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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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산이 깊으면 골이 깊고 태양 빛이 강한 날엔 그림자가 짙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생각이었다.리라이팅 클래식의 출발을 알렸던 이 책은 여러 언론의 찬사를 받을 만큼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다.우선 기획단계부터 신선했다.우리가 제목만 알고 읽기를 두려워 했던 책들을 순치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새롭게 번역하거나 평역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학자들의 시각으로 해체하고 다시 쓴다는 것이다.이러한 기획자체가 우선 매력적이어서 책이 출간된후 <이성은 신화다>를 읽었다.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을 나름대로 독해해 낸 책이었다.책의 내용 자체가 쉽게 이해되는 그런 류의 철학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리라이팅시리즈에서는 자기의 시각으로 읽어낸 글쓰기가 인상적이었다. 무슨 무슨 강독류의 책에서는 만날수 없는 신선함이었다.그리고 이어서 나온 니체의 책 역시 니체를 처음 접하는 사람조차 읽기 쉽게 쓰여져 있었다.물론 그 한권으로 니체 철학의 전체를 파악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저작 전체를 망라하며 관통하는 사상의 맥을 짚어내는 데는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그 책으로 인해 더 많은 관심을 유발하고 다른 니체의 책 역시 손을 댈 수 있다면 리라이팅 기획의 승리가 아니였을까 한다.

이번에 읽은 <열하일기> 역시 가장 큰 미덕은 글쓰기에 있다.인문사회학 책들이 훈장처럼 달고 있는 의고적이고 번역투의 문장은 책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저자의 박지원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쓰기를 통해 따분한 책읽기가 아닌 즐거운여행기를 읽듯이 책장을 넘겨 갈 수 있었다.사실 개인적으로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일부에서는 저자의 주관적 애증이 너무 많이 배인것이 아닌가 하며 따가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물론 사실이다.하지만 이는 인문사회학계에 팽배해 있는 아카데미적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는 차원에서 봐준다면 그다지 눈에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그동안 학자들은 자신들의 고루한 글쓰기와 현실과 유리된 언표를 통해 일반인과 유리된 '천공의 성'을 구축하였다.그들은 천공의 성을 기반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일반인에 대해 우월적인 위치를 누려왔다. 하지만 김종필 총재도 퇴임사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세상은 변했다고....... 외국서적을 대학원생들 시켜서 번역한다.그리고 한글문법에도 맞지않는 번역서를 자기이름으로 몇 개내고 연구실적이라고 올린다.아직도 이런 학자들이  많은 이 땅에서 자기식으로 읽고 자기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저자를 비롯해 수유연구팀이 고전을 읽어내는 잣대는 포스트모던론이다.특히 <열하일기>는 자살과 함께 국내  이름이 많이 알려진 들뢰즈의 이론이다.90년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름이 처음 알려졌을때 난 그게 한 사람의 이름인지 알았다. '들뢰즈와'는 이름이고 '가타리'는 성이고.....^^  10여년이 지난 지금 당시 제국주의론을 읽고 프랑크푸르트의 비판 이론을 읽던 사람들이 이제는 들뢰즈의 신도가 되어있다.저자가 책 서문에 밝혔던 자신의 지적편력은 동시대 책읽기를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일반적인 경우이다.아마 그 전위에 수유연구팀들이 있었겠지만.... 저자는 들뢰즈의 용어들을 중간중간에 감초처럼 넣어가며 열하일기와 연암 박지원을 분석한다.우선 박지원과 들뢰즈의 이론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이 신선하다. 저자의 시각을 따라가면 연암은 18세기가 낳은 대표적 양반 노마드중에 하나 일것이다.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과거 개인적으로 즐겼던 어느술자리를 떠올리게 했다. 30대 중반의 대학강사들과 우연찮게 합석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다.그들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푸코가 노가리가 되고 보드리야르가 고추장이 되고 부르디외가 이쑤시개가 되고 그랬다.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도 후식으로 빠지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이론에 정통한 것은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개괄은 하고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저자는 그 술자리의 담소처럼 박지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노마드를 들이대고 주름을 이야기하고 리좀을 빗대는 장면을 연출한다.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술자리 학출들의 지식인연하는 태도가 떠올라 조금 배알이 뒤틀렸다.(너 자유롭게 사는 구나 하면 될 걸...넌 노마드적인데..라고 한다.어설프기는...^^)

