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침묵이다.

눈 오는 날은 그래서 아름답다. 세상이 동양화의 마지막 여백처럼 남아 있는 날은 읽던 책을 뒤로 물리고 눈이 완성하는 빈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봐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나는  내가 '차가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잘 얼린 네모난 얼음조각을 한동안 바라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봄날 햇빛을 머금은 민들레가 주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아폴론의 미'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거창하다.  '차가움'은 일단 '단순함'을 준다. 우리가 가끔 모든 로코코적 수식을 걷어낸 작품들을 볼 때 느끼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정말 세련된 디자인들은 선을 줄인다. 눈은 그런 차원에서 세상의 선을 단 몇 개의 줄로 환원시킨다. 본질을 향한 질주같은 그런 선들은 아름답다. 우리는 눈이 지워지면 다시금 세상의 선들을 만나겠지만, 삶의 어떤 순간 순간에는 그런 선들을 생각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북극'을 사랑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에 갇혔다는 것은 침묵에 갇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폭설로 공항에 묶였던 날이 생각난다. 공항 대합실의 소란과 대비하여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은 조용했다. 실제로 눈이 오는 날은 조용하다. 눈의 입자들이 흡음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끊겨버린 비행기에 대한 마음은 놓고 나니 하루를 거저 얻은- 남은 일이야 알아서 되라지 뭐-자의 여유로움이 생겼다. 어디로 갈야할 지 결정하기 위해 나 앉은 공항 벤치에서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눈이 건네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해안에 어제 처음 첫 눈이 왔다. 내가 사는 부산의 겨울이 지루한 것은 이 곳에 눈이 귀하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치욕적이다.) 다른 지역에 눈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어느 북구의 겨울과 그 침묵을 만나러 갔다.

영화 <렛 미 인>(여기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아서들 보시오. 그것까지 배려하면서 쓰라고 하는 것은 정말 구리구리한 요구요.)



영화 속의 스웨덴은 계속 눈에 덮여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눈이 펄펄 내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웨덴의 겨울풍광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건 '뱀파이어' 영화다. 하지만 결코 공포물은 아니다. 영화는 '성장영화' 이고 '사랑'의 영화이며 '봉합'(?)의 영화다. 왕따 소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가 주인공이다. 오스칼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의 금발과 햇빛이 부족한 피부빛은 스웨덴의 겨울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면서 결코 반항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칼로 나무에 분풀이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이웃집으로 이사온 이엘리를 만난다. 그녀는 '맞받아 치라'고 오스칼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지켜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소통하기 시작한다.('소통'이라는 말을 쓰고 보니, 마치 이 말이 이제는 '혁명'의 모든 조건인양 쓰이는 경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가나 '소통' '소통' '소통'이다.  남발하는 '소통'의 만연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은 서로 '외롭다'는 조건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기존 공포물의 뱀파이어와는 다른 동화적 구현의 '렛 미 인' 에서 첫 번째 깜찍한 전환이 벌어지는 지점이다.

 

그렇다. '뱀파이어'는 외로운 존재이다. 나는 시골 마을에 서 있는 장승이나 솟대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뱀파이어'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구의 감독은 '외로운' 뱀파이어를 끌어낸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소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에 '왕따' 소년의 '외로움'에 침입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으면 - 스토리라인에 온 신경만 집중시키지 않는다면- 오스칼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뱀파이어 이엘리는 오스칼의 '얼터에고'인 셈이다. 영화 중반부에 이엘리의 존재를 알게된 오스칼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이엘리는 '나는 너다' 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오스칼의 억눌린 자아가 만들어내는 얼터에고로서의 이엘리를 감독이 직접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식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야' 오스칼의 망상이야라고 스토리를 따라간다면 관객의 상상력 협착증에도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속해 있는 세계를 그려내는 중요한 장치가 스웨덴의 눈오는 풍경이다. 오스칼의 내면처럼 그곳은 눈으로 흡음된 침묵의 세계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감독은 오스칼을 창 안에 있는 아이로 설정한다. 창 밖과 창 안이 모두 눈 속에 있는 셈이다. 북구의 겨울은 어둠과 묵음으로 이에 답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사실 이런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무채색이며 이유없는 뱀파이어의 희생양이다. 감독은 여기서 음향효과를 이용한다. 어른들의 장면에는 몇 가지 시끄러운 일상의 소란을 설정하거나 아니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는 단순한 기타멜로리로 덮어버린다. 동성애적 코드가 보이는 오스칼 아버지와 친구의 대화장면은 오스칼이 이런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된 존재임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오스칼은 눈오는 밤이 세계와의 소통의 단절을 말하듯이 오스칼 역시 언어들도 부터 단절된다. 그는 '외로움'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꾸려나가야 한다. 극단적으로 어려운 성장통이지만 감독은 파괴나 일탈 같은 것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섬세하지만 극단적인 폭발을 내재한 이 성장의 아픔은 결국 '뱀파이어'의 흡혈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흡집을 내기 시작한다.

이 영화 초반에 이엘리를 돕는 아버지 또는 애인이 등장한다.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그는 이엘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서 흡혈을 하지 않도로 살인을 통해 이엘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가 만들어 놓는 유일한 제도적 안전 장치가 되는 셈이다. 뱀파이어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실패했을 때, 뱀파이어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잔인한 방식의 사랑의 완성이다.( 다분히 잔인한 것은 성장할 오스칼이 곧 걷게 될 길이기도 하다는 마지막 암시 같은 것 때문이다.) 



