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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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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 예를든 확률스펙트럼에 의하면 나는 6번과7번 사이이다. 사실상 무신론자와 강한 무신론자 사이다. 즉 무신론자다. 나는 유물론적이며, 또한 과학적 세계관을 존중한다. 인문학적인 관용으로 보자면 '매력적 무신론'이라는 범신론과 무신론 사이다. 물론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하면 가끔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할 때와 비슷하게 목덜미가 서늘해진다. 도킨스가 미국에서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할 때 받을 수있는 싸늘한 불편함 같은 것을 한국에서는 '나는 유물론자다'라고 할 때 받는다. 주로 유물론이 뭔지 관념론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말이다.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전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브라함의 신' 즉 개신교,천주교, 이슬람교의 신이다. 서양을 지배하는 신이기 때문에 서양인으로서 도킨스는 그 신만 상대한다. 반면 한국에서 '유물론자'라고 하면 종교적인 관점과 함께 이데올로기적 눈총도 받아야 한다.한국서 '무신론자'라고 하면 비기독교인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유교는 예절 잘지키고 그냥 문안드리는 차원에서 조상 귀신께 제배나 잘하면 되니까, 불교는 '네 안에 신있다' 라고 서로의 신을 보라고 하니까. 물론 불상 앞에서 열심히 절하는 분들도 많다만. 하지만 '유물론자'라고 하면 상황이 다르다. 아마 유교 쪽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졌나 조상 귀신의 은덕도 모르고 라고 나올테고, 불교측에서는 영성도 없는 것들 이라고 나올거다. (아..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왜그러세요.박영규 버전이다.)  거기에 일단의 관념론적 사회 분위기는 이런 '편협한 놈들' '메마른 놈들' 이라고 공격을 해올 것이다. 유물론을 무슨 책상 신이나 벽돌신을 믿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오랜동안 '유물론자'는 '빨갱이' 와 동의어였다. 정치적 상황이 예전에 비해 달라졌다지만 지금도 그런 사회적 정서는 끈적한 테이프 흔적같다. 무신론자가 받는 오해는 유물론자가 받는 오해와  닮아 있다. 이 둘은 사실 쌍둥이이다. 영혼도, 정서도, 감정도 없거나 - 좀 더 세속적으로 가면- 물질만능주의,황금만능주의자 정도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유물론의 전통이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스스로의 사회철학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했다. 즉 마르크스는 과학적 필연성으로 자신의 이론을 특화시키길 원했다. 그 역시 과학적 세계관에기댄바가 크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큰 오해의 시작은 '국민윤리' 과목에 있었다. '유물론=마르크스주의=좌경용공' 이란 자연스러운 흐름을 탄다. 내가 아는 어떤 유물론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인간적 가치들과 내면성의 여러가지 양식들을 모두 가치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농담처럼 말하자면, 가슴이 따듯한 사람은 정말 가슴이 따뜻한게 아니라, 뇌가 따뜻한(?) 것이다. 영혼은 가슴에 있지 않고 뇌에 있다. 그런데 문학적으로 '왼쪽 가슴 아래께 있다'고 하는게 관습적인 미감에 더 어울린다. 우리는 어떤 최소의 기원 또는 범주를 이야기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극소로 환원할 필요는 없다. 인간을 인간 유기체로 대하지 분자들의 조합으로 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안타깝게도 심장이 아니라 뇌다. 고답적으로 해버리면 대중가요는 매우 우습게 되긴 한다. 핫브레이커가 아니라 브레인브레이커.ㅎㅎ 가슴아파서 목이 메어서...가 아니라 뇌가 아파서...왠 두통약 CM송이람.. 인간은 바다에서 왔던지, 뭐에서 왔던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하등적인 존재에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좀 더 갈 것 같다.)   

 

  신의 문제는 사실 오래된 철학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 철학자들은 캐캐묵은 신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 하지않는다. 서양의 관념론은 신을  떨쳐내는데 매우 오랜 시간을 썼다. 근대 이성을 정초했다는 데카르트 역시 그랬다.이원론적 형식을 통해 인식의 주체를 내부에서 구했던 칸트 역시 <실천력비판>에서 신의 문제에서 '신의 요청'이라는 교묘한 방식으로 이를 슬쩍 넘어간다. 물론 19세기- 다윈과 헉슬리 이후- 진화론적 세계관은 중요한 포인트였다. 생물학자들이 다윈을 뉴튼의 반열에 올려 놓는 것은 그래서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후 과학은  세계의 비밀을 하나 둘 풀어낸다. 하지만'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대에 내려와서 생기는 일을 그린 철학적 만화 <신신>에는 "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을 창조해냈을 겁니다." 라는 말이 나온다. 아마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때도 그랬을 것이다. 도킨스가 인용한 '화물숭배의식'처럼 말이다.  

 

