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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의 이번 주 특집 기사 중에는 '관변단체퍼주기 논란'이 있다.

'올해 새마을 운동 등 3대 단체에 280억원 퍼줬다'가 타이틀이다. 3대 관변 단체라고 함은 새마을 관련 단체, 한국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 협의회다.

 

 대도시 사는 사람들은 이게 아직도 있나 할 지도 모른다. 대도시 사는 사람들은 금새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도시의 월급쟁이들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그런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뭘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나마 기사에도 나왔듯이, 가끔 교차로에 안보 플랫카드 거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역 행사 있을 때 교통정리하는 꼴보수 해병전우회같은 회고적인 친목단체 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실제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같은 인구 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 광역시도보다 도 단위에서 지원금이 훨씬 많다. 이 관변 단체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지만 때때로 그 때 그 때 저울질하면서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의 위상을 누리고 있다.이들이 하는 일은 일목요연하다. "소외계층 봉사활동을 명목으로 바닥 민심을 다지고, 시민교육의 이름으로 안보 강연"을 한다.

 

시민단체의 활성화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가 진보의 화두인 적이 있었는데, 사실 이 3단체는 그거 나왔을 때 코웃음 치고 있었을 것이다. 진보단체들이 뛰어난 머리로 무언가 기획하고 있을 때, 이 단체들은 자금력과 봉사라면 목숨 거시는 아주머님들의 고무장갑 힘으로 시골과 소외 지역 민심을 녹여 가며 풀뿌리에 물주고 있었다. 아주머니들 중 대다수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중간 리더쯤 되는 사람,그 위의 기획자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이런 단체들의 경우, 봉사 명목으로 자주 시골 가서 어르신 밥도 해드리고, 떡도 해드린다. 1년에 한 두 번 이상이다. 그럼 선거 때 이게 어떻게 먹히느냐? 이 단체의 관계자들이 직간접적으로 특정 후보 뒤에서 병풍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아이고 어무이. 지난 번에 한번 왔었지예.마...그 동안 잘 지내셨는교? " 한다. 기사에도 언급했듯이 '관변단체 회원들이 특정 후보의 선거원으로 뛰지는 않는다.' 고 한다.(기자가 피해가려고 쓴 것 같은 인상이 강하다만.) 하지만 분명히 관변 단체와 후보 캠프 사이의 긴밀한 관계들-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 식의-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단체가 봉사 활동한다고 돌아다니는 날, 초대 되는 사람은 특정인들이다. 즉 좋은 일 할때 숟가락 하나 얹고 생색내는 자리에 꼭 가고 싶은 것이 정치인들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 단체들은 밥상을 잘 차려 준다. 그 돈은 관변 단체 지원금에서 나온다.

 

