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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 ㅣ 제국 3부작 2
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조정환 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머나만 반도 이탈리아에서 내공을 닦아온 안토니오 네그리가 동료 마이클 하트와 무림비서<제국>을 내놓았을 때 전세계 무림은 한 번 크게 출렁였다. 21세기에 다시 쓰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거대한 기획다왔다. 전지구적 변화를 예언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운동주체를 설정하는 그들의 방식에 모두들 감짝 놀랐다.싫거나 좋거나 무림맹주들은 그들의 도전에 주목했으며 그 동안 자신들이 연마해온 수련방식을 총동원하여 이들을 격파하거나 자신들을 방어했다. 한 동안 이 바닥에 불었던-그리고 아직 그 후폭풍이 가라앉지 않은-'제국논쟁'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그 후폭풍이 지나가지 않은 시점에서 후속적 <다중>을 선보였다. 이 두 책은 9.11테러로 무너지기전 서로 바로보고 있던 쌍둥이 빌딩처럼 상호보완적이다. <제국>이 나왔을 때 가장 크게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제국주의이냐 제국이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다중이란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네그리의 <제국>은 일국간의 경쟁상태인 제국주의가 무너지고 팍스로마같은 제국의 시대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책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제국'의 시대에 그에 조응하는 저항주체인 '다중'의 역동성과 저항잠재력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오히려 <다중>에서는 '저항의 우선성'에 대해 말한다. <제국>은 아무래도 '다중'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해주질 못했다. 오히려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 세계사적 변화와 그 이행 과정에 좀 더 촛점을 맞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그렇게 되다보니 '제국'은 물론이고 '다중'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와 비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그리와 하트는 9.11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변화되어 가는 세계를 다시 한번 '제국'의 이행과정으로 목도한다.그리고 전편 <제국>에서 좀 더 부각시키지 못했던 '다중'과 '제국논쟁'에서 불거진 비판에 대해 후속편인 이 책<다중>에서 답변하고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 <전쟁>은 전쟁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보편적인 상황으로 바뀐 전세계적인 정치구도의 변화를 말한다. 영원한 전쟁이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상황인식과 그것을 지배하는 유일한 형식이 제국이라는 것이다. 네그리는 이를 '전지구적 내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쟁이 삶을 바꾼다는 개념이다. 푸코의 연구를 빌어서 그들은 이 전쟁이라는 상황을 '삶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한다.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국가 권력 혹은 지배의 방식은 전쟁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사회적 질서가 반복,재생산 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은 전지구적 내전 상황하에서 움직이는 현재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런 전쟁과 정치의 역전관계는 한국민들에게는 사실 경험적으로 익숙한 주제이다. 위의 푸코의 말은 김동춘이 <전쟁과 사회>에서 인용했던 것과 동일한 구절이다. 김동춘은 한국전쟁이 그후 근대 역사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한국민들의 삶을 어떤 형태로 바꾸었는지를 <전쟁과 사회>에서 쓰고 있다. 그는 '현재 진행형인 한국전쟁'이라고 이를 설명한다. 한국민들의 의식 속에 한국전쟁의 상흔은 내면화 되어 '삶권력'적인 형태로 작용했다. 우리 사회가 그 상흔으로 부터 많이 벗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그런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바라보는 9.11 이후의 세계가 그런 '전지구적 내전'에 의해 안보라는 이름의 비상권력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기이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을 보면 9.11 테러 이후 '안보'와 '공포'라는 이름으로 미국민과 세계에게 어떤 '삶권력'을 강요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보기에 진보진영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군산복합체론'은 이런 전쟁의 삶정치적 영역을 단순히 경제성의 논리로 풀어나가는 '제국주의적 담론' 방식일 뿐이다. '군산복합체론'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일면적이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리고 해방이후 '저강도 정책'의 방식으로 미국이 삶정치의 한 영역이 되어버린 한국에서는 이런 감각들이 탁월하게 이해될 수 있다.
