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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옷은 그렇다 치지만 자신의 몸 위로 무언가를 덮는다는 것은 상대의 시선을 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글라스, 모자, 마스크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익명성을 보장한다. 타인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숙명이라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므로 갑갑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자유를 바란다. 선글라스로 자신의 시선을 숨기고 마스크나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쓰는 것으로 표정을 숨긴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투명인간 같은 경우에는 붕대로 자신의 몸을 덮어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동시에 같은 사람으로서의 존재가치를 회복한다. 붕대로 덮지 않으면 사람들 틈에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 존재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사람의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책 <베일>의 중편 <천제요호>에서 등장한 남자 역시 그랬다. 온 몸을 붕대로 감고 있는 남자가 길을 가다 쓰러진다. 붕대의 일반적 용도라면 상처를 동여매고 있는 것이겠지만 남자의 것은 자신을 가리는 동시에 사람으로 있기 위한 수단이었다. 투명인간의 붕대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런 남자에게 무의식적으로 혐오감을 느낀 소녀 쿄코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을 그것도 붕대로 온 몸을 휘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다친 사람인 것 같은 사람을 무시하고 지나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쿄코는 남자에게 본능적인 혐오감을 느꼈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품는다. 처음 만난 타인에게 반사적 거부감을 느끼고 아픈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려는 자신에게 놀란 것이다. 그로 인해 그녀는 반감을 억누르고 남자에게 말을 건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무언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남자를 집에 들이게 된 여고생 쿄코는 점차 그 남자 야기에게 연민을 느낀다. 온 몸에서 부정함이 풍겨지지만 정작 그와 대화를 하면 상처 입고 주눅 든 소년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본능적인 경계심을 누르지 못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처럼 <천재요호>는 잠시 쿄코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던 남자 야기가 쿄코의 집을 떠나면서 남긴 편지로 시작된다.
모든 비밀은 이미 모든 사건이 끝난 시점에서 전달되는 야기의 편지에 의해서 풀려 나간다. 편지의 내용으로 인해 야기의 몸을 덮고 있던 붕대가 서서히 풀려 가며 그 밑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금기를 넘어선 자가 그림자의 일부를 보여주는 터라 오싹하면서도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반면 같은 책에 실려 있지만 <가면 무도회>의 경우에는 학교에서 일어난 의문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터라 학원 추리물 같은 느낌도 있었다. 단지 단죄를 하는 자의 정체, 묘한 결말 때문에 둘 다 봐서는 안 될 것의 그림자를 들여다 본 기분이 들었다.
규칙 혹은 관습이 잊혀졌지만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를 넘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무의미해보였던 것조차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그 경계를 넘은 초혼술에 홀린 남자의 이야기 <천제요호>의 경우 가장 무서웠던 것은 그것을 읽고 있는 자신조차 야기의 정신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에 가까운 것을 품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마음에는 누구나 어둠을 품고 있다. 그런데 그 어둠의 근간이 되는 것이 어둠 속에 숨죽이고 베일 사이에서 누군가 들여다보기만 기다리고 있고 그에 따라 절망의 탄식을 토하는 자의 이야기를 듣자니 마음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