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수입] Led Zeppelin - Celebration Day [2CD+2DVD 디지팩]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 노래 / Atlantic / 2012년 11월
평점 :
품절


85년 처음 만났던 레드 제플린. 이후로 내게는 늘 최고의 밴드다. 전설로 남을 2007년 공연...달리 더할 말이 무엇이 있겠나? 여기 ROCK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스네 : 타이스 [한글 자막] - 박종호와 함께하는 유럽오페라하우스 명연시리즈 박종호와 함께하는 유럽 오페라하우스 명연 시리즈 9
라도 아타넬리 외 / 아울로스 (Aulos Media)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몇 몇 장면에서 타셈 싱의 미장센이 떠오른다. 시각연출로 보자면 초현실주의와 고전미를 절충하는 중도적 방식이다. 무용단의 안무는 매우 인상적이지만 독창자의 연기몰입도에는 작은 불만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라마죠비
피터 젤렌카 감독, 마르틴 미식카 외 출연 / 열린문화원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연장으로 가는 일군의 배우들의 이동 장면 부터 시작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손자와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일화가 배우의 이야기를 통해 등장한다. 이야기는 영화가 끝나고 다시 한번 자막의 형태로 언급된다. 감독의 친절한 배려와 수미상관의 강박때문은 아닌듯 싶다. 피터 젤린카 감독은 배우의 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장으로 유비되는 '서구와 동구의 인식' 차이를 이야기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는 고전이 사유되는 방식에 대해 빗금을 긋는 행위이다. 또한 연극 카라마조비를 영화화 하는 젤린카 감독의 해석에 대한 우회적 변이기도 하다.

 

고전이 사유되는 방식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자. 하나의 예술작품이 '위대한 고전'이 되는 시간이 있다. 어떤 작품은 고전의 예감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의 연마 또는 모호한 합의의 시간이 필요하다. 고전과 아닌 것의 경계 역시 매우 모호하다.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 해야하는 사명을 띤 일군의 직군들을 제외하면 '위대한 고전' 이라는 칭호를 다는 순간 하나의 성좌가 된다. 그리고-이게 중요한 점인데- 위대함에 걸맞게 '상투적' 으로 소비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품 A단조 작품 173은 한동안 청소차의 후진 경보음이었다.(그 곡은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명화들은 상품 광고에 키치적으로 쓰인다. 모 에어컨 회사의 제품에는 르느와르의 그림이거나 바르비종파의 작품들이 붙어있다.  대중 소비 사회에서 '고전'이라는 브랜드는  레디 메이드 명품의 세련미에는 못미치지만 합의된(?) 고상함이라는 생명장치로 연장되는 브랜드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목록을 통해 아이들을 강요하는 학교와 학부모의 등살 아래서, 또는 일군의 인문학자들의 틈새에서나 역설적인 각광을 받는다.  이런 상투성의 반대 급부에는 무게에 질려 압사직전의 고전이라는 역설적 운명이 함께 공존한다. 친숙해진 초라함이라는 역설 속에 위대한 고전들은 위대한 비평의 역사와 더불어 이미 목이 졸려진체 파르해진 얼굴로 독자와 만나게 된다. 상투성과 무거움의 이중적 구속인 셈이다.  대중사회가 고전을 소비하는 위대한 무관심 또는 위대한 비평의 압력은 문화연구의 재미있는 과제가 될 만하다. 고전에 대한 우리의 접근은 그 사이에 위치해야만 한다. 더 자유로와질 필요가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을 동시에 털어내야 하는 기묘한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고전은 반시대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분명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그 맥락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초월적 역능이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문학'의 내재적 역능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하는 것들 속에서 찾게 된다. 우리는 무수한 해석의 신전 기둥들 속에서 기둥의 부조들을 만져보며 통로를 찾아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긍정해야 한다. 우리가 고전을 읽고,독해하고, 재해석하는데 훨씬 더 리버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 전제 되어야만 한다.    

