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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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TO : 아룬다티 로이 씨께

열대야가 이어지고 있는 날입니다. 태양의 따가운 독설이 낮에도 모자라 밤까지 이어집니다.늘 차가워보이는 도시마저 살바토레 달리의 그림 마냥 축축 늘어져 혀를 쭉 빼물었습니다.손부채질을 하며 양심수로 수십년 복역한 신영복 교수의 글을  떠올려 봅니다. 잠시 옮겨보겠습니다.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여름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때문입니다.이것은 옆사람을 단지 삼십칠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며칠간 이어진 열대야속에서 로이씨의 <9월이여,오라>를 읽었습니다. 당신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주었다는 <작은 것들의 신>은 지금 이곳에서 구하기가 어렵더군요.소설가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먼저 읽어서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만은 좋은 글은 언제나 살아나기 마련이니 조만간 당신의 소설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로이씨께서 쓴 정치평론과 각종 연설문들이 8편 들어 있더군요. 글 전체에서 반세계화 ,반미,반개발정책에 대한 당신의 쟁쟁한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당신이 직접 행동하고 있는 댐건설에 대한 당신의 우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화려한 경제 지표상의 성장이란 미명아래 사라지는 댐아래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인도가 세계에서 수력발전에 가장 의존하는 국가란 것도 당신의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또 그만큼 댐건설로 삶의 모든 터전을 잃어가는 인도 하층민이 많다는 것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학교에서는 댐건설에 대한 긍적적인 것들만 배웠습니다.단 한번도 댐건설의 패해에 대해서는 언급된 적이 없었습니다. 나이들어 뉴스에서 수몰민들의 애상적인 모습이 그나마 그 분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명절 즈음해서 수몰민들이 저수지 한가운데로 배를 타고 나갑니다.그리고 수십길 물 아래 부옇게 남아 있는 마을의 모습을 찾아냅니다. '저기...저기가 우리집 장독대가 있는 곳인데...어..저기가 옛날에 우물자리....' 이렇게 말이죠. 가라앉은 추억은 단지 애상만이 아님에도 우리는 물 아래 있는 마을이란 신비함으로 그들의 삶을 접했습니다. 몇푼 안되는 보상금으로 나머지 수십년의 생활을 이어가야하는 그들의 삶은 뉴스가 끝나면 머리속에서도 지워집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스위치를 켜서 불을 밝히고 냉방을 하고 목욕을 즐길 수 있도록 누군가가 먼 곳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고 잇는 지를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착취자이며 착취자인지도 모르고 우리 삶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나눔,나눔 많이들 입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들의 삶의 희생속에 또는 착취구조속에 무의식적으로 영입되어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돈 벌어 내 맘대로 한다.'는 식의 사고가 얼마나 소아기적 가치관이고 유아병적인 자본주의 인식인지 다시금 생각합니다.

당신은 책의 많은 부분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화와 아프칸,이라크 침공의 부당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이윤이다.'라고 당신은 세계화의 본질을 선언합니다.즉 이윤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세계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정부들은 '보이지 않는 주먹'은 은폐합니다.그리고 그 주먹의 부당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반시장주의자 커뮤니스트라고 비난합니다.가장 좋은 예는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일 겁니다. 대한민국은 냉전시대 미소의 대리전을 치루었던 곳입니다.그리고 여전히 미군이 주둔하며 주먹을 으르렁거리고 있는 곳입니다.해방이후 60년 가까이 미국을 우리의 구세주로 여기는 사람들이 나라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지난번 이라크 파병 논란이 빚어졌을때 우리의 안위와 미국의 안위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보는 현명한(?) 학자,정치인,언론계인사들이 수두룩했습니다.마치 미국의 에이전시같은 인상이었습니다. 미국정부는 그렇게 자신들의 제국을 확장시키기 위해 지역 엘리트들을 포섭해 놓았습니다. 미국 정부와 다국적 기업,그리고 주변국들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상호 이익을 위해 대다수의 민중들을 삶은 안중에도 없습니다.당신도 지적했듯이 한통속이 된 언론을 통해 그럴싸한 현실주의와 냉소주의,패배주의만을 살포하고 있습니다.이들 언론은 파병에 반대하거나 경제정책의 분배를 강조하거나 또 미국의 부당성에 대해 지적하면 이념공세를 하거나 현실성이 없다고 몰아부칩니다.그들은 세계화와 반미,또는 평화주의자들을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비춰지게 만듭니다. 당신도 몇번을 강조하였듯이 미국을 정점으로 다국적기업과 정부,미디어 기업이 한 덩어리라는 것을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이해하길 바랍니다.