 결국 선거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이런 단체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적 네트워크는 선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꿀떡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성향이 달라도 정치인들은 이걸 확 없애 버리지 못한다. 그랬다가는 다음 선거에서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선거 때가 아니면 평생 가야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야당 후보들이나 군소 정당 후보들은 얼굴 트지도 못했는데, 이미 이들은 서너 번 밥 먹고 얼굴 트고 했던 사람들인 셈이다. 야당 후보들이 발품 팔아 뛰면 된다고 하지만, 시골 사람들이 정치인이 와서 모이라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하고 모이는지 아는가? 당장 자기 집에 빨랫비누 하나라도 생겨야 뭐하나 싶어서 얼굴 보이는게 시골 사람들의 정서다. 그리고 그렇게 얼굴 튼 인연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잠시 흔들리기는 해도 결국 "그래도 그만한 사람 없제."라며 한번이라도 마을에 들러준 사람들한테 표가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거운동을 선거기간에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연말 다되어 가는데 3대 관변단체들은 각 종 기초단체와 주민센터 등 관과의 긴밀한 연계 속에서 바닥에 민심을 얻어가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대도시에서 지하철 타고 회사 갔다고 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이 정서와 파괴력을 결코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이게 뭔가 하고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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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하다. 그것도 무식할 정도로 오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에 진 적이 없다. 이제 "내 세상이 왔다." 고 어깨를 잔뜩 세우고 아무데서나 허리띠를 풀 만도 하다. <시사인>의 천관율 기자의 분석 처럼 그 동안 약한 적들, 교란 시키기 쉬운 적들 부터 하나 씩 차레로 붕괴 시켰다. 크고 작은 위원회와 단체들 부터, 신문과 방송, 제주나 밀양의 주민 저항들, 전교조, 진보당 등등. 맞서 싸워야 하는 세력들은 어처구니 없는 칼날이 들어 오고 있는데도 여론의 눈치, 자기 당의 입지,이후의 동향 등을 고려하다가 어느 새 손이 잘리고, 발이 잘렸다. '약한 적 부터 고립시키고 괴멸시킨다. 그러면 마지막 강한 적도 자연스럽게 무너진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민주당 의원들이 박근혜를 비판하고, 대선불복 운운하자 새누리당은 제명 운운한다. 그러자 민주당 내부에서는 파장을 고려하여 당대표가 '입 닥쳐. 누가 마음대로 이야기하라 했어.'라며 오히려 자기 자식 엉덩이를 후려 팬다. '앞으로 허락 받고 말 안하면 가만 안둬' 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앞 집 아줌마에게 사과하기 급급하다.  향후 정국을 풀고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종북딱지를 벗기 위한 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어른스러운 행동' 인것 처럼 행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레퍼토리가 신선함은 별로 없는 100번 째 리허설 같다.막연한 대치 보다는 한번 이빨로 으르렁 대고 자기 자리 돌아가서 다음 쉬는 시간에 손 내미는 게 극적으로 그럴싸 해보이니까.

 

 컴퓨터도 잘 고쳤던 정치인은 국정원 댓글이라는 삼척동자의 눈에도 보이는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생색한번 내고 모르쇠로 일관한다. 아니 어디서 백신 계발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인다. 미묘한 문제이며 여야를 떠나 구 정치계의 더러운 작태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대략 정리 될 쯤 숟가락 얹는 안정되고 건실한 수순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철도 파업 사흘 째 6천명 이상을 직위해제 해버렸다. 강공으로 겁박하고 안되면 공권력으로 두들기면 결국 다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은 것이다. 그래봐야 기껏 손 시렵게 천막이나 치고 나앉을테니 할 테면 해보라는 것이다. 무릎 담요는 자비 부담이니 관절염이 오는 건 오로지 너희들이다. 이런 오만함과 소통의 부재, 국민을 졸로 아는 자만심의 결말은 이미 책에 다 나와 있다.  끝이 안좋다.   

 

79년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것, 87년 전두환 정권이 손을 내린 것. 그 끝에는 늘 사건이 있었다. 총격이 있었고, 턱하고 억이 있었고, 길 위에 쓰러짐이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사건들이 두 번 똑같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한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것이 초등학교 국어교과의 목표인데 그것 조차 제대로 안되는 거다. 똑같은 사건은 역사에 하나도 없다. 하지만 사건들은 반복된다. 그것은 모양을 바꾸고,형태를 바꾸고, 효과를 바꾸어 가며 역사 속에 기입되어 흐름을 단절시키고, 유속에 변형을 주고 유유히 모습을 감춘다.  물론 그 사건 하나만으로 역사가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국민의 불만과 분노의 에너지는 시간과 일상이라는 비이커 속에서 액체상태로 용해되어 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더불어  임계점을 넘는다. 폭발한다. 아직은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자꾸 그려진다. 그들의 오만함이 불러 일으킨 기시감이다.