저자가 말하는 노마드니 리좀이니 하는 들뢰즈의 개념들이 매력적인건 사실이다.하지만 굳이 그런 심오한 말을 쓰지 않더라도 연암의 자유인적 속성은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의 지적편력과 자유인적인 기질은 여럿이 다루었다.이미 들뢰즈가 그런 용어를 서술하기 전부터 이미 수많은 기인들과 시대와의 불화를 겪었던 사람들은 있었다.오원 장승업은 어떻고 고려시대 만적은 어떠한가....그전까지 우리는 예인적 기질 또는 자유인 뭐 이런 비인문학적인 용어로 말했다.그런데 멋진 프랑스 용어들이 등장하니까 연암은 노마드가 되고 연암을 구속하던 조선이라는 공간은 홈패인공간이 된다. 훨씬 그럴싸해보인다. 저자는 자신이 공부한 들뢰즈와 가타리를 연암이란 대상에 맞춰 옷을 입히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역시 저자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저자가 말하는 노마드에 대해서도 한번 짚어봄직하다. 이건 사실 근대와 탈근대 논쟁에 늘 등장하던 이야기라 신선하진 않다. 또 한번 개인적으로 불운한 추억을 더듬거려본다. 몇년전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던 한 여성학 강사를 잠깐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대충 들은바에 의하면 집도 좀 살고 남편은 좀 더 산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노마드'란 단어가 나왔다. 그 강사는 일반인의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온것이 무척 신기한 듯했다.그 단어 하나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듯했다.(아마 이런 경험들많으실게다.언어는 권력 맞는 것 같다.)그분은 자신은 노마드적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자신의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고.......솔직히 좀 웃겼다. 그녀의 노마드적인 삶을 바탕해줄 수 있는 것은 그의 든든한 재력과 학벌과 박사학위증이다. 하루 하루를 걱정하고 전세금 올려달라는 주인의 말에 부들부들 떠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유목민이란 과연 무었일까? 정규직의 절반도 못되는 임금에 언제 짤려서 정말 유목하게될지 모르는 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마드란 무었일까? 지나치게 극단적인 예를 드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하지만 노마드라는 것이 개인의 가치관에 변화를 주는 윤리적이야기라면 충분히 이해가된다.꼭 들뢰즈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박민규의 소설<삼미슈퍼스타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법정스님,전우익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다 노마드의 실천적 예일것이다.하지만 전범일뿐 일상의 무었이 되기에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현실도피적이다. 물론 글쓰는 재주가 있어서 조직에 얽매이지 않거나 도자기라도 빚거나 통나무집이라도 지을 기술이 있다면이야 노마드도 멋질것이다.하지만......대부분은 더러워도 가족생각하며 담배한모금에 비굴함을 참는 샐러리맨이거나 도서관에서 책상파보지만 보나마나 실업예비생이거나 주부이거나 중소상인인데야 .......어떻게 노마드들의 공동체를 구현할 것인가.?

뛰어난 노고에 대한 칭찬에 비해 되지도 않는 험담이 길어졌다.젊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정을 쏟아 우리사회에 지적결과물들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것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이 계속될길 기원하며 더 좋은 노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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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아 2004-05-21 23:44   좋아요 0 | URL
며칠 전 부터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를 읽고 있는데
리라이팅이 꿈꾸는 반역의 글쓰기가
책보는 즐거움을 줍니다
또한 제 지식의 한계에 대한 계몽을 불러일으키는데
혹 그 계몽에 빠져서 어설픈 교양인이 될까
두려운게 사실입니다
그러자면 깨어있는 사람으로
반성하는 사유를 해야하는데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반성하는 사유님의 서재와 닮았네요

계속 반성하는 사유님의
지적인 글쓰기를 기다려봅니다

프레이야 2004-06-05 20:46   좋아요 0 | URL
이달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사서 보고 싶은 책입니다.
 
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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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전 동네 비디오가게에 갔다.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영화<여섯개의 시선>을 건져왔다.영화는 6개의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박광수,박찬욱,임순례등 이름이 적당히 알려진 감독들도 메가폰을 잡았다.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영화는 사회적 소수자들과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다루고 있었다. 그중에 한 편은 영어교육에 대한 강박증을 영상화하고 있었다.영어 발음을 좋게한다고 혀의 뒷부분을 자르는 -그 부분에 대한 명칭이 있는데 잘 모르겠다.-수술장면을 보여주었다. 이미 신문보도를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영상으로 만나니  잔혹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도대체 무슨 영광을 보려고 저런 짓을 하는지...도대체 좋은 영어발음을 위해 수술대위에 아이를 앉힌 부모들은 어떤 생각으로 세상의 한 켠을 지키고 있는 사람인지...