막막한 현실에서도 당신은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고 했습니다.유일하게 세계화 되어야 할 것은'저항의 세계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최근에 들어본 세계화 구호중 가장 멋진 것이었습니다.즉 지역적인 반세계화 저항이 국제적인 연대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세계화의 흐름에 중대변화를 가져 올 만큼 커다란 저항의 결과물을 낳지는 못했습니다.하지만 당신이 싫어하는(?) 댐이 작은 구멍 하나에서 붕괴되듯이 작은 꽃들의 저항이 뭉치다 보면 그 속도와 방향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꿈꿔봅니다. 당신이 있는 인도와 제가 있는 한국은 같은 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많은 공간일 겁니다. 하지만 소수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작은 행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것은 거기나 여기나 마찬가지 일겁니다. 거대한 제국의 공격에 저항하는 작은 몸부림이 점점 그 물리적 공간의 거리를 좁혀 큰 힘을 얻어내길 기대해봅니다.

제가 있는 이곳은 이제 태양이 중천으로 떠올랐습니다. 인도는 이제 막 아침 햇살이 뜨겠군요. 제가 아침에 본 바로 그 태양을 로이씨가 보고 계신 겁니다.같은 곳을 바라보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햇빛이 골고루 나뉘어지길....

앞으로도 좋은글 기대합니다.

FROM  ;   동쪽 아시아 끝에 붙은 나라에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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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30 19:32   좋아요 0 | URL
아룬다티 로이, 오늘 우연히 들른 서재 세 곳에서 이 이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리뷰를 보니 책을 다 읽은 듯하네요.
너무 꼼꼼한 리뷰라...^^;;;
잘 읽었습니다.
 
옛 다리, 내 마음속의 풍경
최진연 글 사진 / 한길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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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휴가를 앞두고 중고차를 하나 샀다. 결국 차값보다 수리비가 많이 들긴 했지만 그 자동차와 함께 한 첫번째 여행은 아름다웠다. 이름하여 남도여행. 전라도 순천으로부터 해서 화순,보성,구례 등등... 그날 그날 다음 여행지를 찾아가는 즐거움에 전북 고창,변산반도까지 돌아다니고야 말았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조금 철지난 휴가여서 선암사 올라가는 산길은 고즈넉했다.비에 젖은 흙을 스르륵 밟으니 물기가 마음속 까지 소르륵 스며들었다. 몇 십분 올라가서 만난 무지개. 빨강 자주 보랏빛을  뿜어내는 무지개가 아니라 사람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는 무지개였다. 이 책의 소제목을 인용하자면 '시간마저도 멈춰세운' 선암사 승선교였다. 산길에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비에 젖은 돌들을 헤치고 냇물가에 앉아서 승선교의 홍예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 처럼 시간이 가는 걸 잊을 수 있더라.바위들의 배치를 바라보고 바위 틈 사이의 이끼와 흙들을 응시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와 어울려 그 다리를 지나갔을 수많은 발소리를 들었다. 다리를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최초의 경험이었다.

