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락한 피조물로써 늘 가짜 신들을 섬기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의 행동을 오해하고, 비생산적인 불안과 욕망에 사로잡히고, 허영과 오류에 빠질 위험해 처해 있다.(172쪽)

 

이 책을 통한 가장 큰 소득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었던 기억을 깡그리 지워주었다는 것이다. 연신 감탄사를 뱉을 만큼 멋들어진 문장 투성이였지만 읽고나면 공허해서 내가 무얼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당황했던 그 알랭 드 보통의 재발견이다. 또한 인생에서 이렇듯 오래, 많이 불안에 대해 골몰해 본 적이 없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는 영화제목처럼 삶에서 불안은 매 분 매 초 황홀과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 하지만 무의식이 외면을 사주한 것은 아닐까. 불안하면 죄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불안하냐 물으면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힐난할 테다. 불안할 이유도 필요도 없노라고 자만하면서. 그러나 현실은 얼마나 냉혹하며 나는 또 얼마나 지독한 불안으로 병들어 있는 지를 발견한다.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으로 내 안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정체모를 그림자의 본색을 드러내는,  붉은 빛의 표지에서 심상치 않은 오라를 뿜어내는 그것은 '불안'이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 사랑의 결핍, 속물근성, 욕망, 기대, 지위 때문이라고 하나하나의 근거를 들어 속닥거리는 저자의 친절함은 독약처럼 마음으로 스며든다. 불안이라는 씁쓸한 듯 달콤한 맛에 중독되는 건 시간문제다. 불안은 호수 밑바닥의 침전물이다. 어느 날, 누군가, 우연히 잘못된 실수로 휘저어 버리면 감당할 길 없는 혼란으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 때 떠오른 불안의 근원을 언제까지 무시할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 타인의 어떤 비난에도 스스로가 떳떳하고 올바르다면 굽힐 필요가 없는 것처럼? 아니면 그것은 인간의 숙명이므로 자신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해 버림으로써 초월하는 것은?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대해 말할 때 그거의 적당한 긴장과 불안은 삶의 에너지로 바뀐다고 한다. 스트레스에 짓눌려 바닥에서 허우적거릴 것인가, 그것을 추진력 삼아 위로 솟구쳐 오를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다, 라고. 거기서 강자와 약자가 갈리고, 현명과 어리석음으로 판가름 난다. 불안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탐색과 사유를 거듭해 철학자로 이름을 날리고, 저술가가 되기도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불안의 조각들에 채여 설 곳, 앉을 곳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기도 한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것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80쪽)

 

평소 경제관념이 제로라서 돈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면 심리 밖으로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나로서는  루소가 말하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두 가지 방법 중에서 단연 나는 후자 쪽이다.

'부는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   욕심을 갖지 못하는 것, 없는 것이 바보취급을 당하는 이런 세상에서 무슨 뜬구름 잡은 이야기냐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부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 이라는 것에 절대 공감이다. 글에서의 이런 위안까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는가.

 

그러나 비극 작가들은 저항할 수 없는 진실로 우리를 이끈다. 역사상 인간이 저지른 모든 어리석은 일은 우리 자신의 본성의 여러 측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내부에도 최악의 측면과 최선의 측면을 아울러 인간 조건 전체가 담겨 있으며, 따라서 적당한, 아니 엉뚱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 역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은 이러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면 기꺼이 말에서 내릴 것이고, 공감이 커지면서 마음이 겸손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성격상 약점이 다행히도 지금까지는 아무런 심각한 사고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언젠가 어떤 상황과 마주쳐 무제한의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위력을 발휘하면 자신의 삶도 쉽게 박살나, '어머니와 동침으로 눈이 멀다'라는 신문기사 때문에 고통 받는 불행한 인물과 마찬가지로 수치스럽고 비참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206~207)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조승희의 비극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것. 총기가 허용되는 나라였다면 저런 사건 부지기수로 발생하지 않을까. 핍박받던 외톨이 약자의 돌발적인 분노의 크기에 대해 말하기도 두렵다. 총기라는 건 손가락만 움직일 수 있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보복이 가능한 도구이므로 솔직히 살면서 이런저런 불합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체격이 작고 힘이 약한 여자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총기가 허용되는 상황을 몇 번 정도는 꿈꾸기도 했다. 물론 총기 허용으로 발생하는 범죄 빈도가 총기가 없어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해 일어나는 빈도보다 훨씬 높겠지만 그럼에도 만약이라는 영화 같은 상상은 매우 달콤하다.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롬바인'을 다시 봐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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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2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쪽의 글귀가 정말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 책 사두고 가끔 표지만 들여다보곤
하고 있지요. 얼른 읽고 싶어요.

