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
제임스 힐먼 지음, 주민아 옮김 / 도솔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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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어찌 보면 끔찍한 생물이다. 어제 다른 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았다가 어느 영화의 예고편을 보았다. 지구를 '우리 행성'이라고 지칭하는 인류에게 냉소를 퍼붓고 인류가 죽어야 지구가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외계인이 등장했다. 불행하게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범고래나 고양이도 자신의 유희를 위해 펭귄이나 쥐를 죽인다지만 인간만큼 효과적으로 동족을 죽이는 생명체도 드물다. 소설 '드래곤 라자'의 엘프 이루릴은 이런 말을 한다. 엘프가 숲을 거닐면 숲과 동화되어 그저 지나갈 뿐이지만 인간이 숲을 거닐면 길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기보다 자신에 맞추어서 환경을 바꾼다.

더구나 그런 노력은 환경에서 멈추지 않는다. 김어준의 책 '건투를 빈다'에서도 이런 대목이 있었다. 상담자인 여성은 자신의 연애는 싸움을 기반으로 한다고 한다. 싸워가면서 관계도 돈독해지는 것이고 그 과정을 통해 남자친구를 변화시켜 나갈 생각이라는 것이다. 남자친구는 진저리를 치지만 원래 자신의 연애는 이런 방식이며 그것은 지극히 건강한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짝사랑이 괴로운 것은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해서라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자신의 구미에 맞추어 변화시키려는 방식이 '건강한' 것인지는 의문이 생겼다.

하물며 그 변화의 극단에는 죽음이 있다. 인간은 상대를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주로 악당이 내뱉는 대사긴 하지만 미국 드라마 속의 악당은 이런 말을 한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전쟁터에서 수십 아니 수백 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전쟁과 평화 중에 어느 것이 바람직하냐는 질문에 평화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평화가 바람직하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답하는 전쟁은 왜 사라지질 않는 것일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힘을 쓰는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이 책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은 바로 그런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쟁은 예전에도 있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 '패튼 대전차 군단'의 한 장면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아수라장인 전장을 거닐며 패튼 장군은 전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자신도 무슨 조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장의 제목은 '전쟁은 정상적이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많은 이들이 말하는 평화가 비정상적이라고 한다. 전쟁터 속에서 군인들이 살아 돌아오면 정신적 후유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그래서 군인들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전쟁터에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왔기에 당연한 혼돈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평화야 말로 전쟁이 잠시 멈춘 비정상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전쟁을 혐오하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신은 전쟁을 너무나 싫어하지만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야 말로 살아있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런 감정은 사라져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 충격적이다. 매일 많은 매체에서 전쟁은 일상적으로 소비된다. 단 한 명의 죽음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끔찍한 일인데 수만 명의 죽음은 단순히 수치화되어서 그냥 지나치게 된다. 비정상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전쟁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찰나에 전쟁에 대해 분석하는 책은 충격적이지만 논리적인 면도 있었다.

인간 본성 속에 죽고 죽이려는 욕망이 있지 않다면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지는 이유를 알 수 없던 것이다. 단순히 전쟁의 원인이 타인의 것을 원하는 탐욕이라고 보기에는 그 전쟁은 지나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전쟁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심리학적 측면에서 말이다. 전쟁은 정상적인 것이므로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던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암담하지만 납득이 가기는 하는 주장부터 전쟁이 숭고한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그 해방적 초월성을 인정하고 그 소명을 받아들이라는 절대 납득하기 싫은 내용도 있었다.

자주 잊게 되지만 우리나라는 휴전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이 책 '전쟁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좀 더 흥미로웠다. 머리로는 납득이 가지만 가슴으로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용도 꽤나 들어 있었지만 왜 전쟁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지 인간이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끔찍한 일을 행할 수 있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제목은 물론이고 표지까지 찜찜했지만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읽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은 나쁘지 않았다. 허나 이 책을 다 읽은 이후에도 전쟁은 가능한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라도 타인의 죽음보다는 평화를 바라게 되는 것도 인간의 모순적 본능 중에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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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ark 2008-12-24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훌륭한 리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에이안 2008-12-25 16:17   좋아요 0 | URL
칭찬 감사합니다. bookmark님^^
 