영화는 오스칼이 이엘리를 가방에 넣어서 어른들의 세계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도 대화를 나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결국 어른들의 언어는 그들을 침입하지 못한다. 영화는 오스칼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적극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갈등의 해소보다는 봉합적인 결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그런면에서 현실적이다.) 결국 오스칼은 언젠가 자신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인정함으로서만 그 여행을 마감할 수 있다. 오스칼의 셈세함은 그 선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들 역시 언젠가 오스칼같은 봉합의 기억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런 섬세함의 기억을 잃고 뱀파이어를 지워버린 존재들이다. 나를 못견디게 하는 것은 그런 뱀파이어를 타자화시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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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 제국 3부작 2
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조정환 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머나만 반도 이탈리아에서 내공을 닦아온 안토니오 네그리가 동료 마이클 하트와 무림비서<제국>을 내놓았을 때 전세계 무림은 한 번 크게 출렁였다. 21세기에 다시 쓰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거대한 기획다왔다. 전지구적 변화를 예언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운동주체를 설정하는 그들의 방식에 모두들 감짝 놀랐다.싫거나 좋거나 무림맹주들은 그들의 도전에 주목했으며 그 동안 자신들이 연마해온 수련방식을 총동원하여 이들을 격파하거나 자신들을 방어했다. 한 동안 이 바닥에 불었던-그리고 아직 그 후폭풍이 가라앉지 않은-'제국논쟁'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그 후폭풍이 지나가지 않은 시점에서 후속적 <다중>을 선보였다. 이 두 책은 9.11테러로 무너지기전 서로 바로보고 있던 쌍둥이 빌딩처럼 상호보완적이다. <제국>이 나왔을 때 가장 크게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제국주의이냐 제국이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다중이란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네그리의 <제국>은 일국간의 경쟁상태인 제국주의가 무너지고 팍스로마같은 제국의 시대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책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제국'의 시대에 그에 조응하는 저항주체인 '다중'의 역동성과 저항잠재력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오히려 <다중>에서는 '저항의 우선성'에 대해 말한다. <제국>은 아무래도 '다중'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해주질 못했다. 오히려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 세계사적 변화와 그 이행 과정에 좀 더 촛점을 맞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그렇게 되다보니 '제국'은 물론이고 '다중'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와 비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그리와 하트는 9.11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변화되어 가는 세계를 다시 한번 '제국'의 이행과정으로 목도한다.그리고 전편 <제국>에서 좀 더 부각시키지 못했던 '다중'과 '제국논쟁'에서 불거진 비판에 대해 후속편인 이 책<다중>에서 답변하고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 <전쟁>은 전쟁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보편적인 상황으로 바뀐 전세계적인 정치구도의 변화를 말한다. 영원한 전쟁이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상황인식과 그것을 지배하는 유일한 형식이 제국이라는 것이다. 네그리는 이를 '전지구적 내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쟁이 삶을 바꾼다는 개념이다. 푸코의 연구를 빌어서 그들은 이 전쟁이라는 상황을 '삶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한다.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국가 권력 혹은 지배의 방식은 전쟁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사회적 질서가 반복,재생산 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은 전지구적 내전 상황하에서 움직이는 현재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런 전쟁과 정치의 역전관계는 한국민들에게는 사실 경험적으로 익숙한 주제이다. 위의 푸코의 말은 김동춘이 <전쟁과 사회>에서 인용했던 것과 동일한 구절이다. 김동춘은 한국전쟁이 그후 근대 역사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한국민들의 삶을 어떤 형태로 바꾸었는지를 <전쟁과 사회>에서 쓰고 있다. 그는 '현재 진행형인 한국전쟁'이라고 이를 설명한다. 한국민들의 의식 속에 한국전쟁의 상흔은 내면화 되어 '삶권력'적인 형태로 작용했다. 우리 사회가 그 상흔으로 부터 많이 벗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그런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바라보는 9.11 이후의 세계가 그런 '전지구적 내전'에 의해 안보라는 이름의 비상권력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기이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을 보면 9.11 테러 이후 '안보'와 '공포'라는 이름으로 미국민과 세계에게 어떤 '삶권력'을 강요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보기에 진보진영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군산복합체론'은 이런 전쟁의 삶정치적 영역을 단순히 경제성의 논리로 풀어나가는 '제국주의적 담론' 방식일 뿐이다. '군산복합체론'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일면적이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리고 해방이후 '저강도 정책'의 방식으로 미국이 삶정치의 한 영역이 되어버린 한국에서는 이런 감각들이 탁월하게 이해될 수 있다. 

