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침묵이다.

눈 오는 날은 그래서 아름답다. 세상이 동양화의 마지막 여백처럼 남아 있는 날은 읽던 책을 뒤로 물리고 눈이 완성하는 빈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봐도 나쁘지 않을 성 싶다. 나는  내가 '차가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럴지도 모른다. 잘 얼린 네모난 얼음조각을 한동안 바라보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봄날 햇빛을 머금은 민들레가 주는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아폴론의 미'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거창하다.  '차가움'은 일단 '단순함'을 준다. 우리가 가끔 모든 로코코적 수식을 걷어낸 작품들을 볼 때 느끼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정말 세련된 디자인들은 선을 줄인다. 눈은 그런 차원에서 세상의 선을 단 몇 개의 줄로 환원시킨다. 본질을 향한 질주같은 그런 선들은 아름답다. 우리는 눈이 지워지면 다시금 세상의 선들을 만나겠지만, 삶의 어떤 순간 순간에는 그런 선들을 생각해야 한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북극'을 사랑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눈에 갇혔다는 것은 침묵에 갇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몇 년 전 폭설로 공항에 묶였던 날이 생각난다. 공항 대합실의 소란과 대비하여 창 밖으로 내리는 눈은 조용했다. 실제로 눈이 오는 날은 조용하다. 눈의 입자들이 흡음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 끊겨버린 비행기에 대한 마음은 놓고 나니 하루를 거저 얻은- 남은 일이야 알아서 되라지 뭐-자의 여유로움이 생겼다. 어디로 갈야할 지 결정하기 위해 나 앉은 공항 벤치에서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눈이 건네는 말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해안에 어제 처음 첫 눈이 왔다. 내가 사는 부산의 겨울이 지루한 것은 이 곳에 눈이 귀하기 때문이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치욕적이다.) 다른 지역에 눈이 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나는 어느 북구의 겨울과 그 침묵을 만나러 갔다.

영화 <렛 미 인>(여기부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알아서들 보시오. 그것까지 배려하면서 쓰라고 하는 것은 정말 구리구리한 요구요.)



영화 속의 스웨덴은 계속 눈에 덮여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눈이 펄펄 내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웨덴의 겨울풍광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이건 '뱀파이어' 영화다. 하지만 결코 공포물은 아니다. 영화는 '성장영화' 이고 '사랑'의 영화이며 '봉합'(?)의 영화다. 왕따 소년 오스칼과 뱀파이어 이엘리가 주인공이다. 오스칼은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의 금발과 햇빛이 부족한 피부빛은 스웨덴의 겨울과 닮아 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면서 결코 반항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칼로 나무에 분풀이하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이웃집으로 이사온 이엘리를 만난다. 그녀는 '맞받아 치라'고 오스칼에게 이야기한다. 그녀가 지켜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은 소통하기 시작한다.('소통'이라는 말을 쓰고 보니, 마치 이 말이 이제는 '혁명'의 모든 조건인양 쓰이는 경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디가나 '소통' '소통' '소통'이다.  남발하는 '소통'의 만연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들은 서로 '외롭다'는 조건으로 상대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기존 공포물의 뱀파이어와는 다른 동화적 구현의 '렛 미 인' 에서 첫 번째 깜찍한 전환이 벌어지는 지점이다.

 

그렇다. '뱀파이어'는 외로운 존재이다. 나는 시골 마을에 서 있는 장승이나 솟대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뱀파이어'가 외로와 보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구의 감독은 '외로운' 뱀파이어를 끌어낸다.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소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스럽에 '왕따' 소년의 '외로움'에 침입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얼마지나지 않으면 - 스토리라인에 온 신경만 집중시키지 않는다면- 오스칼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뱀파이어 이엘리는 오스칼의 '얼터에고'인 셈이다. 영화 중반부에 이엘리의 존재를 알게된 오스칼이 '너는 누구냐?" 라고 묻는 대목이 있다. 이엘리는 '나는 너다' 라는 식으로 대답한다. 오스칼의 억눌린 자아가 만들어내는 얼터에고로서의 이엘리를 감독이 직접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식으로 '결국 그들은 하나야' 오스칼의 망상이야라고 스토리를 따라간다면 관객의 상상력 협착증에도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속해 있는 세계를 그려내는 중요한 장치가 스웨덴의 눈오는 풍경이다. 오스칼의 내면처럼 그곳은 눈으로 흡음된 침묵의 세계이다. 영화 첫 장면에서 감독은 오스칼을 창 안에 있는 아이로 설정한다. 창 밖과 창 안이 모두 눈 속에 있는 셈이다. 북구의 겨울은 어둠과 묵음으로 이에 답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사실 이런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거의 무채색이며 이유없는 뱀파이어의 희생양이다. 감독은 여기서 음향효과를 이용한다. 어른들의 장면에는 몇 가지 시끄러운 일상의 소란을 설정하거나 아니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는 단순한 기타멜로리로 덮어버린다. 동성애적 코드가 보이는 오스칼 아버지와 친구의 대화장면은 오스칼이 이런 어른들의 세계와 단절된 존재임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오스칼은 눈오는 밤이 세계와의 소통의 단절을 말하듯이 오스칼 역시 언어들도 부터 단절된다. 그는 '외로움'을 재료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꾸려나가야 한다. 극단적으로 어려운 성장통이지만 감독은 파괴나 일탈 같은 것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 섬세하지만 극단적인 폭발을 내재한 이 성장의 아픔은 결국 '뱀파이어'의 흡혈이라는 행위를 통해 어른들의 세계에 흡집을 내기 시작한다.

이 영화 초반에 이엘리를 돕는 아버지 또는 애인이 등장한다.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그는 이엘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서 흡혈을 하지 않도로 살인을 통해 이엘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어른들의 세계가 만들어 놓는 유일한 제도적 안전 장치가 되는 셈이다. 뱀파이어를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실패했을 때, 뱀파이어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잔인한 방식의 사랑의 완성이다.( 다분히 잔인한 것은 성장할 오스칼이 곧 걷게 될 길이기도 하다는 마지막 암시 같은 것 때문이다.) 



영화는 오스칼이 이엘리를 가방에 넣어서 어른들의 세계를 떠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도 대화를 나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영화에서 결국 어른들의 언어는 그들을 침입하지 못한다. 영화는 오스칼이 자신의 내면에서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적극적인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내가 영화를 갈등의 해소보다는 봉합적인 결론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그런면에서 현실적이다.) 결국 오스칼은 언젠가 자신과 이엘리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인정함으로서만 그 여행을 마감할 수 있다. 오스칼의 셈세함은 그 선에 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뱀파이어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우리들 역시 언젠가 오스칼같은 봉합의 기억이 있었을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더 폭력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런 섬세함의 기억을 잃고 뱀파이어를 지워버린 존재들이다. 나를 못견디게 하는 것은 그런 뱀파이어를 타자화시키는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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