수학이 사랑한 예술
아미르 D. 악젤 지음, 이충호 옮김 / 알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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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가 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일이다. 천재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천재이길 바란다. 사람의 생명은 유한하다. 자신의 유한한 삶 동안에 의미를 찾길 바라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남기고 싶어한다. 보통 그것은 자신의 이름일수도 있고 역사에 남을 업적일수도 있다. 이름이든 업적이든 남기려면 누구보다 뛰어난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천재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여기 그런 면에서 아주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수학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 부르바키로 엄청난 양의 논문을 발표하고 수학은 물론이고 다방면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부르바키는 매년 엄청난 양의 논문을 발표하면서도 그 논문의 질은 사람들을 경악시킬 만한 수준의 것을 유지했다. 그의 발표와 저작들은 프랑스 수학계를 뒤흔들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수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예술은 물론이고 문학 같은 관계없는 분야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수학자이며 구조주의 자체로도 불릴 정도인 수학자 니콜라 부르바키는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 곳에는 비밀이 있었다. 아무리 천재라 해도 역사에 남을 정도의 업적을 이룰 만한 수학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안정적인 집안에서 자랐으며 르네상스적 만능인에 속하는 수학자 앙드레 베유의 머릿속에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여러 명의 수학자가 모여 함께 강의계획서를 짜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수학자이고 수학을 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베유는 친구가 매번 강의계획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비슷한 질문에 답변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률적으로 강의계획서를 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당시 프랑스 수학계에는 일정한 체계가 없었다. 양차대전이 일어나서 대변혁이 일어났던 탓도 있었지만 수학을 가르칠 때 일정한 개념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도 않았고 적절한 교습과정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매번 무엇을 가르칠지 그리고 가르치지 않을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야 학생들은 적절한 지식을 얻을 수 없었다. 수학교수들의 관심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앙드레 베유의 계획은 많은 수학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적절한 강의계획서가 있다면 그것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면 되니 매번 무엇을 가르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 학생들도 대학교 수준에 적합한 수학지식을 얻을 수 있으니 우수한 수학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관심이 있는 수학자들이 모여 들고 그들은 무엇을 강의계획서에 넣고 뺄 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쪽으로 번진다. 적절한 수학 교재도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있는 수학 교재는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라 지금 쓰기에는 무리점이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학 교수는 그 교재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교재를 통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재를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모인 수학자들은 그 필요성을 절절히 느끼고 있던 만큼 점차 신이 나서 이야기를 발전시켜 나간다.

전쟁이라는 것은 기존의 많은 것들은 바꾼다. 그래서 많은 분야의 것들이 바뀌고 있던 때였다. 교재를 바꾼다면 수학 전반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프랑스 전체 대학에서 사용할 교재를 만든다는 점은 모인 수학자들을 흥분시킨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의 수학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바닥부터 쌓아올릴 필요가 있다는 점에 동의 한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증명되지 않은 것은 사용할 수 없었다. 시작은 집합에서 하자는 것과 모든 개념을 확립하자는 것으로 이야기가 모인다.

그리고 함께 일정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고 그에 걸맞은 결론을 내려서 공동으로 출판을 하기로 한다. 그 모든 저작들은 가상의 수학자 '니콜라 부르바키'의 이름으로 출간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수학자가 한 명 탄생한 것이었는데 당시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젊은 수학자들이 의욕적으로 모인 일이었고 희생정신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책 '수학이 사랑한 예술'은 모든 분야에 그 영향을 미친 수학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니콜라 부르바키의 저작은 구조주의 그 자체로도 불리고 그 확고한 개념들은 다양한 분야에 흔적을 남겼다. 그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가상의 수학자를 말하기에 앞서 그 가상의 수학자를 이루어 낸 주요 수학자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니콜라 부르바키의 전체 상을 보게 하고 있다. 숲을 통해서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통해서 숲을 그려 보는 것이다. 단순히 강의계획서를 세우던 일이 점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니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특히 니콜라 부르바키의 저작 대부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알렉상드르 그로텐디크의 삶은 흥미로운 것 이상이었다. 구조주의 수학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 점도 좋았지만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인 젊은 수학자들이 얼마나 큰 업적을 이룰 수 있는지가 더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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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아, 날 살려라 - 텍스트로 철학하기
유헌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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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사냥꾼들은 코끼리 무덤을 꼭 찾고 싶어한다고 한다. 많은 코끼리 사냥꾼들이 코끼리를 노리는 것은 상아를 탐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코끼리라는 생물이 묘해서 죽을 때가 되면 홀연히 사라진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죽을 자리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코끼리 사냥꾼이 코끼리 무덤을 찾을 수 있다면 수많은 코끼리의 뼈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코끼리 무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때는 별 생각없이 지나쳤다. 코끼리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어제 '한반도의 공룡'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성장해서 새끼를 키우던 공룡 점박이가 새끼를 죽인 다른 공룡과 싸워 치명상을 입게 된다.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다른 공룡들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공룡 한 마리가 있었다. 반면 사람은 사람의 죽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도 자신의 죽음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모든 생물은 죽는다. 인간도 그런 생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당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책 '죽음아, 날 살려라'에서는 다양한 매체에서 마주하게 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대상은 인간이다. 타인의 죽음에 이입을 해서 노래를 하는 '상엿소리'부터 죽음을 앞두고 고향집에 간 남자의 이야기 '시계가 걸렸던 자리'까지를 다루고 있다. 다양한 매체에서 사람들의 죽음을 말한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서 일수도 있고 당연한 일임에도 너무도 충격적으로 느껴져서 그럴 수도 있다.