네그리는 근대전에서 탈근대전쟁의 형태로 전쟁의 추이가 바뀌는 지점에서 '저항과 역반란'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쉽게 말해서 근대적은 전면적을 뜻하고 탈근대전쟁은 고강도의 치안행위까지 포함하는 국지전을 말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정보와 네트워크에 의한 전쟁 테크놀로지에 의존한다. 이 전략은 '전역적지배' 를 목적으로 한다. 즉 군사력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심리적 토제를 결합하여 지배를 안정화 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힘의 비대칭성은 이것을 가능할 것 처럼 보이게 한다.그러나 이것은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저항의 자율성 때문이다. 네그리는 '역반란'이 '저항'에 대응하면서 변화해나가는 지점을 찾는다. 그러면서 변화된 저항의 계보학을 게릴라전에서부터 찾는다. 게릴라전의 네트워크화는 역반란측의 네트워크 전쟁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는 게릴라전의 전통 역시 근대적 전쟁 신체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하면서 '제국'시대의 투쟁은 그런 유기체적인 정치 신체로부터 탈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부터 비롯되는 근대정치 철학의 신체관을 탈중심적으로 변화시킨 것이 탈근대시대 저항의 특성이 된다는 것이다.(근대 정치 철학은 대의를 통해서건 무엇인건 간에 머리-가슴-발에 해당하는 인간의 형상을 닮아 있다.) 탈근대적 세계인 '제국'의 주체 '다중'은 그런 면에서 '리좀'적인 존재이고 네트워크 간의 소통과 절합을 통해서 만나는 존재이다. 네그리는 신체라는 개념 대신에 훨씬 유동적이고 창조적인 '살'이라는 개념으로 다중의 성격을 설명한다.

2부의 <다중>은 '제국 논쟁'에서 말이 많았던 '다중이란 무엇이냐?"에 대해 철학적,사회학적,정치학적인 측면에서 그 윤곽을 조금 더 분명히 한다. 일단 네그리는 '다중을 노동자 계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맑스주의의 동일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뜻하지 않는다. 또한 근대 정치에서 변혁주체였던 '민중'과도 구분한다. 이것들과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일자회귀'에 대한 네그리의 거부에 있다. 그들은 조금 더 유연하고 광범위한 형태의 '위험계급'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다중'의 외곽선을 긋는다. 흔히들 '차이의 주체'라고 하는 이들이 모두 포함된다.  네그리는 '우리 모두 빈자이며, 또 생산자이다.' 라는 말을 한다.  이는 '다중'이 다분히 정치적 개념이며 민중이나 노동자 계급을 탈영토화한 이후 다시 정치적으로 재영토화한 개념임을 뜻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물질노동'에 대한 '비물질 노동'의 우위를 '제국'시대의 특징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다중'은 그런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속에서 그 성격을 반영하면서 운동한다. 물질노동이 포드주의적 개념이라면 비물질 노동은 포스트포드주의적 그림위에 그려진다. 물론 이런 노동 주체의 이동과정은 비판을 대상이 되었다. 즉 '1세계에서의 비물질노동의 우위 상황을 전세계적으로 일반화한 것 아니냐?" 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비물질노동을 이야기하고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의 상표는 '메이드 인 차이나'이다."라는 것이다. 비물질노동의 우위가 아니라 물질노동의 전세계적 이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체제론자들의 비판에서 주를 이루었다. 데이비드 하비 같은 이들은 '조정'이라는 개념으로 자본의 이윤율감소 경향을 상쇄하는 방법을 말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서문에서도 이 책이 '철학책'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런 실제적인 비판에 대해서도 '이 책이 지적하는 것은 일종의 경향성'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 최소한 그런 실재적 비판의 예봉을 어느 정도 감쇄시킬 수 있는 답변이다. 저자들은 물질노동이 소멸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라 헤게모니가 비물질 노동으로 이전되는 경향을 말한 것이라고 답변한다. 그들은 맑스와 자신들을 그대로 유비한다. 즉 19세기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를 말할 때 그것은 유럽 전역에서 상당히 소수였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의 운동 경향과 그것이 어떤 힘에 의해 붕괴될 것인지 그 경향성을 말했다.  자신들 역시 그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조건에 있어서 '특이성과 공통성'을 강조한다. 이 양자는 서로 침해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특이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요즘 말로 '차이'를 말하고 '공통성'이라는 것은 '보편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하지만 이것은 정확치않다. 왜나하면 근대적 의미의'보편성'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변증법적인 결과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이것을 부정한다.) 다중은 각각의 특이성을 그대로 보존하는 차원에서 또 상대의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공통된 것을 추구하기 위해 절합한다.네그리는 우리가 흔히 '공적인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 체계에 포섭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그보다 더 나아간 방식으로 '공통된 것'이라는 개념을 꺼낸다. 그는 이 '공통된 것'을 꾸려내기 위해 몇 가지 실행방향을 언급한다. 첫째는 신자유주의의 허위를 까발리는 것, 둘째는 공공의 이익 개념을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이것은 케인즈주의처럼 국가에 힘을 싣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오히려 꼬뮌주의적 참여에 더 가깝다.) 저자들은 일반적이거나 공적인 것들은 모두 다중에 의해 재전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며 따라서 공통적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다중을 조직하고 움직이는 것은 '잉여'이다. 기본적으로 맑스의 노동가치론과 선을 같이 한다.네그리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자본에 의해 착취될 수 없는 전지구적 정치적 신체에 포획될 수 없는 잉여에 촛점을 맞춘다. 그 잉여가 적대가 되고 반란이 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조건은 다중의 잠재력,자율성과 소통,그리고 차이에 대한 존중과 절합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런 절합이 결코 반작용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이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한 답이다. 저자들은 축적된 공통된 불만들이 생산적으로 작동하는 점에 주목한다. 설령 미디어에서 보이기에는 항의운동의 측면만 보일지라도 이것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이다. 