 

 

 본격적으로 영화의 이야기로 들어가자. 감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한 원작 옆에 조각난 거울처럼 폴란드, 또는 동구의 현재성을 개입시킨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폴란드 극단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공연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 만든 프로덕션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이 아니다. 즉 오페라 공연물 DVD처럼 실황 공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은 이것이 영화임을 잊지 않다록 앞서 말한 현실의 장치들을 극의 주변에 배치한다. 관객은 카라마조프의 이야기와 함께 그가 배치시킨 것을 동시에 읽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먼저 감독은 내러티브에 두가지 축을 설정함으로서 영화가 연극상연물이 되지 않도록한다. 

 

내러티브의 첫번째 축은 극단의 연극공연이다. 무대라는 제약을 벗어나 일상의 장소에서 대안적 상연을 하는 셈이다. 영화<카라마조비>에서 극단이 공연할 곳은 폴란드 자유노조가 융성했던 제철 공장이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제철 공장이라는 장소는 베로나 오페라 축제의 <일 트로바토레>공연물을 떠올리게 했다. 연극 제작과정 이라는 설정은- 영화 역사에는 이런 영화들이 매우 많다- 특히 카우프만의 <시네도키 뉴욕>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오페라야 싫어하는 분들도 많으니 그렇다쳐도, <시네도키 뉴욕>은 강력 추천이다.<위대한 영화>의 저자인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2010년인던가 '지난 10년 최고의 영화'로 뽑은 작품이다.지난해 리뷰를 쓰려고 사진캡쳐만 해놓고 말았다.)

 

영화는 줄거리를 카라마조프의 재판을 중심으로 압축한다. 아버지의 고약한 질문들 속에 이반과 알료사의 입을 통해 신과 세속, 종교와 구원의 문제가 언급되긴 한다. 하지만 원작품에서의 비중에 비할 수 없다. 매우 유명한 <대심문관>편도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얄료사의 정신적 지주인 조시마 장로도 극중 배역에 없다. 원본과 비교 운운하는 것은 굳이 이 작품을 떠나서도 별 의미가 없다. 감독이나 연출가는 텍스트를 기본적으로 해석하여 '그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기때문에. 

 

영화<카라마조비>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왼쪽 부터, 스메르자코프, 이반, 누워있는 이가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드미트리, 알료사이다. (아시다시피,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들의 이름은  약칭과 정식명칭과 ...하여간 여러 가지로 불린다. 러시아에서 원래 그런다니 할 수 없다.)

 

 

영화의 두번째 내러티브다. 배우들이 극장을 찾았을 때 약간은 병약해보이며, 슬픈 눈을 가진 금발의 노동자 한명이 그들을 주시한다. 공연 리허설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역시 그는 멀리서 그 공연에 집중한다. 두번째 이야기가 그에게 있다. 배우들이 공장에 왔을때 공연기획자는 이 공장에서 얼마전 아아기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노동자는 그 아이의 아버지이다. 영화에서는 넌지시 그것이 보상금을 노린 살해가 아니었는지 비유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소설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존속살해' 라는 인류의 오랜죄악에 대한 질문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영화<카라마조비>에 등장하는 노동자의 슬픈 눈은 그런 선상에 있으며 그의 눈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는 다른 측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눈은 죄책감에 미묘하게 떨리고 있다.  불안감과 죄책감이 영화적으로는 카라마조프들의 연기에 그가 몰입할 수 있는 당위성이다.

 

극중 연극의 내러티브는 드미트리의 재판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어 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연극적 시간과 영화적 시간이 대단히 자연스럽게 넘나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시퀀스는 엄밀하게 보자면 연극 리허설 또는 공연의 한막이나 한장을 단위로 나뉜다. 공연의 에피소드 이후에 무대 뒤의 배우들의 일상이나 관객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식이다.드미트리를 맡은 배우는 다른 스케쥴때문에 감독과 갈등한다. 배우들 사이에서도 실강이가 발생한다. 평면적으로 보자면 이렇게 '무대 위/무대 바깥'은 분절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이질감을 현명하게 극복해낸다. 편집이라는 도구가 의식의 연속성을 만들기도 또한 단절을 만들기도 한다면 감독은 씬과 씬의 자연스러운 공간적 연결을 통해 이음새를 없앤다. 즉 첫번째 내러티브와 두번째 내러티브를 같은 공간에서 구현되며 두 개의 사건이 매끄럽게 이어져 나간다.