<만들어진 신>에서 도킨스는 신 문제에 매우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그의 전투성은 두가지 측면으로 보인다. 하나는 과학자로서의 소신, 다음으로는 네오콘을 중심으로 한 부시정부의 신정 정치의 복원이라는 출간 당시의 상황 때문이다. 그가 사나운 늑대처럼 달려드는 것은 지적설계론의 반격같은 반동적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킨스가 우려하는 정세적인 측면은 사실 한국에서 그대로 이해하긴 쉽지 않다. 한국의 기독교가 강력한 헤게모니 그룹이긴 하다. 특히 이 정권에 들어서면서 그 모습이 더 노골적으로 들어났다. 하지만 한국의 풍부한 종교적 전통은 묘한 정서적 균형을 이루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처럼 '지적설계론'을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압박할 수 없다. 굳이 비종교인들이 나서지 않아도 말이다. 머리 깍은 분들과 갓 쓴 분들이 좌시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신정분리의 세속 정치를 지지하는 이는 '이이제이'를 통해서도 그런 시끄러운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신의 존재 문제를 증명 또는 반증명 하는 것보다는 신의 효과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내게 종교는 문화적 문제에 가깝다. 다이엘 대닛의 용어를 빌자면, 진화의 지향적 자세들 중에 하나이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종교나 신을 믿는 사람들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의 선택의 자유 범위 안에 가두어 둔다면 달리 말하고싶지 않다. 실제 종교가 환상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다른 브랜드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 도킨스는 종교환상이 악성이라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종교인 개인이 사회적 합리성을 유지하려 애쓰고, 비사회적 행동을 혐오하고, 자신이 믿는 종교를 자기에게 한정한다면 나는 그가 어떤 종교를 갖더라고 인정한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정도가 타협의 근본선이다.) 물론 이는 내가 과학적 민감성이 리처드 도킨스 만큼 부족하고 종교 문제에 어느 정도는 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이런 인식의 나이브한 태도를 비판한다. 굴드의 '겹치지 않는 교도권'(NOMA)에 대해서 타협적인 태도로가 비판한다. 굴드 자신이 진화론자이고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겸손이라는 미덕 속에서 불가지론으로 치환시킨다는 것이다. 사실 대개의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 정도 지점에서 종교와 선을 긋고 있을 성 싶다. 결국 영원히 풀리지 않을 가치관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입장에서 '너와 나'의 경계를 긋고 독립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것말이다. 물론 이 세속의 경계를 종교 측에서 넘나들면 반격도 기대하는 것이 합당하다. 도킨스는 과학자들의 이런 모호한 태도 때문에 종교와 신의 문제가 더욱 풀리기 어려운 미궁으로 들어간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여러번 무신론자들을 위로하고 발굴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더 많은 무신론자들이 나와야 세상이 종교가 만드는 환상과 해악으로 부터 빠져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는 좀 다르다. 그것은 종교가 있어도 또는 없어도 반복될 것이다. 기존의 종교가 모두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다른 종류의 이름의 종교, 예를 들자면 광신적 애국주의같은 형태로라도 반복될 것이다.) 도킨스가 진화론과 과학적 방법론 외에 대해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타협적 인식이 일종의 '침묵의 나선'효과를 만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는 무신론자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입장이 환상으로서의 종교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시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에는 매우 동의한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신가설과 과학가설이라고 동치에 놓고 봐다. 과학가설의 열린 가능성이 타당하게 보인다. 즉 과학은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수정할 수 있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다. 유리한 증거가 나오면 신이 있다는 결정적 과학 증거라고 하고 또 불리한 과학증거가 나오면 믿음으로 돌아가버린다. 특히 도킨스의 강력한 주장 중에 특히 어린이에 대한 종교 강요 문제는 무슨 법제화라도 시켜서 막고 싶은 심정이다. 일부 종교인들은 모태종교를 무슨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한다. "진골귀족인 양 ,모태종교에요" 라고 발랄하게 이야기한다. 본인들은 '저는 점지 받을때 부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임했답니다. 그리고 여전하지요." 라는 식이다. 우습긴 한데, 하나님이 아이들을 준다쳐도, 그대를 더욱 축복하고 사랑했을 것이라는 나르시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담때문에 연좌제로 시달리는 것도 괴로운데,또 가족의 크나큰 믿음이 세습적 축복까지 내리니 참으로 귀족형 자본주의 모델이 아닌가 싶다. 모태종교에 대한 축복은 아마 성경 어느 구절을 뚝잘라서  주변 목사님과 장로님과 권사님들이 하신 말씀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종교 리더의 말이 하나님의 말이 되는 순간이다. 웃기는 일이다. 리처드 도킨스라면 '모태종교' 라는 말은 이렇게 해석할것이다. '저 태어날 때 부터 폭력...." 그만하자.

 

내가 설령 도킨스의생각에 동의하더라도 그처럼 전투적일 수는 없을 것같다. 수많은 조용한 종교인들과-또는 가끔 환자 소리도 듣지만, 비교적 조용히 자기신앙생활을 하고있는 종교인들과 공존해야 하는 생활인의 입장에서 그런 도발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와 세속 정치를 섞는 부류들, 그리고 그것에 흔쾌히 동조하는 세력들에 대해서는 욕을 해야만 한다. 종교의 이름을 벌어지는 몽매주의 역시 마찬가지기며 종교근본주의 역시 그렇다. 흔히 말하는 술자리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 두 가지가 '정치' 이야기와 '종교'이야기다. 왜 그럴까? 그건 답이 안나온다는 것 때문이다.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서로 어색함을 더는 길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소통으로 해결될 수 없는 가치, 이 차이가 바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중핵이 아닌가?  '정치'와 '종교' 이야기를 뺀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접촉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가치관의 소통은 어찌되었거나 술자리에서 부담스럽다. 그리고 나머지 자리에서도 만찬가지다. 이 시대의 소통이란 물론 그정도의 것이다. (여담인데, MB정권이 준 특이한 묘한 역설은 술자리에서 이 두가지를 동시에 거론해도 될 수 있게 된 상황이다.) 하여간 문제적인 작가 리처드 도킨스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한다. 일부 그룹에서는 원초적으로 거부당하는 작가로 취급받겠지만 말이다. 참고로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석가모니도 좋아한다. 공자도 그렇고 맹자도 그렇다. 그 분들을 인류의 위대한 현자라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것 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2복음>(예수복음)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도킨스는 물론이고 종교 근본주의자들 또는 무오류주의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걱정하는 바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자기 옆구리에서 흘러나가 지구를 온통 뒤덮을 피와 고통의 강을 기억하면서, 예수는 미소를 띠고 있는 하느님이 조이는 활짝 열린 하늘을 향해, 인류여, 하느님은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그분을 용서라라라고 크게 외쳤다."

 

여담삼아 내 종교 경험은 이렇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조금 더 일찍 나왔다면- 예를 들어 내가 고등학교 때쯤- 자율학습 시간의 종교난상토론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를 취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초등5-중2까지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는 종교선택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기독교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헌법의 종교자유 구문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 부분을 강조하며, 아침 TV 애니메이션 대신 교회가자고 꼬득이는 부모님을 혼자 보냈다. (흐흐흐 스스로 대견하다. 시민의 권리를 헌법에 기대서 주장하다니.)  헌법에 의한 권리 보장이 깨진 것은 아버지가 주일학교 교장인가를 맡으면서였다. 결국  교회 내에서의 묘한 포지셔닝 문제로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된것이다. "자기 아들 하나 전도하지 못하면서 무슨" 이런 비난 어린 시선들을 우려했을 것이다. 결국 길바닥에서 1시간 넘는 싸움 끝에 교회에 가게 되었다. 오래된 싸움에 항복하고 나니 진짜 마음은 편하더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에 항복한 주인공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 사람들은 '신'을 영접해서 그렇다고 했는데, 나는 그때 굴복의 달콤함이 저항의 고달픔보다 심하다는 것을 알았다. 교회 선생들이 기쁜 마음으로 두 손 잡고 기도할 때, 내 마음은 그런 투항자의 안이함과 함께 묘한 비굴함을 느꼇다. 그리고 교회의 끝은 중2때, 교회 안에서 깝죽 거려대는 녀석에게 주먹 한 방 날리고 '나 진짜 교회랑 끝이다' 하고 나온게 정말 끝이다. 따지고 보면 그 깝죽이와 신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중 3때 친한 친구 3인방 중 한 녀석이 순복음교회 광신도였다. 교회가서 한 나절이상 사는. 이 친구를 공박하느라 또 많은 시간을 썼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미션스쿨을 다니게 되었다. 교가만큼이나 '실로암'이라는 복음성가를 자주 부르는 곳이었다.(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한다. 어두운 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 매주 한 번 씩 예배를 봐야했다. 교회 안다니는 아이들은 단어장 가지고 가거나 아님 졸았다. 당시 목사의 축원 아래 고개 숙이고 있는 사람들을 실눈으로 보며, 만약 이것이 무지나 환상의 대상에 대한 응대라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와 그들이 '하나'의 무엇에 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인 것에 대한 모종의 공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자율학습 시간에는 반에 절반 쯤 되던 기독교인들과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꺼냈던 그런 이야기들을 가지고 타율학습의 긴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도킨스를 고등학교 때 쯤 만날 수도 있는 요즘 고등학생들이 부러울 뿐이다.얼마나 싸우기 용의한가. 30년 교회를 다니던 아버지도 수 년전에 교회와 연을 끊으셨다. 이유는 아버지가 감사로 있을 때다. 교회와 사학 재단 설립자의 후계자이자 그 교회의 장로인 자의 재산 해외 은닉 비리를 폭로했기 때문이다. 지역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되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아버지를 정작 화나게 한 건 젊은 장로의 비리가 아니었다. 장로의 비리에 대해 누군가 옹호하며 그 분이 그럴 분이 아니다. 오해가 있다며 그 분을 위해 기도하자고 할 때 대부분 그에 호응하며 머리 숙여 기도했다는 점이다. 아버지 표현을 그대로 전하자면 "그딴 새끼들의 기도나 들어주는 하나님이라면" 이라고 일갈하고 접었다. 당시나는 오래도록 믿던 신을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들 때문에 저버리는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해드렸다.( 오히려 비종교인이 종교를 버리는 걸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조언을 하다니. 역설적이다.) 교회가 싫은 거지,믿던 신이 싫은 것이 아니라면 다른 교회를 다니시거나, 함석헌 목사처럼 무교회주의같은 건 어떠냐고 말이다. 70 넘으신 분이 갑자기 가치를 바꾸는게 쉽지 않을거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신의 존재 문제도 오래도록 믿음과 의심사이를 오고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30년 동안 생물 선생님이셨다.ㅎㅎㅎ 리처드 도킨스라면 아마 70 이면 어때, 그때라도 환상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것이 좋은 것이고 지금 부터 또 즐거운 세상을 살면되지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나도 그렇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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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비타민 플러스 - 전국 초중고생들의 수학 고민을 한 방에 날려주는 박경미의
박경미 지음 / 김영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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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필드상 수상자이자 <학문의 즐거움>의 저자 헤로니카 헤이스케의 책에는 러셀의 수학에 대한 미학이 나온다.