하기야 어느 생명체의 죽음이 충격적이지 않을 수 있겠냐만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고질병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안에서 다룬 텍스트 중에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음을 이반 일리치는 느낀다. 검은 구멍 같은 죽음이 그를 서서히 끌어당기고 있었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그의 삶에 대한 집착이 그를 삶 쪽으로 당기고 있었고 당연히 다가오던 죽음도 그를 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조차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부정한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의바른 태도를 취하지만 그의 죽음을 부정한다. 전부 그가 죽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의 친구는 후에 그의 장례식에 와서 그를 동정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 일은 이반 일리치에게 생긴 일이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며 또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머리로는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고 인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정말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한 예로 만화 '허니와 클로버'에 이런 부분이 있다. 핸드폰을 통해서 본 100년 후의 자신의 생일에 알람을 설정해두는 것이었다. 자신이 있지 않을 그 날에 울리는 생일 축하노래를 말이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그 생각이 나서 핸드폰을 들었다. 먼저 2050년의 생일을 찾아보았다. 노인으로 맞이하게 될 생일의 요일은 목요일이었다. 그 순간 오싹해졌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약 40년 후의 자신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묘한 불쾌감을 억지로 누르고 다시 2100년의 생일을 찾아보았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기적이 있지 않다면 자신이 결코 존재하지 않을 생일이 그 곳에 있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하자면 어리석은 일이다. 죽지 않을 인간은 없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웠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티토노스'의 주인공은 새벽의 여신의 사랑을 받고 불멸을 얻지만 영원한 젊음을 얻는 것을 잊어버리고 계속 나이 들어간다. 그가 끝없이 늙어가서 매미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 글에서는 그는 여신에게 자신의 죽음을 간청하지만 그 때 그 글을 읽은 기분은 인간은 제 생명대로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왜 그가 영원한 젊음을 달라고 하는 것을 잊어버렸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에서 뱀파이어 루이스는 시간과 동떨어져 방관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다가올 때는 그것에라도 매달리고 싶은 사람이 꽤 될 것이다.

인간은 생명이 유한하기 때문에 더 빛나게 생을 살 수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생이 더 빛났기에 죽음이 더 두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반 일리치가 최후의 순간 말했던 것처럼 '죽음이 이제 무섭지 않다'라고 할 수 있거나 진리에 대한 절대적 믿음으로 독배를 아무렇지 않게 들이킨 소크라테스 같을 수는 없다. 인간은 자아가 강한 오만한 생명체인 것 같다.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한다. 죽음마저도 자신은 비껴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허나 삶이 중요한 만큼 죽음의 무게가 더 무거운 법이라 이 책 '죽음아, 날 살려라'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몰랐던 자신의 비논리적 모습을 알게 되기도 하고 죽음에 대한 거대한 공포를 맛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가는 시간을 어디에 가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언젠가는 죽음의 실체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가장 궁금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던 죽음을 다양한 각도로 읽어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먼저 죽음을 다룬 다양한 소설, 시, 영화, 노래를 소개하고 토론이 전개되는데 그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거슬리기도 했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소개된 텍스트의 느낌이 너무 강렬한 경우에는 그들의 토론이 쓸모없는 곁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토론 후에 설명이 있던 것은 좋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생각의 파편이 한군데로 집중되어 하나의 생각으로 묶여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인상적 제목, 인상적 소재를 다룬 '죽음아, 날 살려라', 제목대로만 실제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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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gyu 2008-12-1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니와 클로버 얘기, 눈에 들어오네요
잘 읽었습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서평이 좋았습니다
책에는 '이반 일리치'라고 돼있는데 '울리치'라고 쓰신 건가요?