 

현재 정권의 오만함을 제어할 수 없는 것은 무능하던 유능하던 저항세력에 어떤 구심체도 없기 때문이다. 연애소설 쓰던 야당 대표는 누구나 알다시피 관리형 핫바지다. 아무런 세력도 정치적 비전도 없다. 그 사이 야당을 포함해 일련의 저항세력은 정권의 막무가내를 무한도전 가요제 바라보듯 멍 때리고 지켜 보다 팔다리 다 잘렸다. 정치 공동체 내부의 저항의 연대감도 사라져 버렸다. 그냥 크고 작은 분노들은 팝콘 튀듯 여기 저기 튀어 다니고 있다. 가끔 일베를 만나면 그 아이들과 싸우는게 무슨 대단한 일인양 말이다.

 

지금 이런 눌려 버린 압축된 공기를 뚫고 저항의 힘들을  뭉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다.  그의 운명은 그거였던 것 같다. 나서서 저항하고 연대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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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12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분노도 한 명 분량만큼 같이 모읍니다.
제 마음을 그대로 적어주신 듯한 글, 감사합니다.

드팀전 2013-12-16 08:59   좋아요 0 | URL
ㅎ 그런가요.
 

아는 친구에게 오랜 만에 문자가 왔다.

'드팀전아...나 책 냈다.'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의 단독 저작으로 첫 책인 셈인가?
잊지 않고 출간 소식을 알려준 것이 고맙다.

 

 



(알라딘 책 소개에 162페이지라고 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생각되어 본인에게 확인해 봤더니 500페이지가 넘는다고...알라딘의 표기 실수인 듯 하다)
 

과거 알라딘에서 인연을 맺은 분들 중에 책을 낸 분들이 꽤 많다. 이현우님, 윤미화님, 김이설님, 최정우님, 서민님 그리고 돌아가신 홍윤님 등등...전성원님도 들어가야겠군.

 

하여간 내게 필요한 책을 써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책 제목은 <다이어트 중도 포기자를 위하여..> 뭐 이런거 <로또는 재벌도 춤추게 한다> 

 
이 책은 사서 볼 생각이다. 중고책으로 ㅎㅎ 내 알라딘 주문의 팔할은 중고 서점이다.크흐흐
바람구두님 고생하셨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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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4 1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2-08-1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12-08-1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1번 BWV 1007>을 듣는다. 첼리스트 요요마가 이곡의 영상화 작업을 통해 봄 그려내려고 했던 이유가 어슴프레 기억난다. 도시 구석 구석에 작은 햇살조각이 뿌려질 것 같다. 바흐의 악보들 사이로, 현이 울려내는 공명들 사이로 나풀거리는 나비를 상상한다.'뻘밭 구석 이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데를 기웃거리다' 온 것 같다. 그럼에도 특유의 미소와 온화함을 잃지 않는....

 

에밀 시오랑은 '바흐가 없었다면 신은 권위를 잃었을 것이다' 라고 썻다. 이 말을 다시 쓰고 싶어진다. '바흐가 없었다면 인간은 자존을 잃었을 것이다.' 라고 말이다. 

 

2. 리뷰가 안써진다. 아니 쓰기 싫어진다. 리뷰나 글을 쓰는 행위도 물리법칙에 적당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유비적인 사실같다. 한동안 리뷰나 글을 쓰지 않다보니 이젠 그런 욕구마저 현저히 감소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성의 간계이다. 리뷰 자체가 주는 효과와 기회비용를 비교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단치 않은 리뷰 한 편을 쓰는데도 1-2시간은 소요된다. 예전에는 그것 나름의 효용에 만족을 느꼈다. 그런데 분명 효용은 체감의 법칙을 따른다. 리뷰를 쓰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고, 책도 꽤나 진도를 내어 읽을 수 있다. 그것도 아니면 지난 책들을 뒤적이며 정리를 해 볼 수도 있다.(이 작업은 올해 습관적으로 꼭 해보고 싶다. 최근에 쓴 몇 편의 리뷰도 그 와중에 쓰게 된 셈이다.)