이후 다리에 관한 좋은 인상은 충북 제천의 농다리로 이어졌다.진천 문백에 있는 농다리에 다녀온 것도 그러고 보니 비 온 다음날이었다.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교중에 하나라고 한다.내가 간 날은 그 전날 폭우로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다리 중간 중간이 물에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지네처럼 강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저편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갈 수없는 길들이 더욱 매력적이라 했던가.다리만 있었던들 다리만 잠기지 않았던들. 몇 백년전 언젠가 물건너 편으로 시집가면서 맘속의 연인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도 이 다리는 기억할 것이다.그의 아들의 아들중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피난 짐을 짊머내고 허겁지겁 이 돌다리를 건넜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농다리 앞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콸콸콸 흐르는 물길속에 농다리가 외로와 보였다.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 하나 하나가 살아 있는 살점인 양 물속에서 용트림을 하는 듯 했다. 어찌보면 용이 되고자 했던 이무기의 한이 농다리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이것이 내가 다리에 감동한 두번째 이야기이다. (진천의 문백은 농다리에 어울릴만큼 산수가 아름답고 조용했다.그래서 나이들면 은퇴하고 이리로 들어와야겠다 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행정수도가 연기쪽으로 결정되면 가까운 진천 문백도 돈 많은 이들이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 아깝다. 내 미래의 은신처를  놓쳐버리다니...)

이 책은 저자가 발품 팔며 기록한 옛다리에 대한 기록이다. 알려진 다리들도 있지만 풀숲에 가려져 잊혀진 다리들도 또 시멘트 바닥에 묻혀버린 다리들도 있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강원도 동강 근처에 있었다는  나막다리와 섶다리들이다. 영화같은데 보면 가끔 등장하여 아스라함을 주는 나무로 만든 임시적인 다리들이다. 동강이 인기있는 강이 되면서 시멘트 다리가 놓이고 더이상 아무도 나무다리를 짓지않는다고 한다. 돈도 없고 지원도 없는데 마을주민이 한해 쓸 다리를 만들 이유가 무었이겠는가. 그곳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도 나막다리를 짓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세상의 아름다움은 편리와 과학기술이라는 이름하에 또 하나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것이다.사실 나 역시 섶다리나 나막다리를 직접 본적이 없다. 하지만 사진으로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인다.덜컹거리는 다리위를 걸으며 아래로 흐르는 물살을 보고 싶다. 아찔하겠지만 영원히 기억될 풍광일텐데.....

다리라는 건축물은 어찌보면 가장 민중적이고 서민적인 건축물이다. 지역마다 민초들의 필요에 의해서 세워졌고 그들이 그 다리를 건너며 삶을 이어갔다. 이 책에 등장하는 궁궐의 다리보다 시골 장터를 이어주던 다리가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이다.거칠 거칠한 돌 속에 또 다리위를 덮은 이끼와 다져진 흙속에 그들의 발자국과 숨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궁궐의 다리를 보면 금새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반면 장삼이사들의 평범한 다리를 보면 장똘뱅이 아저씨와 빨래감을 이어진 아줌마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리위를 뒤덮은 왁자지껄한 소리도 쟁쟁하다.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이 자주하는 말중에 파리와 프라하의 다리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 조형미와 아름다운 야경 등등. 반대로 우리 도시의 다리는 냉혹하다. 다리를 그냥 기능적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의 냉정함이 대도시의 삭막한 다리를 만들었다. 하도 여기 저기서 뭐라하니까 이제야 한다는게 조명가지고 어떻게 바꿔본다는게 전부다. 그나마 안하는것보다는 낫다.하지만 빈 집에 조명 비춘다고 온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다리에는 세상을 건너고 삶을 이어맬 온기가 있었다. 그 정다움이 그립다. 

