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지구에서 가장 키가 크고 오래사는 생물. 나무는 동물과 바람에 씨앗을 묻혀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가로지른다. 봄에는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열매를 맺고 가을이 오면 잎을 떨어뜨리고 겨울에는 멈추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피어난다. 폭풍, 짐승, 해충, 세균, 박테리아, 인간에 의해 나무는 일상적으로 상처를 받고 그것을 치료하는데 평생을 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나이테를 만들면서, 땅 속 깊이 더 멀리 뿌리를 내리면서, 하늘 높이 더 멀리 잎을 튀워 올리면서 오직 한자리에서 수천 년을 살아가는 나무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 - P159
작은 섬에는 작은 열매를 좋아하는 작은 새가 많았다. 새는 섬 곳곳을 날아다니며 작은 열매를 먹었다. 새의 몸을 통과하고도 파괴되지 않은 씨앗은 흙 위에 떨어졌다. 씨앗은 파묻혔고 수많은 동물이 그 흙을 밟았다. 다람쥐처럼 작은 동물은 씨앗을 모아 곳곳에 숨겼다. 숨겨둔 씨앗을 까맣게 잊고 거듭 숨겼다. 그중 어떤 씨앗은 움텄다. 새싹이 올라왔다. 새싹 근처에는 새싹이 많았다. 동물은 새싹을 밟았다. 새싹은 죽지 않았다. 새싹은 흙과 비와 태양으로부터 스스로 양분을 구하며 수십 년 동안 뿌리와 줄기를 만들었다. 새싹은 어린 나무가 되었다. 9p-나무를 좋아하지만 나무에 대하여 깊이있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그냥 거기에 있기에 바라보고 지나가고 이파리를 모으거나 가지를 잘랐을 뿐이다. 오늘도 대추나무와 감나무의 가지를 잘랐다. 너무 키가 크다는 이유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잔가지 굵은 가지를 순식간에 잘랐다. 어떤 설명도 양해도 없이 무자비하게. 마치 이 모든 노동의 이유가 나무 탓인냥 그렇게 뭉툭한 모양새로 잘라진 나무의 굵은 기둥을 보면서 처음으로 죄책감을 가졌다. 넓은 세상에 심어졌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까. 다른 하늘 아래였다면 멋진 새둥지도 이고 지고 맘껏 키를 세우고 높이 날아올랐을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축복이고 구원이다. 이해도 인정도 받지 못하는 불행은 죽음보다 더한 의지의 소멸이다.
그는 연민과 불가해함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P85
다시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다시 읽으며 발견하는 새로운(사실은 늘 거기 있었지만) 문장에 숨을 멈추고 몰입하고 생각에 빠지는 순간들에 대하여는 끝도 없이 떠들수 있다.
그녀가 살았으면 하고 그는 바랐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그는 의문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버리려 했던 순간은 인생의 코너 같은 거였을 것이다. 아무도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부모, 그것을 방관한 남편이나 형제자매까지도- 철저한 타인, 혹은 적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가 다시 깨어난다한들 그 상황이 변해 있을 리는 없다. 이번의 시도는 충동적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시도할 수도 있다. 그때에는 좀더 주고명밀하게 모든 것을 진행해, 이렇게 방해받는 일 따위는 없을 수도 있다. 그는 차라리 그녀가 깨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어난다는 상황이 오히려 막연하고 지긋지긋해, 눈을 뜬 그녀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 P82
4. 슬픈 일몰의 아버지해질 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그러다 하늘 저편에서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가슴만 아픈 게 아냐.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몰라. 안진진. 환한 낮이 가고 어둔 밤이 오는 그 중간 시간에 하늘을 떠도는 쌉싸름한 냄새를 혹시 맡아 본 적 있니?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그 시간, 주위는 푸른 어둠에 물들고 쌉싸름한 집 냄새는 어디선가 풍겨오고, 그러면 그만 견딜수 없을 만큼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거기가 어디든 달리고 달려서 마구 돌아오고 싶어지거든. 나는 끝내 지고 마는 거야 - P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