 

그런데 정작 리뷰를 쓰지 않으며 확보된 시간에 그에 대체될 만한 유용한 일을 하는 것만도 아니다. 인터넷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그 시간을 허비할 때도 있고 영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서 도색적인 스샷을 기웃거리다 끝날 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책을 읽고, 또 어떤 문장은 매우 공들여서 고민해보고 하는 시간을 갖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만 리뷰에 대한 아쉬움은 별로 없다. 그래서 자꾸 리뷰와 멀어져 간다.

 

그나마 리뷰라도 써야 글 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텐데...

 

 

3. 최근에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를 읽었다. 알튀세르는 대학교 때 여기저기서 공부한 경험이 있다. 온통 문화나 담론의 영역에서 놀 때마다 이런 것들은 나를 끌어내려 주는 중력이다. 니체적인 의미와는 반대로 긍정적인 의미다. 나는 이걸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시지프스같은 방식이다. 물론 내가 애정을 가진 철학자나 분야들도 있다. 그들의 사고와 사고 방식들. '유용한' 이란 단어는 미흡하다. 그들의 사고와 문장들 그리고 사유의 방식들은 크고 작건간 '혁명적'이다. 그들의 고지에서 미흡하나마 문제의식을 나눈다. 그리고 다시 또 내려오고, 또 다시 그들에게 올라간다.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는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책은 아니다. 대학교 다닐때 교수는 칠판에 자주 '건물'을 그려서 이걸 설명했다. (우리는 축구장이라고 불렀다.) 간략하게 도식화해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서술된다.  

 

생산양식= 생산력 + 생산관계 

 

상부구조/하부구조

 

상부구조의 자율성

최종심급의 경제적 토대

 

억압적 국가장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데올로기 일반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

1)이데올로기의 물질성

2)이데올로기의 호명.

3)주체화의 문제

 

보론) 1)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

        2)계급투쟁의 우위

 

<재생산에 대하여>은 책의 구조 자체도 매우 효과적이다. 자크 비데의 서문/ 알튀세르의 본문/보론(비판에 대한 반비판 성격) / 70년에 나온 유명한 에세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다. 마지막 에세이는 전체 <재생산에 대하여>에 대한 알튀세르 자신의 요약본이기도 하다.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는 사람은 마지막 에세이와 비판에 대한 반비판 성격의 보론 부분만 읽어도 된다. 

 

번역을 논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서 그저 인상비평정도지만. 오탈자가 눈에 띈다. 그리고 문장 자체가 어법에 껄끄러운 것이 꽤 있다. 좋은 번역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과연 이것이 좋은 번역인가라고 묻는다면 망설이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반독자가 비문때문에 알튀세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4.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6번의 가보트...연주자는 오필리아 가이야르.

 창 밖은 이미 봄인데

 도대체 뭐 하는 거지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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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12-04-01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ola!

드팀전 2012-04-02 17:59   좋아요 0 | URL
^^
 

진중권을 표현하는 가장 우호적이고 적절한 말은 '전투적 자유주의자'이다. 최근에 트위터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여전히 그는 그답다. 진중권의 싸가지 없음이라는 에티켓과 멘털리티를 가지고 그를 싫어 할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고 만날 기회도 없다. 친하게 지내려면 김제동 같은 이들이 훨씬 재미있고 즐겁지 않겠는가? 

 

일체의 싸가지 없음은 배제하자. 그리고 그가 던지는 문제의식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내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부분과 닿는 점이 있다. '합리성'과 '독립성'이다. 내가 그와 다른 점은 그보다 '덜 전투적' 이며 '덜 자유주의적' 이라는 사실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는 때로 그것이 사실이나 진실과 관련이 떨어지더라고,의지와 힘의 문제로 돌파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에는 윤리적 딜레마가 늘 상존한다. 목적의 정당성과 수단의 정당성 사이의 긴장 같은 것이다. 나는 때로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폭력적 요소가 늘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이런 폭력적 요소를 지양하도록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결코 순수한 형태의 합일은 도래하지 않는다. 현상적으로 목적과 수단이 동시에 정당화 될 수 있는 최소 접점을 찾고자 하는는 가치 지향만이 가능하다.  합리적 개인들의 다양한 의견 수렴이 힘을 최소한 위험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답이 나온다. 다원적 책임을 통한 위험의 분배와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전제에 대한 메타적 질문이 반드시 따라온다. '누가 합리적 개인인가?' 라는 원초적 문제말이다. 숙의민주주의나 의사소통민주주의에 반드시 달라 붙는 기본적 질문이다. 이 딜레마는 이런 논리에서 결코 풀리지 않는다. 내가 하버마스류의 의사소통론에 대해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그것때문이다.

