓여 있으면 난 아무런 고민없이 후자를 집어든다. 이미 알고 있는 작가의, 나라의, 장르의 책만을 읽어도 읽을 책은 차고 넘치니까, 안면있는(?) 작가나 나라를 늘일 필요성도 크게는 못느끼고 산다. 그래서 남독을 하면서도 나의 독서는 폭이 좁은 편이다.   

그러다 어떤 계기가 되었건 새로운 작가의 작품들을 접하게 될 때, 나는 조심스럽게 에세이나 단편 소설쪽을 먼저 꺼내서 읽는다. 단편은 일단 분량이 짧고 여러편의 작품을 읽을 수 있으니까 작가의 성향이나 장르의 특성을 빨리 파악할 수 있어서 낯가림을 쉽게 지워준다. 김연수와 하루키가 그런 경우였다.

이런 나에게 중국 문학은 낯선 분야다. 물론 위화를 좋아하고, 쑤퉁의 한국 출간작은 모두 읽었으며 하진도 무척 좋아하는 작가중 하나로 꼽지만, 이건 내가 톨킨이나 로저 젤라즈니를 판타지라는 장르와는 상관없이 한 작가로서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문학과는 관계 없는 개별 작가로서 좋아하는 것이지, 위화, 쑤퉁, 하진이 내 앞에 중국 문학의 문을 열어주지는 못했다.  

그러다 이 책 한권은 위화, 쑤퉁, 하진의 책 모두를 합해 스무권이 넘는 책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 냈다. 나에게 중국 문학으로 가는 문을 열어준 것이다. 거부감 없이, 중국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벼리, 벼릿줄이 생각났다. 이 책을 벼리삼아 이 책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그물코들을 더듬어 가다보면 중국 문학이라는 거대한 물고기를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참 고맙다.  

이 책의 작가는 루쉰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다. 루쉰의 <아Q정전>이야 한국의 문학 교과서에도 실릴만큼 유명하니 그렇다치더라도 나머지 이름들이 이렇게까지 낯설다는 점에서 새삼 놀랐다. 작품을 읽어보진 않았어도 한번쯤 이름이야 들어봤음직도 한데(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라면, 이웃 한국에서 이름쯤은 거명될 법도 하지 않은가.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등등등의 작품은 몰라도 이름이야 한두번은 들어봤듯.) 제목은 차치해두고라도 이름조차 낯설다. 우리 번역시장이 얼마나 일본과 서구(그것도 영미권)에 치우쳐있나를 다시한번 확인했다.  

그렇게 낯선 작가의 낯선 작품인데도 모두 술술 잘 읽힌다.  썩 재미있게.

수록된 작품이 모두 중국의 근대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중국이나 한국이나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고 모던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서구 문명이 단시간내 한꺼번에 유입되는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다른 작가의 작품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오는 것인지 문화와 정서가 전혀 다른데도 별로 거부감이 없다. 일본 문학을 처음으로 접할 때의 그 생경하던 느낌과 토악질에 가까운 거부감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의외라 할 정도.

위따푸의 <타락>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이상과 박태원이 떠올랐고, 천충원의 <샤오샤오>를 읽으면서 빙그레 웃다가는 이효석의 토속적인 작품들이, 빠진 <노예의 마음>에서는 최서해의 작품이, 라오셔의 <초승달>에서는 김동인이.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마오뚠의 <린 씨네 가게>는, 잘은 모르지만 쑤퉁이 마오뚠을 계승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몇년 전 중국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온통 중국으로 가기만 하면 떼돈을 벌어올 것처럼 나라가 들썩이던 때(생각해보면 어언 10여년도 더 전인듯.) 출판계도 온통 중국 관련 서적으로 판을 쳤었다. 그 덕에 내 서가에도 중국에 관한 책이 몇권있다. 주로 비지니스에 관련된 책들이지만.(왜 있는 거지? -_-;;;) 다른 나라에서 비지니스를 하려면 그 나라를 알아야 하니, 그 나라에 관한 책들을 몇권 읽어보는 게 정석이겠지만, 그런식의 책이 아니라, 중국문학의 벼리가 되어줄 수 있는 이런 책들을 읽는 것이 훨씬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한국에 더 많은 중국 작가의 좋은 작품들이 알려지기를 바래본다.  

그야말로, 모두에게 중국 문학의 벼리가 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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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2-23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쑤퉁을 마오뚠과 연결시키는 게 흥미롭네요.

마오뚠은 우리에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현대문학사에선 루쉰과 비견되는 작가입니다. <한밤 중(子夜)>과 <봄 누에(春蠶)>를 비롯한 농촌 삼부작은 중국 사실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 불립니다. 제 개인적으론 소설에 사회주의 문학 이론이 가득 담겨 갑갑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심청, 연꽃의 길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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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라는 게 원래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서 고전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라지만 <심청전>의 해석에 대해서는 특히 분분하다. 사실 해석이라기 보다는 작중인물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파는 것이 효도인가 아닌가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식상할 정도.  