 

p.s) 올 여름 휴가를 강원도 쪽으로 가련다. 아직까지 몇개 남아있다고 하니 나막다리를 눈 속에 담아오고 싶다.어디에 남아 있는지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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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7-20 17:10   좋아요 0 | URL
전 모릅니다. -.-
다리 이야기 하나로 나즉나즉하게 써내려 간 글, 잘 보았습니다. 한적한 산길에 앉아 소슬바람 맞으며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어요. 아, 좋아요..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
노동은 외 / 민글 / 199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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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된다.학교 앞 서점에 흑백표지의 그럴싸한 잡지하나가 걸려있었다.지금 기억에 영화배우 '이경영'이었던 것 같은데...가물가물.표지 디자인이 당시로서는 신선했다.검은 흑백사진에 콘트라스트를 쎄게넣은 멋진 사진이었다.전체 1/4상단에 노란색 밑판을 깔고 '예감'이라고 큼직하게 써있었다.문화예술 잡지 제목으로 최고 아닌가....."예감" .뭔가 있을것 같은 예감에 책을 집어 들었다.

문화잡지란게 요즘과 달린 영화 뒷이야기나 음악팬들을 위한 잡지가 대부분이던 시대 군계일학하는 잡지였다.잡지의 전체 색깔은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민족예술계열을 반영했다.그런데 싯뻘건 색갈과 구호가 난무하는 잡지는 아니였다.그렇다고 후에 나온 "문화과학"처럼 어느정도 학술적 저변이 있어야 볼수 있는 잡지도 아니였다.세련된 편집과 진보적 의식을 담되 대중과 유리되지 않는 것이 이 잡지의 장점이었다.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던 압구정을 문화적 시각에서 접근하고 베스트셀러들의 헛점을 짚었다.한국락음악의 저항성과 상징성을 읽어내었다.또 미군 기지 주변의 삶을 다룬 포토에세이를 통해 반미문제를 표현했다.오윤의 판화를 소개하고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알려주었다. 아....그런데 미인박명이란게 잡지에도 적용되는가.3개월인가 4개월 나오더니 없어졌다.허망......아마 수익성이 맞지않았겠지.

이 책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에 나오는 글은 그 잡지 "예감"에서 접했던 것들이 몇 편있었다.그래서 책 이야기에 앞서 금새 사라진 추억속의 잡지를 먼저 떠올렸던 것이다.내가 그 잡지에서 보았던 글중 여기에 수록되어있는 것은 <케테 콜비츠><오윤><빅토르하라> 등이었다.그 외에도 이 책에는 20세기를 살았던 저항적인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들에 대한 소개가 들어있다.책 제목이 되기도한 러시아 시인 미야코프스키,영화<우편배달부>를 통해 친근해진 파블로 네루다,한참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밀란 쿤데라 등등.

우리나라의 예술인들도 수록되어 있다.박수근,윤이상,오윤,김순남 등이다.이들은 대부분 독자적인 어법으로 우리 예술의 수준을 업그레이드한 사람들이다.그리고 역사발전의 동력인 민중들의 목소리를 그들 작품속에 용해시킨 사람들이다.물론 20페이지정도로 그들의 예술과 삶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하지만 20세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옳바른 정치의식을 가지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함게 돌린 사람들의 흔적을 만나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인해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들도 생길 수 있다.과도한 정치성,또는 프로파간다적 예술속성등등.그런데 시대를 읽고 표현하는 법은 누구나 다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 말미에는 문화이론의 장이 마련되어 있다.다른 편들에 비해 조금 더 길게 수록되어있는 편이다.알튀세르와 그람시.그리고 르페브르의 문화이론을 요약설명한다.내가 이 책을 읽던 당시에는 르베브르의 이론이 눈에 들어왔다.거대 담론에 익숙해져 있는 분위기속에서 일상성과 모더니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만만한게 '구조주의'"해체'이던 (사실 그게 뭔지도 잘 몰랐다.) 접근법에서 일상성의 문제와 거대담론이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에 대한 의문과 분석은 신선했다.아마 20세기 문화이론을 좀 압축해서 보고자 한다면 책 말미의 소론을 읽어보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마 ....이 책은 서점 테이블에는 없을 것이다.서점 테이블 밑이나 아니면 헌 책방이거나.. 교과서에 나오거나 미술,음악사 개론에만 나오는 예술가 말고 다른 사람들이 궁금하다면 한번 읽어봄직하다.시대가 달라졌으니 큰 공감을 기대하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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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17 18:15   좋아요 0 | URL
<예감>, 심산 씨가 글을 많이 썼던 잡지죠?
오랜만에 그 잡지 이름을 들으니 반갑네요.
'심장'이 들어간 인상적인 책제목으로 <심장에 새기는 이야기>가 있죠.
가끔 와보겠습니다.