 

예를 들어 이반역의 배우와 관객인 노동자가 있다. 그들이 나와서 공장 주변을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메르자코프가 관객인 노동자에게 잠시 인사를 하는 순간, 그 노동자는 영화 속의 행인처럼 취급되고 앞서 노동자와 이야기하던 배우는 다시 이반이 된다

 

 

 

노동자는 배우들 중 왜 이반에게 말을 걸었을까? 왜 하필이면 이반이었을까?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그는 연극 대화 중 일부를 가지고 이야기하며 '갈고리'와 '지옥'을 보여준다. 그것은 '죄와 벌'에 대한 이야기이고 자신의 죄책감에 대한 유비적 반응이었다. ' 만약 보상금을 노리고 정말 아이를 높은 곳에서 떠밀었다면, 그 갈고리와 지옥이 자기에게 합당한 처벌일까?' 하는 투다. 그는 그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그 무대가, 그리고 그들이 투쟁해왔던 그 공장이 이미 오래전에 갈고리와 지옥이었음을 말한다. 아이를 밀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 곳, 조건들이 충만하고 그것이 실천될 수 있는 곳.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옥은 천국의 반대편, 염라대왕이나 하데스가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 카라마조프의 마을, 폴란드의 공장. 이미 우리 주변에 임재해 있었던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질문은 또 다시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적인 구원의 주변을 맴돌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감독은 영화적 연출에 있어 기존의 두 장르(소설/연극) 사이에소격효과를 발생시켜야할 필요성을 느꼇을 것이다.   '이것은 소설도 연극도 아닌 영화다'라고 말이다. 이는 시선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진 현재성과 감독이 제기하고픈 메시지 사이에 평화적?) 양립 또는 충돌적인 조우가 가능해진다.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효과, 그리고 이를 이어 받은 장 뤽 고다르 등이 점프 컷등으로 변형 시켰던 개입 방식이다. 감독은 충돌하는 격한 방식보다는 전경 샷과 관객 샷의 개입을 통해 이를 이루어낸다. 대표적으로 이런 샷들이 시선의 개입을 전형화하는 방식이다.

 

 

이반과 카체리나가 대화를 나누는 샷이다. 서로의 마음(카라마조프들이니..) 이 폭발하는 대목이다. 오른쪽에  붉은 셔츠를 입은 연극 연출가가 끼어든다. 감독이 마치 이 장면을 연극에 송두리째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다. 붉은 옷의 연출가가 이 장면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보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이유 한가지 밖에 말이다. 이 시선의 무게감은 대단하다. 마치 깨끗한 화선지에 커다른 붓으로 대각선 먹선을 하나  훅 긋는 정도의 강력한 시선이다.시선 하나로 영화의 샷은 다른 시간과 공간성을 갖게 되며, 영화와 연극, 또는 현실의 모든 면들이 다시 만들어진다. 영화에서는 이렇게 연극적 몰입을 방해하며, 또한 영화적 맥락과의 접속조차 혼동케 하는 샷들이 여러번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연극은 여러가지 이유로 수시로 중단되기도 한다. 이런 차단과 혼동은 지속적으로 다른 단위의 시간을 발생시킨다. 이것이 만들어 내는 효과는 무엇인가?

