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 : 음탕한 계집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양지영.손재석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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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표지가 도발적이다.그동안 책들고 돌아다니기 무안했다.<플레이보이>지를 들고 돌아다니는 뻔뻔한 사람이란 인상을 줄까봐 지레 조심했다.그래서 항상 책의 뒤편이 바깥을 향하도록 들고 다녔다.하지만 한두번 실수도 있었다.주차장 아저씨 한테 월주차 끊어줄때다.지갑에서 돈 뒤적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워첼의 '퍽 유'하는 겉표지를 노출하고 말았다. 주차장 아저씨의 표정은 진짜 압권이었다.만화같았으면 '띠윙...퍽'하면서 쌍코피가 조르르 흘렀을 것이다.아저씨는 영수증 끊어줄 때도 내 옆구리에 끼인 책을 흘깃 흘깃 훔쳐봤다.책의 부피와 공사다망함이 겹쳐 거의 이십여일만에 책을 다 읽었다.두가지 이유로 마음이 홀가분하다.숙제를 다 마친 가벼움과 더이상 책 표지를 돌리고 다닐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번거로움으로 부터의 자유때문이다.

책의 들어가는 글이 상당히 길다.초반부터 '이걸 계속 봐야 하나?"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미국 저널리스트 글을 볼 때 느껴지는- 산만함이란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 낯선 접근들 때문이다.흔히 내가 곤란을 겪는 것들은 '변죽때리기'방식이다.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애둘러서 주제의 윤곽을 보여주는 방식은 가끔 혼란을 야기한다.애두르는 방식은 사실 공유된 문화의 점성에 비례하여 효과가 배가된다.타문화권에 있으며 또 번역을 통한-번역가의 자질이 또 개입되는 -이런 상황에서 애두르는 글쓰기가 효과를 발휘하기 보다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들어가는 글부터 워첼은 수많은 영화배우과 문학인,사건사고의 피해,피의자들의 실명을 거론한다.대개 하고자 하는 말은 거론 된 여성들의 왜곡된 삶과 그들을 억압한 마초적 사회의 한심함에 대한 것이다.읽는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그 예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또는 얼굴이라도 한번쯤 본 기억이 있다면 재미있을 수 있다.하지만 전혀 그녀들의 삶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경우 여기 등장하는 이름들은 실체를 갖지 않는 문자외에 별 의미가 없어진다.물론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에 대해 알지 못하는 독자의 지식수준을 책할 수도 있다.하지만 미국의 명사들에 대해 일반인들이 알면 얼마나 알 것인가.엘리자베스 테일러,비비안 리,마돈나,쉐어,드류베리모어.....이정도에선 반가와진다.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에이미 피셔,앤 색스턴,실바아 플라스,릭 골드슈타인.... 물론 책을 따라가다 보면 주요인물들의 경우 얼핏 그림이 잡힌다.하지만 무수히 등장하는 유명,저명,인기인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읽을 수 밖에 없다. 또 한가지 책 번역의 문제도 책읽기를 더디게 하는 일등공신이다.우리 문장에 주어부 다음에 쉽표로 끊어지는 형용사부가 4-5개 들어가고 서술부가 나오는 문장이 어디 있는가? 어떨 때는 서술어를 보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이거 주어가 어디지?"하고 주어 찾으러 거슬러 올라가야한다.대여섯줄 올라가서 보면 거기에 주어가 숨어있다. <타임><뉴스위크>등의 에세이를 대학다닐때 공부삼아 읽어본 사람이면 알것이다.이런 류의 에세이에는 쉼표로 문장을 끊어서 수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한국문장에 옮기고 있다.이런 경향은 책 말미로 오면 점점 심해진다.

이제 책 내용을 좀 보자.책의 첫장에서 워첼은 <삼손과 데릴라>의 성경이야기를 시작한다.삼손을 망친 여자 데릴라에 대한 변론이다.그녀의 지적은 생각없이 받아들였던 성경 이야기의 성정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팜프 파탈의 원조가 되어 버린 데릴라는 "한밤중"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여성에 대한 두려움,여성성으로 인해 야성을 잃어버리는 남성성의 탈취에 대한 우려.이러한 불안감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여성은 마녀로 여우로 악마로 규정된다.워첼은 반문한다.'남자들이 한 여자로 인해 붕괴될 만큼 그렇게 허약했는가? 그걸 인정하는 것인가? '라고 말이다.그녀는 삼손의 예를 들며 파탄의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는 것은 남자 자신들의 실책을 덮어두고 무마해버리려는 희생양 정책일 따름이라고 결론 짓는다.워첼의 이야기는 조금더 현대로 올라온다.에이미 피셔라는 10대 소녀의 이야기-피셔는 유부남 애인을 둔 10대소녀로 그의 부인을 죽이려했다-를 통해 언론과 사회가 이 사건의 핵심을 왜곡한 것에 대해 통렬하게 비난한다.이야기는 남자들의 소녀취향과 이에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10대 소녀들의 심리에 대해 말한다.사회심리학자 길리건화 브라운의 <교차로>를 인용한 10대 소녀들의 정서적 아노미상태는 아주 인상적이었다.너무 긴 이야기라 전부 다 쓸 수는 없지만 그 설명이 아주 설득력이 있다. 워첼은 힐러리 클린턴이 아내라는 위치로 자신을 숨기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한다.항간에 떠도는 힐러리가 페미니스트라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한다.또 수년전 외신 기사의 절반을 차지한 OJ심슨 사건에 대해서도 말한다.피해자인 니콜 브라운과 그녀의 가족이 살인교사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즉 팔아넘기기식 결혼과 아내 폭력에 대한 침묵이 그들 사이의 숨겨진 비밀이었다는 것이다.