 

"수학은 진리뿐만 아니라 숭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조각처럼 차갑고 엄숙하며 사람에게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그림이나 음악처럼 화려한 장식도 없다. 그러면서 장엄하리 만큼 순수하며, 최상의 예술만이 제시할 수 있는 엄격한 완벽에 도달할 수 있다."  <학문의 즐거움>중에서

 

리뷰를 쓰기 전 먼저 밝혀야 할 것이 있다. <수학 비타민>은  최소한 고스톱만큼은 재미있는 책이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분야별 베스트셀러에도 들어가 있는 책이다. 일명 스테디셀러. 애초 이 유명한 책에 대해 리뷰를 쓸 생각은 '한 모금 담배 연기' 만큼도 없었다. 화장실을 오고 가며 읽은 것이 백악기 이전 같다.  남아 있는 것은 트리케라톱스의 꼬리뼈같은 단편적 편린들. 그런데 어느 날, TV 속에서 섬광이 비쳤다. 그 섬광은 '게으른 자여, 이 책에 리뷰를 한 번 써봐라'라고 게으른 원시인에게 예언의 목소리를 건넸다. 그 번쩍이는 섬광은 EBS 다큐멘터리 <문명과 수학>(총 5부작)이다. 다큐멘터리 중 한 편을 본 회사 동료는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PD가 수학과나 공대출신 아니겠어요?" 라고 했다. 그런데 내 생각은 만만의 콩떡 천만의 팥떡이었다. 증명을 해야내야만 하는 문제이겠으나- 이 일로 EBS에 전화를 걸거나, 프로파이링을 하고 싶은 생각은 뽀로로 배꼽만큼도 없다- 프로그램의 제작자가 결코 공대출신이나 수학과 관련된 일을 해 본 사람이 아니라는 쪽에 김어준으로 부터 받은 500원을 걸겠다. 오히려 PD는 나처럼 좀 뒤늦게 '수학의 즐거움'에,또는 수학의 역사가 당겨준('땡겨준'이라고 써야 더 땡기는데)철학에 감동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EBS 다큐프라임 <문명과 수학>의 중심 내용은  김경미의 <수학비타민>이라는 책이 모두 나오는 내용이다. 최소한 인문과학 다큐멘터리를 만들려면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 PD도 유명한 <수학비타민>을 모른 척하고 넘어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아님 말고, 고소하던지,석궁을 쏴라) 사실 다큐에 나오는 주 내용들은 수학과 관련된 일반인을 상대로 한 대중적 서적에 거의 다 나오는 내용이다. '제논의 역설','오일러의 방정식','4도의 색깔로 지도 채우기','페르마의 정리' 등.

 

 <수학 비타민>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수많은 생활 기하학이나 (예를 들자면, A4의 사이즈의 국제규격같은 것), 어디선가 한 두 번 봤던 수학적 난제들, 또는 수학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과 야사들(애플 로고와 앨런 튜링의 관계같은) 서너장을 한 챕터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연대기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아무데나 화장실에 앉아서 펼쳐보고 다시 덮어도 별로 상관없다. 읽다보면 다음에 나올 문제가 궁금해서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게 된다. 한 장 한 장이 수학에 거리가 먼사람들을 점점 수학의 눈으로 이끈다. 위대한 여성 수학자인 소냐 코발레프스키야의 말 처럼 "수학자는 시인"이어야 하며, 수학을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종류의 운율이 느껴진다. 화장실에 앉아서 수학을 하다가,시인이 되어 운율까지 느끼다보면, 결국 문 밖에서 "항문외과에 가야 될 꺼다." 라는 소리까지 듣게 될 지도 모른다. 그때가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일어날 시간이다.

 

 

 먼저, 이 책을 다시 생각나게 만든 EBS 다큐프라임 <문명과 수학>에 대해 이야기 련다. 다큐의 타이틀에는 인류의 위대한 건축물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숫자CG들이 있다. 외계인이 침공하듯이 숫자들이 뉴욕,파리,아테네 등등을 날아다닌다. 인류의 문명과 함께 해온 숫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파르테논 신전도 거기에 등장한다. 파르테논의 황금비 1:1.618이다.  안정적인 미감을 붇돋우는 비율. 그리스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조화'다. 그릭 <수학비타민>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양의 황금비'라는 '금강비'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서양인과 동양인은 기럭지가 다르며, 살아가는 산수가 다르다. 그러니 미감도 다르지 않았겠는가.8등신,9등신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서구 미학이 TV를 통해 보편화 되면서 나온 현상이다. 그리하여'금강비'는 조금 짧다.1:1.41...