드팀전 2004-07-19 09:0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밀란쿤데라 편을 심산씨가 썻던 걸로 기억되네요.
근데...이 꼬마 참 귀엽네요.

바람구두 2004-08-30 18:36   좋아요 0 | URL
품절되어 제일 아쉬웠던 책들 중 하나입니다. 만약 품절되지 않았더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을 텐데요. 저는 제 책은 잃어버리고, 친구 책을 빼앗아 소장하고 있는 책이긴 한데... 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다시금 그리움이 새롭습니다. 리뷰 자체도 아주 훌륭하게 읽었습니다. 이제사 님의 서재를 발견하다니... 제 게으름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추천하고 갑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도록 하지요.
 
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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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년 봄으로 기억된다.당시 시국은 '분신정국'이란 이름으로 대변되듯 87년 6월 이후 최대의 급변기를 겪고 있었다.명지대 강경대 학우가 전경의 뭇매에 죽었다.그 후 학생과 노동자들이 이틀이 멀다하고 자신의 몸을 던졌다.당시 정부는 '전세를 뒤집기 위한 운동권들의 발악'이라고 분신정국을 규정했다.서강대 총장이던 박홍은 죽음을 유도하는 검은세력이 있다고 하며 이후 계속될 주사파 발언의 포화를  열었다.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김지하의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라는 칼럼이었다. 충격이었다.그리고 김지하의 명성 만큼이나 크게 분노했다. 70년대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써 김지하의 무게감.그 만큼의 실망과 분노가 함께 했던건 오히려 당연했다.진보적 인사들의 칼럼과 학교 대자보에는 김지하의 발언에 대한 비난이 가득찼다. 그러한 비난 속에서도 김지하에 대해 오래도록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발언이 '김지하 답다'고 했다.즉 그가 오래도록 심중에 품고 있던 생각을 밝혔다는 것이다.그렇다면 당시 김지하가  말하고자 했던 사상은 무었일까? 본인은 "생명사상'이라고 했다.

장일순을 알게 된건 그의 동지이자 제자인 김지하의 이름 덕택이다.제자가 유명해져서 스승도 유명해진 건가? 이미 알던 사람들에게야 장일순의 이름이 절대 낯설지 않았겠지만 일반인들은 김지하를 통해 장일순을 알게 된 경우가 많을 것이다.나 역시 그랬다. 그럼 여기서 약간의 상상을 더해본다.만약 '분신정국'의 상황에서 장일순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면 어땟을까? ..... 잘은 모르겠으나 이 책을 보고 난 후 내 나름대로 유추해본다면 그 역시 김지하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길 했을 것 같다. 당시 김지하의 발언은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그리고 그건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그와 장일순이 말하는 '생명의 보편성'으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다만 시기적으로 그럴 필요가 있었느냐는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장일순과 김지하 식의 저항은 흔히들 말하는 민주화세력과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지만 그 심연은 사뭇 차이가 있다.그 차이를 우리의 저항세력은 전장의 처절함에 동참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으로 구분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장일순을 70년대 암울한 시대 민주화 세력의 거점이던 원주캠프의 청지기로만 그를 기억하는 것은 지독히 편협한 시각이다.