긴긴 이야기 끝에 엘리자베스 워첼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마돈나의 말속에 있다."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만 제대로 가르친다면 남자에 대해서는 가르칠게 없을 거예요" 워첼은 사회적 억압과 편견 속에서도 경험을 넓히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친다.여성이 가진 욕망이나 성적 능력 역시 자신의 한부분임을 인정하고 여자들이 '더 많이' 갖기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론적 페미니즘서가 아니다.오히려 저널리즘적인 페미니즘책이라고 봐야한다.미디어속 인물들이나 유명인들이 여성문제의 사례로 등장하는 것이 과연 일반성을 가질 수 있을 지 의문이된다.여성이 공통적으로 받는 억압이란 측면에서 보면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하지만 개별 여성이 받는 질적 억압과 계급적 억압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얻을 수 없다.워첼이 가진 저널리즘적 가벼움과 미국 사회의 실용적 관심이 여기에 한 몫한다.신문에 난 대중문화 기사 읽 듯 즐겁게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글래머러스한 -표지를 본다면-저자의 상대적으로 가벼워보이는 문제의식은 현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여성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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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04 18: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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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5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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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농의 책을 읽다가 대학교 역사 수업시간이 떠올랐다.식민지 해방투쟁과 관련된 수업이었다.첫 시간에 강사는 이 수업의 기본 전제에 대해 말했다.일제 식민지 시기 우리 민족의 반제국주의 전선은 크게 두가지이다.하나는 민족개량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혁명론이다.우리 역사는 분단으로 인하여 폭력혁명에 대한 부분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반면 민족 개량주의는 당시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아주 현실적인 선택이었다.하지만 강사왈...그거 다 뻥이다.그리고 한 학기 수업에서 왜 민족개량론이 뻥일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식민지 현실에서 폭력혁명이 유일한 반제국주의 투쟁방법일 수 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하자고 했다.

일제시대 우리민족의 과제는 두가지로 압축된다.반봉건과 반제국주의.반봉건은 유교적 중세성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민권의식을 함양해야하는 내적 과제이다.이와 함께 외세라는 제국주의의 물결에 저항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지켜야하는 외적 문제 역시 해결되어야 했다.이러한 이중억압 구조의 혁파는 지상과제였다.많은 지식인들이 그 대안을 사회주의 혁명에서 찾았다.해방 이후 초기에서 중도좌파계열이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혁명전통의 순수성과 토지분배문제에 대한 민중들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었기때문이다.이 책<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서문에서도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민족혁명이 성공하려면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특징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의 폭력혁명이다.개인의 자유와 사적 자본축적을 이룩한 한 역사의 주체 부르주아지가 변증법의 틀에서 안티테제에 이르는 때가 필연적으로 온다.노동력만을 유일한 자본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은 승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사회주의 이상이 건설된다.프란츠 파농은 이 책에서 사적 유물론의 단계론적 세계관을 식민현실을 토대로 부정한다.파농은 저개발국에서 부르주아지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한다.식민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식민 모국의 부르주아지와 자신을 동일사하려는 속성을 보인다.거기에 그들은 편협한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민족을 대표하는 권력을 얻게 된다.이들은 또한 식민 모국이 심어준 인종주의적 편견을 그대로 답습한다.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여 "조선놈들은 게을러서......" 라는 식의 민족 부르주아지의 정서가 피부색을 달리한 사람들에게 적용되면 그게 인종주의적 편가름이된다.민족 부르주아지는 점차 자신의 민중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식민 모국,외국자본가들을 지향한다.결국 식민 모국으로 부터 독립이 될 지라도 광범위한 압력을 통해 식민모국은 그 영향력을 직접지배때보다 넓히게 된다.더 간단하게 말하면 식민국가는 신신민지의 형태로 바뀌게되는 것이다.

파농은 식민지의 자본축적이 중개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파악한다.식민지는 경제적으로 이중의 수탈을 받는다.하나는 자원의 공급시장이요 또 하나는 잉여생산물의 수요시장으로서의 역할을 갖는다.민족부루주아지는 이 사이에서 중개라는 형태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다.파농은 해방이후 중개업에 대한 국유화로 자원의 분배형평성과 민족부르주아지의 사적 자본 축적의 통제를 주장한다.

