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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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아내는 이야기에는 그 사람의 일부가 담기기 마련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과 자라난 환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환상 세계를 그려도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의 가치관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이야기란 없다. 어딘가에는 만들어낸 사람의 숨결이 살아 숨 쉰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작가들에 대한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의 조각을 읽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히 조각에 불과하더라고 그렇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정신을 담는다. 이 책 <영화인문학>은 그런 입장에서 영화를 읽어나간다. 27편의 한국영화가 소개되고 먼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이후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감성을 담아내려 애썼는지를 먼저 말하는 것이다. 그 후 영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그와 연관된 관념이 선보인다. 처음 읽을 때는 영화에 대한 소개 같기도 하지만 읽어나갈 수록 영화를 말하는 사유의 덩어리를 끊어냈다는 느낌이 강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 <영화인문학>의 저자는 철학자다. 영화를 인문학의 관점에서 읽는다기보다 인문학에 관한 생각들을 영화라는 주제로 묶은 것 같았다. 덕분에 수월하게 읽어지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권의 말미에 이런 부분이 있다. 이 글이 연재되던 당시에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글이 어렵다고 불평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앞으로도 더 어렵게 느껴지는 글을 읽어나가라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부터 해서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을 거듭하는 철학자다운 답변이었다.

편하게 읽어지는 책은 아니지만 그만큼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었다. 책에서는 27편의 '한국'영화만을 다룬다. 가볍게 생각하면 철학자가 영화를 보는 독특한 관점을 읽고 그에 따라 그 영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기는 하다. 그런데 정작 읽어지는 것은 27편의 한국영화에 담긴 시대상이었다. <이어도>에서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희생양이 되는 인간에 대한 것, <영자의 전성시대>에서는 최하층민으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까지 지나온 혹은 살아본 적도 없는 시대를 되새기게 한다.

더구나 <달콤한 인생>에서 등장인물이 부딪히는 진짜 이유는 그 이유가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며 강박적으로 이유를 찾으려 할수록 상황은 악화된다는 것처럼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게 하는 말이 많아서 하나의 영화를 말할 때마다 한 호흡씩 멈추어 서서 생각을 모으게 되었다. 봤던 영화는 그런 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하고 그 안에 담겼지만 읽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서 골몰해보았다.

단지 아쉬웠던 것은 어렵게 느껴지는 만큼 안 본 영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 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보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아서 그리 와 닿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는 점이었다. 하기야 저자가 밝히는 사유의 덩어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그 영화가 보고 싶어지기는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영화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 셈이다. 기대했던 이유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소개된 영화는 대체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만큼 한국 사회의 그늘을 지목하는 것이 많아서 책의 전체적 분위기도 차분한 편이었다. 결국 전부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도 삶은 왜 이렇게 복잡한 것인지,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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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힘이 세다 - 죽어있는 일상을 구원해줄 단 하나의 손길, 심미안
피에로 페르치 지음, 윤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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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는 어른에 비해서 작다. 부드럽고 통통한 뺨, 맑은 구슬 같은 눈, 앙증맞은 손발까지 보고 있자면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자아낸다. 같은 생명체의 어린 모습일 뿐이지만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간의 어린 아이는 성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길다. 다른 동물들의 새끼가 금세 일어나 달릴 수 있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그렇기에 어른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래서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새끼일수록 사랑스럽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을 하고 있고 애정을 느끼도록 한다는 것이다. 보호받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힘이 숨어 있다. 하지만 정작 몇몇 순간을 제외하면 아름다움에 대해서 잊고 지낸다. 혹은 기껏해야 아름다움을 외적인 아름다움에 한정하거나 소유욕을 불태우는 객체로만 떠올리게 된다. 아름다움이야말로 평범한 삶에 색채를 더해주는 비밀인데도 말이다. 이 책 <아름다움은 힘이 세다>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아름다움에 대해 예찬하고 아름다움의 변질이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이 좁아지는 편협함을 경계한다.