 

1:1.41... 이 숫자 어디서 본 듯 하지 않은가?  잠시 후에...^^

 

 

다큐멘터리의 나레이터는 배우 남명렬씨다. 그는 고대문명의 발생지인 이집트, 그리스,인도 그리고 근대 수학의 탄쟁지점인 유럽을 여행한다. 영상은 매우 세련되었으며, 가끔씩 심도가 얕은 DSLR촬영 분량도 보인다. 하여간 배경이 좋은 곳이며 영상미 역시 빠지지 않는다. <수학비타민>에는 피타고라스 항구의 기념비가 멋없이 등장하는 사진이 한 컷있다. 영상미를 따져야하는 방송에서는 훨씬 다양하게 기념비를 이용한 미장센을 만든다. 다큐프라임<문명과 수학>이 뛰어난 점 중에 하나는 바로 매우 효율적이고 감각적인 CG의 사용이다. 하여간 CG의 완성도와 타이밍 그리고 아이디어가 예술이다. 단순한 도면을 지루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만한 호사도 없을 성 싶다.

 

(출처 : EBS 다큐프라임 <문명과 수학>)

 

좀 전에 말했던 금강비 1.414..  이 값은 바로 루트2의 값이다. 그리고 루트2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고대철학사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피타고라스와 루트2' 살인 사건의 전모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자연수만이 존재하던 피라고라스의 세계 속에 히파수스의 루트2라는 진실이 어떻게 살해를 당하는지 말이다. 어떻게 보면 인류 역사에 반복되어 온 원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이야기만 너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내용들이 모두 <수학비타민>에 들어 있으므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문자화된 책을 통해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같다. 이 대목에서 다큐와 책에 동시에 나오는 퀴즈를 한 번 보자. 인도 베레나스 사원에 있는 하노이탑 이야기다.(요즘은 장난감도 나와있다.) 여기에는 '세상의 종말 시간'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문제다.

 

64개의 금판이 있다. 그리고 세 개의 기둥이 있다. A기둥에서 C기둥으로 옮긴다. 규칙은 작은 것이 아래에 갈 수 없다. 그래서 B기둥을 이용해야 한다. 다 옮기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

 

정답은 초당 1개를 옮긴다 해도 대략 5949억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우주의 나이는 약 137억년으로 추정한다. <수학 비타민>에는 인도사람들이 10의 64승을 무한한 수 '불가사의'라고 한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재미삼아 검색엔진 '구글'의 어원이 나온다. 10의 100승을 '구골'이라고 한다는데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모든 것을 검색한다는 뜻이겠지.

 

EBS다큐프라임의 <미적분의 세계>로 들어가면 알만한 사람들이 나온다. 뉴튼,라이프니치가 그들이다. 이들의 미분법에 대한 저작권 논쟁 역시 유명하다. (이 내용도 <수학비타민>에 다 나온다.) 또한 이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이클로이드 곡선'(최단강하곡선) 문제를 내는 재연장면도 나온다. 쉽게 말하면 같은 높이에서 경사면을 따라 가장 빨리 내려가는 것은 직선이 아니라 한옥 기와같은 곡선이다. <수학비타민>에서는 기와의 곡선에서 빗물을 빨리 내리기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다큐멘터리에 나오지 않았지만, 사이클로이드의 재미있는 점은 '등시곡선'이라는 것이다.즉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싸이글로이드 상에 공을 내리면 동시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수학 비타민>의 리뷰를 쓴다는게 오히려 <문명과 수학>의 리뷰를 쓰는 것이 된 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의 리뷰가 아니다. '수학'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나는 이제 기초적인 미적분조차 풀지 못한다. 가끔은 나눗셈도 헷갈린다. 그만큼 수리적 차원에서의 수학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지금 내가 수학을 접근하는 방식은 수학이 열어놓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관심에서 유발된 것이다. 누군가 또 이 집 저 집 문 열어보기 좋아하는 이가 있다면 <수학 비타민>은 매우 유용한 촉재제가 될 것이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가 흥미도를 떨어뜨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불러 일으킬 만큼 재미있는 수학이야기들이 많다.  조금은 느긋하게, 수학이 걸어온 길을 따라가보고 싶다면 EBS의 다큐 프라임<문명과 수학>도 좋은 선택이다. 몸을 던지고,눈물을 자아내는 다큐멘터리가 주지 못하는 지적인 쾌감을 자극한다.

 

(설명을 위해 EBS 다큐프라임의 훌륭한 장면과 CG들을 여러 장 사용했으나 저작권 문제와 저작권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수정하면서 모두 지웠다. 한 장만 남겨놓았다. 멋진 그림과 적절한 CG를 말로 설명할 길이 없어서.ㅎㅎ 하여간 그러저러한 문제로 내용과 구성이 조금 틀어진 부분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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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클리드의 창 - 기하학 이야기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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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좋아했으나 그리 수학을 잘하지는 못했다.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인과 법칙을 적용하면 이건 좀 어색한가?  '좋아함'과 '잘함'이 인과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생각인가? 이건 낭설이다. 전자는 기호나 취향 또는 욕망일 수 있으며, 후자는 결과다. 굳이 결과가 아니더라도 '결과'라는 이름으로 반영된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제는 그런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는 '좋아함'이 지복임을 알게 된다. 즐거운 일들은 언제나 어떤 과정 자체에 대한 만족이다. 결과는 부수적인 보상이지 지속적인 동력이 되진 못한다. 늘 상기 되어 있어 모종의 불안감 마저 느끼게 하는 -어떤 이는 이를 에너지가 충만한으로 표현한다만- 긴급 구호 봉사자는 '가슴이 시킨다' 라는 말로 '과정'이 주는 행복을 이야기한다. 가슴이 좋아해서 다시 수학을 즐길 수 있을까? ㅎㅎ 가끔 몇 몇 수학 기호들을 끄적여보기도 하지만, 수학을 놓은지 20년이 넘어가는 시점이다 보니 인수분해도 헷갈린다. 미적분은 말해 무엇하랴?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수학을 잘하지 못하기때문에' -하지만 현실은 '수학을 잘해야하기 때문에'-'수학을 좋아한다' 라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의식적으로 내면화시킨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요즘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개 인문계 고등학교의 문과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수학에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내 경우는 좀 다르다. 나는 문과적 내용들이 좋아서 이걸 선택한 셈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문과생이었다. 잘 모르면서도 어려서 부터 나는 사회,역사,세계문화 같은 것들이 개미,,공룡,별,인체 같은 것 보다 좋았다.  