제 3부는 <민주주의>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정치적 목표가 여기이다. 그들은 '급진적 민주주의'를 통해 이름만 남아 있는 '민주주의를 제국 시대에 재전유'하자고 주장하는것이다. '다중'의 문제와 근대정치 체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여러번 제시했던 '대의(제)'의 문제가 다시금 부각된다. '대의'는 다중과 정치를 연결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절대적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것이다. 근대 정치체제는 지속적으로 인구의 확장,지역의 광역성들을 내걸면서 '대의'문제의 약점을 피해왔다. 네그리와 하트는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대의'라는 것은 '선출직 귀족제'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이것은 자유주의국가에서나 사회주의국가에서나 공히 작동했다. 저자들은 이런 '대의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나 구체적인 내용들은 들어 있지 않다.)

네그리와 하트는 책 후반주에 가면서 제국 시대의 정치적 형식에 대해 조금 더 실재적인 예들을 거론한다. 그런데 이 역시 그다지 구체적이지는 못하다. '제국'시대에 현실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는 단체인 UN의 개혁한 같은 것들이다. 상임이사국의 입김을 줄이자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이야기들과 제2의 총회같은 이원화된 UN 개혁론같은 것들이 제시된다.그러면서 유럽연합의 복합적 연방체제 같은 것들에 대해 주목한다.(물론 이런 것들이 대의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은 지적한다.) 또한 국제적 사법질서를 위해 국제형사재판소의 강화, 경제적 개혁을 위한 최빈국의 외채 삭감, 전 인류의 공통된 이익을 위한 저작권,특허권의 공유같은 것들을 말한다.하지만 이런 제안들에 구체성들은 부족하다. 오히려 저자들은 삶정치 영역에서의 이러한 제안보다는 우리의전지구적 상황을다루는 실험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라고 살짝 발을 빼낸다.

그러면서 다시금 18세기의 실재적 민주주의를 위한 꿈을 언급하고, 다중의 구성적 동력학을 고혀하여 복수성이 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물론 이것에는 '권력'이 배제된다. 다중은 '항구운동적인 주체'이지 결코 '주권권력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네그리의 주장을 '아나키스트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반권력론'때문으로 보인다. 네그리는 보론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에 짧은 반비판을 가한다. 그 중에는 '당신은 아나키스트인가?"부터 "당신들은 레닌주의자인가?" 라는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비판들이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그들의 주장이 이 사이에 있다라고 말한다. 최종결론 부분에서 다시금 이를 확인한다.(매디슨과 레닌 사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시대를 통찰한 새로운과학과 함께 새로운 존재론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분히 신학적인 결론으로-본인들은 이를 신학의 사회학이라고 명명하겠으나-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고 그 결정을 사건적으로 이해하길 요구한다.새로운 인류의 창조가 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이며 또한 정치적 해위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때 그때 비판적인 메모를 많이 했다. 물론 그 메모는 네그리와 하트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이다. 그들은 내 메모를 훔쳐 본 사람들인양-아마 '제국논쟁'에서 이미 나왔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몇 장 건너지 않아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달릴 수 있는 오해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래서 메모를 계속 했으나 결국 어느 정도는 해소하면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최소한 그들의 생각을 비판적으로라도 받아들이는 독서였기때문에...

내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대목은 사실 <다중>의 맨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다중의 구성적 힘에서, 보장들과 입헌적 동력의 제도적 방법을 갖춘,"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기획을-주권을 넘어서는,권위를 넘어서는,폭정을 넘어서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기획을-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은 결국 '제국.다중론'의 현실 정치에서의 접합과정에 대한 질문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이와 유사한 무수한 질문에서 추렴된 것이겟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 는 이 책이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와 같은 것은 집단적 정치적 논의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라고 공을 넘긴다.사실 우리사회에서 '다중'이라는 최신 철학용어가 시사잡지에서도 옮겨지고 일반인들도 알만한 단어가 된것은 좀 이색적이다. 아마 지난 '촛불집회'의 영향력이 무척 컷을 것이다. 당시 학자들과 시사잡지들은 듣도 보도 못한 창조적인 운동주체의 등장에 놀랐다. 그들은 네그리의 예견과 용어를 도입하여 '시애틀에 이어 나타난 서울의 다중'으로 보았다. 나는 이런 분석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다중'의 출현의 한 예로 충분하다. 문제는 그 축제적 운동과 철학적 결합의 이상적 상황에 흥분해버린 것이다.(나는 지난 촛불집회 상황에서 이를 누누히 강조한 바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인 것'의 복원을 축하하다가 '정치'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다중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도 관련이 있지만(권력문제에 대한 포기같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언젠가 알라딘의 어떤 분이 제기한 '좌파 역시 권력을 목표로 하기에 자율주의가 오히려 낫다.'는 입장에 대해서 비판한 적이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 논의 속에 구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문제를 이론적 유비를 통해 해소하려는 나이브 함에 있었다. 네그리와 하트 역시 자신들의 주장이 '경향성'이라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다. 구체적인 아무런 변화를 끌어내지못하고 '다중 출현'의 광경만 목도한 것이 '촛불'이라면 사실 현재의 후폭풍들은 그 운동주체의 한계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광장에 열번 스무번 나간 것 만큼이나 지식인들이나 진보적인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그런 한계들을 깨닫고 운동의 흐름을 실재적인 변화를 위해 집중시키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인 즉, 이론을 현실에 맞추며 박수치는 것을 때려 치우고,구체적 변화를 도모하는 방향에 힘을 실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시대의 역행은 어떻게 보면 '촛불'의 후폭풍일 지도 모른다. 촛불의 개별적 주체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촛불의 실패가 보여줄 수 있는 한가지 역사라는 것 말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에 내가 전적으로 동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책은 분명히 <제국>과 어우러지는 좋은 책이다. 우리는 근대적 토대 위에 서 있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고 또 다른 세계의 움직임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한다. 이 책은 그런 시각을 만들어주고, 또한 비판과 반비판의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은 더 넓어지고 튼튼해 질 수 있다. <제국>보다 훨씬 평이하게 씌여졌지만 이 책은 또 앞의 책이 '다중'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제국'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국'에 대한 선이해가 있어야지 <다중>에 접근하기 쉬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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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1-17 14:3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어려운 책 보기 싫은데 그래도 제국과 다중은 봐야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항상 뒷통수를 묵직하게 잡아끕니다. 너무 어렵지는 않던가요? 번역도...
올 겨울 방학 진득하게 앉아서 볼까 싶네요.