 

 

이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이다. 앞서 말한 죄의식과 죄책감에 괴로와하는 노동자다. 연극은  걸려온 전화한 통에 중단된다. 배우들 역시 연극을 중단하고 전화 받는 그의 모습을 관찰하다. 그 전화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누구도 들은바는 없지만, 모두가 그 내용을 알고 있다. 영화는 이제 그 끝으로 향한다. 영화는 몇 장의 아름다웠던 시절 속 사진과 압도적인 갈고리를 관객의 머릿 속에 남기며 끝이 난다. (물론 사진은 그 이전에 배치된 것이지만 말이다.) 배우들은 검은 그림자를 남기며 공장을 빠져나가고 그들은 낡고 닳아서 이제는 쓸쓸해진 제철 공장 위로 흩어진다. 아름다운 시간과 비극적 사건들 사이의 시간. 그 사이에 무엇이 존재했을지, 또 무엇이 사라졌을지...시간을 공간속에 박제화해 놓은 사진들을 볼 때마다 드는 암연과도 같은 질문이다. 아득하다는 말 밖에 달리 덧댈 말이 없다. 깊은 어둠의 소실점으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야누스의 얼굴처럼 우리에게 많은 질문과 대답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영화<카라마조비>는 매우 현명하게 만들어진 영화다. 엄청난 배우나 제작비를 쓰지도 않았다. 그저 고전의 명성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질문을 살짝 흔들었을 뿐이다. 과거를 반복한다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반복이며 현재와의 조우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결국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텍스트가 가진 생산적 힘을 반복하는 것, 차이를 반복하는 것이지 단순히 과거를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반복은 차이의 반복'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에게는 도래할 더 많은 카라마조프들이 있다는 점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날 때마다 생기는 기대감이다.

 

P.S)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지 않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고, 또 던져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영화는 영화로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소설<카라마조프>가 아니라 영화<카라마조비>이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의 첫번째 내러티브가 뼈대에 가까운 카라마조프 존속살해사건을 보여주고 있기때문에 소설<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읽었다면 좀 더 흥미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고전 '아닌가? 클래식ㅋ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 슈트라우스 : 살로메 (한글자막) - 박종호와 함께하는 유럽오페라하우스 3차 명연시리즈 박종호와 함께하는 유럽오페라하우스 명연시리즈 14
나디아 미카엘 (Nadja Michael) 외 / OPUS ARTE(오퍼스 아르떼)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레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마태복음 4:6-8>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성경에는 '헤로디아의 딸'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 '살로메'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성경에 등장하는 '살로메'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를 따라갔던 세 명의 여인 중 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인공과는 동명 이인인 셈이다. 사람들은 신실한 기독교인 살로메가 아니라 후자의 광기 어린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를 기억한다.

 

성경과 이 내용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줄로 생각하고, 짧게 오래된 막장드라마의 줄거리를 적어 보자.

 

헤롯2세(헤로데)는 로마 제국에서 유대 땅에 임명된 왕이다.(그의 아버지 헤롯1세가 예수 탄생 당시 어린 아기들의 몰살령을 내린 사람이다.) 봉분왕이다. 그리고 그는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다. 세례 요한(요하난)은 이를 비난한다.  헤롯이 결혼한 헤로디아에게는 살로메라는 매력적인 딸이 있다. 헤롯에게는 딸이자, 조카가 되는 셈이다. 햄릿의 삼촌 클라우디우스 왕의 원형 아닌가?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자식보단 조금 덜 친한" 세익스피어<햄릿>중에서.  헤롯은 살로메에게 들이댄다. 주위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살로메는 막장 가족들과 노인네들과의 회삭이 즐겁지 않다. 우연히 세례 요한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에게 반한 것이다. (대개 가족사에 불만이 많은 회장님집 딸들이 신념과 야성을 겸비한 사람들에게 넘어간다.) 살로메는 요한에게 키스를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도덕의 현자 요한이 이를 받아들일리 없다. 공주님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사랑과 소유욕, 질투와 선망, 분노와 애욕이 마구 섞여 버린 미증유의 심리상태에 빠져든다. 그것도 모르는 헤롯은 여전히 껄떡거리다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주고 만다.

이런 식이다.

 

"살로메...춤 한 번 만 춰줘. 섹쉬한 걸로다가. 나를 흥분 시켜준다면 이 나라의 반이든 뭐든...니가 원하는 거 다 줄 해줄께"

기회를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한 살로메 "좋아요. 한번 해드리지."