 

진중권이 나꼼수를 비판의 주종은 팬덤 현상과 나꼼수의 음모론이다. 나는 나꼼수가 조중동과 대적해 성공적인 대안미디어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것은 조중동이 쓰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카운터를 날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조중동이라는 '깡패' 에 대해 '건달'의 방식으로 MB만 노린 것때문 말이다. 만약 MB만 노리지 않고, 더 광범위하게 체제 자체를 건드린다면 대중은 어렵고,두려워서, 모이지 않는다. 언젠가 말했듯이 나꼼수 강점은 나꼼수의 약점이 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걸 진중권은 음모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나꼼수가 제기한 문제들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 나꼼수는 '아니면 말고'' 내가 첨부터 그랬잖아, 소설이라고' 라는 식으로 말하고 빠져나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방식은 아주 오랫동안 공공연하게 조중동과 보수언론이 써왔던 방식이다.  일단 팩트의 정확성에 대해서, 즉 나꼼수가 말하는 것이 단순히 음모인지 아닌지는 정보력과 정보량 자체가 떨어지기 때문에 지금 당장 뭐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연성이 있는 음모는 작은 팩트상에서 문제를 만들 수는 있지만 실제 전체적으로 사실관계의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스탠스다. 

 

진중권이 트윗에서 연일 이슈를 만드는 것은 단지 음모론때문만은 아닌것 같다. 더 큰 이유는 '팬덤현상'이다. 진중권은 이 '팬덤'을 견디지 못한다. 그가 독설을 퍼부어 세간의 관심을 끈 사건들을 보면 '팬덤'과 관련있다. 심형래의 디 워 사건, 황우석 사건 등등... 문제를 다수의 대중들이 진영논리로 가지고 판단해 버리는 것. 이것을 합리성을 추구한다는 자유주의자 진중권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가 '전투적 자유주의자'이다. 정치적으로 그는 '사민주의자'에 가깝다. 어떤 이는 자기가 스타가 못되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해버리면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히틀러가 악마여서 파시즘이 발생했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니까. 나는 이 지점에 대해 진중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언젠가 '오빠' 이외에 '-빠'가 되어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그게 그거다. 어떤 이는 진중권이 미국 소고기 수입때 앞서 나가서 선동한 걸 가지고 뭐라고 한다. 그 때 자기가 영웅되니까 가만있고, 지금은 자기가 뒷방 늙은이니까 비판한다고. ㅎㅎ  소고기 때 도대체 어떤 '-빠'가 있었을까? 진중권이 칭찬은 받긴했지만 그 시위에서는 어느 누구도 '빠'인적도,'빠'가 된 사람도 없었다. 자발적인 시민 참여였고 자유주의자 진중권 역시 개인적으로,또 소속된 당의 당원으로 참가를 한 거 아닌가? 팬덤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꼼수의 음모론과 비키니 사건때문에 나꼼수 열풍이 이제 조금 차분해졌는가 모르겠다. 진중권은 그의 트윗에서, 나꼼수 주요 성공 원인에 '반MB-노무현-민주당' 을 들었다. 나꼼수에 몰광(내가 만든 말이다. 몰빵으로 열광하는 )하는 내 친구들도 살펴보면 대개 그 라인이다. 그것이 대중의 정치적 염원이고 현상태의 지표라면 그런 현상은 그 자체로 인정한다. 문제는 그런 현상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합리적 정당성을 얻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는 나꼼수 현상을 지지하고- 비록 2-3번 밖에 듣지 않았지만- 20대 청년들이 자기계발서보다 김어준의 책을 열심히 펼쳐보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이런 저런 차원에서 나는 나꼼수의 한계와 비판의 주머니도 차고 있던 사람이다. 그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열광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이참에 나꼼수의 문제와 진영논리들을  조금 더 차분하게 바라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진중권이 비키니와 관련된 최근 트윗에는 만약 '그 말을 MB가 했다면 어떻게 했을래?' 라고 반문했다. 아마 MB가 했으면, 탄핵 가자고 햇을 것 같다. 나꼼수가 사과해야 하는게 맞다. 첫번째, 사과할 만한 내용이다. 두번째, 이 문제로 발목 잡히면 곤란하다는 기술적 차원에서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고등학교 때인가 매우 궁금했던 질문이 그거 였다. "만약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선량한 민족이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면 만약 한국이 일본을 식민지배했으면 어땟을까?"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답게, 일본인을 평등하게 살기 좋게 해주었을까?"  답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문제 넘어서 있었다. 국가 폭력이나  제국주의와 식민담론이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즉 '한국 대 일본'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면 오로지 '우리는 남과 달랐을거야'라는 옹색한 답변 밖에 얻지 못한다.