드팀전 2008-11-17 16:15   좋아요 0 | URL
글쎄요...<제국>보다 <다중>은 훨씬 평이하게 씌여졌습니다. 쉬운 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글쎄 쉽다 어렵다는 어떻게 답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번역 역시 제가 답할 수는 없지만 크게 장애가 되진 않았습니다. 대신 몇 가지 개념적 용어들이 <제국>과 <다중>에서 다르게 번역되고 있긴 합니다. <제국>에서는 multitude를 '다중'으로 정식화되기 이전이어서 '대중'이라고 번역하고 있기도 하니까요.생체정치 같은 개념들도 마찬가지지요.

Jade 2008-11-17 16:10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리뷰만 보면 어려운 책들이 매력있어진다는....-_-;;;

드팀전 2008-11-17 16:14   좋아요 0 | URL
읽어 볼 만 합니다.
 



오랜만에 예찬이 사진을 올려볼까...예찬이도 28개월째 되었다. 낮시간에는 똥오줌 가리니 이제 밤시간만 잘 가르치면 인간으로서 해야될 문명화 조건 중 하나쯤은 마스터하는 것이다.

젓가락 민족답게 아이용 손잡이 있는 젓가락이라면 조자룡 헌창 쓰듯 한다. 그러나 가끔 손가락이 아플 때는 인류가 선험적으로 부여받은 10개의 젓가락을 쓴다. 손이 지저분 해지면 앞으로 쭉 내밀며 닦으라고 한다.






올 여름에 예찬이랑 함께 간 촛불집회 사진. 한동안 '이..명 바비 물러가라' 때문에 힘들었다. 최근에 좀 잊었다. 마치 쇠라도 녹일 것 같던 열기가 기억 뒤편으로 물러가듯이 예찬이도 '이 ..명 바비'를 잊었다. 인간이란게 원래 뜨겁기도 잘하고 식기도 잘한다. 예찬아..너는 네 삶에서 항구적 혁명을 준비하렴!!  ^^ 너와 함께 할 따끈한 커리큘럼을 위해 요즘도 아빠는 열공중이다.ㅋㅋ 



음...장모님이 김치담는데 예찬이가 끼었다. 소금에 절인 김치 한 조각을 아삭...


예찬이는 과자를 전혀 먹이지 않는다.(쌀 튀밥은 먹는다.) 빵이나 과자를 보면 '저건 아빠 먹는거'라고 하고 나를 먹여준다. 대신 아빠를 닮아 '과일 킬러'다. 사시사철 유기농 과일을 먹이느라 아빠의 허리는 휘어도 저런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면이야...유기농을 먹는 것은 또한 사람과 자연의 공생을 위한 정치적 실천이기도 핟. 예찬이가 좋아하는 과일은 수박,포도,사과,귤,바나나이다.


하루는 예찬이가 '로버트 주세요' 한다. 뭐...robot?  무슨 robot 했다. 계속 '아빠..로버트 주세요' 한다. 아 아......요구르트! 남들은 못알아 들어도 부모는 다 알아듣는다. 아주 가끔 외계통신용어를 쓸 때는 빼고...그것도 독해하려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사랑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니까.



예찬이는 책보는 걸 좋아한다. 엄마 아빠와 놀려면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데...요즘 음악엔 영 싱숭생숭하다. 아무래도 가을 타는 것 같아서...자기가 원할 때 아니면 잘 안들려준다. 나는 예찬이의 동화책 중에서 <안녕 프레드릭>인가 하는 생쥐 나오는 책이 제일 좋다.



이것도 여름에 처갓집에서 찍은 거네. 처갓집은 2층이고 앞에 작은 공간도 있다. 그래서 아파트보다훨씬 덜 답답하다. 장모님은 동네 최고의 정원사같다. 하여간 잘 키우신다. 예찬이가 좋아라하는 고종사촌 형의 헬멧을 쓰고....빗자루 들고 청소했다.



^^ 요즘 예찬이가 이룬 성과 중 가장 놀라운 것. 혼자서 쉬하기다. 낮에는 전혀 문제 없다. 혼자서 볼 일 다보고 변기 물까지 내린다. 문제는 밤인데...몇 번 시도했다. 하룻 밤에만 이불 두 번씩 갈았다. 아이 역시 그때마다 깨니 서로 잠을 못자서 죽을 지경이었다. 처형 왈 아이들이 기저귀 뗄 때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한 번에 무리하게 하지 말라고 해서 밤에는 기저귀와 팬트를 병행한다.