 

이제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하며, 늘상 논란이 되기도 하는- 아리아가 아닌- 관현악곡이 등장한다.'일곱 베일의 춤' 실제로 오페라는 보러 오는 사람들이나 영상물로 이 작품을 보는 사람들도 모두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숨죽이며 막장 드라마를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장면이며, <일리아드>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장면이다.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와 루크의 대결. 이탈리아 오페라로 말하자면'한방의 하이C'와도 같은 장면이다. (빈체로 빈체로..빈체...로...오....꽈꽝.) 수많은 연출가들이 오페라 관객들이 하나같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요거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식으로 노려보고 있을- 이 장면을 과거 선배 동료들 다르게 어떻게 요리할까를 두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셈이다.  

 

헤롯의 약속은 지켜진다. 매우 긴 살로메의 아리아."당신은 나에게 키스해 주지 않았지" 가 이어진다. 살로메의 광기에 놀라 버린 헤롯은 살로메의 죽음을 명한다. 

 

<살로메>(비어즐리 작)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 바그너의 악극<반지>나 리하르트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바르톡의 <푸른 수염의 영주>같은 작품들을 택할 확률은 매우 낮다. 설사 있다 하다면, 매우 우연한 기회에, 특정한 음악적 환경 속에서만 이루어질 것이다. 자발적으로 오페라에 관심을 가진 대부분은 모차르트, 푸치니, 베르디를 먼저 만난 확률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오페라가 뭔가 하고 궁금해 하는 사람에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권하는 짓은 순서가 아니다. 인연이 닿으면 만나겠지 하는 정도에서 남겨 두어야 한다.

 

 언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강숙 선생이 그런 말을 했다. "17,8세기에 귀족사회에서 음악을 소비할 때는- 하이든,모차르트 등등- 조화로운 화음 가지고 표현이 가능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19세기를 거쳐 20세기에 들어서는 시점에서도 과연 그런가? 대중속의 고독, 전쟁과 인간성의 파괴 뭐 이런 것들 어떻게 조화로운 화음들로 구성해낼 수 있을까? 불협화음,조성의 파괴 등이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 이강숙 선생의 말은 우리 시대는 우리 시대를 표현하는 음악적 노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궁극적 요지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의 시대는 그리 멀지 않다. 동시대라고 하긴 뭣하지만 최소한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전 세대라고는 할 만한다. 빈의 황금기였으며, 구 제국의 몰락과 두 번의 세계 대전이 있었던 시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이 뿜어내는 위용에는 파괴와 절망, 그리고 영광에 대한 노스탈이지와 그의 잔해가 묻어 있다. 그가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두고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은 음악을 필요로한다." 라고 했을 때, 그가 매료된 '살로메'의 주제는 에로스와 타노토노스의 항구적 불협화음이었다. 오페라<살로메>는 그렇게 파국적 주제를 음향학적으로도 구축해 낸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쇤베르크와 신빈악파에 비해 온건한, 즉 음악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만든 <살로메>에서 보여주는 음향학적 파국은 대단히 낭만적이고 퇴폐적이다. 이것은 새로운 설계를 위한 파괴와는 다르다. 구체제의 파국일 뿐이다. 도약과 단절의 진폭은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그의 관현악 전반은 그리하여 음악의 통시적 변동 속에서 반정합을 통합적으로 조율하는 전통적 헤겔식의 바그너와 닮아 있을 뿐이다. 실제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 오페라 <살로메>에서도 보면 바그너식의 '라이트모티브', 일명 '유도동기'가 거의 전편에 사용된다. '유도동기'를 쉽게 말하자면, 극이 진행되면서 인물이나 상황이 등장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멜로디이다. 만약 영화<해리포터>라면, 악당 볼트모어가 등장할 때는, 뭔가 음습한 음악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 '라이트모티브'는 바그너가 본격적으로 사용한 장치인데, 실제로 바그너의 악극에는 다양한 종류의 모티브가 다양한 조성,화음,속도변화들 통해 쓰이고 있다. 오페라<살로메>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는 클라리넷 소리가 '살로메'다. 목관악기의 부유하는 듯한 멜로디는 불안을 조성하고 정서적 동요를 일으키는 데 적격이다. 곡이 시작하면 곧 바로 등장하기 때문에 크게 귀기울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페라<살로메>의 2008년 런던코벤트가든 공연 실황은 동곡의 영상물로서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다. 런던 오페라계의 이슈메이커인 데이빗 맥비커의 히트작인 셈이다. 무대의 배경은 1930-40년대 대저택의 지하 음식 창고로 설정했다. 의상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영화에서 본 기억을 떠올려 본다면, 무대에 등장하는 헤롯의 군사들은 영국 군복을 입고 있다.(이 프로덕션이 영국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무대는 3층 구조이지만, 지하는 세례 요한의 감옥 공간으로 설정만 될 뿐 무대에 가시화되지는 않는다. 2층 역시 실제로 큰 비중을 차지 하지 않는다. 2층에서는 유대 제사장들과 헤롯,헤로디아가 만찬을 열고 있다는 설정 공간으로만 존재한다. 전체적으로 푸른 빛의 일관된 톤은 지하실 창고의 분위기와 적절하다. 영화에서 지하철같은 폐쇄공간에서 쓰이는 조명의 톤을 생각해본다면 쉽게 이해될 것같다. 색채 공간으로 3개의 층위를 구분하자면, 세례 요한의 공간은 죽음과 맞닿아 있는 검은 색의 공간이다.검은 구덩이로만 묘사된다. 그리고 본 무대인 지하층은 갈등이 빚어지는 서늘한 푸른 빛의 공간. 2층은 검고 붉은 계열로 구분된다. 무대는 단막극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 변화나 막에 따른 교체는 없다. 단 한 번 일곱개의 베일춤에서 상징적 이동장면을 연출한다.