이 소설 심청은 우리 고전 <심청전>에서 효도라는 부분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시작한다. 여하한 이유로든 집을 떠난 여자가 연꽃속에서 되살아나 왕비가 되고, 노인 잔치(맹인잔치)를 열고 잘먹고 잘 산다는 모티프만을 따 와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꽤나 재미있게 읽힌다.  

황석영에 관한 이야기 좀 해 보자. 황석영은 나에게 좀 불편한 작가다. 김훈의 마초이즘을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황석영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남성성은 반감을 일으킨다. 음식에 관한 사소한 수다를 써내려 간 <황석영의 맛있는 세상>에서조차 그는 몇몇 여인들과의 무책임한 과거 연애담(그것도 육체적)을 털어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솔직함일수도 있겠고 무배려일수도 있겠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여자는, 물상화 된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것이 불편하다. 이를테면, 이 사람은 여자라는 존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는구나, 라는 느낌이랄까.  

이 소설 심청도, 황석영의 소설로서는 드물게 (이 소설 이후에 바로 또다른 여주인공을 내세워 쓴 바리데기가 나오긴 하지만) 여성 화자를 앞으로 내세워 한 여인의 일대기를 구성해가고 있지만, 남성작가의 소설이라는 느낌이 너무 역력하다. 이 상황에서 이런 행동을 하게 될까, 라는 느낌이 아니라, 남자의 환상속에서 여자란 이렇게 행동할 것을 바라는 구나, 라고 읽힌달까. 성과 매춘에 관해 담담하다 못해 쿨한 태도까지는 그렇다쳐도, 순식간에 성녀로 변신해 고아들을 구조한다거나, 악기 연주외엔 아무런 교양을 쌓지 못한 최하층의 유녀가 갑자기 왕족의 아내가 되어서도 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거나 하는 점은, 그 격차가 너무 커서 이건 그야말로 남자들의 환상속의 그녀구나 라는 생각밖에. 왜 그런말 있지 않은가. 남자들은 침대밖에서는 정숙한 숙녀를 침대 안에서는 요부를 바란다는 웃기지도 않는 삼류 주간지의 대사 말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강해질 수 있고, 또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그 한계를 측량하기란 힘들겠지만, 이 소설 속의 심청이란 존재는 너무 강하다. 꺾어도 꺾어도 꺾이지 않고, 밟아도 밟아도 밟히지 않는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인간을 저 바닥으로 밀어붙여 놓고도, 하긴 연꽃이라는 게 원래 더러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것이니 심청의 캐릭터와 물고 들어갈수도 있겠으나, 이건 마치. 인간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보고픈 면만을 보니까, 음, 무배려로 읽힌다.

고등학교때, 우리 학교는 산 중턱에 있었고, 그 아랫동네 선창가에 오래된 사창가가 남아있었다. 지나가면서 한두번 그 홍등을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 그 안으로 들어가 본 일은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 중 몇몇이(그 중엔 노처녀 문학선생도 끼어있었다) 그 안을 무슨 일인지 들어갔다 나왔다는 이야기를 노처녀 여선생이 해 주면서, 그 중에 있었던 국어 선생이 "얘들이 천사지." 그랬단다. 반어로서의 천사가 아니라, 정말로 천사라고, 눈시울까지 붉히며 이야기 했다는데,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시쳇말로 "뭥미?" 싶다. 남자들의 유녀에 대한 이상화와 환상은 변기와 천사를 오간다. 도대체 이런 환상은 왜 생기는 거지? 

하여간에. 이 소설을 읽다가 문득 그 옛날의 기억이 살아났다. 황석영과 그 선생은 닮은 꼴이다. 뭐랄까, 유녀를 천사라고 이상화 시키는 건, 그녀들에 대하는 존중이 아니라, 훨씬 가혹한 비하로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좀 과장되이 말하면 여성 전체에 대한 비하로 느껴지기도 하고. 

뭐,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재미있게 읽힌다. 일본어, 중국어가 독음 그대로 제시되고 때때로 한자를 병기하긴 하지만 그래도 특별한 설명이 없어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는 흥미진진하고 짧은 분량안에 15살부터 80세까지 한 인간의 인생을 때려넣다보니 이야기도 스피디하게 진행된다.  

재미있긴 했지만. 뭔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소설. 황석영의 전작들에 비하면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왜 이런 소설을 쓰셨습니까? 라고 묻고 싶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후로 창녀문학이 유행을 탄다더니 그 유행에 편승하신 건 아니실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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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1-09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저도 이상스레 황석영 소설은 바리데기 이후로 그렇게 호감이 안가더라구요. 아시마님이 그 느낌을 집어주셨군요. 왜 이런에 ㅋㅋㅋ 완전 따라쟁이로 '살아있는 날의 시작' 읽으면서 막 분노하고 있습니다. 막 투사하면서. 박완서 샘은 사람들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분 같아요. 너무 적나라해서 움찔움찔해요.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박완서 소설전집 9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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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을까. 대학시절 교수님 중 한분은, 우애가 타고나는 것이 아님을 강변하셨다. 한 사람의 인생 최초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바로 형제라고. 잠깐의 놀이친구 하나를 얻는 대가로 얼마나 많은 생존의 필요조건을 빼앗기게 되는데 우애라는 게 자연스럽게 생길수 있는 것이냐고 물으셨다.  