에이안 2008-12-13 13:26   좋아요 0 | URL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모르고 있었는데 잘못 썼네요.
수정했어요.^^;
 
만화로 읽는 4컷 철학교실
난부 야스히로 지음, 아이하라 코지 그림, 한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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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이후로 누구나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음을 피한 자는 여태껏 있지 않았으므로 누구나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죽음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떠올려보게 된다. 두려움이 너무 커서 어떤 의미를 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람에게서 있어서 죽음의 의미는 지나치게 크다. 그래서 반대급부로 삶에 의미를 더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 '만화로 읽는 4컷 철학교실'의 주인공 히로시 역시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계속하여 생각만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로 한 것이다. 도시를 뒤로 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자신이 사는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여행을 떠난 21살의 남자라니 처음의 분위기는 진지 그 자체였다. 그런 분위기가 일명 돼지씨의 한 마디로 끝이 난다. 자신은 잡아먹히기 위해 산다는 것이다. 그 적나라한 대답에 순간 경악한 히로시는 얼어붙는다. 그 때 돼지씨의 천연덕스러운 말이 이어진다. 빵 잘 먹겠다라는 말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돼지씨는 말 그대로 돼지다. 식용으로 사육되고 있는 돼지이며 그 사실을 사실 그대로 담담하게 받아들인 존재인 것이다. 일단 말하는 돼지이며 사람보다도 논리적이고 철학자에 가까운 돼지인터라 이 책 최고로 만화적인 존재다. 히로시와의 충격적 만남이후 돼지씨는 번번이 히로시가 찾아낸 삶의 의미를 꺾어버린다. 가짜 말놀음에 쉽사리 넘어갈 돼지씨가 아니라는 의미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21살 청년 히로시와 돼지씨의 짧은 대화는 철학적 지식을 줄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유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충격적 만남을 시작으로 그들의 관계는 이어진다. 히로시는 처음에는 돼지씨가 답한 삶의 의미에 충격을 받아서 돼지씨를 설복시키려 든다. 어떻게든 잡아먹히기 위해 산다는 그의 삶의 의미를 뒤집어보려 하는 것이다. 히로시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잘못된 그리고 끔찍한 삶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돼지씨는 그 관계에서 실리적 이익을 추구한다. 바로 히로시의 배낭에 있는 빵이다. 히로시가 돼지씨에게 말을 걸고 히로시가 충격을 받아서 멍하니 있는 동안 배낭에서 빵을 낚아챈다. 빵 잘 먹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돼지씨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답했을 뿐이고 충격을 받아 좌절하는 것은 히로시가 어리숙하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대화를 주고받고 충격을 받는 대화 패턴을 반복하는 사이 히로시는 일방적으로 돼지씨를 스승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돼지씨에게 삶의 의미를 배우려 드는 것이다. 더구나 분명 식육용으로 사육되고 있는 돼지씨가 간단히 울타리를 뛰어넘어 그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둘의 관계는 미묘한 것이 되었다. 돼지씨는 분명 자신의 삶의 의미가 잡아먹히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음에도 울타리를 넘어서 히로시와의 여행에 동행하는 것이다. 그 도중에 히로시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계속 말해댄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의 논리는 돼지씨의 한 마디로 무너진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대화도 유쾌하지만 여행을 해나갈 수록 두 사람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내용도 내용이지만 철학적인 설명을 부가한 글도 나름의 즐거움이었다. 사실 이 책에서 철학은 큰 부분이지만 대충 넘어가게도 되는 부분 중에 하나다. 머리말 부분에 쓰여 있듯이 처음에는 히로시와 돼지씨가 나오는 4컷만을 읽고 철학에 대한 설명이 쓰여 있는 글은 안 읽고 넘어가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만화를 읽고 다음번에는 만화와 글을 함께 읽고 조금 더 궁금하다면 주석으로 붙은 설명들을 읽으면 되는 것이다. 둘의 대화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하는 '만화로 읽는 4컷 철학교실' 정말 재밌게 읽었다. 삶도 철학도 그렇지만 답이 없는 여정이지만 말이다. 허나 사실 그 여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전부니 그렇다 한들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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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역사 - 진실과 거짓 사이의 끝없는 공방
황밍허 지음, 이철환 옮김 / 시그마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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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세운 건국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에 하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법이 없다면 모든 것은 사람의 손에 빌어서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많은 일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법은 필요악이라고 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람의 손에 의해 세워진 법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더라도 사회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있어야 한다. 허나 정의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라도 누군가를 처벌하게 만든 법이니 만큼 차가운 면이 있다. 그래서 피해자 가족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한 따뜻함을 잘 살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할 사람은 물론 법을 적용하는 법관이다.