 

 : 코벤트 가든 로얄오페라 하우스, 오페라 <살로메>중에서

 

<살로메>는 전통적으로 외설성때문에 가십거리가 되곤 한 오페라다. '일곱개의 베일춤'의 전통적 해석방식은 춤을 추면서 옷을 한 개 씩 벗는 스트리퍼 살로메로 설정된다. 맥비커는 코벤트가든 프로덕션에서 상징적으로 에로틱한 장면만을 연출할 뿐이다. 공연 막이 오르면 지하창고에서 보이던 나체의 여인이나 멋진 뒷태를 가진 형집행자의 나체는 맥거핀에 가깝다. 일곱개의 춤에서 나디아 미카엘은 속옷정도까지만 노출하면 되는 수위에서 공연한다. 전혀 아쉬워 할 것도 없다. 나디아 미카엘은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기력과 놀라운 집중도를 보여준다. 피칠갑을 한 채 요한의 머리통을 들고 마지막 아리아를 부르는 나디아는 작은 동작 하나 하나까지 관객을 집중시킨다. 죽은 요한과의 키스장면은 잠시 숨을 멎게끔 매력적인 연출이다. "이것은 피의 맛인가? 아니 사랑의 맛이다."라며 요한의 잘린 머리통을 부여잡는 나디아의 눈빛과 동작은 네크로필리아의 파국적 에로스를 보여준다. 물론 성량에서 약간의 중량감 부족이 주는 아쉬움은 남는다만 광기와 절망 사이를 오고가는 연기력으로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연기는 헤로디아를 맡은 미하엘 슐스터다. 시니컬한 태도의 일관성은 충분히 훌륭하나 공격적인 어택이 부족한면, 연출이 그 지점을 강조하고 싶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만, 개인적으로 그 지점이 아쉽다. 또한 마지막 명령이 집행되는 장면 역시 앞선 비장한 나디아의 클라이막스 이후 급박하게 정리한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더 사실적인 살해가 이루어졌어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앞서 잠시 이야기한 '일곱개의 베일춤'에 대한 연출이다. 곡은 이국적 춤곡에서 왈츠를 넘나든다.  당시 유럽인들이 가진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은 문화 전반에 걸쳐 반영되었으며 음악도 예외는 아니었다. 맥커비는 탈의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영상과 막의 이동을 통해 일곱베일을 벗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연출한다. 무대 뒤 스크린을 통해 에로스적인 설정들이 전달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맥키비의 연출 장면을 단순히 옷을 벗으며 춤을 춘다는 시각적 쾌락 이상을 상징한다. 전통적 방식이 시각적 쾌락수준에 대한 욕망 정도로 머무는 것이라면 맥커비의 연출에는 복종과 순종이라는 성의 가학성/피학성의 쾌락이 은연중에 묻혀있다. 상징적으로 표현되었을 뿐 수위가 더 높은 것이다. 헤롯은 멍청히 음흉한 눈빛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해 살로메를 독촉하고,동의를 구하고, 패티시의 대상들을 제공한다. 살로메는 자신의 1차적 욕망를 위해 이에 수동적으로 움직이지만, 이 행위들은 음악적 진행과 섞이며 능동/수동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에 이른다. 헤롯이 제공한 옷을 던지며 세면대에서 물을 뿌리는 행위는 그들의 상징적 교접이 성공적이었으며, 또한 마무리 되었음을 말한다. 그들 둘은 그리고 다시 대중들이 있는 공간으로 '흠흠...' 거리면서 나온다. 몇 개의 옷을 벗어 던지는 것보다 더 깊은 관계가 아닌가?