굳이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첫째를 위한 최고의 선물이 둘째 운운 하는 말은 웃겼다.  

먹을 것이 흔전만전인 요즘 세상에도, 형제는 어린 존재의 식탐에 최대의 적이다. 하물며 보릿고개가 존재하던 과거엔 오죽했을까.  

이 책도 그렇게 시작한다. 어른은 배곯아 죽고, 아이는 배터져 죽는다는 전쟁통에 일곱살 수지는 삶은 고구마 하나를 더 먹기 위해 다섯살 동생을 저자거리까지 끌고가 버리고 온다. 일곱살과 다섯살.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살아남기 위한 인간의 본능은 나이의 한계를 넘어선다. 단순히 복잡한 저자에서 손을 놔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해 그 저자까지 끌고 가는 일곱살 아이의 모습은 현재의 일곱살들에게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둘째가 생기기 전 나는 한없이 너그러운 엄마여서 감히 말하건대 큰소리 한번을 안지르고 애를 키웠다. 그때 나는, "아이가 어떻게 하면 엄마를 화나게 할 수 있지요?" 라는 말을 용감하게 하는 엄마였다. 식용유를 쏟아 그 위에서 헤엄질 치기가 두번이었고, 식초병을 들고 온 집안에 식초를 뿌리고 다닌 적도 있고, 결혼 후 첫 생일 선물로 받은 명품 가방에 멸치 액젓을 부어버린 일도있다. 그래도 화가 나지 않았다. 식용유 위에서 헤엄치는 아이와 같이 미끄럼을 타며 놀았고, 식초며 멸치 액젓을 제대로 간수못한 내탓이지 아이를 나무라진 않았다. 아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그렇게 한없이 너그러운 엄마에게서 자란 큰놈이, 둘째가 태어나자 야단을 맞기 시작했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작은놈에 대한 해꼬지만은 묵과하기가 어려웠다. 작은놈은 기를 쓰고 큰놈의 장난감을 탐냈고, 엄마의 부엌살림을 포함하여 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독점하던 큰놈은 제것을 건드리는 작은놈을 밀어내고 때렸다. 이해를 하면서도 순간순간 소리를 지르게 되고, 아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뭐든지 다 내거였고, 뭐든지 다 하게 해 주던 엄마가, 무슨 짓을 해도 오냐오냐 니가 궁금했구나, 했던 엄마가 어느날 갑자기 돌변한거다.  만약 둘째가 아니었다면 난 여전이 큰놈을 야단치지 않고 키우고 있을 거다. 우리 큰놈이 좀 얌전하고 순한 편이라서.

이래도, 나의 큰놈에게 작은놈은 선물이 될수 있을까. 난 사실 아직도 잘 이해를 못한다. 큰애를 위해서, 외로워 보여서, 나중에 부모죽으면 서로 의지되라고 둘째를 낳기로 했다고 말을 하는 사람들을. 어린시절엔 그렇다쳐도, 남보다 못한 형제, 많이 봤다.  

예전에 우리 교수님이 경영하시던 회사의 비서로 오래 재직하신 분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하나만 낳고 그만 낳더란다. 애가 셋이던 교수님이 그분에게 애를 더 낳으라 권하자,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부모 아래에서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의 치닥거리를 위해 대학까지 포기하고 결혼도 한참이나 늦게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비서분은 "내 아이에게 형제라는 의무를 지워주기 싫습니다." 라고 대답하더라나.  

이 책의 주인공 수지와 수인(오목이)의 오빠인 수철에게도 동생은 의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난리통에 잃어버린 동생을 찾고서도, 갓 결혼해 이룩해 놓은 자신의 가정에 누가 될까봐 동생을 모른척 해 버린다.  

그때 수철이는 이미 결혼해서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을 두고 있었고, 하나 남은 누이동생 수지를 부럽지 않게 호강시켜가며 곱게 기르고 있었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고생 모르고 자라서 그에게 시집와 그의 자식을 낳아준 아내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누이동생이 하나 달린 것도 속으로 미안한데 하나를 더 끌어들이다니, 그것도 고아원으로부터, 그건 차마 못할 일이었다. 가정이라는 지상의 낙원을 그렇게 모독할 순 없었다.
..........
그는 동생을 모르는 척 하는데 양심의 가책은커녕 난만한 꽃밭을병충해로부터 지켜야 하는 원정으로서의 사명감마저 느꼈다.
p. 111 

수철에게는 잃어버린 동생 오목이 뿐만아니라 고이 기르고 있는 수지마저도 자신의 낙원을 위해서는 걸림돌이 되는 존재다.  

난 가끔 박완서 선생님의 글이 불편할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런 순간이다. 위선으로 포장해서 자기 자신마저도 외면하고 싶어 저 깊은 구석에 잘 파묻어둔 인간의 구린 내면을 작가는 지나치게 환한 조명을 들이대며 만천하에 공개해 버린다. 정곡을 찔린 독자는 휘청, 할 수밖에 없다. 아이코 선생님, 아파요, 좀 살살... 이라고 엄살이라도 부리지 않으면 그 순간을 넘기기가 힘들다.  

