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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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손에 든 지 이주가 지났다. 일주일간의 여행 동안 어수선하고 들뜬 마음 사이를 비집고 이 책이 생각나곤 했다. 심지어는 다른 책을 읽으면서도 떠올랐다. 창백한 얼굴로 텅 빈 아파트를 지키고 있는 수지 박의 모습이.

나는 그녀가 너무 가슴 아프다. 스산한 뉴욕의 거리를 헤메며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른 채 걸어가고 있는 그녀의 작은 어깨가 몹시도 슬프다. 부모님의 죽음을 뒤쫓는다고 해서 그녀의 빈속이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과거를 이해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언니 그레이스와 다시 다정한 자매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데미안과 다시 사랑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온전한 한국인이 혹은 온전한 미국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녀의 추적이 가슴 아프다.
그녀는 왜 통역사가 되었을까. 그것이 과거 언니가 부모님에게 했던 바로 그 통역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몰랐을까. 통역사는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분노를 터뜨리는 법 없이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옮겨 주어야’ 한다고, 정말 그녀는 믿었던 걸까.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 많은 한국인 이민자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레이스와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을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던 걸까.
그럼에도 그녀가 미국이라는 곳에서, 뉴욕이라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통역사 밖에 없었다는 건, 지독한 불행인지 지독한 행운인지.

수지 박은 아버지가 그토록 부르짖던 한국의 유교적인 가르침을 벗어나서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 밖으로 내쳐졌고,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용서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는 부모님과 그레이스 사이의 은밀한 공모에서 눈을 감고 지냈다. 갑작스런 부모님의 죽음과 갑작스런 그레이스의 변신과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갑작스런 실마리들에 수지 박은 이방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의 쌍둥이 언니로부터의.

마치 유령처럼 살아가고 있던 그녀가 부모님의 죽음을 쫓아가며, 허둥대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차라리 잘된 일이다 싶었다. 그녀는 5년 만에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꼈고, 그녀는 오랜만에 고열에 시달리며 앓았다. 그래, 그렇게 아프고 다시 일어나야지. 그녀는 이제 길을 찾았다고 했다. ‘두 소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아무리 많은 남자를 유혹해도, 아무리 많은 남편을 가로채도, 아무리 많은 신을 섬겨도’ 찾을 수 없던 경계선 사이의 길을, 이제 찾았다고 했다. 그러니 나도 그녀를 보며 그만 아파해야겠다.  



Nicoletta Tomas Caravia [Come out there]

참 이상한 일이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원피스, 날마다 바르던 장미빛 립스틱, 없이는 못 사는 줄 알았던 보리차를 기억 저편에 묻고 지내다가 어느 날, 집과는 멀리 떨어진 황량하고 텅 빈 아파트에서 그녀의 과거를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이 "물을 마시겠소, 보리차를 마시겠소?"라고 하는 말을 들은 뒤에야 갑자기 오랫동안 보리차를 마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다니.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한때는 없으면 안되는 줄 알았던 물건이 사라진 것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니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런데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면 그보다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랑은 책임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p.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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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1-20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잘 어울립니다.

애쉬 2006-01-22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안녕하세요? 물만두님. 물만두님 서재는 정말 즐~겨 찾고 있어요.^^ 소심해서 글 남긴 적은 없지만, 늘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답니다~
 

 

 

 

 

눈 아플만큼 빨간 겉표지는 벗겨내고 읽고 있다.
새까만 표지에 S.K.라는 두 글자만 황량하게 박혀있는데,
이게 훨씬 어울린다.
처음에 읽을 땐 도대체 뭐하자는 얘긴가도 싶고,
뚜겅뚜겅 말을 잘라먹는 말투도 영 적응이 안되었다.
읽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었는데,
좀 익숙해져서 그런지, 뒤로 갈수록 무척 흥미롭다.

이민 1.5세대에겐, 뉴욕은 그리 매력적이지도, 쉬크하지도, 다채롭지도 않더라.
왠지 모를 부채감까지 느끼며, 가슴이 약간 아프려고 한다.
수지, 그녀는 어딘가 마음을 붙이고 안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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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ading Lab]
- Will Bullas

동물이 등장하는 익살맞은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 Will Bullas의 작품,

맥주 마시는 북극곰, 볼링을 치는 하마, 춤추는 오리.
하나같이 즐거운 그림들.
이번에 특별이 개의 해를 맞아,
책 읽는 개.