 언젠가 k방송사의 <인물 현대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장일순을 다룬 적이 있다.아무래로 역사성을 걷어내고 형상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겠지만   '민주화의 숨은 일꾼' 으로서의 장일순이 상대적으로 많이 부각된 것이 아쉬웠다. 반면 이 책 <좁쌀 한 알>은 선생과 주변 사람들 사이의 일화를 중심으로 장일순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드넓은 우주적 사고의 일면을 보여준다. 장일순은 일체의 모든 것 속에 하느님이 들어있다는 세칭 범신론적인 태도를 취한다. '풀은 부처의 어머니'이며 '밥 하나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것이다.그의 시각으로 보면 세상에 갸륵하고 섬기지 않아야 할 것이 없다.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을 하느님처럼 모시고 나의 친구를 하느님처럼 모시고....창녀를 하느님처럼 모신다. 진리는 결국 하나의 것으로 귀결되니 종교의 편가름 같은 것은 그에겐 무의미한 짓일 뿐이다. 카톨릭 신자였지만 부처와 노자,장자 그리고 혜월을 가리지 않고 섭렵하고 받아들인다. 교회다니기때문에 법당의 향내 조차 맡기 싫다는 칭찬받을 (?) 신심의 주님의 종들이 도처에 깔린 이 사회에서 그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혼자 잡념에 빠져본다.

장일순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그의 무소유와 겸손함이다.그리고 그의 앎이 실천으로 배여 평생을 함께 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책이라도 하나의 CD라도 더 쟁여 넣으려 나. 조금 아는 지식으로 남들에게 뭔가 알려주려고 하는 나. 그리고 조금 아는 것도 이 핑계 저 핑계...현실적 문제 등등 운위하며 빠져나가는데 익숙해져 있는 나.그리고 그런 변명조차 인간적인 한계라고 선 긋고 맘편안하게 자려고 하는 나.... 이런 나는 얼마나 초라해지는 것인지....

그의 가르침은 '낮아 지고 낮아 지라는 것'이다. 내가 낮아 지지 못하면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고 세상도 변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장일순은 그의 멋진 글씨가 '고구마 장사의 글씨'만 못하다 했다. 또 유치원생의 글씨만 못하다 했다. '산길에 소리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가는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라고 말한다. 그의 집 가훈은 '하늘과 사람을 대해서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 였다.

나는 얼마나 사람과 하늘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사는지 반성해본다.잘난 맛에 사는게 인생이라며 얼마나 떵떵거리고 다니는지.....  얼마나 닦으면 표지에 나오는 장일순 선생같은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P.S) 이 책의 단 한가지 아쉬움이다. 지나치게 좋은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렇다보니 장선생의 고뇌와 번민들은 빈약하게 다루어진다.그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장일순 판 '용비어천가'로 읽힐 수 있다.오히려 그를 우리곁에 있었던 살아있는 누가 아니라 신격화된 누구로 보이게 하여 반감을 사지나 않을까 걱정해본다.기우라면 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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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4-08-22 23:28   좋아요 0 | URL
잘 읽고 갑니다...
 
국민으로부터의 탈퇴 - 국민국가 진보 개인, 반양장
권혁범 지음 / 삼인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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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때(그래 여기도 국민이구나.)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웠다.'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울랄라.....방과후까지 남아서 이걸 다 외워야 집에 갈 수 있었다.나름대로 잘 나가던 난 우리반에서 가장 먼저 이걸 외우고 당당히 책가방을 쌌다. 집으로 돌아갈 마음에 들뜬 내 뒤통수에 대고 선생님 왈 "넌 남아서 못 외운 아이들 도와주고 가렴'  ....'그럼 그렇지.... '   결국 국민학교 5학년이 다되도록 구구단도 못외우던 친구에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암기를 시켰다. 그러나 될 턱이 있나.해도 눈치를 보며 서산으로 넘어가려는 시간, 더듬더듬 외우던 친구들도 돌아가고 그 친구와 둘이 남아서 계속 '길이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생각하며 외우고 또 외웠다.  결국 선생님도 데이트를 가셔야 했는지 아님 중간고사 채점을 다 끝내셨는지 내일까지 다 외워올 것을 친구에게 다짐 받으며 돌아가도 좋다고 말씀 하셨다. 어스름 운동장엔 미루나무 그림자가 짙어지는 시간이었다. 친구는 콧물 덕지 덕지 묻은 소매자락으로 다시 한번 코를 훔치며 미안하다고 했다.또 선생님에 대한 원망도 빠뜨리지 않았다.난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대신 니가 내일 축구할때 꼴키파 봐야돼." ^^