파농이 보기엔 혁명의 주체는 사회주의혁명처럼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파농은 프롤레타리아를 식민지사회에서 나름대로 수혜를 보고 있는 사람들로 본다.이들이 점차적으로 민족 부르주아화 되며 민족정당에 대한 지지를 보이게 된다.식민 모국은 지속적으로 분리정책을 주도한다.결국 프롤레타리아와 식민부르주아가 혼재하는 도시층과 농민과 기타원주민들이 산재한 농촌과의 분리가 이루어진다.파농은 혁명주체로서 후자인 농민을 들고 있다.그는 농민들의 혁명역량과 의식의 건강성에 대해 과하다 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치교육의 강화이다.농민을 비롯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현재의 억압을 뚫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농촌으로 잠입한 투사나 지식인들이 그 단초 역할을 한다.하지만 파농은 그들의 역할에 과다한 짐을 싣지는 않는다.그들 역시 민중속에서 그들에게 동화되어 배워야한다고 말한다.

이 책이 탈식민논의의 초석이 된 것은 파농이 심리학자였다는것이 큰 역할을 한 듯하다.식민지의 구조와 경제체제만을 논의한 것이 아니라 식민지 인들이 갖게 되는 내적 식민화의 부분을 파농은 심각하게 우려하고 그 원인의 소재를 밝힌다.우선 식민화된 인간의 공격성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인종주의적 이분법이 내재화된 이주민들은 원주민 통제를 위해 가공한 폭력을 일삼는다.식민지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원주민처럼 되길 꿈꾼다.하지만 이러한 꿈은 꿈일뿐 지속적으로 좌절을 겪게된다.내적 억압은 같은 억압을 받는 원주민을 향한 폭력으로 발산되는 양상을 보인다.특히 식민지 룸펜 프롤레타이아의 폭력은 주의를 요한다.혁명초기의 룸펜프롤레타리아의 폭력성을 어느방향으로 잡느냐에 따라 양날의 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파농은 기본적으로 식민지체제의 폭력과 원주민의 대항폭력에 같은 가치를 부여한다.식민체제가 폭력적일 수록 대항하는 힘도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파농은 이 에너지가 혁명투쟁으로 전환되기를 꿈꾼다.각성된 민중의,민중을 위한,민중에 의한 무장혁명이다.폭력투쟁은 게릴라전 양상을 띄게 될 것이며 또 식민모국의 유화정책에 교란될 것이다.파농은 단호히 전체의 변화가 아니라면 타협은 없다라고 말한다.또한 식민모국의 이분법적 사고로 내적 식민화된 사람들의 인식 해방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즉 검은 사람보다 더 검은 하얀피부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 그 반대도 항상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세밀한 관찰을 요구한다.

파농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탈식민화는 식민상태에서 벗어나는 소극적 입장은 아니다.파농은 말한다.탈식민화는 언제나 폭력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탈식민화란 쉽게 말해서 어떤 '종의 인간이 다른 종'의 인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과도기 같은 것은 전혀 없고 오로지 전면적이고 완전하고 절대적인 대체만 가능하다.파농의 이러한 주장은 현체제에 적용하는것은 과격한 주장이란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파농의 60년대 알제리와 현재의 시대는 다른다.하지만 억압받는 소수국이 거대한 제국에 저항하며 생존권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길이 쉬이 찾아지지는 않는다.물론 개량주의적 타협을 배제한다면 말이다.

우리 민족은 파농의 이야기에 정서적으로 닿는 부분이 생긴다.식민지를 겪었기때문이다.파농이 지적한 내적 탈식민화가 우리사회 제반 부분에 적용되는 것도 식민지 역사라는 토대가 있기때문이다.우리의 의식적 탈식민화는 일본제국주의의 억압대상자로서만 한정되지 않는다.신식민지상황 속에서 미국과 서구문명에 의존적인 역사 역시 내적 탈식민화의 영토가 된다. 또 등떠밀려나갔던 자의적으로 나갔다 미국의 세계전략 일원으로 참가했던 베트남전, 해외시장,국내등지에서 벌어지는에서의 경제적 착취문제등에도 자성해야만 한다.사르트르와 파농은 이렇게 자성의 목소리를 높인다.

"동포들이여 우리의 이름으로 온갖 범죄가 저질러 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다른 사람에게 내뱉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법정에 서는 게 두렵다면 자신의 영혼에게라도 말해야 한다."

 "내 몸이여,나를 언제나 의문을 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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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6 0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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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5-06-16 09:26   좋아요 0 | URL
**님께....감솨..감솨....
오타는 찾는데로 수정하겠습니다.제가 서재글을 쓸때 주로 회사에서 눈치봐가며 쓰거든요.아무래도 빨리 치다보니 오타가 있습니다.거기에다가 다시 한번 볼 틈도 없이 바로 등록해버리거든요.이후에 한번씩 보다 오타발견하면 그때 그때 수정하죠.지금도 하나찾았는데...찾아보면 많을거에요.알어서 읽어주셈.
 
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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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미국은 골칫덩어리다.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웃집 성질 나쁜 반장아저씨같다.과거에는 먹고 살려고 아부도 좀 하고 큰 형님 대접도 해줬다.일부 세력들은 그 와중에 반장아저씨네 편에 딱 붙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했다.또 여론조작을 통해 미국은 자유와 민주의 수호천사라고 떠벌여주었다.마치 조선시대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듯이 겉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반장아저씨 미국을 대한민국의 상국으로 모셔놨다.그래서 그런지 대한민국에는 한국민임에도 스스로 미국의 에이전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정계,재계,종교계,인터넷계에 만연한다.대통령이 비슷한 말 한번 했다가  욕을 바가지 바가지로 먹었다.미국은 그들에게 우상이다.그렇기때문에 더 골치아픈게 미국이다.