 아...출근해야지. 오늘도 짜식이 5시반에 깨서...요즘 수영장 알러지때문에 운동을 못간다. 잠이 좀 덜 깬 상태긴 하지만 그 시간이 책 볼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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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11-06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부러워요. 해람이는 기저귀 벗기면 죽자살자 울어서 좀 더 놔두기로 했어요. 전세계에서 기저귀 가장 빨리 떼는 나라에 굳이 동참할 필요성도 못 느끼고. 기저귀값 대신 책값 아끼죠, 뭐...(음, 그런데 왜 계속 플래티늄이지. ㅠ.ㅠ)

드팀전 2008-11-06 11:53   좋아요 0 | URL
기저귀를 하면 울어요.예찬이는. 기저귀 하려면 설득작업이 필요하죠.

mong 2008-11-06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찬이는 표정이...참
뭔가 다 알고 있을것 같은 표정이에요

드팀전 2008-11-06 11:53   좋아요 0 | URL
^^ 그런가? 음...하여간 멋진 녀석이에요

메르헨 2008-11-06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깜찍해요.^^저희 아이는 벌써 49개월인데 이런 어린(?)시절이 있었나 싶어요.하핫..
세월이 참 빠르더라구요.ㅋㅋㅋ

드팀전 2008-11-06 17:5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시간은 참 빠르고 아이들은 죽순처럼 크지요.

nada 2008-11-0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진지하게 오줌을 누네요.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일을 가장 진지하게 해내는 사람들을 좋아해요. 저 때는 모든 게 다 진지하겠죠. 노는 것도 최고로 진지하게 놀고.. 드팀전님은 육아에 적극 참여하시나 봐요. 사모님이 든든하실 듯. 전 쬐끄만 애들이 맛있게 쩝접거리며 과자 먹는 걸 보면 슬프더라구요. 저 깨끗한 몸에 왜 벌써부터 독을 갖다 쌓나.. 싶어서요. 저 같으면 오염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을 것 같은데 부모들이 이해가 안 되더군요. 아니, 저라면 아예 산업화된 시대에는 애를 낳지 않겠죠.-.-

드팀전 2008-11-06 18:01   좋아요 0 | URL
육아는 공동의 일이니까요...그럼에도 와이프가 훨씬 더 많이 볼 수 밖에 없지요. 요즘 즐거움은 주말에 예찬이와 주변놀이터 기행다니는 겁니다.
산업화 시대에 아이를 출산하지 않는다면 산업화를 붕괴시키는 한 방법이 되겠군요. 더이상의 소비자들이 없을테니...그러면 이제 미래도 없어지는 것인가요..^^
 

하루 종일 미국 대선 특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 확정'

TV를 보다가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TV 자막을 손으로 가렸다. 이렇게..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 확정.

TV에 못난이 부시가 앞으로 나오지 않을테니(매케인이 되도 그건 마찬가지였겠지만) 좋다.

그런데 왜 오바마에 대해 한국민이  큰 기대를 걸까?

국제사회에서 미국 외교의 고립과 일방외교 정책은 후퇴할 것이다. 북한 문제에서도 그렇다. 이명박 외교팀은 이런 인지부조화를 맞추르라 또 버벅거릴게다.  그런데...'오바마'의 시대가 오면, 이제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나?  진보적 대통령이 나왔으니 미국의 무력 개입은 사라질까? 역사적으로 미국 민주당 대통령 시절에 대외 무력 행사가 없었단 말인가?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의 예들을 비유하자면 그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순행적 역사이행의 단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형식'이 바뀌는 것일뿐이다. 일방주의는 부시 시대에 일시적 힘을 얻었을뿐 '제국'의 역사에서는 결국 유지될 수 없다는게 네그리의 주장 아니었던가. 그 틀을 유지해서 쉽게 말하자면 '제국주의'에서 '한국'은 눈물을 흘리지만, '제국'의 시대에 '한국'은  이제 한숨을 놓아도 된다는 건가? 

<다중>의 일부분을 요약해보자. '오바마 승리'의 흥분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건강에 해가 될까?

권력의 네트워크 형태는 오늘날 질서를 창출하고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이다...1990년대 초 이래 미국의 외교정책과 군사적 개입이 제국주의적 논리와 제국적 논리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미국은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적 국가들처럼 하나의 국가권력으로 행동한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군사적 개입과 그 외교정책 일반의 방향설정은 또한 동시에 제국적 논리를 따른다

미국의 외교적,군사적 행동이 제시하는 인간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수사학을 그저 근본적 국익 논리를 은폐하기 위해 고안된 외관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똑같이 실재적인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단 하나의 군사,정치적 장치를 통해 작동하는 두 개의 경쟁적 논리로 말이다.
미국은 '홀로 갈 수' 없으며, 워싱턴은 다른 지배적인 권력들과의 협력 없이는 전지구적 질서에 대해 군주제적인 통제를 행사할 수 없다.....네트워크 형태의 전지구적 권력의 필요성은 이데올로기적 주장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물질적 조건에 대한 승인이다....

그러한 일방주의적 모험은 하나의 일시적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군주는 귀족과 협력하지 않고서는 무력하다.....네트워크 형태는 엄밀하게 지배의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권력의 모든 측면들에 부과된다.