네그리는 근대전에서 탈근대전쟁의 형태로 전쟁의 추이가 바뀌는 지점에서 '저항과 역반란'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쉽게 말해서 근대적은 전면적을 뜻하고 탈근대전쟁은 고강도의 치안행위까지 포함하는 국지전을 말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정보와 네트워크에 의한 전쟁 테크놀로지에 의존한다. 이 전략은 '전역적지배' 를 목적으로 한다. 즉 군사력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심리적 토제를 결합하여 지배를 안정화 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힘의 비대칭성은 이것을 가능할 것 처럼 보이게 한다.그러나 이것은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저항의 자율성 때문이다. 네그리는 '역반란'이 '저항'에 대응하면서 변화해나가는 지점을 찾는다. 그러면서 변화된 저항의 계보학을 게릴라전에서부터 찾는다. 게릴라전의 네트워크화는 역반란측의 네트워크 전쟁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는 게릴라전의 전통 역시 근대적 전쟁 신체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하면서 '제국'시대의 투쟁은 그런 유기체적인 정치 신체로부터 탈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부터 비롯되는 근대정치 철학의 신체관을 탈중심적으로 변화시킨 것이 탈근대시대 저항의 특성이 된다는 것이다.(근대 정치 철학은 대의를 통해서건 무엇인건 간에 머리-가슴-발에 해당하는 인간의 형상을 닮아 있다.) 탈근대적 세계인 '제국'의 주체 '다중'은 그런 면에서 '리좀'적인 존재이고 네트워크 간의 소통과 절합을 통해서 만나는 존재이다. 네그리는 신체라는 개념 대신에 훨씬 유동적이고 창조적인 '살'이라는 개념으로 다중의 성격을 설명한다.
2부의 <다중>은 '제국 논쟁'에서 말이 많았던 '다중이란 무엇이냐?"에 대해 철학적,사회학적,정치학적인 측면에서 그 윤곽을 조금 더 분명히 한다. 일단 네그리는 '다중을 노동자 계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맑스주의의 동일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뜻하지 않는다. 또한 근대 정치에서 변혁주체였던 '민중'과도 구분한다. 이것들과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일자회귀'에 대한 네그리의 거부에 있다. 그들은 조금 더 유연하고 광범위한 형태의 '위험계급'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다중'의 외곽선을 긋는다. 흔히들 '차이의 주체'라고 하는 이들이 모두 포함된다. 네그리는 '우리 모두 빈자이며, 또 생산자이다.' 라는 말을 한다. 이는 '다중'이 다분히 정치적 개념이며 민중이나 노동자 계급을 탈영토화한 이후 다시 정치적으로 재영토화한 개념임을 뜻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물질노동'에 대한 '비물질 노동'의 우위를 '제국'시대의 특징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다중'은 그런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속에서 그 성격을 반영하면서 운동한다. 물질노동이 포드주의적 개념이라면 비물질 노동은 포스트포드주의적 그림위에 그려진다. 물론 이런 노동 주체의 이동과정은 비판을 대상이 되었다. 즉 '1세계에서의 비물질노동의 우위 상황을 전세계적으로 일반화한 것 아니냐?" 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비물질노동을 이야기하고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의 상표는 '메이드 인 차이나'이다."라는 것이다. 비물질노동의 우위가 아니라 물질노동의 전세계적 이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체제론자들의 비판에서 주를 이루었다. 데이비드 하비 같은 이들은 '조정'이라는 개념으로 자본의 이윤율감소 경향을 상쇄하는 방법을 말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서문에서도 이 책이 '철학책'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런 실제적인 비판에 대해서도 '이 책이 지적하는 것은 일종의 경향성'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 최소한 그런 실재적 비판의 예봉을 어느 정도 감쇄시킬 수 있는 답변이다. 저자들은 물질노동이 소멸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라 헤게모니가 비물질 노동으로 이전되는 경향을 말한 것이라고 답변한다. 그들은 맑스와 자신들을 그대로 유비한다. 즉 19세기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를 말할 때 그것은 유럽 전역에서 상당히 소수였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의 운동 경향과 그것이 어떤 힘에 의해 붕괴될 것인지 그 경향성을 말했다. 자신들 역시 그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조건에 있어서 '특이성과 공통성'을 강조한다. 