예전에 잘가던 술집 주인할아버지는 "X도 미국놈 X는 약이다"라고 늘상 말했다.한국전쟁 당시 초코렛얻어먹던 습성 때문인가.그 아저씨가 그런 말을 내뱉고 있을때 거리에서 성조기는 '훨..훨 ...' 불 타고 있었다.'양키 고우 홈' '반미반제' ....그렇기때문에 더 골치아픈게 미국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미국에 대한 두가지 극단적 시각에 제동을 건다.둘다 지극히 감정적이고 일면적인 요소가 있다.친미 세력들의 빅보스에 대한 과도한 충성은 더이상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라 언급을 하지 않겠다.미국에 대한 비판적 세력의 대미인식이 지나치게 레토닉 중심이었다는 것은 자기비판을 해봐야한다.거리에서 선전선동의 구호로 반미를 외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거리에서 길게 설명해가면서 이야기할 것인가.짧고 굵게 운율에 맞춰서...거리에서야 그렇다.그런데 반미의 의식 역시 그렇게 짧고 굵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간다.시대를 뛰어넘어 21세기에도 미국에 대한 반대의식은 감정수준이 주류를 이룬다.신문에서 인용한 몇가지 논리에 감정을 확 싣어서 광화문에도 가고 인터넷 도배질도 한다.

"이라크 침공은 무조건 석유때문이다.부시는 한반도에 불리하다 미국 민주당 캐리가 대통령이 되야한다." 이런 단순논리는 생각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에 대한 멋진 변명 역할을 한다.저자는 책 말미에서 미국의 대외적책이 결코 바뀐적이 없다고 말한다.오히려 미국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기때문에 일희일비하는 대미이중성이 발생한다고 본다.미국은 독립전쟁이후 줄곧 같은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그 작은 차이에 환호하고 실망하고 기대한다는 것은 피상적 대미인식이 가져다주는 또다른 의식적 의존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을 미국의 시각에서 파악하길 권하다.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와 역사에 대한 집단무의식으로 볼 수도 있다.저자는 우선 미국이 예외주의적 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다.미국이 인류사의 보편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때문에 정치,역사에 있어서 특별하다는 것이다.그 예로 미국은 봉건제가 없었으며 역사적으로 단일한,합의된 이념에 따라 움직여왔다는 것,또 계급갈등이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없었다는 점들을 들고 있다. 이 예외주의는 미국을 합의된 정치이념으로 움직이는 '합의주의 신화'라는 강박증을 만들어낸다.

이 합의주의 신화에 바탕이 되는 것이 '자유주의합의이론''공화주의 합의이론'이다.쉽게 말해 건국초기부터 미국 역사를 이끌어온 중추 사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른 구분이다.자유주의 합의이론에서는 로크의 사상에 기반을 둔 개인의 사적자유,공화주의 합의이론에서는 고대공화,마키아벨리로 이어지는 공민의식을 중심에 둔다.여기에 저자는 미국의 지배적 정신인 프로테스탄티즘,그중에서도 캘빈주의를 더한다.이 세가지가 저자가 말하는 '보수적 아메리카즘'의 구성요인이된다.저자는 '보수적 아메리카즘'을 독자적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즉 '미국의 보수주의''미국적 보수주의'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명시한다.앞서 말한 두 용어는 '자유주의'의 상대개념으로 하위가치를 지닌 반면 '보수적 아메리카즘'은 자유주의,공화주의,캘빈주의가 상호협력하여 융화되면서 발생하는 미국 정치의 내적 보수성을 밝히는 개념인 것이다.

