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는 주위가 어두워져 가는데다 피로가 겹쳐 우울해졌지만, 해가 저물어버리자 오히려 조금씩 힘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민이 된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낮의 세계는 끝났지만, 밤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언제나 기대에 가득 차 있다. (105쪽)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인 관계. 아무리 외면해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순 없는. 그 소년과 소녀가 밤의 피크닉을 떠난다. 그리고 길 위에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들이 치뤄내는 성장통이 어찌나 달콤한지.

낮보다는 밤을 좋아한다. 밤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일반적인 피크닉은 상식적으로 낮에 이루어진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이런 행사가 정말 있는 건가. '밤의 피크닉'은 멋진 발상이다.   

중학교 2학년인 현에게 책을 건넸지만 그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읽어낼지는 모르겠다. 작고, 약하고, 울보였던 현이는 어느덧 남자의 모양을 갖추고 목소리를 깐다. 요즘은 한창 농구에 열중인데, 성장을 지켜본 입장에서는 길쭉길쭉한 손가락 발가락만 봐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예쁜 건, 간간히 건네는 책들을 대부분 소화해 낸다는 것. 운동과 공부하는 틈틈히 소설을 읽는 소년의 모습은 아름답다.   

'도서실의 바다'는 묘한 단편들이다. 위의 책 외에는 온다 리쿠를 몰랐기에 더욱 생경하다. '밤의 피크닉'에도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과 엇갈리는 미스테리 요소가 끼어 있다. 그 부분이 중요한 열쇠라서 뜨악스럽기도 했다. 단편들은 하나같이 미스테리와 판타지가 버무려진 영화의 줄거리를 읽는 느낌이다. 이 작가의 책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몰아서 읽으면 재미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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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 곳곳에는 장애로 인한 시린 기억들이 묻혀있다. 그것은 그녀의 진솔한 삶과 책읽기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처럼 자연스럽다. 문학의 숲을 거니는, 한가로운 산책처럼 친근하지만 심심하기도 해서 이 책에는 일찌감치 재미없음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기대한 것은 아마도 권태로운 일상을 뒤흔드는 치열한 글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혹은 알아도 간과한 무엇을 발견하기를 바랐는지도. 그건 사사로운 욕심이다. 읽는 책들 중에서 정말로, 정말로 맘에 쏙 들어 열광하는 건, 열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 다 읽은 책을 차마 놓기 싫어 머리맡에 모셔두거나, 그 책의 여운으로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이건 단지 순전히 투정이다. 엄한 책을 붙들고 하는 엄한 투정이다. 왜 감동할 수 없는가. 서글프지만 말라버린 감성 때문이다. 책읽기는 점점 음식과 닮아간다. 편식이다. 어려서도 하지 않던, 스스로 차려 먹는 밥이니 고칠 길은 멀지 않을까. 책읽기에 타이밍이 있다면 이 책은 훨씬 오래 전, 이십 대나 십 대의 뜨겁고 팔팔한 청춘에나 어울리려나. 아니다. 사람마다 기호가 있으니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내게는 늦은 감이 있다.




그녀는 장 영희라는 이름 앞에 붙는 장애인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타인은 그녀와 그녀의 장애를 따로 분리해서 바라볼 수가 없다. 그건 가령 특이한 머리모양이나 눈의 쌍꺼풀처럼 그녀를 결정짓는 인상 같은 거다. 어려운 문제다. 보면서 보지 않는 척,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오지'는 영화에 대한 내 기억과 사뭇 다르다. 꽤나 좋아라 했던 영화..... 다시 봐야지.  