 권혁범 교수의 글은 이미 각종 잡지를 통해서 자주 읽었다.그때마다 우리가 평소에 간과하던 부분에 대한 그의 핀셋으로 뽑아낸 것 같은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책 <국민으로부터의 탈퇴>에서도 그의 칼날은 녹슬지 않았다.그가 뽑아든 칼날의 대상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와와 한국민의 근대성이다.이 책은 우리가 지극히 당연시 여겨왔던 국가,국민,민족이란 개념에 대해 성찰적으로 바라보기를 요구한다.책은 3부로 구성되어있다. 1부에서는 국가주의를, 2부에서는 미국에 대한 인식을, 3부에서는 환경이나 젠더 문제를 주로 다룬다. 물론 책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비평의 관점은 탈근대적 정치사회론이다.이미 탈근대적 관점의 한국사회 분석은 무수히 이루어져 왔다.아마 그 선두에 계간지 <당대비평>이 있었을 듯 하다.물론 권혁범 교수도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으로 있었다.(지금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그 외에도 임지현 교수(물론 당대 소속이다)의 책들과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전설적 인물 문부식의 글등을 통해 2000년 필두부터 민족주의의 허구성과 국민국가의 폐해,한국 사회의 왜곡된 전체주의 구조에 대한 비판이 있어 왔다.특히 진보층에대한 비판적 성찰은 논쟁의 주요 화두가 되어왔다. 인문사회학 책치고 잘팔린 <우리안의 파시즘>같은 책은 이러한 탈근대적 관점의 한국사회분석 압축판이며 근대론자들과 탈근대론자들의 논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권교수는 우선 우리의 국가관에 대한 특징으로 '국가 무오류성'을 지적한다. 물론 여기서 국가는 '대---한민국' 이다. 신성화된 국가가 개인의 충성을 요구하기 위해 만든 것이 '단결'과 '애국'이다. 일상적인 생활 영역에도 깊숙히 침입해 있는 단결과 애국이란 용어는 개개인을 국가와 국민이란 이름으로 총체화 시켜버린다. 권교수가 이 과정에서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국민국가라는 이름이 필충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타자화'이다. 사실 모든 근대적 패러다임이 '타자화'를 통해서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이란 국가를 위해 우리가 타자화 시킨 것은 무었인지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다. 특히 권교수의 지적 중 인상적인 부분은 우리가 신성시 하는 국가라는 것이 무의식과 공론의 영역에서 실제보다 과장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권교수는 '위선적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즉 국민 개개인이 공동체는 선이며 공동체 중 가장 상위에 해당하는 국가나 민족을 중요시 한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국가에 대해 불신하며 개인적 혈연이나 학연등 전근대적 요소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근대론자들은 온전한 국민국가의 건설 미비를 그 원인으로 내세운다. 친일파문제라던가 장기간의 우익 독점적 정치구조,냉전이데올로기의 내제화,외국 군대의 주둔,민족 통일의 미완성 등과 같은 문제의 청산이 이루어져야 온전한 국민국가가 완성되어야 국가의 공적영역에 대한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것이다.사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근대론자들의 주장을 너무 단순화한 느낌이 들어 찝찝하지만 골자는 그렇다는 것이다. 기실 이 문제는 오래도록 치열한 공방이 되던 주제였고 요즘은 다들 중용적인 태도로 문제를 수용하는 듯하다. 권교수 역시 책 말미에 이 부분에 대해 개념적으로 '진보'와 '탈진보'의 중층적 해결이 선과제라고 밝히고 있다. 진중권 역시 <사회비평>에서 엘리아데와 푸코의 예를 들어가며 근대론자들의 발전주의적 해결에 반대하며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를 중층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 권혁범 교수는 민족주의의 보수성과 그 허구성에 대해 지적한다.