저자는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정치문명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으로 보는 건국 초기와 연방헌법 제정시기에 촛점을 맞추어 미국의 정치문명을 조망한다.첫번째 자유주의는 영국의 로크에 힘입은 바 크다.혁명기에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중시 되었으나 19세기를 넘어서면서 아담스미스의 경제적 자유방임주의가 더해진다.하지만 이 자유주의에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있었는데 그것은 도덕주의이다.이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개입축소를 지향하지만 궁극적으로 덕성의 역할 역시 중요한 것으로 본것이다.이러한 점은 공민주의적 입장을 가진 공화주의와의 결합가능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미국 공화주의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식민모국 영국의 타락한 정치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비롯된다.미국 정치의 근원적 회귀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공화주의자들은 미국에서 고대 공화주의의재현을 꿈꾼다.반평등적인 평등주의 하에서 대통령(왕)/상원(귀족)/하원(대중)의 권력분립을 추구한다.또 공민적 실천을 위해 재산권-특히 토지과 무기소유 보장을 연방헌법에 담는다.인적구성면에서 보면 연방파-코트(상업세력)-자유주의를 한축으로 하고 반연방파-컨츄리-공화주의를 한 축으로 한다.하지만 이 두가지 근본이념이 갈등만을 한 것은 아니다.포칵의 말을 인용하면 '마케아벨리적 긴장'이라고 하는 덕성과 상업,덕성과 타락,사익과 공익의 대치 속에서 인식의 절충을 이루어낸다.공화주의적 틀내에서 자유주의의 사익추구나 상업이데올로기를 용인하고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가지 미국 정치이념의 기본 토대가 되는 것이 캘빈주의이다.캘빈주의 역시 공화주의적 불평등성에 정서적 가치를 제공해준다.또한 자유주의의 사익 추구를 선으로 규정함으로서 이 양자간의 조화를 가능케해준다.캘빈주의는 특히 미국인들이 가진 우월주의와 소명의식을 설명하는데 적합하다.미국은 기본적으로 '반대를 통한 정체성'확보를 특징으로 한다.캘빈주의는 반프로테스탄트,반이민을 넘어서 반미국적인 것들에 대해 부정하는 정서적 토양을 만들어준다.캘빈주의에 바탕을 둔 천년왕국론이나 소명론은 미국을 예외적인 국가로 인정케하고 미국의 대외팽창 및 대내팽창의 도덕적 안전핀 역할을 해준다.거기에 미국의 강박적인 도덕주의 역시 과격한 배타주의 성향을 보이며 미국의 우월성을 입증하는데 한몫을 한다.미국의 부시가 툭하면 종교적 용어를 사용하며 미국을 선으로 기타 반미국가를 악의 축으로 보는 것은 미국인들이 가진 캘빈주의의 선악관의 투영이다.

저자는 미국의 대외관을 끝으로 책을 정리한다.미국 대외관의 근본은 사회진화론과 캘빈주의적 선악관이다.현재 미국이 다자주의라든가 고립,개입주의라든가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여 미국 외교의 방향을 밝히는데 이것은 전부 옮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수사조각으로 본다.미국은 근본적으로 세계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확산한다는 의미에서 팽창주의를 펼쳐왔다는 것이다.즉 부시가 되었던 클린턴이 되었던 미국 외교원칙은 '팽창'이란 원칙은 불변이었다고 본다.욕먹는 부시 경우 이러한 것을 위장하는데 훨씬 미숙한 방법을 쓰고 있다는 차이뿐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말미에서 자신의 주장이 환원주의틀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자기비판을 했다.기본적으로 합의주의의 융합을 통해 문제에 접근했기때문이다.개별 합의주의가 가진 환원론의 성격을 융합시켜놓았더라도 결국 합의주의 패러다임의 환원적 성격은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 책에서 모든 미국의 정치 외교의 핵심원리를 찾으려 했다면 그것 자체도 모순일 수 있다.이미 저자는 책 서두에 이 책의 방법론적 접근에 대해 밝혔고 그 안에서 충실했다고 본다.이런한 내재적 접근을 통해 미국을 움직이는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이 개별 사안에서 또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아는 것은 독자가 연구해야할 몫이다.서점에 가보면 헌팅턴부터 촘스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미국관련 서적이 즐비할테니 말이다.

% 이 책은 지금 잠시 잠수하고 계신 바람구두님의 강력추천 덕에 읽었습니다.땡큐!! ..그나저나 언제복귀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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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현암사 동양고전
오강남 옮기고 해설 / 현암사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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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혼자 길을 걷다보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다.이름하여 '도인'들....  연인이나 친구들 처럼 우루루 몰려다니는 사람들에겐 잘 접근하지 않는다.좀 어수룩해보이거나 생각이 많이 보이면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   "도에 관심있으세요?"...  대개는 무시하면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가끔 은근과 끈기가 힘인 사람들이 있다.이런 사람들은 몇 십미터를 졸졸 따라다닌다.언젠가 그런 사람을 한 번 만났다. 어떻게 떨칠까 고민하다 내가 꺼낸 말..."저 맑시스트거든요.아시죠..빨갱이?"  .... 그 영업사원인지 도인인지는 벙찐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나 역시 '이거 효과가 생각보다 대단한데..'라고 느끼며 내 잔머리의 영특함을 스스로 대견해 했다.그리고 내린 결론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호환마마,불법 포르노 보다 더 무서운건 빨갱이구나.. 도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군."

나는 옛글을 좋아하는 편이다.노자의 도덕경이란 걸 처음 읽었던 것이 대학교 1학년때였다.사실 뭐 잘 알고 본 것은 아니다.그후에도 논어니 맹자,채근담같은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가끔 한시도 뒤적이면서 앞뒤로 오고가며 해석도 해봤다.나름대로 재미있었다.일단 옛 글은 압축적인 멋이 있다.또 나름대로 사리에도 맞는 말들이고...거기에 속물적인 정서도 하나 작용했다.어디가서 그런데 나온 글 하나 외워서 이야기하면 좌중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그걸써먹는 나도 유치하지만 또 거기에 "와...." 하는 인간들도 다 똑같다.