 

   
 

그러나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상황은 말로우가 상상했던 것과 판이했다. 커르츠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문명의 계율을 벗어난 '암흑의 오지'에서 그는 온갖 무자비한 수단을 다하여 상아를 긁어모으고, 총으로 제압한 원주민들로부터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 받고, 불복종하는 원주민들을 죽여서 목을 잘라 장대에 꽂아 울타리를 치는 등 악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커르츠는 여전히 자신의 위대한 명분을 웅변으로 떠들며 "야만인들의 씨를 말려라"라고 적혀 있는 문서를 말로우에게 준다. 그러나 커르츠는 콩고 강 귀항선상에서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열병으로 죽는다. 문명의 가면을 벗은 인간의 악마성과 19세기 제국주의, 인종차별의 광기를 상징하는 인물 커르츠는 죽음의 순간에서야 자신의 삶에 대한 통렬한 자기 반성에 다다른 것이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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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장영희 교수님 정말 존경하는 분입니다... ㅠㅠ

로그인은귀찮아 2007-10-0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기도 많고 평도 너무 좋은데 말이죠. 책 속의 책들의 기억이 식상해서 일까요.
그나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기소침하지 마시길.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딜 가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법. -몽상-
 

 

 

 

 

 

K는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앉아 있었다. 머리는 맑았지만 현기증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그는 그걸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계절이 다시 바뀌기 전에, 모든 곡식이 비에 깨끗이 쓸려가고 햇볕에 마르고  바람에 씻기겠지. 나의 어머니가 이승을 살고 난 다음, 깨끗이 씻기고 날려가고 풀잎 속으로 빨려 들어갔듯이, 나의 손길이 닿은 곡식은 한 알도 남지 않게 되겠지.

그렇다면 도저히 두고 떠날 수 없는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곳에 나를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나야 하고, 우리들의 어머니를 떠나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집을 떠나지 못하고,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죽으려고 돌아와야 하는 그런 어린애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어린애일까? 나는 내 어머니의 무릎에,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의 무릎에, 그렇게 수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모든 이가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죽는 그런 어린애들의 집안 말이다. (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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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녀석에게 준다고 사 놓고는 내가 푹 빠져 읽어버린.

나뭇잎이라는 닌자 마을에 나루토라는 천방지축 외로운 꼬마가 살고 있었다. 설상가상, 꼬마는 만년 낙제생에 고아. 마을 사람들로부터의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며 그 반작용으로 일부러 말썽을 부리는 장난꾸러기지만 그런 소년에게 믿음을 준 선생님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이루카 선생님. 실력은 제로면서 나중에 커서 호카게(대통령쯤?)가 될 거야, 라고 큰소리 뻥뻥 치는 나루토. 나는 나의 닌자의 길을 갈 테야. 일단 꿈을 크게 가져라 인가? 하하. 

며칠에 걸려 읽고 나니,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다. 매력적인데, 악당과 대립하는 선한 사람들의 정신 구조는 어느 만화에서나 비슷해서 차별성이 희미해지고 만다. 힘을 얻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는 일족이나 가족, 가장 친한 친구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패륜이라니. 이런 사상이 성장기의 애들에게 어떻게 비출까. 그러니까 악당이지 정도? 낙제생도 나루토 같은 근성만 있으면 된다는 적당한 교훈과 무엇보다 대단한 스승과 운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 하여튼 매력적인 만화고, 만화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맨드라미는 참, 싱싱하기도 하다. 어지간한 녀석들은 말라 죽거나 벌레에게 먹히거나 이유모를 병에 걸려 있는데, 이 녀석만은 생명력이 흘러 넘친다. 우리집 마당 구석구석은 지금 채송화와 맨드라미가 만개해 있다. 맨드라미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예쁘다는 말은 솔직히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꽃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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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드라미, 참 예쁘단 말 안 나오는 꽃이죠^^
그래도 색깔만은 얼마나 선명하고 성질 있게 보이는지...
우몽님, 8월도 가고 있네요^^

겨울 2007-08-28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올 8월은 유난히 길고 지루했어요.
성깔 있는 꽃, 맞아요.
남이 뭐라거나 말거나 우람한 핑크빛 꽃대를 세웁니다.

잉크냄새 2007-08-2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애로선인의 팬이랍니다.ㅎㅎ

겨울 2007-08-2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라, 보셨군요.^^
전 카리스마 가아라의 드라마틱한 인생전환에 감동 먹고 눈물까지.....
 