이 양자는 서로 침해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특이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요즘 말로 '차이'를 말하고 '공통성'이라는 것은 '보편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하지만 이것은 정확치않다. 왜나하면 근대적 의미의'보편성'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변증법적인 결과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이것을 부정한다.) 다중은 각각의 특이성을 그대로 보존하는 차원에서 또 상대의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공통된 것을 추구하기 위해 절합한다.네그리는 우리가 흔히 '공적인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 체계에 포섭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그보다 더 나아간 방식으로 '공통된 것'이라는 개념을 꺼낸다. 그는 이 '공통된 것'을 꾸려내기 위해 몇 가지 실행방향을 언급한다. 첫째는 신자유주의의 허위를 까발리는 것, 둘째는 공공의 이익 개념을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이것은 케인즈주의처럼 국가에 힘을 싣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오히려 꼬뮌주의적 참여에 더 가깝다.) 저자들은 일반적이거나 공적인 것들은 모두 다중에 의해 재전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며 따라서 공통적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다중을 조직하고 움직이는 것은 '잉여'이다. 기본적으로 맑스의 노동가치론과 선을 같이 한다.네그리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자본에 의해 착취될 수 없는 전지구적 정치적 신체에 포획될 수 없는 잉여에 촛점을 맞춘다. 그 잉여가 적대가 되고 반란이 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조건은 다중의 잠재력,자율성과 소통,그리고 차이에 대한 존중과 절합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런 절합이 결코 반작용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이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한 답이다. 저자들은 축적된 공통된 불만들이 생산적으로 작동하는 점에 주목한다. 설령 미디어에서 보이기에는 항의운동의 측면만 보일지라도 이것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이다.
제 3부는 <민주주의>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정치적 목표가 여기이다. 그들은 '급진적 민주주의'를 통해 이름만 남아 있는 '민주주의를 제국 시대에 재전유'하자고 주장하는것이다. '다중'의 문제와 근대정치 체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여러번 제시했던 '대의(제)'의 문제가 다시금 부각된다. '대의'는 다중과 정치를 연결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절대적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것이다. 근대 정치체제는 지속적으로 인구의 확장,지역의 광역성들을 내걸면서 '대의'문제의 약점을 피해왔다. 네그리와 하트는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대의'라는 것은 '선출직 귀족제'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이것은 자유주의국가에서나 사회주의국가에서나 공히 작동했다. 저자들은 이런 '대의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나 구체적인 내용들은 들어 있지 않다.)
네그리와 하트는 책 후반주에 가면서 제국 시대의 정치적 형식에 대해 조금 더 실재적인 예들을 거론한다. 그런데 이 역시 그다지 구체적이지는 못하다. '제국'시대에 현실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는 단체인 UN의 개혁한 같은 것들이다. 상임이사국의 입김을 줄이자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이야기들과 제2의 총회같은 이원화된 UN 개혁론같은 것들이 제시된다.그러면서 유럽연합의 복합적 연방체제 같은 것들에 대해 주목한다.(물론 이런 것들이 대의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은 지적한다.) 또한 국제적 사법질서를 위해 국제형사재판소의 강화, 경제적 개혁을 위한 최빈국의 외채 삭감, 전 인류의 공통된 이익을 위한 저작권,특허권의 공유같은 것들을 말한다.하지만 이런 제안들에 구체성들은 부족하다. 오히려 저자들은 삶정치 영역에서의 이러한 제안보다는 우리의전지구적 상황을다루는 실험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라고 살짝 발을 빼낸다.