 우리는 하루 하루 서구 선진국이 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다.60년대 가난하던 시절에는 서구가 보여준 물질적 풍요가 그 목표였다.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이젠 그들의 경제뿐만이 아니라 사회문화 전반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다니며 심리학시간때 배웠던 '욕망의 발전 피라미드' 하위 단계에서 상위단계로 옮겨가고 있다.이제 서구화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려는 단계까지 이른것 같다. 인터넷에는 대한민국을 미국의 52번째 주로...뭐 이런 사이트도 있다. 한국이 답답하니 비판하고 씹는 것은 충분히 이해된다.나 역시 그러니까.그런데 이젠 미국의 한 주로 편입하는게 낫지 않느냐는 농담같은 이야기가 괴상한 논리로 온라인 안에서는 목소리를 높인다. 서구화된 의식자체로 만족하지 못하나 보다.그래서 아예 그들의 일원으로 편입되고 싶은가보다.

박노자는 서구인으로 우리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서구화 가면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우선 우리의 세계 인식이 서구 근대론의 틀 안에 공고화 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가 너무 당연히 여기는 자유나 자본주의 세계란 것이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지나가는 한 시기 중에 하나임을 밝힌다.서구의 근대패러다임을 불변의 진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중심과 주변이라는 타자화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로 파악한다.서구 패권국가의 중심-주변부 가치관 속에 우리는 서구의 근대프로젝트를 맹목적으로 쫓으며 중심부적 가치를 교육받고 믿어버리게 된 것이다. 지난 이라크 파병에서 우리는 서구-특히 미국-의 에이전시가 되어 버린 많은 한국인들을 보았다. 그들의 주장중 하나는 미국의 이익이 곧 한국의 이익이다라는 류의 생각이었다. 이미 의식이 미국에 종속되어 버린 이들에게 우리가 서있는 좌표가 어디인지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없을 성 싶다.그들에게 우리의 좌표는 미국이라는 국왕밑에 봉사하고 특권을 챙기는 봉건 영주의 장원일 듯 싶다. 미국이 최고의 우방이라고 칭찬해주면 그저 감사하고 자부심을 얻겠지...우리에겐 든든한 백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박노자가 미국만을 서구화의 주체로 보는 것은 아니다.그는 근대가 만들어 놓은 서구적 패권 자체를 문제 삼는다.그의 글을 첫장은 도스토에프스키와 러시아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복지국가라고 일컽는 북유럽의 원조문제에 대해서도 애정어린 비판을 가한다.자발적 원조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대상국을 원조국에 경제적으로 귀속시키는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박노자의 문제 의식은 개인의 인권과 인간성에 대한 존중이라는 모토로 적이나 아군에 상관없이 집단의 폭력성과 가학성 그리고 이에 대한 은폐를 폭로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부각하며 반대로 연합군 측의 독일포로에 대한 폭력은 숨겨져왔다. 적의 잔혹함은 그들의 조직의 반역사성,그들의 인간성 결여로 그려진다.반면 연합국의 반인륜적 행태들은 전쟁의 상황논리속에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악마와 싸우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위악이었다는 식의 아주 편리하고 대중설득력이 높은 논리로 위장하는 것이다.