8월, 당신의 추천 도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아이에 대해 “걘 야구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걔 머릴 열어보면 야구장이 들어 있을걸.......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하는 말 중 상당수가 단어들의 뜻 그대로의 의미가 아님을 아직 알기 전이었다. 나는 내 머리를 열어보면 그 속에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자, 어머니는 “아가, 뇌가 들 어 있단다”라고 하고, 주름진 회색 덩어리의 그림을 보여 주었다. 나는 내 머릿속을 그걸로 채울 만큼 뇌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다. 다른 누구도 그렇게 흉한 것을 머릿속에 넣어 다니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었다.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야구장이나 아이스크림이나 소풍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회색 뇌가 들어 있음을 안다. 내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든, 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는, 그 그림이 잘못 만들어졌다는 증거 같았다.

내 머릿속에 든 것은 빛과 어둠과 중력과 우주와 칼과 식료품과 색깔과 숫자와 사람들과 온몸이 떨릴 만큼 아름다운 패턴들이다. 나는 아직도 왜 내가 다른 패턴이 아니라 이런 패턴들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책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낸 질문들에 답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답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생각했다. 나는 늘, 아무도 한 적이 없으니 내 질문들은 잘못된 질문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다른 누구도 생각해 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둠이 먼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무지의 심해에 처음으로 닿은 빛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질문들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365~366쪽)

 

 

좋아하는 마저리에게 식사 한번 하자는 말조차 건네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보며 그것으로 됐노라고, 그녀의 주변 언저리의 공기나 그늘의 일부인 채로 만족하는 루의 여린 사랑을 쫓아가노라면 가슴이 저릿하다. 자폐를 가진 자신은 정상인 마저리로부터 결코 사랑 따위를 받을 순 없다고 체념하는 그러면서도 간절히 원하는 루의 섬세한 마음이라니. 소설에서 마저리와의 관계는 루의 사념들이 전부다. 통속적인 뭔가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정상인과 장애인과의 사랑 이야기는 아니니까. 마저리는 루가 현재의 익숙한 세계를 깨고 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계단 같은 존재다. 그 계단이 없이는 벽을 오를 수가 없다. 소설을 다 읽은 뒤,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에서는 안도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기억하기를 바라면서도 기억하지 못해서 다행(?)이라니, 참.




자폐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뜻인지 혹은 아닌지 의문을 느끼기도 하지만 루는 주어진 현재에 최선을 다한다. 그는 보고 듣고 배운 대로의 삶을 완벽하게 살아간다. 마치 프로그램화된 로봇처럼 기억 속의 매뉴얼을 따라서 반응하고 말하고 사고한다. 루에게 친구란 절대적 신뢰관계에 있다. 화를 내서도, 의심을 해서도,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그렇게 구축한 불완전하지만 안전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친구라고 믿었던 돈으로부터 이유모를 공격과 폭언을 들으면서 깨어진다. 루는 조금씩이지만 변화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가 가보지 못한 곳, 체념하거나 포기했던 꿈을 선택을 때임을 자각한다.




그 자신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싶은 순간들. 그가 정상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달라지는 호의적이지 않는 낯선 사람들의 시선과 질문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간절한, 간절한 소망의 실현이 그것이다. 그는 마음껏 별을 보고 싶지만 낯선 길이나 공간이 두려워 떠나지 못한다. 정상인들이 쓰는 말의 이면을 분석을 통해서가 아닌 그저 직감과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원한다. 그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에 대해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자각하는 순간 그는 선택한다. 가진 것을 모두 잃을 수 있는,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안정된 직장, 그리고 생명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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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8-28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한번쯤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네요.^^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겨울 2007-08-28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낸다는 것에 회의가 느껴지는 즈음입니다.
아마도 권태일까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시길.

물만두 2007-08-2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었습니다.
루를 보면서 그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부럽더군요^^

겨울 2007-08-2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 읽어서 기분이 좋은데요?
사실, 저도 루가 여러가지 면에서 부러웠어요.
정상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단어인지 생각했구요.
다시 한번 읽고 싶은 멋진 책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