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라딘 불매운동에 대하여
"알라딘의 대표가 홈페이지 첫 화면에 배너 공지 형태로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 사과와 향후 유사한 사태의 재발 방지'를 게재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제가 20여일 전 올렸던 요구사항입니다. 조유식 대표는 신밧드의 이름으로 블로그라는 마술 양탄자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술렁술렁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 라는 반응부터 또 '이게 뭔가? 장난하냐?' 라는 반응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단계로 가기 위한 이행의 제안도 있습니다. 환영합니다.
바람구두님을 비롯해서 이미 다른 분들이 잘 정리해 놓았듯이, 그리고 제 지난 페이퍼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싸움은 크게 두 가지 문제와 한 가지 사족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1) 김종호씨의 거취 문제였고 또 다른 하나는 2) 사과와 재발방지를 위한 공식 입장 표명 이였습니다. 그리고 곁가지 문제는 3) '알라디너들 사이의 싸움' 이었습니다. 세번째 것은 처음부터 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다른 분들이 적당히(?) 대응하는 수고도 해주셨습니다. 가장 미숙한 저격범은 늘 자기가 저격하는 위치에만 놓여 있지 타깃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저격이 실패할 경우 자기 위치가 노출되고 이어서 자기 코 앞에 수 십개의 총구가 놓여질 것이라는 점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련의 일들은 제 관심사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장기에서는 기물을 잡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는 것이지요. 제 나름대로는 이 싸움에 있어서 철학, 내부 동력, 방향, 전술 등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나름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심을 생각하며 평상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개인적 과제였습니다. 제가 알라딘 내 불매운동에서 주로 다룬 것은 첫번 째 것보다는 두 번째의 것에-즉 사과와 재발방지-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알라딘 불매운동은 선언 이후 별다른 일이 없었으며 욕구는 일괄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직화로 보자면 첫 단계에 있었고 그 단계에 맞는 실천 과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국면이 움직이며-저는 이런 현실의 역동성이 매우 좋습니다. 글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것이지요-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이행을 위한 욕구와 제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번째의 잡음과도 단절하며 그동안 집중하지 못했던 첫번째 문제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환영합니다. 제가 지난 번 페이퍼에서도 인용했던 '물의 흐름'과도 같은 방향이라고 봅니다. 물론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대해에서 만나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틈틈히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슬쩍 건네겠습니다.
조대표의 사과건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논어> 자로편에 보면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니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함께 하지만 같지 않고 소인은 같지만 화합하지 못한다.' 는 뜻입니다. 흔히 '화이부동' 이라는 성어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제가 볼 때 조유식 대표를 향한 편지 글은 '화이부동'의 실천적 재현입니다. 각자가 모두 다른 형식과 글을 쓰지만 '조유식 대표를 향한 편지글 NO '로 '같음' 을 이루어 냅니다. 관망을 하고 계시던 분들도 이 릴레이에 참가해 주셨습니다. 바람돌이님의 노고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참여해주신 분들의 노력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유식 대표는 생각보다 일찍 나왔습니다. 조유식대표의 신밧드 블로그는 사실 꼼수입니다. 제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시간에 올라와서 약간 당황했습니다만 쭉 읽어보니 결국 조기수습용 꼼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성이 차지 않습니다. 히딩크 감독님 말을 빌자면 '많이 배고픕니다.' 이것이 '꼼수' 임을 알지 못한다면 상황은 달라질겁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이 사과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알라딘 CEO의 수싸움임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앞서서도 이야기했지만 '대중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냐 하지 않느냐' 가 아닙니다. 이런 꼼수를 알면서 그걸 용인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은 것이냐' 가 핵심입니다. 어떤 분은 '상관없다. 타협은 중요하다' 라고 말합니다. 전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견해이고 또 타당하기도 한 생각입니다.