 박노자는 서구에 대한 왜곡된 시각에서 시작해서 우리 내부의 가면을 벗기기 위한 작업으로 들어간다. 한참 논란이 많았던 동학의 혁명성에 대한 논쟁부터 한국의 진보논쟁 속에 지식인들의 학연주의등에 칼날을 대한다.물론 그의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을 그대로 수용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의 탈근대적 한국사회 분석이 많은 논쟁거리가 되어서 학계에 비판과 반비판의 토론을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박노자의 생각이 많은 부분 동의하면서 또한 그가 촉발하고 있는 토론의 건강성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세상에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고 위장하는  가치들이 많다. 대부분은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그 연유를 알지도 못하고 당연히 믿고 있던 가치들이 그런 과잉대접을 받는다. 우리가 믿고 있는 서구화된 가치들,근대적 가치들 역시 위의 것들중에 하나 일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우리가 우리의 좌표를 잡는 일, 무엇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철학적 과제이고 우리 교육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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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후회는 없다 - 에베레스트에서 사라진 맬러리를 찾아서
피터 퍼스트브룩 지음, 정영목 옮김 / 지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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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대에 대한 모험은 언제나 휴먼다큐멘터리의 주요소재였다.거기에는 환경과의 사투속에 인간 일반이 보여줄 수 있는 선과 악,용기와 무능이 동시에 들어있다.모험기는 한편의 잘짜여진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한 드라마 창고이다. 이 책 역시 에베레스트 산에 도전하고 실패했던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는 영국 BBC 방송의 의미있는 기획으로 시작되었다.그들은 1920년대 최초로 세계 최고의 산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실종된 멜러리와 어빈을 찾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그 래서 이 책은 두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책의 전반부는 주인공인 멜러리의 에베레스트 등정과 그에 부수된 이야기들로 이루어진다.그리고 멜러리의 실종과 함께 시작되는 후반부는 방송제작팀이 전설을 역사로 만들기 위한 여정으로 그려진다.

책의 전반부는 영국의 에베레스트 도전 약사이다.이부분에는 개인적으로 불만이 좀 있다.모든 것이 지극히 영국인의 시각에 입각하여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다시말해 제국주의 역사관 그대로이다.이 책은 영국인들이 20세기 초 지리학적 이유(?)로 인도와 네팔,티벳등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과정을 길게 보여준다.이 작업이 마치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열망때문인 듯 그려진다.하지만 이는 지극히 정치적인 작업이었다.어느 나라가 식민국을 건설하고 침략하려는데 지도도 없이 시작하겠는가? 이 지도 제작 과정에 물론 현지인들이 이용된다.지은이는 이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어설픈 휴머니즘적 입장을 취한다.하지만 목숨을 버려가며 간첩활동을 하며 지도를 만든 현지인들은 사실 제국주의 영국에 이용당한 것 뿐이다.어쨋거나 이러한 지도 제작 과정에 세계 최고봉이 발견된다.영국인들은 여기에 인도에서 지도제작을 담당했던 에베레스트의 이름을 붙인다.그래서 지금도 에베레스트라 불린다.하지만 이미 그 봉우리는 각 인접국 마다 나름대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백두산을 마운튼 화이트헤드 라고 부르면 좋을까?

어찌되었건 1920년을 넘어서며 영국은 에베레스트에 대한 도전을 시작한다.그리고 이 팀에 좌충우돌형 산악인 멜러리가 있었다.이 책에 나오는 멜러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쳐가면서도 직관적 산행을 감행하는 무모함,툭하면 잊고 다니는 덜렁거림,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우유부단함.바로 멜러리의 특징이다.그는 이론이나 경험보다 직관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산을 오르는 방법을 비롯해서 교사로서의 교육관 역시 그러했다.이런 사람은 사실 조직적으로 움직여야하는 산악팀에서는 골치아픈 존재이다.하지만 그의 직관이 가져다 주는 노련함과 열정은 에베레스트 팀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에서 마지막 정상정복조로 멜러리가 뽑힌다.지독한 추위와 강한 바람,인간의 의지를 꺽는 고산환경이 모든 대원을 낙오시킨 것이다.멜러리 역시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그 밖에 없었다.그리고 젊은 공학도 어빈과 함께 산에 오른다.그리고 실종된다.그가 과연 정상에 올랐을까? 이 책은 다시 책의 시발점이었던 문제제기로 돌아간다.

1999년 멜러리-어빈 촬영팀은 눈속에서 발견한 멜러리를 보고 이를 확신한 듯 하다.지은이는 퍼즐을 맞추 듯 유추해간다.그리고 멜러리의 정상 정복에 대해 긍정적인 결론을 낸다.같은 영국인이었기 때문일까?아니면 에베레스트와 하나된 멜러리가 보여준 강한 인상때문이었을까?

