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역사 - 진실과 거짓 사이의 끝없는 공방
황밍허 지음, 이철환 옮김 / 시그마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나라를 세운 건국자가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에 하나는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법이 없다면 모든 것은 사람의 손에 빌어서 해결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많은 일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결국 법은 필요악이라고 해도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람의 손에 의해 세워진 법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처벌을 받더라도 사회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있어야 한다. 허나 정의를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라도 누군가를 처벌하게 만든 법이니 만큼 차가운 면이 있다. 그래서 피해자 가족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한 따뜻함을 잘 살릴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할 사람은 물론 법을 적용하는 법관이다.

하지만 따뜻해야 할 법은 지금도 지극히 차갑다. 법의 따뜻함을 느끼게 할 법관이 법의 차가움을 가중시켰을 수도 있고 법 자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제정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그런 것들보다 돈이 있는 자만 법의 보호를 제대로 받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책 '법정의 역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끊임없는 싸움의 역사인 법정의 역사를 밝히고 있다. 가장 앞부분에 이런 부분이 있다. 현청의 문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여덟 팔자로 열려 있지만, 아무리 도리에 맞는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모로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들었던 법학 강의의 노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떤 문제든지 범죄에 달할 정도로 아주 큰 것이 아니라면 가능한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 분은 평생을 법학자로 법관으로 사신 분인데도 자신이 소송 당사자가 되자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심란하셨다고 언급하셨다. 자신이 분명 승소할 것을 알고 있는데도 변호사로써가 아니라 소송을 당하는 당사자가 되니 감정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제대로 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관리들이 법관의 노릇을 해서 국민들이 제대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원한다면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찾아보면 무료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큰돈을 들이지 않고 우수한 변호사를 기대하기 힘들기도 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소송은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점점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예전 프랑스에서 농민이 바구미라는 해충을 고소했다. 신의 저주로 바구미를 쫓아달라는 것이었다. 지루한 소송이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도 바구미는 농작물을 먹어치웠으며 농민들은 굶게 생긴 상태였다. 원고 측인 농민들은 어떻게든 피고 측 바구미와 협상이라도 이루려했지만 소송은 끝까지 진행되었다. 그리고 소송의 결말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슨 바구미가 판결문 정본을 갉아먹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법정의 역사를 다루니 만큼 책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판결로 많은 사람을 죽음에 몰아넣은 중세시대 종교재판부터 현대의 심슨 재판까지를 다루고 있다. 연대별로 넘어가는 이야기도 흥미 있었고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 가발을 쓰는 법관들의 고충까지 나온 것이 꽤나 흥미로웠다. 가발을 쓰는 법관들은 그 가발을 보통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발은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비싸기도 하지만 법관이 된 이후에 일생동안 사용하니 비위생적이라는 것이다. 그럼 지저분해질 때마다 새로 구입하거나 세탁할 수는 없나 싶었는데 가발이 낡았다는 것은 경력이 오래됐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가발을 대대로 물려받기까지 한다는 것이었다. 의사든 법관이든 사람들은 오랜 경력을 가진 사람을 더 신뢰하기 마련이다. 그런 경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불편해도 가발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O.J 심슨의 재판 이야기였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구성된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풀려난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돈의 힘으로 무죄로 풀려났지만 그의 평생은 의혹으로 뒤덮였고 실질적으로 파산했다. 그가 정말로 아내를 죽였는지 아닌지에 대한 진실은 알 길이 없다. 한 점 의혹이 없어야 하는 형사재판에서는 무죄를 그런 사건을 일으켰을 개연성이 있으면 유죄가 되는 민사재판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법은 지금도 차갑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기 위한 법이 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그래서 법관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것을 밝히기 위한 싸움을 계속한다. 언제 성공을 거둘지 알 수 없는 지루한 게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책 '법정의 역사'에서는 흥미롭지만 갑갑하기도 한 법정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그 과정은 흥미롭지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가 중국인이라 중국 쪽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은 편이다. 제목이 법정의 역사고 표지 역시 서양의 법정에 가까워서 서양 쪽의 법정이나 반씩 섞여 있는 내용을 생각했지만 중국의 법정 역사에 미국이나 영국의 이야기가 약간 곁들여진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 점을 제외하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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