형제간의 우애, 가족간의 정.. 글쎄. 나는 언젠가 "도저히 극복못할 가족의 문제를 넌 경험해 본 적이 없지 않느냐" 라는 공격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도 나로서는 얌전히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형제의 우애, 가족의 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가족을 나의 치부로 느껴보지는 않은 사람이다. 어떻게 가족을, 형제를 치부라고 말을 할 수 있느냐는 항변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도저히 극복못할 가족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내가 자주가는 인터넷의 익명 게시판에는 종종 그런 류의 글이 올라온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신용불량자 오빠, 병든 엄마 단칸방에 사는 식구들 그런데 나는 죽도록 공부해서 화려한 학벌과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고 외모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평범한 남자는 나의 환경을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차라리 고아이고 싶다, 그들은 평생 내가 책임져야 하는 내 가족이니까 나는 결혼을 못할 것이다, 난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데 나에게는 너무 과분한 희망같다. 하는 고백.  

이 소설의 수철을 지극히 희귀한 이기적인 인물이라고만 폄하할 수 없다는 것이 나는 아프다. 난리통에 아버지는 행방불명되고 어머니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기총 난사로 참혹한 시신이 되어버린 걸 목격해야 했던 14살 소년은, 당연히 가정이라는 것에 남들보다 훨씬 집착할 수 밖에 없다. 그것도, 그냥 가정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게 진열장의 보석처럼 더욱 빛나고 돋보"여 "도대체가 흠잡을 데라고는 없었고 작은 불행이 숨어 있을만한 그늘도 없(p.61)"는 그런 가정을 그는 지켜야 한다. 그의 이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그는 특별히 이기적인 인간이라기 보다는 아픔을 가지고 도사린 짐승이다. 그는 작은 불행이 숨어있을만한 그늘이 생길 계기를 만드는 것조차 두려워 한다. 그런 그에게 형제간의 우애는 생기고 자라날 틈이 없다.  

수지에게 오목이는 자신의 추한 과거에 대한 증인이다.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짓을 했는지. 오목이를 볼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참담한 결과를 확인해야만 한다. 자신이 한 인간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그것도 피와 살을 나눈 형제에게 한 짓이니 내가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를 속속들이 깨달아야만 했다. 처음에는 과거를 숨기고자 한 방어본능에서 동생을 외면했고, 나중에는 외면했던 일이 또다른 죄가되어 그녀를 짓누른다. 동생에 대한 우애보다 나 자신에 대한 보호가 먼저다.  

첫째를 위해 둘째를 낳는다고, 형제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우애를 인간 본능의 영역으로 보는 것 같다. 나는 우애란 극기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박완서 선생님의 수많은 소설 중, 가장 단순하고 신파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구린 속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 속에서도 그 시대 풍속사에 대한 묘사는 빛을 발한다. 이런 부분에서 나는, 소설가의 시대에 대한 책무를 읽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교수님은 우애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씀해 주셨다. 우애란, 교육의 결과인 거라고. 형제 둘이 우애를 가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끊임없는 극기와 부모의 자상한 배려와 교육이 있어야만 한다고.  

이 책은,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형제간의 우애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준다.  

하긴 그러고보면, 인류의 역사는 형제살인의 역사로 시작되지 않던가. 카인과 아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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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1-0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정말 너무 잼있게 읽고 있어요. 책이 진짜 팍팍 넘어가고. 박완서 샘이 이런 통속적인 라인을 이다지도 재미있게 적나라하게 쓰셨다는 게 놀라와요. 무엇보다도 위선의 해부. 넘 찔려서 ㅋㅋㅋ 우애라는 것. 우정. 다 요즘에는 사기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거라도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 때문에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가치를 붙잡고 견디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둘째. 안그래도 둘째를 고민해보게 되는데 어느 정도 커서 자기 절제와 예의라는 것을 알게 되지 않는한 서로 최초로 경험하게 되는 부정적인 관계인 것도 사실인 것 같아요. 아,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삶이 넘 음울해 집니다. 그나저나 이 책 추천해 주신 거 넘 고마워요, 아시마님! 그리고 몇 월 달에 가시는지. 아래 댓글에 '그 때쯤이면'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들려요--;;