요즘도 마음이 혼란스럽고 세상사로 인해 감정이 울렁울렁 대면 옛글을 하나 찾아 읽곤한다.주로 법구경이나 숫파니파타를 본다.이 책 <장자> 역시 앞으로 그 목록에 들어갈 것 같다. <장자>의 내용이 선불교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는지 아니면 진리가 서로 닿아서 그런지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불교의 가르침과 상당히 유사했다. 우선 <장자>의 첫구절은 동물이야기로 시작한다.그 유명한 물고기 곤과 새 붕에 대한 이야기이다.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 만큼이나 유명하고 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야기이다.세상사의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로만 이해된다만 정말 아는지는 알 수 없다. <장자>는 물고기와 새의 변화로 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우화와 풍자,반어를 통해 현실의 한 차원을 뛰어 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우리가 이것 밖에 없다고 믿는 그 모든 것이 '우물 속 세상'이므로 마음을 수련하여 대양으로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선 해야하는 것은 "자신을 잊어라"는 것이다.<장자>제 2편 남곽에 사는 자기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것이다. 본문에는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라고 하고 있다.여기서 자신이라는 것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뿐만이 아니라 나의 실존을 구성하는 기타 모든 환경까지 포함되는 듯하다.즉 나와 나를 만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도는 버리는 것이라는 말 역시 같은 의미일게다.서양 철학에서 근대의 자아론이  탈자아론으로 변증법적 발전을 꿰하는데 <장자>에서는 이미 그것을 오래전에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나 니체,가깝게는 들뢰즈 이런 사람들의 말 속에 가끔 씩 선불교와 노장의 사상이 묻어나는것도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 속에 서있는 듯하다.광고에서도 자주 들려지는 말들은 자아정체에 대한 확실한 각인이다.흔히들 하는 '나는 나고 나는 세상의 중심이고' ...뭐 결국 소비주체로 당당히 서서 열심히 사서 쓰란 이야기인데도 괜히 그럴싸해보인다.특히 에고가 강한 젊은층에게 이런 메시지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장자>는 "내가 과연 나일까"하는 비판적 넘어섬을 또 넘어서라고 한다.불교에서 말하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마음일 것이다.자아에 대한 비판적 사유 역시 결국 '나'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일 뿐 진정한 넘어섬은 '오상아'-즉 나를 잃어버림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세상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한뿌리에서 나옴을 깨닫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분별심'을 없애는 것이다.<장자>에서는 마음 굶기기-즉 심재-를 통해서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깨라고 일갈한다.비교종교학자 답게 역자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한다."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가난한 것이나 마음을 굶기는 것이나 같은 말일 게다.여기서 말하는 이분법이란 것이 '너는 여당 나는 야당'하는 것이 아니다.남과 여,기쁨과 슬픔,삶과 죽음 ....등등등 세상을 구성하는 여러요인들의 흐름을 분별하여 보는 것을 삼가하라는 뜻이다.선악미추 생사 고락이 모두 평등한 가치가 된다.선불교에서 역시 인간의식과 감각의 위계를 없애라라고 말한다.어디서 주워들은 말 중에 "양단" 이란 말이 있다.양쪽을 모두 자르라..라는 그런 말이다.여기서 양쪽이란 것이 바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뜻한다.<장자>의 유명한 우화중 하나는 장자의 아내 장례식 대목이다.장례식에서 북치고 장구친 장자이야기이다.삶과 죽음을 같은 가치  equal value로 본다면 사실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굳이 논리적으로도 어긋남이 없다.몇년전 책이 소개되어 큰 감동을 주었던 스코트 니어링의 죽음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떤이들은 이러면 무슨 삶의 재미가 있을 것이냐고 반문한다.나 역시 한편으로 그말에 동의 하기도 하지만 장자가 말한바는 그런 1차원적인 것은 아니였을 것이다.세상사의 즐거움을 알고 관계의 유용함도 깨닫고 충만한 삶을 누리되 거기에 연연하여 큰 진리를 거스르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사상 중 큰 오해를 받는 것중 하나는 정치사상이다.장자의 사상이 현실은 비루한 것이니 연연해 하지말라는 것으로 파악했다.다른 말로 하면 있는 것은 있는대로....즉 가진자들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이런 무식한 말을 하신분들은 내가 대학다닐때 열심히 운동하시던 선배들이다.그들 역시 뭐 알고 말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고 몇몇 책들에서 주워들은 걸 게다.20대초반의 어리숙함을 지금와서 욕해봐야 무슨 소용있겠는가.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봐도 경솔한 제단은 아니었나 싶다.장자의 사상은 다 소용없다는 허무주의는 아니다.유가의 가르침에 비해 적극성이 떨어지는 (특히 맹자)것은 사실이나 장자는 정치의 다른 차원을 지적하고 있다.큰 틀에서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 안으로의 혁명을 주창한다.장자가 제시하는 정치는 수신에 우선을 둔다.그리고 그다음으로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을 진정한 다스림으로 본다. 이런 말이 나온다.

"명철한 왕의 다스림이란 그 공적이 천하를 덮어도 그것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변화시키는 힘이 만물에 미쳐도 백성들이 그에게 굳이 기대려 하지 않는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말을 기르는 일과 무엇이 다르겟습니까? 그저 말을 해치는 것을 없애는 것 그것뿐입니다."