아...아....부시 보다 낫지 않겠냐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럼 된거 아니냐?' 라고 말한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덩떵어리' 다. 오늘 하루종일 한국 언론들의 오바마 쇼케이스가 완전히 그런 식이다. YTN 앵커는 웃으면서 방송한다..피식..

 네그리의 주장처럼 '제국'으로 한걸음 더 가는것인가?

그나저나 첫번째 흑인 대통령은 대단하다.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TV화면에서 자주 보여주는 것도 다 이해가 간다. ... 미국의 '공화주의적' 전통에 대해 생각해본다. '공화주의'...그건 아주 오래된, 인류의 대단한 발명품이다. 미국 '공화주의적' 전통에 대한 훌륭한 책이 있었는데...어 기억이 안나네...<미국의 정치문명>이었던것 같다.  

미국을 승냥이로만 보는 것은-80년대 반미정서가 그런 우를 많이 범했고, 그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다- ' 미국의 역사적 실재' 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아론적 양비론이다. 좋건 싫건 미국은 실체다.. 미국은 선도 악도 아니다.(그런데 한 짓들을 총합해 보면 역시 악에 더 가깝다.^^) 노암 촘스키나 하워드 진같이 급진적인 미 제국주의 비판에 익숙해있다면, 반복학습으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은 기본 베이스로 하고, 다른 측면에서 -이것은 꼭 숭미라는 뜻 아니다, 양비론자들은 자주 그렇게 오해한다 - 미국을 돌아보는 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과연 한국 정부는 오바마의 미국과 세계전략 대해 어떤 대응을 가지고 있을지?  뭐 대충 눈치봐서 하지가 전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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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11-0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충 눈치봐서~~~ㅋㅋㅋ 그런데 눈치라도 제대로 보면 좋겠어요.
며칠 전 우리아들 왈,
"미국은 좋겠다."
"왜?"
"이제 대통령 바꾸잖아~"

로쟈 2008-11-05 18:5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미국은 좋겠습니다.--;

드팀전 2008-11-05 19:34   좋아요 0 | URL
어떤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지...아니면 순환적인 정권의 교체일지 두고 봐야지요...하여간 미국이 새로운 시기로 접어든 것만은 사실이니까...과거로 회귀하는 한국보다는 좋아할 만한 일이겠네요.
 

아마 여기 소개되는 네 권의 책은 거의 살 것이 분명하다. 언제 읽게 되느냐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년 안에는 읽지 않을까 싶다.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참고문헌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전문가는 아니니까 일단 산 책은 거의 다 본다고 봐야 한다. 

 감찍하다. 책 표지부터 무언가 어필하지 않는가?

김삼순을 만들었던 김윤철 PD가 번역을 했다. 하여간 통속적인 드라마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사이를 오고 가는 책인 듯 하다. 작가가 현업에서 스토리라인을 작업을 하는 이여서 글이 구성지게 흘러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도 제대로 읽어볼 책이다. 내년쯤에. 그 입문서보다는 오히려 드라마나 영화의 스토리들이 어떻게 수천년 동안 그나물에 그 밥인지 흥미롭게 따라가면 좋을 것 같다.(비하적 발언이 아니라 고전의 원형과 보편성에 대한 예찬이다.) 우리는 이미 몇 몇 가지의 스토리텔링의 원칙들에 대해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위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알라딘 MD의 추천 책이다. 단 차이가 있다면 위의 책은 소개 이전에 알았던 거고-표지를 잘 써야된다 그래서- 이 음악책은 MD의 소개로 알게 된 책이다. <교향곡은 어떻게 클래식의 황제가 되었는가> 제법 길면서도 아주 촌스러운 제목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음악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최소한 이 책은 음악 자체가 말하는 바를 이야기한다기 보다는 교향곡이라는 형식의 성공을 짚어보는 음악사회학적 내용이 들어 있지 않을까 싶다. 서구 음악사에서 교향곡과 베토벤이라는 산맥은 뗄래야 뗄 수 없다. 소심남 브람스는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까? 심심할때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다. 앞의 책과 함께 알라딘MD의 평가는 난이도 중하다. 내 수준이네..^^

 지오바니 아리기의 책은 거의 처음으로 번역된 듯 하다. 물론 그의 논문 몇 편이 수록된 것들은 있지만 말이다.이 책 역시 공저자가 있다. 비버리 실버다. 모두 세계체제론자들이다. 아리기의 세계체계론은 계급문제에 있어서 월러스틴보다 훨씬 퇴각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의 체계적 축적순환론은 장기 20세기를 바라보는 거대서사 드라마 한편을 꾸려내고 있다. 비버리 실버 역시 <노동의 힘>이라는 책을 통해 세계체계론이 빈공간으로 두고 있는 노동문제가 자본의 헤게모니 이동에 따라 어떤 양상으로 변화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비버리 실버의 그 책이 아리기의 모델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기때문에 두 사람의 친화성은 익히 예상할 수 있었다.  세계체계론에서는 '금융의 성장'이 위기를 앞둔 벨 에포크 시기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현재 세계 금융위기를 보면서 당연히 떠오를 수 있는 생각이다. 어떻게 역사적 자본주의가  특정국가에 헤게모니를 주고 또 그 수명을 마감하는지 설명 볼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거대한 순환론적 설명이다.