아름다움이란 어디까지나 상대적 개념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껴도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고 같은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매번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더구나 심장이 멎을 것처럼 아름답다고 느꼈던 광장도 더욱 아름다운 청동상을 보고 나오면 퇴폐적이고 시시한 곳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참 후에 다시 그 광장에 가보면 다시 아름답다고 느끼며 감탄하게 되니 아름다움에 절대성은 없는 셈이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폭은 저마다 다르다. 전혀 다른 음악, 건축물, 예술 작품, 풍경 등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이므로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획일적으로 가르쳐서 서양의 유명 미술 작품을 보고는 무조건적으로 아름다움을 느껴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보다 많은 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삶은 더 행복하고 활기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내면서 가만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그리고 내리쬐는 햇살에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는 먼지조차도 아름답다는 감상을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 삶은 좀 더 행복한 것이 될 것이다.

더구나 길을 걷다가 무심코 보게 된 단풍의 잎맥 하나하나까지 들여다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순간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 동시에 사람에게 살아있다는 실감을 갖게 한다. 삶에 대한 활기를 주는 것이다. 거기에 누군가와 그 순간을 공유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나누어 가진 것과 같다고 한다. 타인에 대해서 그 사람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알게 되는 것만큼 타인을 깊숙이 알게 되는 경우도 없을 것 같다. 반면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삶은 죽어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무채색이라면 모든 시간은 무료할 뿐이고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닌 그저 그 곳에 있을 뿐인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의 힘은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 더구나 그것은 누군가에게 사야 하는 것도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아름다움을 외면적인 것, 육체적인 아름다움에 국한하고 그것을 소비재로 변환시킨다. 아름다움을 변질시키고 그것을 상품화한 것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쫓아봐야 허망함만 남는다. 오히려 자신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뜨게 해서 평범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선명함으로 남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강력한 힘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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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8-14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안님은 미인이시군요.^^ 제가 만든 사전에요. (제 멋대로 단어를 재해석하는 거랍니다다;;) 미인이란 생활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되어있어요. 아름다움이란 김광섭 씨의 '생의 감각' 같은 것이로군요.

에이안 2009-08-14 15:39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의 미인이라면 '미인' 맞아요.^^
순간 에샬롯님의 미인이라는 말에 움찔 했답니다. 단어를 재해석하신다니 재치있으신 분이신가봐요.^^
 
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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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옷은 그렇다 치지만 자신의 몸 위로 무언가를 덮는다는 것은 상대의 시선을 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글라스, 모자, 마스크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익명성을 보장한다.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라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므로 갑갑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자유를 바란다. 선글라스로 자신의 시선을 숨기고 마스크나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쓰는 것으로 표정을 숨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투명인간 같은 경우에는 붕대로 자신의 몸을 덮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동시에 같은 사람으로서의 존재가치를 회복한다. 붕대로 덮지 않으면 사람들 틈에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 존재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사람의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책 <베일>의 중편 <천제요호>에서 등장한 남자 역시 그랬다. 온 몸을 붕대로 감고 있는 남자가 길을 가다 쓰러진다. 붕대의 일반적 용도라면 상처를 동여매고 있는 것이겠지만 남자의 것은 자신을 가리는 동시에 사람으로 있기 위한 수단이었다. 투명인간의 붕대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 남자에게 무의식적으로 혐오감을 느낀 소녀 쿄코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을 그것도 붕대로 온 몸을 휘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친 사람인 것 같은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쿄코는 남자에게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꼈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품는다. 처음 만난 타인에게 반사적 거부감을 느끼고 아픈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려는 자신에게 놀란 것이다. 그로 인해 그녀는 반감을 억누르고 남자에게 말을 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무언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남자를 집에 들이게 된 여고생 쿄코는 점차 그 남자 야기에게 연민을 느낀다. 온 몸에서 부정함이 풍겨지지만 정작 그와 대화를 하면 상처 입고 주눅 든 소년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본능적인 경계심을 누르지 못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처럼 <천재요호>는 잠시 쿄코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던 남자 야기가 쿄코의 집을 떠나면서 남긴 편지로 시작된다.

모든 비밀은 이미 모든 사건이 끝난 시점에서 전달되는 야기의 편지에 의해서 풀려 나간다. 편지의 내용으로 인해 야기의 몸을 덮고 있던 붕대가 서서히 풀려 가며 그 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금기를 넘어선 자가 그림자의 일부를 보여주는 터라 오싹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같은 책에 실려 있지만 <가면 무도회>의 경우에는 학교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터라 학원 추리물 같은 느낌도 있었다. 단지 단죄를 하는 자의 정체, 묘한 결말 때문에 둘 다 봐서는 안 될 것의 그림자를 들여다 본 기분이 들었다.