어린 시절 수학을 좋아했던 그렇지 않았던, 수학은 최근에 관심을 가진 영역 중에 하나이다. 정작 수학적 계산보다는 철학적 측면에서의 수학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게다. 그 관심의 기원은 물리학 또는 이와 깊은 관계가 있는 우주론에 대한 호기심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수학도 들춰보게 되는 셈이다. 도랑치다가 가제 잡는 것 정도로 해두자.  수학에 대한 내 기억의 잔여가 그다지 많지 않고,또한 이 관심의 지속성 조차 의심스럽기 때문에 작금의 수학에 대한 이해정도에 대해 사실 큰 기대하지는 않는다. 오지랖 넓은 속류 교양인들이 취하는 일반적 특징 중에 하나로 취급한다. 아마  대략 교양 수준으로 됐다 싶을때면- 어디가서 나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난 척 약간 뻥치고 나올 정도 된다면- 다음으로 버뮤다 삼각지나 크리켓의 역사와 경기 원리를 뒤쫓고 있을지도 모른다.(ㅋㅋㅋ)  하여간 나같은 얄팍한 교양 수준 독자는 출판사에는 미세먼지만큼 도움이 될 지언정 인류 발전엔 그닥 큰 영향력을 끼치긴 힘들것이다. 그나마 위안은  이 사실을 알고 즐기니 '즐겁지 아니한가'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의 <유클리드의 창: 기하학 이야기>는 나같은 얄팍한 수준의 독자를 대상으로 쓴 인류 발전에 기여한 수학자와 물리학자들의 이야기이다. 앞서 말했듯이 내관심은 이들이 열어 놓은 인식론적 지평의 확장이다.( 수학적 증명은 내 범위를 넘어서고, 이 책의 저자도 따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결국 과학이 추상적 차원에서 인류에게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인식론의 확장 아닌가?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그리하여 자연을 구성하는 원리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 어차피 인수분해도 헷갈려 하는 내가 고난도 수학식을 이해할 수도, 그리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리도 만무하다. 또한 그것이 어떤 발견이 연쇄적으로 몰고 올 과학사적 위대함의 규모도 내가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발견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그것이 어떤 뜻을 함의하고 있는지 조금 향유할 수는 있다.  비유클리계를 알게 되었을때 사람들은 인식론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애인이 바람났다는 것을 알 때도 인식론적 충격이 만만치 않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세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니까. 물론 서너번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이젠 뭐 11차원도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사는게 다 그렇지 뭐라고 하면서..ㅎㅎ 하여간 비유클리드는 오래된 토대를 흔들기 때문에 충격적이다. 이것은 인식의 세계를 굉장한 차원에서 전환시켜준다는 것이다. (또한 먹고사는 경험적 문제에서 점점 멀어지게도 만든다.ㅎㅎ) 중세 교회가 지동설에 대해 화형이란 방식으로 협박을 가한 것은 그들이 가진 신 중심의 인식론적 토대를 거침없이 흔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지난 100년 인간의 위대한 발견 중 하나가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휘어지며 수축하기도 하는 시공간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도입시켰기 때문이다.이런 발견에는 항상 저항과 몰이해가 따르기 마련이다. 반대는 당대 사회에서 나오기도 하고, 또 전문가 집단에서 나오기도 한다. 때로는 천재라고 하는 사람들 조차 어떤 인식론적 가설에 대해 저항한다.(물론 나름대로 그 이론이 가진 문제점들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이 책 <유클리드의의 창>에도 그런 도전과 응전의 역사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미 눈치챗다시피 이 책은 기학학과 물리학의  역사에 대한 흥겨운 에세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고대 그리스 즉 BC 500 년대 부터 초끈이론,M-이론이 등장하는 1990년대까지 다룬다. 저자는 이 장구한(?) 역사에서 기하학 혁명을  불러일으킨 다섯명의 주인공을 불러 세운다. 유클리드, 데카르트, 가우스, 아인슈타인, 위튼이다. 하지만 이 다섯명의 간략한 약사로 책이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저자가 이 책을 서술해가기 위한 거대한 다섯 봉우리일 뿐이다. 다섯명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했던 전후 학자들의 연구와 관계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다음 작업으로 이어졌는지까지 설명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무리도 나오고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도 등장한다. 리만이나 프레게도 등장하고, 힐베르트, 마이켈-몰리, 로렌츠 등도 등장한다. 가깝게는 '으으으' 하는 스티브 호킹도 나온다. 결국 앞서 말한 기하학 혁명의 다섯 주역들만의 독립된 선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선분의 최고점을 잇는 연속선의 궤적을 따라 이 책은 서술 되어 있다. 이 곡선은 좌표 상에서 우상승곡선으로 향하고 그 끝은 막혀있지 않다. 아마 이 책에서 저자가 어떤 단절을 상정한 곳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몰락, 즉 히파티아의 죽음 이후 (영화<아고라>에서 매력적인 레이첼 와이즈가 역을 맡았다.정말 그렇게 예뻣을까?ㅎㅎ) 데카르트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대략의 시간들-흔히 중세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시대- 일 것이다. 중세의 과학기술의 퇴보가 있지 않았다면, 지금 쯤 인류는 태양계 바깥의 행성을 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투로 말한다. <코스모스>의저자 칼 세이건도 어디선가 그와 유사한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거의 천년 가까운 과학적 정체였으니 현재 인류의 발전 속도를 소급해서 생각하면 지끔 쯤 안드로메다 외계인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선정한 기하학의 독수리 5형제의 면면은 이렇다.  맏형 유클리드는 향후 거의 2천년간 지배하게될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리자이다.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의 수학을 집대성한 셈이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코키토'의 철학자이자 기하학과 대수학을 결합시킨 장본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래프와 좌표라는 개념이 데카르트때 도입된다. 그리고 천재 가우스는 당대 발표되지 못하지만 비유클리드의 싹을 발견한 사람이다. 캐릭터 셔츠로도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부정한 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 사람 이야기하려고 이걸 다 쓴 것 같다- 위튼.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가? 이 분은 다섯명의 멤버중 유일하게 중력에 영향을 경험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현대 우주론을 살짝이라도 열어본 사람이라면 그를 1세대 초끈 이론을 정리하고 2세대 초끈 이론을 이끈 M-이론의 창시자로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자를 포함한 세간의 평가는 아인슈타인에 맞먹는 천재 중에 천재인 셈이다. 저자는 <유클리드의 창>에서 위튼을 비롯한 초끈 이론의 과제와 성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이 책을 정리한다. 결국 다섯 명과 주변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통해서 인류가 세계와 자연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 시간과 공간을 -기하학의 전쟁터이니까- 어떻게 대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하게 된 셈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책 전반부는 대수학과 기하학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무래도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그것에 바탕을 두니 경험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을 다루는 책 후반부 부터는 이론 물리학이 중심이 된다. 결국 이론 물리학의 증명은 수학을 통해서만 가능하기때문에 수학이 팽을 당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에 의존해야하는 더 중요한 대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적 수학용어나 수식이 거의 없다. (있어도 그 수학적 증명에 관심이 있거나 이해할 수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수학이 아니라 역학만 한참 이야기하는 것 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나름 쉬운 방식으로- 그의 아들 두 명이 매우 여러번 찬조 출연한다- 물리학의 주요 아이디어들을 설명한다. 하지만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면 이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많이들 아는 상대성 이론-그런데 정말 상대성 이론에 대해 많이들 아나?- 역시 수학적 증명으로 설명하는 것은 물리학과 대학원이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애초부터 거기는 포기하고 교양수준의 상대성 이론과 관련된 책들을 작심하고 좀 살펴본 적이 있다. 이유는 가장 유명한 이론인 상대성이론이 뭔지 잘 몰라서. 하여간 오고 가는 기차와 날아가는 우주선등을 통해-이 책에서도 기차 예를 쓰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기차 예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대략 그림은 좀 그려졌다. 그런데 맥스웰의 방정식이나 로렌츠의 변환등등 알려고 덤비면 알아야 할 매우 전문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 또 그 이후 등장하는 양자론이나 파인만의 QED, 초끈이론은 아직 대략적 스케치 밖에 그려지지가 않는다. 이 책에는 이 부분에 대한 도해 같은 것도 전혀 없다.(사실 그림으로 된 설명을 봐도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한편으로 저자 역시 자신의 설명으로 이 세계를 이해시키려는 의도도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복잡한 극미시 세계에 작동하는 힘들을 몇 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장점은 잠시 후에 말할 것지만 단점 부터 말하자면, 이 책으로 알수 없는 것이 태산이니 더 많은 공부를 하라고 다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유클리드의 창: 기하학 이야기>의 장점을 말해보자.  먼저 이 책은  기하학을 중심으로 물리학사의 흐름들과 전체적인 조망도를 그린다. 그중 돋보이는 장점은 일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유머러스한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희희낙낙한 표현들은 압권이다. 하나 하나 소개하지 못함이 아쉬울 정도이다. 가우스의 일탈, 즉 유클리드 공리계를 일탈하고 싶은 욕구를 저자는 혀에 귀고리 꽂은 아이들이나 쫒아다니는 10대의 남자아이들의 일탈 욕구와 빗대면서 표현한다. 가우스는 그런 아이들하고 다르긴 했다는 것이 그 일탈의 변별성이다. 이런 식의 재밌는 비유와 표현의 일상성은  삐꺽거리는 거대한 기계를 떠올리게 하는 기하학이란 뉘앙스에 살짝씩 달콤한 꿀을 발라주는 셈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명싱해야 할 것은 다루는 분야 자체가 워낙 전문적이고 어려운 분야이다 보니 그 유머러스함으로도 다가설 수 없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유머러스하다는 것이 꼭 쉽다는 뜻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한번 말했지만, 이 책에는 저자의 아들, 알렉세이와 니콜라이가 때로는 별로,때로는 관측자로, 때로는 이론적 대립자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저자가 매우 자상한 아빠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도 이 책에 등장한 자기들의 모습에 매우 즐거워 했을 것 같다. 기하학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비인간적인 내용들에 자기 방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아이들이 등장하니 훨씬 인간적인 향기가 난다. 책은 그래서 좀 더 인간적인 온기를 품게 되고 아이들은 자기 존재가 오래도록 활자로 남아있을 테니 좋고. 이런 걸 두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제잡고 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결론만 남았다. 