그러면서 한발 더 나아가 저항적 민족주의 마저도 결국에는 자민족 중심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주의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민족주의가  더 이상 진보의 개념이 될 수 없다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하지만 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의 경험이 있는 우리 역사에서 저항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칫 반역사적이거나 몰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과거  경희대 도정일 교수는 <당대비평>에서  '내셔널리즘의 전면배척'에 대해 반대했다.패권적 민족주의에 반대하지만 피압박민족의 저항적 민족주의에는 찬성한다는 것이다.그러며 한마디 더 붙이기를 문화 다양성을 파괴하는 시장 유일주의 속의 반민족주의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반면 권혁범 교수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화의 경제적 부문만 부각되고 이에 대한 민족 경제적 반감에 대해 유의할 것을 주장한다.오히려 다양성이 서로 교류되는 '파이프현상'을 예로 들며 보편적인 세계주의 타당성 관점으로 바라보길 권한다.교조주의적 세계화 반대세력과 대세론적 세계화 수용세력 양자가 다 성찰적으로 돌아보아야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특히 세계주의적 관점이 적용되는 부문이 3부에 나오는 환경과 민족문제이다. 사실 환경문제와 민족문제는 별개의 문제처럼 작동해 왔다.권교수는 민족이 부국강병의 매커니즘 속에서 환경파괴를 지속적으로 감행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임을 지적한다.그러면서 제3세계가 환경문제에 있어서 환경파괴의 근본원인으로 제1세계를 지적하며 환경이슈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쉬워한다. 즉 귀책사유의 대부분이 1세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보편적 이성이 요구하고 전지구적인 컨센서스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환경민족론이 해악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야 준주변국으로 여기저기 눈치보며 적당한 수준에서 국제환경문제에 발을 담고 있지만 좀 더 고민을 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탈근대적인 사회분석에 매력을 느낀다.우선 지독히도 '우리'와 '하나'와 '대동단결'을 중시하던 한국 사회의 갑갑성에 대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대학에서도 분명히 그러한 느낌은 내게 간파당했었다.당시 목소리 컸던 사람들은 지난 대선에서 또 대개 큰 목소리로 '비지론'을 주장했다. ^^  물론 소수파도 있지만^^  또 한가지 거시담론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일상생활 영역을 움직이는 힘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반갑다. 하지만 내게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여론조사에서는 7:3으로 밀리는 이런 형국에 또 다른 탈근대적 접근이  현실적으로 어떤 힘을 발휘할 지는 의심스럽다.(그리고 ..나 군대 갔다 왔다. 이런 자기방어기제를 꺼내지 않아도 되는건 언제일까?)그나마 그런 이슈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역할이 아니었을까 위안해 본다.

후기) 아...국민교육헌장 못외운 친구...지금 생각해보니 그 집이 생활보호대상자 였던 것 같다.다 쓰러져가는 슬레트 집에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살았는데...  지난해인가 수십년만에 동창싸이트에서 그 친구의 글을 보았다. 여전히 맞춤법은 개판이더군.그래도  이름난 경비업체에 취직해서 잘 다니고 있었다. 그 친구의 글 말미에 코 끝이 찡해졋던 기억이난다. ' 우리 국민학교 동기들 중 가장 못난 ㅇㅇ 가 너희들이 보고 싶다." ...그 친구 옛날부터 골키퍼 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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