규칙 혹은 관습이 잊혀졌지만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무의미해보였던 것조차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그 경계를 넘은 초혼술에 홀린 남자의 이야기 <천제요호>의 경우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그것을 읽고 있는 자신조차 야기의 정신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에 가까운 것을 품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나 어둠을 품고 있다. 그런데 그 어둠의 근간이 되는 것이 어둠 속에 숨죽이고 베일 사이에서 누군가 들여다보기만 기다리고 있고 그에 따라 절망의 탄식을 토하는 자의 이야기를 듣자니 마음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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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전 4
이종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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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3학년 때 가장 유행했던 귀신 이야기는 귀신을 보면 대학에 간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남들 다 피하려는 귀신을 못 봐서 안달인 아이들이 속출했었다. 그 와중에 다리 없는 귀신을 본 것 같다고 말하자 내 친구들은 모두 투덜댔다. 나는 수시로 이미 들어갈 대학이 결정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으로 추측되는 귀신의 모습은 이랬다. 흰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였고 잠시 우리 반 교실을 들여다보다 복도 꺾이는 부분으로 사라지셨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잘못 학교에 들어온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크지만 얼핏 보았을 때 다리가 보이지 않아서 반 농담으로 말하자 아이들은 전부 귀신이라 소리쳤다. 진실은 아직도 모른다. 그 할아버지가 귀신이었는지 아니면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귀신의 존재는 그런 존재면 족하다. 만화 <백귀야행>에서 요괴는 이렇게 말한다. 어둠을 꿰뚫는 네 시선이 있을 수 없는 것을 존재하게 한다고 말이다. 요마를 보는 능력이 있는 남자가 있어 경계가 분명해지고 그들이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볼 수 없는 사람에게 귀신은 관계 없는이야기인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 것, 그것이 귀신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 <귀신전>에서는 그 분명하지 않으면 족했을 존재들이 점차 힘을 얻는다. 무당같이 특수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귀신과 관련된 일에 휘말리는 것이다. 여태까지 귀신전 1, 2, 3권에서는 검은 안개와 함께 힘을 얻어 마을 하나를 삼키는 악령들이 나왔었다.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분명해야 할 이승과 중음의 경계는 흐릿해지며 그에 따라 귀신이라는 존재는 분명해진다.

반대급부로 퇴마사들도 힘을 얻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다. 전 편에서는 각 권마다 여러 가지의 에피소드가 있었고 퇴마사들이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나왔었다. 전 권을 관통하는 이야기가 있고 작은 이야기가 전부 그것과 약간씩 관련을 가지고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문제가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지만 동시에 작은 이야기들은 거의 사라졌다. 검은 눈구멍을 가진 괴물들이 도시에 나타나고 도시는 아수라장이 된다.

치열한 전초전을 벌이지만 퇴마사들은 아직도 열세이고 본색을 드러낸 숙희야 말로 이제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통쾌하기는커녕 답답함만 가중되는 느낌이었다. 도시를 습격하는 검은 눈구멍의 괴물들에게 속수무책인 시민들의 모습, 상황파악을 위해 들어갔다가 위기에 빠진 경찰 특공대의 이야기, 정체불명의 여인의 등장까지 흥미요소는 많았지만 중반부에 다소 늘어지는 느낌이 있어서 아쉬웠다.

좀 더 호쾌한 맛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전초전이라 고생은 이제 시작인 것 같다. 반면 작가가 공포소설가이니 만큼 초반의 아비규환은 오싹했다. 검은 눈구멍들이 지하에서 그리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마구 습격하는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숙희를 비롯해서 묘화까지 여태껏 뿌려두었던 문제들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앞으로 <귀신전>에서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 궁금하기만 하다. 작은 이야기들이 거의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숨어 있었던 진짜 문제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다음 권에는 좀 더 호쾌하면서도 오싹한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역시 귀신의 진실은 궁금하지만 알고 싶지 않다. 가끔은 분명하지 않은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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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샬롯 2009-08-14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신꿈은 꾼 적 있는데..;; 그런데 귀신이 처음엔 무섭다가 나중엔 같이 놀게 되는... 이상한 내용을 흐르더라고요.;; 저는 그 존재 여부를 떠나 그냥 재미있어요. 이런 이야기들..^^ㅋ <백귀야행>은 제가 사랑하는 만화책이랍니다.^^;; 얼마전에 정리해서 지금은 없지만 다시 살까 생각을 하고 있다는..^^;;