하지만 따뜻해야 할 법은 지금도 지극히 차갑다. 법의 따뜻함을 느끼게 할 법관이 법의 차가움을 가중시켰을 수도 있고 법 자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제정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런 것들보다 돈이 있는 자만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책 '법정의 역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의 역사인 법정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가장 앞부분에 이런 부분이 있다. 현청의 문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여덟 팔자로 열려 있지만, 아무리 도리에 맞는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모로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들었던 법학 강의의 노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떤 문제든지 범죄에 달할 정도로 아주 큰 것이 아니라면 가능한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 분은 평생을 법학자로 법관으로 사신 분인데도 자신이 소송 당사자가 되자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심란하셨다고 언급하셨다. 자신이 분명 승소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변호사로써가 아니라 소송을 당하는 당사자가 되니 감정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제대로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관리들이 법관의 노릇을 해서 국민들이 제대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원한다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찾아보면 무료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큰돈을 들이지 않고 우수한 변호사를 기대하기 힘들기도 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소송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점점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예전 프랑스에서 농민이 바구미라는 해충을 고소했다. 신의 저주로 바구미를 쫓아달라는 것이었다. 지루한 소송이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도 바구미는 농작물을 먹어치웠으며 농민들은 굶게 생긴 상태였다. 원고 측인 농민들은 어떻게든 피고 측 바구미와 협상이라도 이루려했지만 소송은 끝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소송의 결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바구미가 판결문 정본을 갉아먹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법정의 역사를 다루니 만큼 책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판결로 많은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은 중세시대 종교재판부터 현대의 심슨 재판까지를 다루고 있다. 연대별로 넘어가는 이야기도 흥미 있었고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 가발을 쓰는 법관들의 고충까지 나온 것이 꽤나 흥미로웠다. 가발을 쓰는 법관들은 그 가발을 보통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발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비싸기도 하지만 법관이 된 이후에 일생동안 사용하니 비위생적이라는 것이다. 그럼 지저분해질 때마다 새로 구입하거나 세탁할 수는 없나 싶었는데 가발이 낡았다는 것은 경력이 오래됐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가발을 대대로 물려받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의사든 법관이든 사람들은 오랜 경력을 가진 사람을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그런 경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불편해도 가발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O.J 심슨의 재판 이야기였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구성된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풀려난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돈의 힘으로 무죄로 풀려났지만 그의 평생은 의혹으로 뒤덮였고 실질적으로 파산했다. 그가 정말로 아내를 죽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진실은 알 길이 없다. 한 점 의혹이 없어야 하는 형사재판에서는 무죄를 그런 사건을 일으켰을 개연성이 있으면 유죄가 되는 민사재판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법은 지금도 차갑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기 위한 법이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그래서 법관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것을 밝히기 위한 싸움을 계속한다. 언제 성공을 거둘지 알 수 없는 지루한 게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 '법정의 역사'에서는 흥미롭지만 갑갑하기도 한 법정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그 과정은 흥미롭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가 중국인이라 중국 쪽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편이다. 제목이 법정의 역사고 표지 역시 서양의 법정에 가까워서 서양 쪽의 법정이나 반씩 섞여 있는 내용을 생각했지만 중국의 법정 역사에 미국이나 영국의 이야기가 약간 곁들여진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 점을 제외하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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