아시마 2010-01-06 20:54   좋아요 0 | URL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소재가 바로 그 도시의 속물적 통속성과 여성성이예요. 이걸 주제로 한 논문집도 나와있죠. 이 책 말고도 <휘청거리는 오후>나 <도시의 흉년>도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그 시대상을 세밀히 살려내면서 인간의 속물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위악적일 정도로요. 이렇게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작품성이나 문학성을 잃지 않는다는 면에서 참 희귀한 작가예요. 단점이라면, 박완서 본인의 배경(서울대 출신)이나 다섯자식들(최소 2명이 서울대 출신으로 알고 있어요. 첫째 호원숙씨와 죽은 막내아들)의 특징때문에 그런지, 주인공들이 다들 대학 출신의 엘리트 상류층이라는 거. 예전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요즘 새삼 느껴지네요. 비슷한 시대의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조세희의 난쟁이 연작과 비교하면 그 괴리감이 참 크죠.
그 외에 여성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살아있는 날의 시작> 이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도 좋아요. <서있는 여자>는 상대적으로 평론가들에게는 호평을 받았는데 저한테는 다른 작품에 비해서는 좀 처진다는 느낌이었구요.
전쟁과 박적골 이야기도좋지만 이런 이야기도 참 좋죠.
아참, 전 빠르면 6월 늦어도 8월이요. 근데 가서도 서재질 계속할거라, ^^

blanca 2010-01-0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시마님 저 지금 마지막 부분 읽고 있는데 눈물나요......박완서샘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데...이 책 권해주셔서 정말 또 한 번 감사를....박완서샘 관련하여 아시마님은 거의 논문 한 편 쓰셔도 될 듯한데요^^ 살아있는 날의 시작은 처음 들어요. 아! 읽을 거 투성이군요. 리뷰도 안쓰고 다 빌려 읽던 시절이 있어서 너무 아쉬워요. 박완서 샘 책을 대체 무얼 읽었고 안 읽었는 지를 알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죽은 막내 아들. 너무 가슴아파요. 남편이 췌장암으로 죽고 6개월 만에 그렇게 된 거더라구요. 그 때 출간한 책 읽고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그리고 큰 따님 남편분은 EBS명의에 나오더라구요^^ 아내가 박완서 따님이라고 성우가 ㅋㅋㅋ

6월이면. 아이구. 서재질 계속, 당연하지요. 저랑 독서와 감동을 같이 ㅋㅋㅋ 계속 나누셔야죠. 저는 주변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아무도 없어서 외롭답니다. 다들 책을 사서 본다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책 얘기 하면 하품 시작하시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가니 좀 숨통이 풀리네요. 전 그럼 따뜻한 겨울을 읽으러 이만 휘리릭~
 
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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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김영희가 생각났다. 하긴 뭐, 한국인여자 독일인 남자의 결합인데다 거주지역도 독일 뮌헨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여자가 연상이라는 점, 남자가 공학도 (김영희의 남편 토마스는 수학도였던가?)라는 점도 비슷해서 여러모로 연상작용을 일으킬만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글쓴이 두 사람의 직업탓인가 (임혜지는 건축학자, 김영희는 예술가) 김영희의 책이 감성쪽을 건드린다면 임혜지의 책은 이성쪽을 건드린다. 게다가 이 책은 놀랄만큼 유머러스 하다! 

우리 큰놈은 천기저귀로 키웠다. 큰놈이 9개월쯤이었나 남편의 친구들과 가족동반 1박 2일로 여행을 가면서도 짐가방에 천기저귀를 꾸역꾸역 넣어가서 사람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던 전력이 있다. 다들 오호, 네가 그 말로만 듣던 에코맘이구나, 알뜰하구나 했는데. 글쎄. 솔직히 나는 아이를 위해 이기적인 엄마였을 뿐 별로 에코적이지도 알뜰하지도 못했다고 고백한다. 천기저귀가 아이에게 좋다길래 천기저귀를 썼을 뿐, 지구 환경은 내 생각 밖의 일이었다. 천기저귀가 종이 기저귀에 비해 쌌다는 생각도 안든다.  

아이를 낳아 집에 데려와 한달이 지났을 때 수도 검침원이 벨을 눌렀다. 수도 사용량이 한달 사이 두배로 뛰었는데 어디 누수가 되는 거 아니냐고. 아니다, 아이를 낳아서 천기저귀를 쓸 뿐이다, 했다. 큰놈이 기저귀를 떼고 한달이 지나자 수도 검침원이 또 벨을 눌렀다. 수도 사용량이 절반으로 줄었는데 새로 이사오셨냐 하더라. 아니다, 천기저귀를 더이상 쓰지 않을 뿐이다, 했다. 

한장에 3000원 가까이 하는 일본제 빨랫비누(아는 엄마들은 안다, 샤본다마 라고.)와 역시 그 브랜드의 표백제로 아이 기저귀와 내복을 폭폭 삶아(한번 삶을때 한시간씩 삶으니 남편은 옷을 고는 거냐 묻더라.) 뜨거운물로 세탁기를 돌렸다. 그걸로도 성에 안차서 헹굼 추가를 두번씩 꼭꼭 했다. 기저귀는 6개월이 안되어 너덜너덜해지고, 내복 시보리는 죄다 늘어나서 둘째는 입지도 못하게 되었다. 가스비는 묻지 마시기를. 