그러면서 다시금 18세기의 실재적 민주주의를 위한 꿈을 언급하고, 다중의 구성적 동력학을 고혀하여 복수성이 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물론 이것에는 '권력'이 배제된다. 다중은 '항구운동적인 주체'이지 결코 '주권권력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네그리의 주장을 '아나키스트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반권력론'때문으로 보인다. 네그리는 보론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에 짧은 반비판을 가한다. 그 중에는 '당신은 아나키스트인가?"부터 "당신들은 레닌주의자인가?" 라는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비판들이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그들의 주장이 이 사이에 있다라고 말한다. 최종결론 부분에서 다시금 이를 확인한다.(매디슨과 레닌 사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시대를 통찰한 새로운과학과 함께 새로운 존재론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분히 신학적인 결론으로-본인들은 이를 신학의 사회학이라고 명명하겠으나-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고 그 결정을 사건적으로 이해하길 요구한다.새로운 인류의 창조가 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이며 또한 정치적 해위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때 그때 비판적인 메모를 많이 했다. 물론 그 메모는 네그리와 하트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이다. 그들은 내 메모를 훔쳐 본 사람들인양-아마 '제국논쟁'에서 이미 나왔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몇 장 건너지 않아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달릴 수 있는 오해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래서 메모를 계속 했으나 결국 어느 정도는 해소하면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최소한 그들의 생각을 비판적으로라도 받아들이는 독서였기때문에...
내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대목은 사실 <다중>의 맨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다중의 구성적 힘에서, 보장들과 입헌적 동력의 제도적 방법을 갖춘,"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기획을-주권을 넘어서는,권위를 넘어서는,폭정을 넘어서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기획을-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은 결국 '제국.다중론'의 현실 정치에서의 접합과정에 대한 질문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이와 유사한 무수한 질문에서 추렴된 것이겟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 는 이 책이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와 같은 것은 집단적 정치적 논의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라고 공을 넘긴다.사실 우리사회에서 '다중'이라는 최신 철학용어가 시사잡지에서도 옮겨지고 일반인들도 알만한 단어가 된것은 좀 이색적이다. 아마 지난 '촛불집회'의 영향력이 무척 컷을 것이다. 당시 학자들과 시사잡지들은 듣도 보도 못한 창조적인 운동주체의 등장에 놀랐다. 그들은 네그리의 예견과 용어를 도입하여 '시애틀에 이어 나타난 서울의 다중'으로 보았다. 나는 이런 분석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다중'의 출현의 한 예로 충분하다. 문제는 그 축제적 운동과 철학적 결합의 이상적 상황에 흥분해버린 것이다.(나는 지난 촛불집회 상황에서 이를 누누히 강조한 바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인 것'의 복원을 축하하다가 '정치'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다중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도 관련이 있지만(권력문제에 대한 포기같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언젠가 알라딘의 어떤 분이 제기한 '좌파 역시 권력을 목표로 하기에 자율주의가 오히려 낫다.'는 입장에 대해서 비판한 적이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 논의 속에 구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문제를 이론적 유비를 통해 해소하려는 나이브 함에 있었다. 네그리와 하트 역시 자신들의 주장이 '경향성'이라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다. 구체적인 아무런 변화를 끌어내지못하고 '다중 출현'의 광경만 목도한 것이 '촛불'이라면 사실 현재의 후폭풍들은 그 운동주체의 한계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광장에 열번 스무번 나간 것 만큼이나 지식인들이나 진보적인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그런 한계들을 깨닫고 운동의 흐름을 실재적인 변화를 위해 집중시키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인 즉, 이론을 현실에 맞추며 박수치는 것을 때려 치우고,구체적 변화를 도모하는 방향에 힘을 실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시대의 역행은 어떻게 보면 '촛불'의 후폭풍일 지도 모른다. 촛불의 개별적 주체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촛불의 실패가 보여줄 수 있는 한가지 역사라는 것 말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에 내가 전적으로 동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책은 분명히 <제국>과 어우러지는 좋은 책이다. 우리는 근대적 토대 위에 서 있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고 또 다른 세계의 움직임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한다. 이 책은 그런 시각을 만들어주고, 또한 비판과 반비판의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은 더 넓어지고 튼튼해 질 수 있다. <제국>보다 훨씬 평이하게 씌여졌지만 이 책은 또 앞의 책이 '다중'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제국'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국'에 대한 선이해가 있어야지 <다중>에 접근하기 쉬울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