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다리, 내 마음속의 풍경
최진연 글 사진 / 한길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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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년 전 휴가를 앞두고 중고차를 하나 샀다. 결국 차값보다 수리비가 많이 들긴 했지만 그 자동차와 함께 한 첫번째 여행은 아름다웠다. 이름하여 남도여행. 전라도 순천으로부터 해서 화순,보성,구례 등등... 그날 그날 다음 여행지를 찾아가는 즐거움에 전북 고창,변산반도까지 돌아다니고야 말았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에 갔던 기억이 새롭다.조금 철지난 휴가여서 선암사 올라가는 산길은 고즈넉했다.비에 젖은 흙을 스르륵 밟으니 물기가 마음속 까지 소르륵 스며들었다. 몇 십분 올라가서 만난 무지개. 빨강 자주 보랏빛을  뿜어내는 무지개가 아니라 사람의 발자욱 소리가 들리는 무지개였다. 이 책의 소제목을 인용하자면 '시간마저도 멈춰세운' 선암사 승선교였다. 산길에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비에 젖은 돌들을 헤치고 냇물가에 앉아서 승선교의 홍예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짓말 처럼 시간이 가는 걸 잊을 수 있더라.바위들의 배치를 바라보고 바위 틈 사이의 이끼와 흙들을 응시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와 어울려 그 다리를 지나갔을 수많은 발소리를 들었다. 다리를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느낀 최초의 경험이었다.

이후 다리에 관한 좋은 인상은 충북 제천의 농다리로 이어졌다.진천 문백에 있는 농다리에 다녀온 것도 그러고 보니 비 온 다음날이었다. 농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교중에 하나라고 한다.내가 간 날은 그 전날 폭우로 반대편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다리 중간 중간이 물에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지네처럼 강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저편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갈 수없는 길들이 더욱 매력적이라 했던가.다리만 있었던들 다리만 잠기지 않았던들. 몇 백년전 언젠가 물건너 편으로 시집가면서 맘속의 연인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도 이 다리는 기억할 것이다.그의 아들의 아들중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피난 짐을 짊머내고 허겁지겁 이 돌다리를 건넜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농다리 앞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콸콸콸 흐르는 물길속에 농다리가 외로와 보였다.다리를 이루고 있는 돌 하나 하나가 살아 있는 살점인 양 물속에서 용트림을 하는 듯 했다. 어찌보면 용이 되고자 했던 이무기의 한이 농다리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이것이 내가 다리에 감동한 두번째 이야기이다. (진천의 문백은 농다리에 어울릴만큼 산수가 아름답고 조용했다.그래서 나이들면 은퇴하고 이리로 들어와야겠다 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행정수도가 연기쪽으로 결정되면 가까운 진천 문백도 돈 많은 이들이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 아깝다. 내 미래의 은신처를  놓쳐버리다니...)

이 책은 저자가 발품 팔며 기록한 옛다리에 대한 기록이다. 알려진 다리들도 있지만 풀숲에 가려져 잊혀진 다리들도 또 시멘트 바닥에 묻혀버린 다리들도 있다.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강원도 동강 근처에 있었다는  나막다리와 섶다리들이다. 영화같은데 보면 가끔 등장하여 아스라함을 주는 나무로 만든 임시적인 다리들이다. 동강이 인기있는 강이 되면서 시멘트 다리가 놓이고 더이상 아무도 나무다리를 짓지않는다고 한다. 돈도 없고 지원도 없는데 마을주민이 한해 쓸 다리를 만들 이유가 무었이겠는가. 그곳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도 나막다리를 짓는 법을 알지 못할 것이다.세상의 아름다움은 편리와 과학기술이라는 이름하에 또 하나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것이다.사실 나 역시 섶다리나 나막다리를 직접 본적이 없다. 하지만 사진으로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인다.덜컹거리는 다리위를 걸으며 아래로 흐르는 물살을 보고 싶다. 아찔하겠지만 영원히 기억될 풍광일텐데.....

다리라는 건축물은 어찌보면 가장 민중적이고 서민적인 건축물이다. 지역마다 민초들의 필요에 의해서 세워졌고 그들이 그 다리를 건너며 삶을 이어갔다. 이 책에 등장하는 궁궐의 다리보다 시골 장터를 이어주던 다리가 훨씬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때문이다.거칠 거칠한 돌 속에 또 다리위를 덮은 이끼와 다져진 흙속에 그들의 발자국과 숨결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궁궐의 다리를 보면 금새 그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반면 장삼이사들의 평범한 다리를 보면 장똘뱅이 아저씨와 빨래감을 이어진 아줌마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리위를 뒤덮은 왁자지껄한 소리도 쟁쟁하다.

유럽을 다녀온 사람들이 자주하는 말중에 파리와 프라하의 다리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 조형미와 아름다운 야경 등등. 반대로 우리 도시의 다리는 냉혹하다. 다리를 그냥 기능적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의 냉정함이 대도시의 삭막한 다리를 만들었다. 하도 여기 저기서 뭐라하니까 이제야 한다는게 조명가지고 어떻게 바꿔본다는게 전부다. 그나마 안하는것보다는 낫다.하지만 빈 집에 조명 비춘다고 온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다리에는 세상을 건너고 삶을 이어맬 온기가 있었다. 그 정다움이 그립다. 

 

p.s) 올 여름 휴가를 강원도 쪽으로 가련다. 아직까지 몇개 남아있다고 하니 나막다리를 눈 속에 담아오고 싶다.어디에 남아 있는지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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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7-20 17:10   좋아요 0 | URL
전 모릅니다. -.-
다리 이야기 하나로 나즉나즉하게 써내려 간 글, 잘 보았습니다. 한적한 산길에 앉아 소슬바람 맞으며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어요. 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