에이안 2009-08-14 15:41   좋아요 0 | URL
저도 <백귀야행>을 좋아해서 전 권 가지고 있어요. 그런 류의 귀신 이야기들은 꽤 즐겁더군요. 꿈에서 귀신과 함께 노셨다니 살짝 부럽네요. 전 꿈에서 귀신이 나오면 도망치기 바쁜 터라...^^;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박지현 옮김 / 살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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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에서는 보통 사건이 일어나고 탐정 역을 맡은 사람이 그 사건을 조사한 후 결론을 내리는 식으로 전개된다. 포와로도 엘러리 퀸도 모든 증거를 수집하고 결론을 내린 후 사람들 앞에서 추리 쇼를 선보이는 방식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탐정이 조사하는 사건은 진귀한 보석의 도난 같은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살인이다. 누가, 어떻게, 왜 죽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추리 소설의 꽃은 살인 사건, 그것도 밀실 살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도 없는 닫힌 공간에 사람이 죽어 있다. 그런데 그 곳에 다른 사람이 없으며 창문도 문도 없는 밀실이라면 사건은 미궁에 빠져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밀실에 사람이 죽어 있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거나 나올 여지가 없었다면 사고사나 자살 같은 살인 이외의 것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살인이라면 인간 증발의 트릭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일종의 불가능 범죄 풀이랄까. 이 책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역시 밀실 살인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시작점이 다르다. 한 남자가 방에 들어가 살인을 준비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이미 밝혀져 있으니 누가 죽였는지는 의문점이 아니다. 남자는 차분하게 살인을 진행하고 다른 남자를 살해한다. 남자의 목적은 피해자가 사고사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방을 밀실로 나온 후 그 방을 빠져 나오는 살인자, 그렇게 문은 닫혀 진다. 밀실에 살해된 피해자만이 남은 상태에서 살인자가 밖으로 나온 것이다. 방은 아직도 밀실인 상태로 말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살인자도 남자가 밀실을 만들어 놓은 방법도 이미 드러나 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은 남자의 동기와 남자가 밀실을 만들어 놓은 목적이었다. 살인은 남자의 목적대로 풀려 가지만 이후 상황은 그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탐정 역을 하고 있는 유카라는 여성이 뛰어난 두뇌를 발휘한 탓이었다. 살인자인 후시미와 탐정 역의 유카는 과거에 뭔가 관계가 있었다. 감정적인 선이 아직 남아 있는 두 사람인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무엇인가 미심쩍다고 판단한 유카는 어떻게든 문을 열려 하고 살인자인 후시미는 필사적으로 그 시도를 막으려 한다. 차가운 머리, 평온한 대화 속에서 진검승부가 펼쳐진 채 심리게임이 벌어진다. 그리고 문은 아직도 닫혀 있었다. 추리 소설은 대체로 사건이 발생하면서 진행된다. 살인이 일어나고 그것이 발견된 후에 탐정이 그 사건을 풀어간다. 누가 동기를 가지고 있는지 알리바이가 없는지를 판단하고 모은 증거를 통해 논리의 고리를 연결해가는 것이다. 밀실 살인조차도 누군가 살해당한 것을 안 후 밀실을 깨고 들어가서 살인을 확인한다. 그 다음에야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반면 이 책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는 제목 그대로 문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살인자와 탐정의 심리게임이 돋보인다. 아직 살인이 확인되지도 않았고 살인자가 만든 밀실이 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사가 진행되니 독특한 맛이 있었다. 더구나 탐정 역의 유카라는 여성은 평소에도 분위기에 맞는 표정을 '지어내는' 모든 것을 머리로 판단하는 인물이었다. 그녀에게 누가 살해당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상이 생겼으니 그 끝을 알아야 하는 것뿐이었다. 살인의 동기도 동기지만 밀실의 목적과 밀실이 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사되는 살인 사건이라는 점이 가장 특색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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