 

이거 매우 폭력적인 (?) 상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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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6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6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2-02-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씨는 자신만의 중도좌파 잣대를 중도우~좌파 에게 일률적으로 일반화시켜 적용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합리성을 이성적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진중권의 냉소적인 모습을 보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논쟁을 하는게 아니라 마음에 칼을 간 상태서 논쟁을 하는 것으로만 보입니다. 제가 유추해보기로는 공부한 내용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니체같은 냉소적 스타일의 철학 및 미학자들, 아류맑스식의 논쟁습관(가령,인터내셔널 내 논쟁서 심하게 몰아부쳐 낙인찍는 점),그리고 서양철학 특성에서 비롯된 한계(마음에 대한 이해부족) 비롯된 것 같습니다. 풍자가 아닌 냉소적 쾌 추구 성향, 사람의 주인이랄수 있는 마음보다 합리적 이성을 우위에 두는 사고방식, 싸우면 끝장보는 아류맑스 특유의 논쟁문화 이런게 습관화된 사람같습니다. 나이먹으며 성숙해져 논쟁 덜하면서도 상대를 설득하는 힘을 가져야하고 그게 아니면 마음의 적이라도 만들지 않아야하는데 말입니다.

진중권씨 말은 이성적으로 맞는 부분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기식 스타일이 아닌 사람들 마음에 벽을 만들거나 심하면 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진보논객 중에서 진보측에게 득과 실을 동시에 가장 많이 가져다주는 인물이 진중권씨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다른 측면서 보면 10% 이하의 진보측 지지율 현상유지하는데 가장 기여하는 논객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융통성없는 합리성, 중용의 균형감이 없는 논쟁스타일은 진보측을 늘 현상그대로 유지시킬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스타일이 아닌 다른 스타일의/다른 입장을 지닌 사람들의 방법에서 배울게 많고 다른 입장의 방법으로 생각해보아야 자기스타일을 객관화시키고 균형감각을 터득해서 성장하는데, 그게 15년 동안 전혀 안됐던 대표적인 진보논객이 진중권씨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성에 대한 일관적 추구성향이 매우 쎈 고수이니 그 장점을 바탕으로 마음에 대한 친화력도 보완하면 금상첨화일텐데 이 둘을 상반되는 걸로 잘못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소림권 고수인 상태서 태극권 연마를 못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드팀전 2012-02-06 16:03   좋아요 0 | URL
진중권이 적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적절한 설명인듯 합니다. '논쟁도 다 사람의 일이다'라고 하는 인본적인 접근이 그에게 부족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일단 그것은 그의 한계인지라 다른 이들이 그와 같은 방식을 취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가 '이성적으로 맞는 부분'이 있다면, 거기서 취할 부분이 무엇인가를 구분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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