첫째라고 그 요란 난리 법썩을 떨고 애를 키우고 났더니 제정신이 좀 들었다. 한달에 세탁 비누값만 몇만원을 쓰고 수도요금이며 가스요금이며, 종이기저귀의 해악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를 칭송하고 시어머니가 날 알뜰하다고 예뻐 할때마다 나는 은밀히 얼굴을 붉혔다. 종이기저귀 사용하는 것의 두배 이상의 비용이 들었고, 환경에 끼친 해악은 아마, 열배쯤은 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작은 놈은 진짜 우리 가정 경제와 지구 환경을 위해 종이기저귀를 사용하기로 했다. 큰놈 키울땐 종이 기저귀 쓰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오죽하면 여행갈때까지도 천기저귀를 챙겨갔을까. 시댁 친정 내려갈땐 당연히 천기저귀 싸짊어 지고 다녔다.) 종이 기저귀도 애는 잘만 크더라.  

그런 생각을 할 때 이 책을 읽었다.  

9리터로 샤워를 한다는 남자. 9리터면 도대체 어느정도의 물인가 궁금해서 대충 계량해봤더니 2리터들이 생수병 네개반. 헉. 세수한번 하면 땡이겠다.  

작가는 평범한 한 사람 한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역설하고 있다.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나 하나가 끼치는 해악이 지구 환경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 정말 지구야 미안해, 다.  

세상은 앞에서 활약하는 주연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배경을 이루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주연이 아님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이 '배경'의 위력을 항상 생각하며 '좋은 배경'이 되겠다는 뜻으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씨를 뿌리며 사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기로했다. 티끌인 나에게 태산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p.71 

생각해보면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소비를 많이 하는지. 책의 과소비에 대해서만큼은 반성 못하겠지만, 반성을 안한다고 해서 과소비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음식에 관해서도 그 외 기타 등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면 꼭 필요해서 사는 것의 몇배를 소비한다. 과소비를 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더 많은 시간의 노동을 해야 하고. 이 악순환.  

새해에는 모든 것에 대해 알뜰해져야 하겠다. 나의 시간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뜰하게, 의미없이 소비하는 시간들을 줄여야겠다. 물론 이 책에서는 노는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을 하지만. 무의미하게 흘려버리는 시간이 노는 시간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올해의 목표는 알뜰함이다. 

올 초에 이 책을 읽게되어 참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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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1-04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해겨울~ 이랑 다섯째 아이 읽어야 하는데 아시마님이 또 지름신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두께랑 글씨체 보고 각오좀 하고 있어요. 다 읽고 사야겠지요? 저좀 말려주세요.

아시마 2010-01-05 00:01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데요, 책 지름신은 그 어떤 지름신보다 강력하셔서 말려지지가 않아요. 그냥 신의 이끄심에 따라가심이 지당하셔요. 호호호호호호.

덕수맘 2010-01-05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저두 옷욕심은 특별하게 없는데 책 욕심은 어떡해 잘 안되네요..ㅋㅋ

아시마 2010-01-05 23:0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옷은 10자 장롱 세칸중 한칸 반이면 충분한데 책장은, 이미 방 하나를 책장으로 둘러놓고, 벌써 책이 또 넘치네요. -_-;;; 책장 또 사면 안된다고 충무공이 애원하고 갔는데 말이죠. 아. 하. 하.
 
다이어트의 여왕
백영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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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라는 감정은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보통 호승심이 많은 사람이 질투도 많다고 하는데, 질투는 끝내 그 질투를 하는 사람과 그 질투를 받는 사람 양쪽을 다 파괴시킨다. 나 쟤 싫어, 그냥 주는 거 없이 미워, 라고 말할때 그 사람의 내면은 그 '주는 거 없이 미운 쟤'를 질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질투를 하는 사람은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쟤가 미운짓을 하기 때문에 싫다고 강변한다.  

때때로, 아니 거의 대부분은 질투와 동경은 동전의 양면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동경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을 질투하고, 좋은 성적을 동경하는 고교생은 나보다 성적이 나은 사람을 질투한다. 질투는, 내가 가지고 싶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게 가지게 되는 감정이니까.

그런데 이 질투라는 감정은 참 희한한데서 발현된다. 외모에 집착하는 사람의 질투 대상은 공인된 미녀인 김태희 전지현이 아니다. 같은 아파트 501호 애 엄마가 질투의 대상이다. 성적에 집착하는 아이의 질투대상은 전교 1등하는 나일등이 아니라 나와 비슷하게 약간 높은 성적을 가진 이중간이다. 이상하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면, 고3 내내 나는 K와 Y 둘과 함께 점심, 저녁을 먹었다. Y는 전교 1-2등을 다투는 수재였고, 나는 중간보다 좀 위, K는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런데, 한달에 한번 있던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면, 저녁마다 나는 혼자 버려져야 했다. K는 늘 Y와 둘이 나가버렸다. 그 둘이 아니어도 밥 먹을 친구는 있었고, 처음엔 어리둥절 했지만 나중엔 으레 그런가보다 했는데, 내가 모의고사날 저녁마다 버려져야 했던 이유는 대학을 들어가고 나서야 알았다. K의 고백을 통해.  