무위의 정치이며 작은 정치이고 보이지 않는 정치이다.쉬워 보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참 위대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쉽게 재미있게 읽었다.한자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아니니 더욱 용이했다.내용중 일부는 이미 다른 책들을 통해서도 알고 있던 것이었다.그중 일부는 이미 나의 세계관의 한장을 구성하고 잇는 것도 있다.하지만 나는 책을 읽었으나 아직  읽지 않은 것과 같다.내가 읽고 느낀것은 글이지 <장자>의 세계가 아니다.내가 만약 열심히 닦아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정도쯤 된다면 그때쯤 <장자> 한번쯤 읽었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몇가지 잡념이 떠올라서 마지막에 쓴다.

내 생각에 결국<장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결국 "행"의 문제가 아닐까한다.장자가 실행의 문제를 딱히 지적한 바는 없다.하지만 모든 철학이나 사상의 중심은 행동이다.수많은 좋은 지혜와 세상을 꾀는 깨달음을 얻어도 자신의 손발이 그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또 한가지 생각은 이런류의 책에 감화 감동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요즘<장자>류의 책이나선불교,명상론,인도기행등의 책이 인기있다.하지만 이는 대중소비적인 '선사상''무위사상'이다. 여전히 자신의 삶은 분별과 자신의 이기로 가득차 있으면서 퇴근후에 도장에서 명상하고 마음을 비운다고 무었이 비워질 지 모른다.물론 아예 생각한번 해보지 않는 것보다야 훌륭하지만 취미가 되어버린 '도'라는 것이 과연 선인들이 찾던 그 '선'이고 '도'인지 모르겠다.그리고 가끔 만날 수 있는 어설픈 범우주적 세계관 역시 삽질한다고 생각한다.현실의 불의에 대해서는 별 말 못하고 또는 개입을 하려하지 않으며,늘 자신은 한차원 위를 바라본다는 듯 한 범우주론적 세계인들은 우습다.그런 고매한 분들에게 지상의 어설픈 시인 김수영은 "너의 중용은 비겁이다."라고 했다.스스로의 비겁을 형이상학이니 초월이니 하는 것은 고귀한 가르침으로 곡학아세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분들이 뭔가 알고 있다해도 실제 아는 게 없을 수도 있다.불교에서는 스님들이 화두를 앉고 몇년수행 하다보면 어떤 스님들은 큰 가르침을 깨달았다고 큰 스님을 찾아온다고 한다.이제 다 알았으니 내려가겠다고.본인들은 진짜라고 믿지만 그게 아닌가보다.몇년 절간수행도 그러한데 그까짓  책 몇권보고 마치 세상사 부질없다고 하는 위인들도 경계해야한다. 전부 키치다.키치적 작가들에 대한 키치적 만족이며 키치적 취미에 대한 키치적 낭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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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5-05-16 17:19   좋아요 0 | URL
신영복 님이 쓰신 나의 동양고전 독법 " 강의 " 읽고 있는데..동양고전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물이 샘솟는 깊고 맑은 샘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머리 속이 시원해 지거든요. 장자도 읽고 싶었는데 ... 드팀전님 리뷰를 보니 더더욱 간절해 지네요.

