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무슨 말들을 하는지 집중하고 보려고 해도 넉줄 이상 읽기가 힘들다. 원래 없던 관심을 갑자기 키울 수도 없는 법. 하던데로 눈팅과 무관심의 역학 법칙을 지속하기로 한다. 복학생 형님 같은 전지적 위로 따위는 오글거려서 어차피 체질에 맞지도 않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2.문득 책장의 책을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 문장.
사유,/즉 자신의 강압 메커니즘 속에 자연을 반영하고 되풀이하는 사유는/ 자신의 철두철미함 덕분으로 /스스로가 또한 강압적 메커니즘으로서의 /'잊혀진 자연'임을/ 드러낸다. <계몽의 변증법> 중에서...
/ 표기가 되어있다. 문장이 잘 안들어올 때 밑줄 긋고 다시 문장을 나누어 읽으며 하는 짓이다. 문장이 안들어오는 이유는 이해부족도 있겠고, 그 문장을 읽던 당시 딴 생각을 해서 일 수도 있다. 음악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거나, 뭔가 성적인 생각을 한다거나, 업무와 관련된 일을 미리 시뮬레이션한다거나...하여간 딴짓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클래식이다. 니체나 벤야민,아도르노 같은 이들의 글을 보고 있으면 좌절감이 생긴다. 이런 사유에 이런 문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인간들인가 하고 말이다.
3. 오늘 낮, 회사 자료실에 들렀다가 <한겨레21>을 잠시 열어봤다. 지난주 것 같았다.<건축학 개론>이 특집이다. 결국 '세대론'의 반복인 셈이다. 90년대의 소비세대의 문을 연 신세대가 자라나서 이젠 복고적 소비중심축으로 등장한 셈이다. 문화시장의 트렌드가 7080세대에서 이제 90세대로 넘어온다는 뜻이다. 징후는 <나는 가수다>의 폭발적 인기부터 예감된 것이다. <건축학 개론>은 이를 명백히 가시화시켰다.
<건축학개론>의 첫사랑 이야기 속에 윤대녕의 <상춘곡>의 한 문장이 인용되었다. <상춘곡>이라는 단편은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윤대녕의 희미한 그림자일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를 처음 알게된 작품<천지간>은 TV문학관에 나온 심은하와 김상중 때문에 유독 기억이 생생하다만. 하여간 기자가 인용한 글은 이거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
뭐라고 해야할까? 기쁜 마음이 들었다. 드디어 20대 아니 이후 30대 어느시절, (워낙 철이 늦게드는 사람이라) 나이 들어 만나고 싶던 그 지점에 도착했다. 비로소. 오는 길이 쉽지 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이렇게 왔다는. 늦었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고 머쓱거리며 대견스럽기도 하다는.
물론 나는 앞으로도 더 떨릴테고, 그 떨림을 자책과 자부심으로 안고 운명처럼 살겠지만, 저 문장을 읽고 난 뒤 내게 밀려온 감정은 그거였다. 이제 거기까지 왔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