고등학교 시절 난 언어영역으로는 거의 전교 톱이었는데(그래, 자랑질이다.) K는 늘 그것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단다. 언어영역만 아니면, 나를 이길 수 있는데, 단 한번도 모의고사 점수로 나를 이겨보지 못했던 K는 성적이 나온 저녁이 되면 속이 상해 Y를 끌고나갔던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난 정말 몰랐다. 학교 다니는내내,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신기할 정도로, 나는 성적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애였으니까. 그렇다고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은 아니고, 남의 성적에 관심이 없었다. 그걸로 스트레스 받아본 적이 없다. 당연히 누군가를 질투해 본적도 없고, 내가 질투의 대상이 될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사실 나는 좀 감정적인 부분에선 늦되는 아이였다. 아주 많이. 

재미있는 건 K의 질투 대상이 Y가 아닌 나였다는 사실이다. 전교 1-2등의 수재였으니 Y와 나의 언어영역 성적은 비등비등했는데도 K는 Y의 언어영역 성적엔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않고(사실 관심도 없고, 으레 잘했겠거니.) 나의 성적에만 관심있고 나에게만 스트레스를 받아했다. 나에게도 그랬지만 K에게도 Y는 애초 경쟁의 대상이 아니었다. 당연히 질투를 느끼지도 않는다.  

시간을 좀 더 당겨서, 대학을 졸업하고 여차저차해서 일식집 서빙을 하는 언니를 알게 된 일이 있다. 그 언니의 경쟁대상은 놀랍게도 고현정이었다. 한때 연예인을 꿈꾸던 언니가 트레이닝 비슷한 걸 받느라 요가 헬스 학원같은걸 다녔는데, 그때 그 언니 옆에 데뷔전의 고현정이 있었더란다.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걸 굳이 내게 거짓말 할 필요가 없으니 사실이었으려니 한다.) 그런데 그 언니는 연예인의 꿈을 접고, 일식집 서빙으로 취직을 했는데 고현정은 그때 이미 화려한 연예계 생활을 끝내고 삼성가의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그 언니는, 고현정도 삼성가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자신도 삼성가 까지는 아니어도 명문가의 며느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었다. 흠. 1년여의 사귐뒤로 만난적이 없는데 그 언니는 꿈을 이뤘을까. 그 당시의 언니와 고현정은 내가 볼 땐 정말 극과 극이었는데, 그 언니에게 고현정은 자신과 동급이었다. 질투란게 뭘까를 곰곰히 생각하게 만들었던 내 인생의 일화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잘나가는 것에대해선 그냥 그러려니 한다. 운명론을 갖다 붙이기도 하고, 전생을 갖다 대기도 하고. 그런데 한때나마 나와 동등했던 사람이 나보다 나아지는 것에 대해서는, 또는 나와 비슷해 보이는데, 아니면 그거 하나만 빼고는 나보다 나을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그 하나만은 내가 이기지 못할 것 같은 데 대해서는 불같은 질투를 느낀다. 내가 쟤보단 낫지, 라는 천박한 위안을 주던 대상이 내가 무척 가지고 싶으나 아직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휙하니 쟁취해버렸을 때의 박탈감은 거의 증오에 가깝다. 그래서, 질투와 동경은 동전의 양면이고, 질투와 증오는 사촌간이다.  

이 질투를 증오가 아닌 자기 발전의 연료로 삼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사람이라는 게 그러기가 참 힘들다. 그럼 그냥 놓아버려도 될텐데 질투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집착과 함께 온다. 질투의 대상은 밉고 싫지만, 그 사람의 소식에는 가장 감도 높은 수신기가 작동한다. 그래서, 질투와 동경은 동전의 양면이고, 질투와 증오는 사촌간이며,  질투와 집착은 동복 형제다(사실 쌍둥이일 가능성이 높다.) 

이 책, <다이어트의 여왕>은 그 질투의 속성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TV리얼 쇼 <다이어트의 여왕> 참가자인 14명은 처음에 비만이라는 동일 선에 서서 함께 출발했다. 거기서 이들은, 서바이벌 게임 형식으로 참가자 한명씩을 탈락시켜 나가면서 단 한명의 다이어트의 여왕을 뽑는 과정에 참여한다.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형식 자체가 질투라는 감정이 개입하게 만든다. 나보다 나아서 질투나는 사람은 가차없이 탈락 대상이다. 프로그램 속성상, 나보다 더 살을 많이 뺀 사람은 질투의 대상이라서도 그렇지만 경쟁의 대상이라서도 탈락시켜야야 한다. 그런데, 절대 그 이유가 질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팀에 도움을 주지 않으니까, 융화에 방해가 되니까 기타 등등등의 구구절절한 이유가 붙는다. 게다가 그들은, 질투의 대상(아직까지는 불특정 다수다.)을 이기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결코 공개하지 않는다. 질투란게 원래 그렇다. 내가 너를 질투한다는 사실은 제 3자 에게도 그렇지만 질투의 대상에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들의 질투의 대상은 처음부터 빼빼 말라 피골이 상접했던 작가 김인경이 아니라 나와 같이 뚱뚱했다가 다이어트에 성공해 날씬해진 연두다.  