타협은 중요한 덕목입니다. 물 위에서든 물 밑에서든 대화와 타협은 어딜 가나 있습니다. 하지만 타협이란 것도 나름대로 질서가 있는 법입니다. 첫째, 상대가 진정성을 가지고 둘째, 그 진정성에 맞는 형식을 취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최소한 어린 아이들의 다툼이 아닌 이상은 그렇습니다. 조유식 대표가 정공법을 쓰지 않은 것은 그런 면에서- 설령 그의 말이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그 진정성 마저 의심받기 쉬운 떳떳하지 못한 수인 셈입니다. 아닌가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소한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정말 떳떳하게 뉘우치고 앞으로의 '금과옥조'로 삼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우회적인 방식으로 대처할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일개 파견(도급) 노동자 하나 때문에 알라딘 대표로서 창피하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 나와서 무릎 꿇고 인터뷰 하라는 것도 아니고, 머리를 풀어 해치고 석고대죄를 하라는 것도 아닌데 그것이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일까요. 자존심이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중요합니까? 같은 하늘 아래 평생 누군가로 부터 원을 사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자존심이 중요합니까? 제가 듣고 싶고, 정도에 맞다고 생각하는 길은 '블로거 신밧드' 의 입장이 아닙니다. '알라딘 CEO 조유식' 의 것입니다. 내년 1월 부터 제도 개선을 한다고 조대표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을 굳이 말하지 못할 이유도 없을 듯 합니다. 전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 술은 새부대에 담으라' 는 말이 있습니다. 묵은 해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알라딘 CEO 조유식 님이 이 해가 끝나기 전에 '정도'에 맞는 방식으로 다시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요청드립니다. 알라딘 CEO 조유식 대표님!
책 읽는 선비와도 같은 CEO를 꿈꾸신다고 들었습니다. <사서>에는 항상 두가지 인물형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군자와 소인'입니다. <사서>는 군자의 덕을 칭송하고 그걸 이루기 위한 타산지석으로 소인을 대칭적으로 언급합니다. 맹자는 세상에 군자와 소인이 따로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대체를 따르면 대인이 되고 소체를 따르면 소인이 된다' 라고 했습니다. 즉 밝고 맑은 큰 길을 따르면 군자가 되는 것이고 이익과 삿됨의 길을 따르면 소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매심제기>에서 다산은 '뉘우침의 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뉘우침에도 방법이 있다. 만약 밥 한 끼를 먹을 사이에 불끈 성을 냈다가 어느 새 끈 구름이 허공을 지나가는 것처럼 한다면 어찌 뉘우치는 방법이겠는가? 작은 허물은 고치고 나서 잊어버려도 괜찮다. 하지만 큰 허물은 고친 뒤에 하루도 뉘우침을 잊어서는 안된다. 뉘우침이 마음을 길러주는 것은 똥이 싹을 북돋우는 것과 같다. 똥은 썩고 더러운 것인데 싹을 북돋아 좋은 곡식을 만든다. 뉘우침은 허물에서 나왔지만 이를 길러 덕성으로 삼는다."
어느 누구도 완벽한 기업, 완전한 CEO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실수도 하고, 때로는 현실과 타협도 합니다. 조유식 대표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알라딘은 더 많은 가능성으로 사랑을 받을 수 도 있고 그렇고 그런 인터넷 서점이 될 수도 있을 겝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동안 알라딘을 통해 좋은 책과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인터넷 서점 중에서 하나쯤은 괜찮은 기업이 있었으면 합니다. 조대표에게 다시 공은 넘어갔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대신 켄트는 "명예는 단도직입적이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저의 알라딘 불매는 계속 될 것이며 저는 조금 더 미리 주문하는 불편을 감내하더라도 동네서점과 보수동 헌책방, 오프라인 음반매장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오늘 내일 안에 예치금등은 털어낼 생각입니다.)
2. 글쓰기를 중지하며...