분홍달 2005-05-17 08:08   좋아요 0 | URL
그 어떤 훌륭한 생각이나 사상도, 행이 따르지 못하면 공허한 일이겠죠...리뷰 잘 봤습니당^^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게오르그 짐멜 지음, 윤미애 외 옮김 / 새물결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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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은 아웃사이더이다.그가 사회학계에서 받는 대접을 봐도 그렇고 그가 연구한 분야를 봐도 그러하다.사회학계의 이단아, 게오르그 짐멜의 이름이 20세기를 넘어서면서 복원된 것은 유명한 <돈의 철학>이라는 책 때문이다.그는 돈을 연구함으로써 일상의 소소한 영역이 어떻게 삶을 구성하는지 총체적으로 알고자 했다.짐멜은 화폐를 인간의 삶이 산출한 삶 이상의 것으로 파악한다.화폐를 통해 인간은 훨씬 넓은 자유를 맛보게 된다고 말한다.이외에도 짐멜이 다룬 주제는 유행,여행,식사,편지,장신구등 비사회학적인 것들이다.물론 현재는 이러한 주제들인 문화연구란 이름으로 사회학적,미학적 범주에 포함되어 제법 깊이 있는 연구성과물드이 나오고 있다.하지만 20세기 초반에 시도는 당시로서는 너무나 획기적인 기획이었을 것이다.같은해에 나온 프로이트의 <꿈의기원>과 짐멜의 <돈의 철학>은 이후 심리학과 사회학 양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원지가 된다.물론 결과적으로 프로이트의 책이 가져다준 충격에 짐멜은 자리잡을 곳을 찾지 못하고 한참 뒤에나 관심을 갖게 되자만 말이다.어쨋거나 짐멜과 비교할 때 베버와 맑스로 이어지는 사회학의 전통은 사회의 큰 틀을 제단하는 작업이었다.반면 짐멜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어온 일상의 영역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상의 영역이 재발견됨고 동시에 짐멜의 복원이루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짐멜의 일상성에 대한  선구적 접근이 미시사를 중심으로 현대성을 성찰하는데 그 사상적 기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대도시의 삶에 대한 분석을 잠깐 살펴보자.짐멜은 대도시에 사는 개인들에게 전형적인 심리적 기반은 신경과민으로 본다.이는 외적 내적 자극들이 급속도로 그리고 끊이없이 바뀌는 데서 기인한다.대도시의 삶은 화폐경제와 이성의 지배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양자는 사람과 물건을 취급함에 있어 순수한 객관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화폐가 현상의 개별성에 관심이 없듯이 이성적 관계 역시 객관적으로 평가가능한 관계에만 촛점을 맞출 뿐이다.짐멜은 대도시의 삶이 만들어낸 정신적 현상을 '둔감함'과 '속내감추기'라고 말한다.둔감함은 사물의 차이에 대해 관심을 갖지않고 사물 자체를 공허하게 받아들인다.속내감추기 역시 무수한 관계에 대한 내적반응을 피하기 위한 독특한 정서적 양식이다.반면 대도시는 화페 교역의 중심이며 자유의 상징이다.결국 이를 바탕으로 대도시인들은 질적 특수화를 추진한다.개인주의에 대한 선망이다.객관적인 문화보다는 주관적인 문화에 대한 동경이 대도시인들에게 자리잡는다.이러한 짐멜의 분석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물론 미디어의 등장이 문화의 평준화에 일정정도 기여햇던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공간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특수성과 질적 개인주의의 발현에 대한 지적은 옮바르다.대도시의 문화는 점차 질적 개인주의의 강화로 치닫는다.미디어와 활발한 외국문화와의 교류가 큰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도시인들은 자신을 평등화속에서 부각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다.색다른 유행,새다른 음악,색다른 음식....이 모든 것들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은 자본의 축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또 이에 대한 요구가 강한 대도시인들의 개인화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짐멜의 이야기는 식사쪽으로 이어진다.밥은 밥이지 거기 또 무슨 사회학이냐 하시 분도 있지만 재미있는 분석이 많다.우선 식사가 같이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혼자 먹으면 성질나빠진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시피 식사는 공동행위이다.이는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공동 식사의 신화는 같은 것을 먹고 마심으로서 공동의 피와 살을 만든다는 원시적인 표상으로 읽힌다.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식사라는 것이 자기 접시 위의 것만 먹는 이기적 배타행위라는 것이 은폐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식탁공동체에 대한 금지조항들이 역사적으로 등장한다.계급을 구분하고 이방인을 제외시키며 내적 확실성을 다지는 효과를 거둔다.또 공동 식사는 시간의 규칙성,식사 방법의 표준화,개인적 욕구의 자제등의 요소를 부과한다.결국 식사의 미학화는 유기체적 삶의 낮은 단계에 위치하는 매우 보편적인 욕구충족의 행동을 양식화시킨다.이는 매개된 사회하를 통해서 먹는 것의 단순한 자연주의가 극복되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식사가 뭐이리 복잡할 까 생각할 수 도 있다.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식사 형태가 거의 같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한 사회는 한 가지 형태의 식사양식을 가지고 있다.우리나라는 대개(딴지거는 분들은 매일 포크를 쓰시겟으나) 밥숟가락 하나와 젓가락 한짝이 중심이된다.짐멜도 직적 해듯이 접시들은 대개 좌우대칭 형태를 유지하고 색채는 가급적 단순화한다.그냥 무심하게 이루어지는 식사 행위에도 오랜시간에 걸친 표준화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책에는 이것 외에도 얼굴의 미학적 의미,장신구가 가진 심리학적 요소,스타일의 문제,사회적 신의가 가진 관계성의 문제,비밀이나 감사의 사회학적 접근,우리 오감이 가진 특수성등이 사회학적 시각으로 다루어진다.최근에는 문화연구에서 조금더 실제감있게 다루는 주제들이다.오히려 최근의 연구가 짐멜의 형이상학적 글쓰기에 비해 훨씬 쉽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짐멜이 이 책을 풀어가는 방식은 형식논리에 근거를 두고 대상의 특수성보다는 보편성에 촛점을 맞춘다.그리고 그 대상이 사회와 맺는 관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하다.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그리고 르페브르처럼 일상이 자본주의라는 큰 틀 속에서 식민화되어버린 관계성을 밝히지도 못한다.이 책은 개별 영역에 대한 작은 산문형식이기에 더욱 그렇다.하지만 일상의 영역이 철학의 대상이 되는 시점에서 그 출발점을 알린 위대한 아웃사이더의 글을 보고 싶은 분이라면 한번쯤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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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5-08 15:43   좋아요 0 | URL
재미있겠는데요. 식사에 대한 고찰.
우리나라 드라마엔 정말 밥먹는 장면 많이 나오쟎아요.
여기에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드팀전 2005-05-10 10:15   좋아요 0 | URL
TT 글쎄요.제 생각에...근대화이후 해체된 가족에 대한 이미지를 반영하는 듯 합니다.생각해보면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는 식사 시간외에는 없습니다.그것도 장성한 자녀가 있는 경우 한두명은 이러저런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요.하지만 식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그나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인 듯합니다.드라마 작가가 이를 알고 의도적으로 그랬든 아니면 상투적으로 그랬던간에 그의 의식 한 구석에 그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