저자가 제시한 객관적 추론 역시 추론일 뿐이다.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왠지 멜러리가 정상을 정복했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졌다.전설을 역사로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속성때문인지 아니면 비극적 죽음에 영웅성을 부각하고 싶어하는 속성때문인지는 모르겠다.하지만 때론 인간적 한계에서 나오는 무모함이 성공을 거두는 것이 세상일이다.그런 이변 또는 예측불허가 없다면 세상은 훨씬 지루한 무언가가 될 것이다.언젠가는 퍼즐의 나머지 조각이 될 젊은 어빈의 시신도 발견될 것이다.그러면 좀 더 많이 알려지겠지만 그때까지는 에베레스트의 돈키호테의 성공을 믿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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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전선
허동현·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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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가장 역사학자들의 편애를 받는 부분이 개화기와 해방 전후 시기이다.그 이유를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우선 다른 시대에 비해 참고자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다음으로 당시의 역사가 현재 우리 시대의 문제와도 맥이 닿아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 책의 중심이야기 역시 개화기 즉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로 집중되어있다.

<우리 역사 최전선>은 이 시기에 펼쳐진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사상을 근대와 탈근대라는 두가지 시각으로 두명의 학자의 필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해방이후 우리 역사의 주류는 근대우월적인 사관이었다.대표적으로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부국강병론이 그것이다.그리고 저항적 민족주의와 일제식 국가주의가 우리인식의 주류를 차지했다.이러한 흐름에 반대하며 역사속의 개인과 소수자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는 흐름이 나온 것은 근자의 일이다.박노자 교수는 이러한 탈민족적,탈국가적인 역사해석과 소수자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 역사 최전선>에서도 박노자 교수는 탈근대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맡았다.박노자 교수는 근본적으로 서구의 근대라는 개념 자체를 무리하게 적용하는 과정의 문제를 지적한다. 부국강병이란 이름하에 무리하게 추진되는 일본따라가기식 근대화는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진리에 처음부터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갑신정변이나 황서영의 백서 사건들을 인류의 보편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 예이다.반면 허동현 교수는 박노자교수의 생각에 많이 동의하면서도 좀더 현실적인 시각을 제시한다.역사라는 것이 개구리 뛰듯 점프할 수 없다는 것으로 단계적으로 필요불가결하게 거쳐가는 과정으로 이를 설명한다.그러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근대'가 현실에 존재한적이 없음을 주장한다.하지만 두사람 다 우리의 근대화가 일본지향적이었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는 것에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한다.이는 그동안 우리가 반동적이었던 저항적이었던 전체라는 이름 또는 국가와 민족이란 이름에 개인의 희생을 너무 당연시 해왔기 때문이다.이러한 교육은 사실 아직도 유효하다. 예를 들어 지난 월드컵때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의 팀을 응원했던 한 네티즌은 수많은 네티즌들에 의해 매국노로 IMF를 몰고온 주범같은 부류로 몰렸다.(너 같은 X들이 많아서 IMF가 온 거다.라는 식의..) 얼마나 애국적인 국민인가? 다양성과 개인의 의지나 취향은 애국의 이름하에 묵살되어져야만 한다.이것이 우리들의 지배적인 역사관이고 국가관이다.

오래전에 그런 질문을 해본적이있다.만약 우리가 일본보다 강해서 일본을 침략했다면 우리는 선의를 사랑하는 민족이기때문에 '위안부'도 '일본에 대한 수탈'도 '일본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고문'도 하지 않았을까? 만약 '우리는 그러지 않았을거야 '라는 사람이있다면 교과서에 배운대로만 말하는 순진한 사람이거나 파시스트 둘 중에 하나였을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나온다. 일제시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일한 일본인-대개 좌파거나 아나키스트 였지만-들이다.이들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우리를 도왔기때문에 좋은 사람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잠재적 파시스트 일원이다.그들은 그들의 소신에 따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일본에 반대한 것이다.역으로 대한민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어도 그것이 인류의 보편적 정의에 어긋나면 반대하는 것이 진정 옳은것이다.우리는 주변에 너무 많은 애국자를 갖고 있다.해외에서 뛰고 있는 스포츠 선수들도 우리에겐 한국의 국위를 떨치는 용사이다.세계적인 음악가들에게도 그런 호칭을 붙인다.어디가나 애국이고 국위선양이다.