겨울 2007-05-26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끌리는 내용입니다.
다른 책들은 굉장히 무덤덤하게 읽혀서 나하고는 안맞는가보다 했었어요.
 

 

읽는 도중에 몇 번이나 악, 이럴 수가를 외쳤던지. 각 장의 끝은 이야기의 완결처럼 충격을 던지고 작가는 궁금하시면 다음 장을 이라며 파안대소. 대단하다는 명성을 듣고 구입한 책이지만 기대 이상으로, 2007년의 첫발은 <핑거스미스>가 완승.


이제까지 읽은 소설 중에서 등장인물들의 대다수가 악당인 경우는 처음이다. 특히 세 명의 대표적 악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거기다 매력적이기까지. 핑거스미스(소매치기) 수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일장에서는 백치 같은 모드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고 믿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그러나 이장에서 속은 것은 모드가 아니라 수였다는 사실에 기함을 하고. 그런데 삼장에서 그 모드조차도 석스비 부인에게 속았다는 것에 뒤로 넘어갈 정도가 되어. 수와 모드에 대한 연민과 조바심으로 안절부절 하게 만들더니. 그 석스비 부인이 사실은. 결국은.


작가 스스로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설정의 많은 부분을 차용했노라 밝혔듯, 빅토리아 시대의 가난과 무지, 차별이 어떻게 사기와 협잡, 모함과 살인을 불사하게 만들었는지를 기막힌 속도와 필력으로 보여주는 <핑거스미스>는 <올리버 트위스트>와 교차하여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그 이상의 대단한 소설이다. 출생의 비밀이 있고, 엄청난 유산이 있다는 건 비슷하지만 그 모든 걸 뛰어넘는 로맨스, 사랑이 있다는 것이 다른 점. 더구나 두 여자, 수와 모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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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1-0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올해 첫 책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군요.

겨울 2007-01-08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는 <강산무진>을. 김훈의 책을 일년에 한 번은 읽는 거 같아요.
 

 

 

 

 

 

 

 

사 놓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읽게 되는 책에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어렵지는 않지만 타의 혹은 자의에 의해 망명, 유랑하다 죽은 자와 죽음에 대한 사색들이 상당히 암울하다. 그래서 저조했던 당시의 상황과 기분으로는 제대로 몰입하여 읽을 수가 없었던 것. 그러다보니 연이어 다른 읽을거리들에 점점 책장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읽다 만 책들이 시간이 흐르면 마치 다 읽은 듯 뻔뻔히 바라보기 마련인데 소설이 아닌 다른 것을 찾는 내게 딱 걸려들어, 이 12월에 온전히 만났다.


그의 여행이 언제는 고독하지 않았냐마는 이번 글에서는 유난히 쓸쓸함이 짙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텅 빈 마음이 느껴진다. 어쩌면 나이 듦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제애나 가족애, 어떤 사상이나 이념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수 없는 영혼의 서글픔 같은. 그의 디아스포라적인 감정과 사색은 태생의 우울이 아닐까. 그것이 역동적인 힘이 되어 살아 왔지만 찰나의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그는 고백한다. 그가 말하는 죽음과 삶과의 거리는 너무 가깝다.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두는 끈들은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 ‘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


국적이나 고향, 가족의 뿌리 안인들 그와 같은 방황이 없을까? 어디서 어떤 삶을 산들 천성이 고독과 죽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 상황에 처해도 누군 절망을 하고 누군 낙관을 하듯이. 그리고 나는, 세상은 낙관하는 이보다 절망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위안을 얻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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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2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이 책을 읽고 나시면 많은 실항민을 생각하기게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책 읽으면서 고향을 떠나 사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집니다.

잉크냄새 2006-12-2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생적인 외로움과 우울함, 고독을 천형으로 타고난 사람들...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겨울 2006-12-2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 동안의 고독', 잊고 있었어요. 집에 있는 낡은 책을 처분하기 전엔 다시 읽을 수가 없노라 생각했던 책 중의 하나였는데, 올해가 가기 전엔 반드시!