"제 점수는 요..(두구둥 두구둥)... <유클리드의 창:기하학 이야기> 이 분야의 대중적인 에세이로 추천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입니다. 통과...축하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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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 - 고전이론에서 포스트 아인슈타인 이론까지 비주얼 사이언스 북 1
다케우치 가오루 지음, 김재호.이문숙 옮김 / 전나무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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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고사 선택과목이 지구과학이었다. 개그맨을 닮은 지구 과학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조는 친구들을 보면 "마!! 너 그럼 나중에 연애 못해. 알아? " 라고 말씀하셨다. 
 "왠지 아냐..니들 같은 애쉐이들이 뭘 알겠냐? 임마..형님이 알려줄께. 니들 연애 해봐라. 밤에 싸돌아다니 다가  뭐...언덕배기에 같은데 앉아서 '저 별은 말이지 안드로메다 어쩌구..' '저 별자리는 어쩌구'....'저 별까지 거리는 어쩌구' 이런거 한 번 해주면 아가씨가 '와우' 이러는 거야.  뭘 알고 졸아. 자씩들.졸지마!! 진도 나간다 " 이런 식이었다.  

  

 하여간 지구과학을 잘한 나는 연애에는 몇 번 실패는 했지만-인류의 도전 역사는 또한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기에- 그래도 결혼까지 잘해서 아들 둘 낳고 잘 살고 있다. 그 선생님이라면 "걔가 지구과학을 잘해서 그래." 라고 하실지도.  

 지구에서 한 40년 넘게 살다보니 지구 밖이 그리워져서 오랜만에 추억 어린 '지구과학' 공부를 한다. 오래 전에 배웠던 기억들은 장롱 밑 동전처럼 희뿌옇고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은 아지랑이 처럼 아롱거린다. 경험상  이런 상태에서는 과욕하지 말자가 금과옥조다. 지금 당장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묵묵히 쌓아 놓는다.그러다 보면 언젠가 "아...그거였군" 하는 날도 오는 법. 즉 반복을 동반하게 마련인 계통적 독서를 하다보면 넓은 그물코가 생기고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게 많더라도 그물망엔 이끼가 끼는 법이다.   

사실 이 책의 시리즈인 <한 권으로 충분한..> 또는 <하룻 밤에 읽는...>류의 책은 "즐겨보지 않는다." 고 이야기해야 좀 있어보인다. 그래도 책을 좀 읽는다는 자가 '한 권...'으로 뭐 어쩌겠다는 것에 현혹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자격지심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한 권으로 아는 척 하지 않을테니-' 라는 조건만 달면 좀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다.'쪽팔림'은 대개 '실용적 목적' 에 뒤로 밀려나기 십상이다. 모르는게 죄가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는게 죄일지도 모르니까. 이런 류의 책은 새로운 분야를 접할 때 유용하다. 대부분 대중적인 기초 입문서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입문서를 몇 권 보다가 보면 또 거기에 뭔가 그림이 잘 안그려지거나 할 때가 있다. 마주 잡은 손가락 사이의 빈틈 같은 것들. 그럴 때는 '그림이 많이 그려진' 책들, 장황할 설명보다는 딴딴하게 이야기해 놓은 책들이 마음을 풀어준다. 그런데 여기에도 단점이 있다. 무턱 대고 '그림 많은 책'들은 매우 간략하고 핵심만 요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전 정보가 없을때는 더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앞으로 가면 절벽이요 뒤로 가면 낭떠러지니 어쩌란 말인가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경험적인 정답은 책들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이를 매우는 상보적인 독서습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입문서들을 너그럽게 읽지 않으면  '한 권'이든 '그림으로 보는'이든 제대로 아웃라인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있는법이다.  

