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인물에게 시간은 제한, 부적절한 것, 반복, 단순한 완료의 수단이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시간은 많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좁다란 통로를 통해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밀어낸다. 그러나 공간은 넓고, 가능성, 위치, 교차로, 통로, 우회로, U턴, 막다른 골목, 일방통행로 등이 가득하다. 실제로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토성의 영향 아래, 73~74 페이지)
책을 빨리 많이 읽기를 당연시하고 우쭐해 하던 허영심이 이제는 어느 정도 고쳐졌다고 생각한다. 단숨에 읽어치우는 소설의 생명력은 짧다. 관심도는 읽기를 마친 그 시점에서 뚝 떨어져 시야에서 점점 더 먼 곳으로 이동하다가 급기야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남의 손에 제일 먼저 떨어지는 것도 소설이다. 속도에 비례하여 빨리 잊힌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래서 천천히 느릿느릿 읽은 자리를 다시 돌아가 읽더라도 내게는 좀 어렵다싶은 책들을 꾸준히 산다. 그 책들은 언제나 시야를 차지하고 기다린다. 일 년이 지난 것도 있고 금방 산 책도 있다. 백 퍼센트 이해를 하지 못했으니 언제까지나 읽지 않은 책들로 남아 있다. 내 집을 떠날 일도 물론 없다.
이 책은 순차적으로 읽지 않는다. 목차를 살펴보고 익히 아는 이름이나 흥미로울 것 같은 장을 찾아 페이지를 후루룩 넘긴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느릿느릿 페이지는 망각하고 단어에 문장에 집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