언제봐도 반가운 게 푸코다. LP시리즈는 현대철학자들에 대한 입문서로 나름 괜찮은 것 같다는게 내 경험적인 생각이다. 하이데거를 좀 읽고 싶어서 끄적이다가 몇 달전  LP에서 나온 것을 보고 꼽아 두었다. 그리가 가장 최근에는 푸코가 나왔다. 표지가 마음에 든다.푸코에 대한 입문서는 만화 시리즈 부터 해서 실로 다양하다. 대개 푸코의 경우 그의 철학적 사유를 세 단계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가장 인기가 많은 토막은 '권력'에 대한 푸코의 사유를 담고 있는 중반기가 아닐까 싶다. 내 개인적 관심은 '성의 역사'에 있다. 푸코는 '그리스로의 회귀' 를 통해 구조에 옴짝달싹 못하는 주체를 '자기배려' 라는 개념으로 그 탈출구를 만들어 낸다. 내가 읽었던 푸코의 책은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뿐이다. 앞으로도 푸코의 책만 집중적으로 읽을 수 없기때문에-그럴 역량도 안되고 해서- 주변부로부터 압박해나갈 생각이다. 교양차원에서 읽는 거니까 반복해서 이런 저런 접근으로 조여가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좋다. 

 진짜 고민하게 만든 아이템이다. 중복 아이템들이 꽤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완전히 그동안 사모은 음반들에 대한 충성도 때문이다.  만약 그런것을 괄호치고 본다면 이 콜렉션은 정말 강력추천이다.카라얀은 하이든,모차르트에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못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일가를 이루었다. 전곡 녹음만 4번으로 기억하고 있다. EMI에서 한번, DG에서 세번...음반 매니아들 사이에서 어느 시기가 카라얀-베를린필의 가장 유기적 사운드 조합이었나를 두고 논쟁이 있다. 마지막 녹음은 대개 카라얀의 미끈함때문에 좀 갈린다. 카라얀의 차이코프스키,브루크너 후기교향곡들 역시 개별 아이템으로도 명반 대열에 들어가 있다. 결국...예약하고 말았다.

아..드디어 인터내셔널 릴리즈가 나왔다. 한 때 수입보붓상들에게서 구하던 음반이다. 팻 메스니와 안나 마리아 조팩의 음반이다.앨범 자켓은 좀 달라진 것 같다. 이미 너무 알려진 이후 나온 음반이어서 처음의 감흥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예전에 락음반들은 어땟나 생각하면 ^^  예를 들어 잉위 맘스틴의 초기 스틸러 시절,알카트라즈 시절의 음반들은 그가 솔로 명성을 얻고 난 이후 한 참있다고 정식으로 들을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는 빽판이 있었다. 이 음반에 수록된 <너 나랑 함께 갈래?> 는 예전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음반소개를 대신하며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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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8-11-04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기의 책이 번역되었군요.. <장기 20세기> 이런 책도 번역되면 좋을텐데..
아무튼 출간소식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 전공하는 친구 하나가 예전에 미국에 갔다가 아리기를 만났다는데 아리기가 바로 옆옆 연구실에 있는 실버도 보고 가라고 그랬다는군요. 당시 그 친구는 그냥 그게 누군가 싶어 그냥 안 만나고 왔다가 나중에 실버의 유명세(?)를 뒤늦게 알고는 후회했다는 일화가 문득 생각나는군요;;

드팀전 2008-11-04 09:08   좋아요 0 | URL
^6^ 선생님들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데...아까비!! ^^

mong 2008-11-04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저도 어제 잠깐 보고 반했는데...
요즘 MD추천도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더군요
마지막 책은 푸코 좋아하는 친구에게 알려줘야겠어요

(뜬금없이)잘 지내시죠?

드팀전 2008-11-04 10:08   좋아요 0 | URL
아.,.추가로 올리고 있었는데...몽은 마지막 음반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mong 2008-11-04 10:38   좋아요 0 | URL
어...저 이 앨범 처음 봐요
메스니앨범은 대충 다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앨범이 있군요 흐흐

드팀전 2008-11-0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음반이 나온지 몇 년되었지요. 당시에 폴란드 국내 릴리즈용으로만 풀렸어요. 물론 유럽쪽에서야 덩달아 구하기 쉬웠겠지만. 매스니 매니아들은 유럽 여행갔다 오는 친구들에게 사달라고 부탁해서 들었다는 에피소드들도 있읍니다...월드풍의 편곡이 인상적이지요. 안나 마리아 조팩의 음반은 그 외에도 몇 장 더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8-11-05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를 알아보고자『 광기의 역사 』..읽긴 했지만 머리만 복잡해졌던 기억이 다시 떠오르네요 ㅎ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인데 이해는 못하고 마냥 좋아하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엇! 비트겐슈타인 관련 내용도 있었군요..)

저는 슈베르트의 어떤 곡들을 들으면 이 책의 내용들이 떠오르더라구요~


드팀전 2008-11-05 23:13   좋아요 0 | URL
뭘 하나 제대로 이해한다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서...늘 '우공이산'의 여유로 다독입니다. 푸코는 제가 대학 다닐때 나름 인기인(?)이었고, 그가 제시하는 시각의 참신성이 언제나 머리와 마음의 한 구석을 뚫어주는 역할을 해서 좋았습니다...비트겐슈타인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몇 몇 아이디어와 글귀들의 의미만 눈도장 찍고 있는 것이지요. ^^ 철학 전공자도 아니니 다 따라가기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