 

<스피처 망원경으로 찍은 안드로메다 은하. 출처:위키피디아> 

 <한 권으로 충분한 우주론>의 경우도 일련의 과학 시리즈물이다. 알라딘에서도 인기 있는 대중적인 우주론 책들이나 물리학 관련 책들을 보다가 머리 속 세포가 간질 발작할 즈음 대증처방으로 일종의 진정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구스타프 도레의 '바위에 묶인 안드로메다' 출처: 위키피디아>-안드로메다는 페르세우스의 아내이다. 희생제물로 묶여있는 것을 페르세우스가 구해주고 결혼한다. 이후 아테네 신에 의해 하늘로 올려진다.> 

책은 근대 우주론부터 해서 최신 우주론까지 중요한 내용들을 요약해 놓았다.  마치 지구과학 참고서의 하이라이트판 같은 식이다.(물론 그것보다는 좀 길다.) 또한 다른 대중적 과학책처럼 각종 수식은 거의 없다. 몇 개 나오기는 하지만 수식적 표현이 더 용이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쉽게 말해 마치 요약된 일러스트레이션용 관광 안내 지도처럼 우주론의 역사에 대한 거대한 조감도만을 독자에게 설명한다. 이런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범위별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명확히 그래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론의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다.' 라는 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말한다. 물론 이런 과정에는 무리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초끈이론이나 브레인우주론 등에 대한 설명은 설명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개요만 그려져있다. 전체적인 조감도를 그리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과감히 스케치정도만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우주'란 무엇인가? 책 첫 부분에 나오는 한자 해석을 통해 '우주'란 말은 결국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한다. 좀 더 부가하자면 그 두 요소를 채우고 있는 것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이 문제는 '극대와 극소의 범위'를 갖는다. 우주론은 가장 거대한 것을 찾는 것(그 구성요소들까지 포함하는)것과 가장 작은 출발점(기원)을 찾는 것이다. 그것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하고,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가?  

하여간 이렇게 우주론의 범위부터 시작한 내용은 근대물리학을 거쳐 현대우주론까지의 역사와 발견등을 소개한다. 이론물리학의 정점이자 현대 우주론의 정점이라는 양자 우주론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든다. 초끈이론,M이론, 등등이 그런 것이다. 양자론도 다음 내 공부 목록 중 하나인 셈인데, 크게 상상하는 것보다 작게 상상하는 것이 더 힘들 다는 것을 보여주는게 양자론이다.하여간 양자론 덕분에 우주의 기원과 힘의 분석이 가능해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고등학교 때 세포관찰 해본게 고작인 3차원적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11차원의 시공간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그것도 10에 마이너서 4-50승 단위의 극소세계라면 말이다. 양자우주론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사실 이론적 난해함이 가장 크겠지만, 경험적으로 정합적인 유클리드-뉴튼의 법칙의 간섭도 큰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하면 극소, 극대의 세계 또는 빛의 속도라는 초광석 세계 그리고 그런 시공간에서는 뉴튼의 법칙은 달리 작용된다. 하지만 경험이 만든 상상력의 한계를 그 경험을 넘어서는 것에 계속 고개짓을 함으로써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오늘 점심 뭘 먹지? 매우 고민하는 아인슈타인 할아버지) 

실제로 양자물리학이나 우주론의 분야에세 일반인들이 가장 애 먹는 원인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이론 물리학은 이론적으로 도출되는 시공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수학적 법칙을 모두 빼낸 아인슈타인의 특수,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그런 실제의 경험성/이론적 정합성 사이의 차이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은 실험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이 책에도 잠깐 나오지만, 이미 자동차 네비게이션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상대성 이론의 보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가끔은 우주론이 다루는 범위가 너무 넓고 미세해서 실제 이것이 무슨 도움이 될 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주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넓고 그 안에 인간은 미세한 점에도 미치치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점'이 누적된 노력의 결과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의 영역은 남겨두어야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런 우주론적인 질문들은 또한 존재의 위상과도 연결된 실존적인 질문과도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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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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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리뷰를 쓰기 바로 조금 전에 2009년 첫번째 피셔스케이팅 대회 쇼트게임이 끝났다. 김연아는 세계 신기록으로 소띠 해 첫번째 경기를 멋지게 끝마쳤다. 차범근의 시대부터 이어진 스포츠 국민영웅의 자리는 현재 김연아의 것이다. 국민 여동생은 더 이상 문근영이 아니며 국민 요정 이효리도 불안불안하다. 이효리가 '이십대에 대한 청구서'를 정리하가 위해 시골가서 몸빼입고 마지막 불꽃을 지피는 동안 김연아는 새하얀 빙상장 위에서 한 마리 새처럼 하늘거리며 중력을 벗어난다. 

오늘 쇼트게임에서는 헤맸지만 김연아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의 프리게임도 기대된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한 동안 이 라이벌전은 커다란 즐거움을 줄 것이다. 프로 스포츠가 성공하려면 이런 라이벌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축구의 사회학>에 보면 축구가 발생한 후 초창기부터 이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런 구도는 흥행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한 도시내에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라' 라는 성공 원칙이 있다. 축구에서는 이런 걸 '더비'라고 말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맨체스터더비', 인테르밀란과 AC밀란의 '밀란더비', 리버풀과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 도시는 다르지만 오래된 숙적같은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클라시코 더비' 등등...  

<다윈의 식탁>에서 'MBC 백분토론' 보다 훨씬 영양가 있고 또 열띤 진화론 토론을 펼치는 팀들의 대결을 '에볼루션 더비'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양 팀은 D팀과 G팀으로 선수 구성이 조금씩 바뀐다. 하지만 양 팀의 주장은 바뀌지 않는다. 진화론의 김연아-아사다 마오다. 바로 <이기적 유전자>의 도킨스와 <풀하우스>의 굴드가 그들이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김연아-아사다 마오는 서로 험한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지만 도킨스-굴드는 때로 얼굴을 붉히고 했다. 

<다윈의 식탁>은 진화론 내부 논쟁을 둘러싼 팩션이다. 다윈 이후 가장 유명한 진화생물학자라는 윌리엄 해밀턴의 장례식에 세계 유명 진화론자들이 모인다면 어떨까 라는 상상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들은 다윈 이후 진화론을 다시 살렸다는 '근대적 종합' 이후 진화론의 4가지 거대한 쟁점들에 대해 서로 머리채 쥐어잡는 토론에 돌입한다. 그 첫번째 주제는 '자연선택의 힘'에 대한 것이다.즉 다윈의 자연선택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며 무엇이 적응이고 무엇이 부산물인가 하는 논쟁들이다. 두번째 주제는 협동의 진화이다. 진화가 개인 차원이냐 집단 차원이냐의 논쟁부터 시작해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론'. '다수준 선택론' 등이 토론된다. 셋째 날은 '유전자 란 무엇인가 로 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학자마다 유전자의 이미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유전자의 영향력에 대한 문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이보디보'라는 진화발생학의 유전자론도 도킨스의 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제기된다. 네번째 날은 '점진론'과 '단속평형설' 사이의 논쟁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문제에 있어서 쿤-포퍼 논쟁이나 푸코의 에피스테메의 단절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 같은 것과 유사하다. 굴드의 넓이뛰기 비유가 등장하고 도킨스팀의 '굴드씨 오바하지 마세요. 다윈의 점진론은 그렇게 좁은 개념이 아니거든요' 하는 비판이 나온다.  다섯번째 주제는 '진화와 진보'의 관계를 말한다. 도킨스는 진화에 어느 소실점이 있다는 쪽이고 굴드는 그 유명한 말-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다- 라는 말로 이를 비판한다. 