우리에겐 해결하지 못한 근대적 과제가 많이있다.하지만 단계적 발전만 주장하며 탈근대적 질문들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특히 우리의 왜곡된 근대가 낳은 패해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한다.지금쯤이면 우리도 민족과 국가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반성할수 있는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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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황광우.장석준 지음 / 실천문학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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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던 것은 대학 1학년 겨울방학때이다.낭만과 자유가 가득하리라 예상했던 한 해는 대형걸개 그림과 최루탄 냄새만이 자욱한 기억을 남겼다.방학때 읽었던 <선언>에 대해 용어상의 불편함은 없었다.아마 한 해동안 지속된 의식화(?)교육의 영향이었을까.지금 생각하면 철학적 이해나 공부의 깊이에 비해 열정많이 넘쳤던 사람들과의 세미나.싫던 좋던 한 해동안의 사회과학 공부는 맑스를 1년전 공산당 수괴의 이미지에서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로 옮겨놓았다. 변증법적 유물론,사적 유물론,정치경제학 등을 얽기 섥기 익히며 그 한해가 지났다.영문과 한글 번역이 함께 게재된 <공산당 선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기억 중 내게 떠오르는 것은 두가지이다. 우선 <선언>이 가지고 있는 함축성이다.그다지 길지 않은 글 안에 인간의 역사와 자본의 성장과 몰락,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미지까지 명료하게 써놓을 수 있다니.(그는 역시 천재였나!!!)

그 명쾌함에 대한 감정은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대로이다.시간이 지난 뒤에 읽어보니 또 한가지 느끼는 바는 맑스의 문장력이다.자고로 좋은 글이란 그 내용성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공력에서 비롯되는 문장의 힘이 필수적이다.<선언> 역시 위의 두가지 요소를 다가지고 있다.

<선언>을 처음 읽던 당시 가졌던 또 하나의 느낌은 <선언>이 유토피아적 묵시록 같다는 감정이었다.그러한 것을 목적론적 역사관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조금 뒤에 알았다.맑스의 직선적 역사관이 가지고 있는 문제와 장미빛 청사진에 대해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나의 시각이 문제였을 수 도 있으나 맑스 비판자들도 지적하는 편협한 계급관이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과잉기대,계급환원주의 등등이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했기 때문이다.그리고 당시에 공부가 서로 깊지 못했던 선배들의 지협적인 해석과 경직성,몰이해등도 도매급으로 맑스철학의 문제로 넘어가는 부작용을 만들기도 했었다.

어느 학자든지 시대적 상황과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맑스 역시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혁명의 분위기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 주요 저작들을 썻고 또 혁명운동의 브레인이 되어 주었다.그리고 100여년이 흘렀다.그의 자본주의 분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특히 노동소외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에서 보여준 바로 그 꼭두각시 같은 노동자의 모습.아무리 우리가 외피를 그럴싸하게 둘러친다고 해도 본질은 변하지 않고 있다.하지만 그의 철학을 우격다짐식으로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것은 <선언>의 진짜 의미를 또 한번 왜곡하는 것이다.흔히들 맑스 교조주의라고 하는 이 우격다짐은 이제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스스로는 부인하겠으나 공부가 어리고 의욕이 많았던 우리 선배세대들은 분명히 그러한 우를 범하였다.흔히들 말하는 일상적 파시즘의 영역에서 작동한 부분이 있었음을 외면할 수는 없다.물론 당시 시대의 절박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으나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가는 부분에 대한 반성도 필요한 것이다.당시 선배세대들의 우상이었던 몇몇 사람은 그렇게 비난하던 보수정당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고 있다.그나마 좀 다르긴 할 텐데...그래도 역시.

실업이 이 시대의 최대 인권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청년실업에 장년실업....등등. 일자리가 줄어들면 노동자가 되겠다는 실업자들도 힘들지만 현재 노동자들도 힘들긴 매한가지이다.노동의 강도는 높아가고 실업에 대한 우려로 낮은 포복자세로 출퇴근하기 십상이다.희망이 없는 듯 싶다.그래도 그래도 희망을 찾으려면 정치인이나 경제인은 아닐 듯 하다.결국 노동자만이 희망이 될 수 밖에....중산층이란 허위의식은 이제 버렸으면 한다.요사이엔 그런 의식도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아직도 국민의 80%는 중산층이라고 답한다.그만 속자.나는 월급 받는 임금노동자다.만국의 노동자와 억압받는 이와 개인의 자유가 사회적인 자유로 확장되길 바라는 이와 사회의 변혁을 위해 목숨바친 모든 이여 단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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