산타님. 저도 집을 떠나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고 있어요. 혼란한 역사 속의 한장을 기록하지 못한 삶일지라도, 인간 대다수의 삶은 디아스포라임을 생각하면서요.
 

 

오늘날 세계 곳곳의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식료품점에서 반조리된 냉동식품을 사다 먹거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그 먹을거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키워지거나 재배되었으며 어떻게 조리되었는지, 어디서 나는 재료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 음식들을 먹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그 동네의 식료품점에 진열되기 위해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해 왔는지, 그것이 그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자원이 투입되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재정적 수익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 괴물같이 변해 버린 기업들의 탈취를 중단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의 건강과 후손들이 살아갈 이 지구의 건강이 주주총회에서의 결정(그것은 당연히 기업의 수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결정일 것이다.)에 좌우되는 이런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거대 기업의 탐욕 앞에서 인간과 동물이 고통을 당하고 환경은 파괴되어 가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들은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너무나 많은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 그만 무기력증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를 인식하고서도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그저 현상을 되는 대로 인정해 버리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라고 큰 소리로 말하고자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차이를 만든다.”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제인구달, 희망의 밥상, 27쪽>

 

이 책은 눈으로만 읽고 지나치기엔 너무 절박하다. 첫 장부터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또박또박 옮겨적고 싶은 글이다. 결국엔 옮겨적는 걸로도 성에 차질 않겠지만. 이런 책을 교과서로 채택하여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엄마가 딸에게 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이런 책을 반복해서 읽어야 하고 달달달 외워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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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2-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업의 이윤추구는 '종자개량'으로 까지 이어져서 생물학적 변종에도 기여합니다.
식민지와 영세 소작농을 향한 경제적 착취와 생명에 관한 무서운 재앙이지요.
이런 문제에 직면해서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건
대개 눈에 보이는 '건강'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는거죠.
경제적, 생물학적 측면을 무시하구요.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카길'사와 '스타벅스'로 거론될 수 있겠슴다.
이건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니라 '착취'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우몽님의 지적처럼 교과서로 채택한다면 가난하거나 덜 풍족해도
지금보다는 더 많이 나누고,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을거라는 말입니다.
촛불이 모여, 횃불이 되는거죠

겨울 2006-12-06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유전자 변형 곡물, 식품, 작물, 사료 등에 관한 글에 충격을 금할 수가 없어요. 남의 나라 일이려니, 아직은 우리의 농업이 살아있다고 안일하게 생각했거든요. 정말 살이있나요? 이미 다국적기업의 달콤한 술책에 포섭되어 선량한 가면을 쓰고 뒤로는 이익에 눈이 멀어있지 않나요? 에효, 무서워요.
 

 

 

작가의 이름과 소재에 혹해서 구입했지만 읽는 내내 ‘왜 내가 이걸 읽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일단은 소설이라서 싫건 좋건 끝을 보았지만, 감동을 쥐어짜는 이야기의 미덕만은 박수를 쳐야겠다. 낯선 상황이지만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멋지다는 감탄사를 뿌리면서 몰입에 몰입의 노력을 기울이다가도 결국은 허구일 수밖에 없잖은가, 하고 맥이 탁 풀려버리지만, 거기까지 끌어당기는 중력만은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또 그것이 그들 소설의 결정적인 미덕일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듯 태어난 하루에 대한 아버지, 어머니, 형의 사랑은 가히 절대적이다. 강간범의 자식을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아버지는 신에게 묻는다. 신의 대답은. 너 혼자 생각해. 하루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게 그들의 선택이었다. 어떤 의문도 회의도 불신도 망설임도 없이, 한 치의 티끌 같은 거리낌도 없이 하루라는 생명을 존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로.   


이 소설은 읽는 이가 깊은 생각과 고뇌를 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냥 무조건 이런 결정을 내렸으니 받아들여. 한다. 교훈과 감동을 주기 위해 작정한 우화에 가깝다. 재미와는 다른 웃긴 이야기다. 그렇다고 웃음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우습지만 너무 진지하다. 강간범이 죽어 마땅한 인간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의 비정상에 가까운 윤리의식을 들여다보면 어이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하루의 친부라는 사실은 신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다. 출생의 가혹한 비밀을 끌어안고 결벽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하루의 극단적인 선택에는 ‘유전자’라는 천형을 짊어진 자의 고통이 배어있다. 슬픈 중력 삐에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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