 

세간의 평가처럼 2008년 코벤트가든의 <살로메>는 맥커비의 상징적 연출과 탄탄한 연출 그리고 가수진들의 활약으로 매우 좋은 공연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만약 실제 극장에서 이 공연을 봤다면, 마지막 나디아 미하엘의 아리아가 끝나고 암전이 올 때 브라보를 외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분간 최고의 레퍼런스로 자리잡지 않을까 싶다.

 

여담삼아, 극중 등장하는 제사장 중에 동양인이 한 명 보인다. 비중이 큰 역은 아니지만 로얄오페라단의 지원을 받는 촉망받는 한국인 성악가 박지민씨다. 그에 관해 찾아봤는데 재미있는 이력을 갖고 있다. 매우 뒤늦게 성악공부를 했으며, SM기획에서 연습생도 해보았다고 한다. 서울대 성악과 사상 낙제점에 가까운 보기드문 B학점 소유자였다고 한다. 국내의 높은 진입 장벽으로 인해 오히려 국외에서 가능성을 인정받고 이후 국내 주목을 받게된 성악가인 셈이다. 이 공연을 녹화할 당시보다 현재 여기저기서 비중있는 역할을 많이 맡아 세계를 무대로 공연하고 있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J 인디영화 콜렉션 Vol.1 박스세트 : 피터팬의 공식+거북이도 난다+보이지 않는 물결 (3disc 디지팩)
바흐만 고바디 외 감독, 소란 에브라힘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페이퍼로 쓴 글을 이 쪽으로 옮겨놓는다 

TV로 폭격 동영상을 보면서 아내에게 농담처럼 전화를 했다. "TV 켜봐. 난리도 아니다. 쌀이나 라면 사놔야 되는거 아닌가? ^^"  - 아직 쌀이나 라면을 사놓치는 않았다. 
 결국 한반도 영구평화체제가 만들어지거나 한쪽이 완전 박살나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은 과거 그랫던 것 처럼 지속적으로 반복될지 모른다. 그런데 '한쪽이 완전 박살나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하는 방식이다. 전쟁을 WAR, 대문자로 파악하는 자들은 '박살' 사이에 숨겨진 비극에 대해 모른 척 한다. 뭔 일만 터지면 금새 장농에 모셔둔 과거의 제복을 입고 '전쟁하자'고 들끓고 일어나는 무도한 모험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정신 차리시오' 라는 말 이외에 달리 더할 말이 없다. 항문기때 미해결된 욕구의 문제라면,그대들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군대 시절의 기억을 다시 재연하고 싶다면, 몇 만원 들고 서바이벌장으로 가라.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정체성이 멈춰진 시간이 군대시절이었다면 그 인생에 대해서는 '못났다'는 말대신에 '안타깝다'는 말을 해주는게 나을성 싶다.  