알라딘에 집터를 잡은지 어느 덧 6년이 되었습니다. 연애 편지를 많이 쓰다가 -저 많이 썻습니다.ㅎㅎ- 그것도 뜸해진 시점에 '쓰고 싶다는 마음' 에 서재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리뷰랄 것도 없이 그냥 저냥 몇 가지 생각을 쓰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새 알라딘에서 꽤나 알려진 서재인이 되었습니다. 논쟁에 참여하기도 했고, 또 그런 것에 심드렁해지기도 했습니다. 지난 1년간은 서재 댓글 기능도 아예 막아 놓고, 몇 몇 분들과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제대로 된 소통은 최소한의 상대에 대한 존중과 자기 품위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간혹 이를 지키지 못한 경우가 있었던 듯 합니다. 서재 댓글기능을 막았던 것은 그런 면에서 외부 만을 통제한 것이 아니라 제 내부 역시 자정하고 있던 셈입니다. 생각 보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어찌 해서 한 해의 마지막에 그 동안 했을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도 부덕함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그 말들 속에 제 진심이 있었고 또 믿는 바를 제가 선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역량이 있었다면 더 많은 일들을 도모할 수도 있었겠지만 제 그릇의 한계인 듯 합니다.
<대학>의 첫번째 장구는 이겁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知止而后에有定이니 定而后에能靜하며 靜而后에能安하며 安而后에能慮하며 慮而后에能得이니라
제가 외우는 <대학> 구절 두 개 중에 하나 입니다. 사실 <대학>의 모든 것은 첫번째 장구에 다 들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두고 두고 곱씹어도 아깝지 않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술적 차원에서 공부를 할 만큼의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책 읽기도 일종의 삶을 위한 공부라면 '큰 공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늘 갖고 있습니다. 최소한 제 '책 읽기' 공부의 목표가 글자에 집착하거나 이해 하는 차원이 아니라 뜻을 세우고 인간의 길에서 어긋나지 않는 길이길 늘 바랍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회사에서 나오면서도 이 구절을 다시 뇌되었습니다. '대학지도는 재명명덕하며 재친민하며 재지어지선이니라, 지지이후에 유정이니 정이후에 능정하며 정이후에 능안하며 안이후에 능려하며 려이후에 능득이니라.'
<대학>6장에는 제가 좋아하는 말이 또 하나 있습니다.
所謂誠其意者는 毋自欺也이니 如惡惡臭하며 如好好色이 此之謂自謙이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이니라.
그 뜻은 이렇습니다. "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니 악한 내음을 미워하는 것같이 하며 좋은 빛을 좋아하는 것같이 함이 이 이르되 스스로 쾌족함이니,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니라."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 '愼獨' 신독'이지요. '스스로 삼가한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절에는 此謂誠於中이면 形於外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 (속마음에 성실하면 밖으로 드러난다. 고로 군자는 스스로 있을때 삼가한다.) 라고 하여 한번 더 강조합니다. <중용>의 첫장 역시 '신독'에 대한 강조가 나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저는 제가 인용한 말들을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길 생각입니다.
6년이란 시간 동안 많은 글들을 썼습니다. 사실 제대로 된 글이라고 할만한 것은 거의 없지만 글이라 불리웠고, 알라딘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서는 '허명'도 얻었습니다. 저로서는 잠시 모든 글쓰기를 중단할 시점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더 많이 읽을 것이고, 더 많이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글은 전혀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기존의 글들은 그대로 둘 생각입니다만 그곳에 저는 없습니다. 사실 바람구두님네의 출산을 축하해주고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것에 연연해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곳에서든 또 어떤 형태로든 아름다운 탄생을 기억할 것이며 또 축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산이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면서도 산모와 태어나는 아이, 그리고 가족 모두에게 긴장감을 주는 일입니다. 저희집 아이들은 모두 조산원에서 태어났고, 가족적인 친밀한 분위기 안에서 저는 그 모든 과정에 참여했기 때문에 탄생을 위한 엄마와 아기의 위대한 쟁투를 기억합니다. 바람구두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무탈하게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첫번째 꽃숨을 건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
기쁨도 아쉬움도 없는 평안한 마음으로 사라집니다.
風來疎竹 風過而竹不留聲 풍래소죽 풍래이죽불유성
대숲을 흔들며 불어온 바람은 지나간 뒤에 소리를 남기지 않으며
雁度寒潭 雁去而潭不留影 안도한담 안거이담불유영
찬 연못을 날아가는 기러기는 사라진 뒤에 연못에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따로 한 분 한 분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