<다윈의 식탁>의 최고의 장점은 최강의 진화론자들 사이의 가상토론을 통해 진화론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쟁점과 논쟁, 비판과 반비판의 역사를 알기 쉽게 보여주고 있다. 토론사이를 오고 가는 비유들과 어떤 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과학적 사례들은 과학이 토론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 논쟁의 전체적인 지도를 그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다윈의 식탁>이 이런 가이드 북으로 훌륭한 점은 토론에 등장하는 학자들이 쓴 저작들을 본문은 물론이고 책 부록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상 토론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편의상 도킨스-굴드팀으로 나누었지만 사실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보완적인 존재들이다. 같은 편에 있는 굴드와 르원틴도 어떤 면에서는 서로 의견이 같지만 또 서로 이견을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책 부록에는 본문에서 언급한 5가지 주제별로 향후 더 읽어볼만한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저자는 그렇게 하고도 아쉬웠는지 <만들어진 신>으로 이슈가 된 도킨스의 '반종교' 의 논리를 정리한다. 물론 이어서 굴드의 도킨스 비판도 이어진다.  

물론 현재 진화생물학에서 주류는 도킨스이다. 도킨스의 '유전자시각론'은 혁명적인 평가를 받는다. 물론 도킨스만의 독자이론은 아님을 말한다. 저자 역시 D팀과 G팀 사이에서 최대한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굴드 쪽 골대 뒤에 서있다.(도킨스팀의 골장면을 보고 싶어한다는 뜻이다.)도킨스만을 위해 그의 3대 저작 <이기적 유전자>,<확장된 표현형>,<눈먼 시계공>을 따로 정리한다. (주를 통해서 굴드의 저작도 다루고 싶었지만 누락시켜서 아쉽다는 유감을 뜻을 전한다.그런다고 모를줄 알고..^^) 

이 책에 토론 내용들을 하나 하나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대신 이 책은 사회생물학이나 진화론 논쟁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한번 빠져 볼 용기를 줄 것이다. 과학논쟁은 분과학문의 영역을 벗어나서 전 사회의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보고 '과학이 역시 최고야' 라고 할 필요는 없다. 과학자들은 어떤 최종심급을 찾아다니는게 일이고 본연의 임무이지만 그런 최종심급이 -유전학의 용어를 빌자면- 모든 표현형과 그 관계들을 이해하거나 즐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유전자환원주의도 유전자 표현형의 어느정도의 일관성 관계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 유전자가 무슨 의도를 갖는다거나 특정 표현형을 직접 양산해낸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윈의 식탁>의 논쟁에 대해서 나는 결국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 논쟁같은 것에서는 도킨스의 이론이 더 매력적이다. 반면 '신'에 대한 접근 방식은 '굴드'의 주장이 평소 내 지론과 같다. 굴드는 '신'을 믿는 이들의 영역 자체를 따로 놓아두는 방식을 취한다. 도킨스는 과학자로서 미신을 방치하는 옳지 못한 퇴보라고 말한다.(내게 종교는 그냥 믿음의 영역일 뿐이다. 지적 설계론 같이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고 그에 대한 과학적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사명감을 가진 과학자로서 가능한 일이나- 내게는 피곤해보이는 일이다.) 9.11을 두고 '종교적 근본주의' 때문이라고만 보는 방식이 놓치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 도킨스의 입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나는 인류가 다른 종이 되기 이전까지 '종교적 근본주의' 없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행여 장구한 진화의 시간을 거쳐 그런 다른 종이 되었다면 그것은 더이상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종교 전반에 대한 도킨스의 생각에는 별 거부감이 없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종교관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언젠가 그런 종교관의 주입을 '폭력'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래서 '모태신앙'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내게 어떻게 들리는지 알아?'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때도 많았다. '점진론'과 '단속평형설' 같은 논쟁은 '다윈의 재해석'을 통해 충분히 해소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인문학에서도 사실 이런 논쟁이 있어왔다. 인문학에서는 '사건'이란 개념으로 어떤 불연속성을 설명한다.(이는 물론 시간적 개념으로 진화의 시간에 비하면 정말 찰나의 것이다.) 9.11 같은 것들은 세계 역사에 있어서 어떤 '사건'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미국 대륙 한 복판으로폭탄테러 비행기가 날아들었으니 말이다. 굴드가 단속평행설을 주장하기 위해 썻던 소행성과의 충돌처럼 쌍둥이 빌딩에의 충돌은 미국민들에게 과거와는 심리적으로 다른 삶의 양상을 요구했다. 생물학이라면 '진화'라고 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부시의 도를 넘어서는 일방외교의 강경정책은 진화의 방향에 대해 다른 적응을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진화론 관련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런데 창조론은 어디갔는가 궁금할 수도 있겠다. 창조론, 지적 설계론같은 것은 <다윈의 식탁>에선 크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지적 설계론'에 대해서는 책 후반부에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의 미국 내에서의 논쟁에 대해 한 편의 글이 있다.(도킨스와 같은 무신론적인 진화론자들이 왜 가만히 연구실이나 강의실에 있지 못하고 나서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해가 간다. 한국의 뉴라이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지적설계론이 담론 공간에 비집고 들어온다.) 저자는 생전에 굴드와 도킨스가 숙적이었지만 서로 동의하는 것이 딱 두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는 진화는 사실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는 자신들이 모두 최고의 글쟁이였다는 것이다. ^^ 나는 원론적 차원에서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이다. 다윈 역시 한때 유물론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도킨스가 '종교는 바이러스다' 라고 말했듯이 나는 오래 전부터-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종교는 인간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문학이나 예술적 차원에서 나는 범신론자에 가깝기도 하다. 내 생각에 인간 사회에서 인간은 결코 신을 쫓아낼 수 없다. 어떻게도 해도 신은 귀환한다. 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애초부터 비이성적 존재이며(완전한 이성적 존재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환상의 영역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학 이성이 신의 공간을 쫓아내는 순간 과학 이성은 또 신의 자리를 차지한 일종의 '대리신'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도킨스가 열심히 무신론자로 뛰는 것은 아마 서구 사회 일반에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 종교 중심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 역시 특정 종교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지만 한국은 묘한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내었다. 한국에서는 교과서에 기독교의 창조론을 싣자고 주장한다면 불교계나 유림등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내 생각에 한국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훨씬 덜 종교적인 나라다. 덜 특정종교적이라고 해야 맞을 지도 모르겠다.(=제갈량과 몽테스키외가 삼분지계의 함의를 인류에 건넨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들은 이것들이 나중에 한 통속이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없었겠지만) 대통령 취임식만 봐도 알 수 있다. 현 대통령도 한국을 봉헌하고 싶은 마음이야 있겠으나 취임식에서 다함께 손모아 기도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받지 못한다는 뚜쟁이 소리를 하는 인간들과는 아예 상종하지 않는게 내 실천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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