최근에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영화<거북이도 난다>를 봤다. 이 영화가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개봉했을 때 특이한 제목때문에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대개 그랬듯이-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제가 벌어지는 근처에 있으면서도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최근에 알라딘에 올라온 '파고닥세운님'의 <거북이도 난다>라는 페이퍼는 기억의 항아리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이 영화를 다시 생각나게 했다. 영어로 하면 '리마인드'다. (감사를..)  현재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불법 다운로드와 DVD  CJ인디영화시리즈를 통하는 길이다. 나는 DVD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봤다. 영화관 갈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작은 컴퓨터 모니터나 그것보다 조금 더 큰 TV 화면으로 보게 되어 늘 안타깝긴 하다.   

영화 <거북이도 난다>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을 겪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말한다. 사람들은 근거없는 착각을 통해 '우리는 전쟁을 한다' 라고 믿는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은 '전쟁을 겪을 뿐이다.'   

 

영화 줄거리는 쓰기 귀찮다. 포털의 영화 소개로 글로 대신한다. 

 <이라크 국경지역의 쿠르디스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문에 사담 후세인의 핍박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들 중에는 어린이답지 않은 리더십과 조숙함으로 또래 아이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위성"이라는 소년과 전쟁 속에서 팔을 잃은 소년 "헹고"가 있다. "위성"은 "헹고"의 여동생인 "아그린"을 보고 첫 눈에 사랑에 빠지나, 그녀는 전쟁 중 받은 상처로 늘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위성"은 지뢰를 내다팔고 무기를 사두는 등,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나가면서 "아그린"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아그린은 그런 "위성"과 자기를 아껴주는 오빠 "헹고", 그리고 불쌍한 아들인 "리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군인들에게 겁탈당하고 아이까지 낳은 악몽 때문에 늘 자살을 생각하는데.> -네이버 영화소개-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감독의 '슬픔에 대한 예의'이다. 이 영화는 대단히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느 멜로드라마들처럼 눈물이 잔에 흘러넘치게 만들지는 않는다. 분노로 치아를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며 잘 우는 나도 고인 눈물을 천장 한 번 바라 보고 말릴 수 있었다. 만약 이 영화가 헐리우드적 방식으로 '잘 만들어졌다' 면 이 영화는 극장 바닥을 온통 적셔서 모두들 영화관을 나서며 젓은 신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영화의 감흥을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감독은 이 아이들을 멜로드라마나 단순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함으로써 이 영화가 담고 있는,또 자기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를  영화관객들의 자족적인 몇 천원의 문화적 소비로 끝내게 하지 않는다. 고바디 감독은 극도로 눈물을 자아내거나 또 치마를 부여잡으며 분노케할몇 몇 장면을 대단히 빠르게 처리한다. 예를 들어 슬픈 아기 '리가'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 말이다. 감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거의 없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상처처럼 그렇게 필름은 스윽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관객의 가슴을 밴다. 여기서 감정을 끌고 가는 것이 오히려 사치이고 그것은 이들의 비극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식의 태도다. 감독은 거리두기를 통해 슬픔에 대해, 비극에 대해, 현실에 대해 깊은 예의를 보낸다.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다. 비극의 겪는 이들에 대한 예의를 통해 슬픔을 가볍게 하지 않는 방식말이다.  

 

그 결과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지는 않지만 잠자려고 누운 어둠 위에는 영화 속 어떤 장면의 적막함들과 비통함들이 다시 재상영된다. 

 거북이. 물소리. 지뢰. 아이들. 파란 하늘과 절벽. 아그린의 보랏빛 고무신. 팔이 없는 헹고의 절규. 위성의 공포에 젖은 안경. 붉은 물고기... 

거북이가 날 수 있을까...그렇다. 우리가 평화롭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