화가의 홈페이지 http://www.willbull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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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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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그녀는 이 거대한 사회의 기저에 흐르는 모순과 갈등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작가적 책무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호기어린 책무감을 덮고도 남을 만큼의 배짱이 있다. <인생을 훔친 여자(화차)>에서는 그것이 나즈막한 독백처럼 다가왔다면, 이제 <이유>에서는 함께 응원하고 달리는 이어달리기 같다.
르포 형식을 띤 외관부터가 그렇다. 700페이지가 다 되어가는 이 두툼한 책 안에는 얼마나 많은 인간 군상들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 2025호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도를 연습장에 그려가며, 서로를 이어주는 얇디얇은 인연들을 빨간 줄로 그어가며, 그렇게 책 읽기는 수십권 짜리 대하소설 이후로 처음이다. 작가 스스로 이 작업을 즐겼을 것이 틀림없다.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 모으듯 ‘사건’은 많은 사람을 빨아들인다. 폭심지에 있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 이를테면 각자의 가족, 친구와 지인, 근처 주민, 학교 친구나 회사 동료, 나아가 목격자, 경찰의 탐문을 받은 사람들, 사건 현장에 출입하던 수금원, 신문배달부, 음식배달부 등, 헤아려 보면 한 사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지 새삼 놀랄 정도다.
물론 이 사람들 전부가 ‘사건’에서 등거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또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대다수는 ‘사건’을 기점으로 방사형으로 그어진 직선 끝에 있는 것이며, 바로 옆 방사선 끝에 있는 다른 ’관련자‘하고는 전혀 면식이 없는 경우도 많다.(91)


처음에는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중심으로 엮여 있는 걸까 하며, 뭔가 거대한 음모 같은 것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들이 서로를 옭아매며 사건의 중심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무엇, 그래, ‘폭심지’ 같은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방사형의 그물이 넓혀지면 넓혀질수록 더욱 큰 폭발과 진동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폭심지’ 라는 것은 없더라. 바람 불고 비 내리면 다같이 흔들리고 물방울이 맺히는 거미줄이었을 뿐. 더 이상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는 중요치 않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관계들에 대한 갈등과 고민들이 있을 뿐이더라. 그리고 그 관계들의 중심에 '가족'이 있다. 피를 나눈 가족이든, 피를 나누지 않은 가족이든.

가족이라는 관계는 참으로 어렵다. 가족주의에서 무던히도 벗어나고 싶었건만, 어느새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들고 말았다. 애틋하고 살가운 감정과 버겁고 부담스러운 감정이 늘 공존한다. 누나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고민하는 야스타카, 늘 시어머니와 다투고도 집을 선뜻 나가지 못하는 유키에 아줌마, 모진 말로 아버지를 공격했지만 그 아버지를 너무 닮은 나오키. 이들 모두가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벗어나는 것이 자유로운지, 벗어나지 않는 것이 자유로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돌아갈 곳도 갈 곳도 없다는 것과 자유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가족이란 고단한 삶 속에서도 서로를 부둥켜 안는 것.
George Tooker [Lovers 2]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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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rner Study (1915)
- Carl Larsson

스웨덴 화가 Carl Larsson (1853~1919)의 작품

부드러운 느낌의 일상화들을 그린 Carl Larssson의 그림이다.
말간 수채화의 느낌도 너무 좋고, 따뜻한 색감도 참 좋다.
무엇보다 그의 그림이 좋은 건,
그의 그림에 언제나 그의 가족들과 그의 집, 그의 마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들도 그의 그림들을 주욱 들여다 보면,
그의 아내 카린과 8명의 아이들이 웃고, 노는 모습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들이 어찌 따뜻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나 그의 아들들은 낑낑대며 힘들게 공부를 했었나 보다.
유독 심각한 얼굴로 숙제를 하는 남자 아이들이 많이 그려진 걸 보면.
이 그림은 제법 여유만만하게 공부하고 있는 모습인데,
또 모를 일이다.
이 녀석의 이마엔 주름살이 잔뜩 지어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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