다이어트에 성공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직장으로 복귀해 승승장구해 나가는 연두는, 나머지 13명이 그리 될 수도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있다. 때문에 사람들의 질투는 무섭게 작동해 곧바로 증오로 바뀐다. 연두가 근무하는 레스토랑으로 달려가 연두의 음식에 흠집을 잡은 사람은 연두를 제외한 참가자 열세명 모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에(앗, 이거 스포일러구나.)이 소설은 끝난다.  

주인공 연두를 파괴하는 건, 그 나머지 13명의 증오로 변질된 질투와 연두 내부의 질투(옛 연인의 옛 연인에 대한) 두가지다. 처음 연두의 질투는 "질투는 나의 힘" 이 되어 다이어트의 성공을 가져오지만, 질투라는 것이 본래 그쳐지지가 않는 것이라(집착과 쌍둥이라니까.) 결국은 연두를 파괴로 몰아넣는다.  

질투로 인해 망가진 연두를 구해내는 건, 그 질투와 상관없이 연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 그대로의 사랑과 관심이다. 사랑과 관심만이 동경으로 시작된 질투, 질투에서 진화한 증오, 증오와 더불어 오는 집착의 고리를 끊는다. 자족한 사람은 타인을 질투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니 남이 가진것을 동경하지 않는다. 아마 연두는 자신이 질투로 인한 증오와 집착의 대상이 되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다. 상처야 되겠지만, 그것이 이미 자신의 질투를 딛고 살아남은 연두를 또다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지금, 질투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꽤나 강렬한 질투다. 이런 나를 구제하는 것도 오직 자족한 삶일텐데, 그 자족의 평화는 언제 찾아오려나. 

지금, 당신은, 누구를 질투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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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09-12-1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투,시기 라는 감정에 워낙 관심이 많아서 심리학책도 찾아 보려고 했어요. 뜬금없는 질투심이 저를 뒤흔든 적이 있어서. 대체 이 감정이 어디서 왔나 싶어서. 님의 얘기처럼 아예 나와 경쟁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질투라는 감정 자체가 생기지를 않더라구요. 우정의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닌지. 아무리 친한 친구도 내가 유독 가지고 싶었거나 잘하고 싶었던 분야에서 갑자기 성취를 이루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게 힘들더라구요. 자족의 삶. 그래서 질투가 승할 때는 내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가장 미묘하고 해석하기 힘든 감정인 것 같아요.

아시마 2009-12-16 23:33   좋아요 0 | URL
네, 인간이 가진 가장 미묘하고 해석하기 힘든 감정이고, 덧붙이자면 가장 인정하기 힘든 감정인 것 같아요. 인간의 가장 추한 감정이기도 하고, 가장 폭력적인 감정인 것 같기도 해요. 수많은 일들의 바탕에 깔린 감정은 결국 이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결국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 그렇듯, 외부(질투의 대상)가 발화점이 아니라 질투하는 나 의 내면의 문제인 것만은 확실하죠. 그러니 시작도 끝도 결국은 나의 문제인데, 참 다스리기 힘든 감정이더라구요.
그래도 내가 지금 시기 질투를 하고 있구나, 라는 걸 인정하기만 해도 괜찮은데, 질투의 가장 추한 면은 그걸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질투의 대상이 문제라고 말하게 되는 면에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도 많이 그러지만, 음, 끝까지 상대방의 흠을 잡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인간이 이렇게 추한 존재구나 싶어 우울해지곤 하더라구요. 근데 뭐, 끝까지 상대방의 흠을 잡아서 상대방을 추락시키고자 하는게 또 질투란 감정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 속성이라. 어렵죠.

다락방 2010-01-01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시마님. 이거 땡스투 누르고 저 오늘 지릅니다. 오늘은 1일. 신한카드 결재시 6프로 할인되는 날이죠. 후훗.

아시마 2010-01-03 20:50   좋아요 0 | URL
저 남편한테 알라딘 제휴카드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애걸복걸 중인데, 안만들어 주네요. 버럭!
전 괜찮게 읽었는데, 다락방님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저 이작가 전작 스타일도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칙릿은 칙릿 나름의 맛이 또 있죠. ㅎㅎ 잼나게 읽으시길.

다락방 2010-01-03 21:50   좋아요 0 | URL
칙릿이란 장르를 좋아하진 않는데 아시마님의 리뷰를 읽다보니 그 미묘한 감정 질투를 읽어보고 싶어졌거든요. '린제이 로한'이 나오는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을 보면 여기에서도 마지막에 그런 대사가 나오거든요. '걔가 뚱뚱해진다고 내가 더 날씬해지는 건 아니다'라는 거요. 하이틴 무비인데도 전 그걸 보면서 마치 그제야 알게되는 새로운 사실인 것 처럼 아, 그렇지! 했었어요. 어떤 소설이든 영화든 내가 거기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완벽하지 않은가 생각해요. 전 그렇게 뭔가 아주 작더라도 메세지를 던져주는 걸 꽤 좋아한답니다. 다 읽고 나면 저는 어땠는지 말씀드릴게요.(물론 -아시겠지만-오자마자 그 책 먼저 읽는다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