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입원하셨다는 할머니 소식을 듣고 차비를 차려 내려가면서 싸들고 간 몇 권의 책 속에 들어있던 소설집에서 유독 절절하게 와 닿았던 짧은 글이다. 암의 발병과 함께 뒤를 가리지 못하고 앓아누운 어머니를 간병하는 딸은 죽음에 이르는 그 짧지만 긴 시간을 그렇게 표현했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라고.


할머니가 좀 더 건강하셨을 때, 농담처럼 누운 자리에서 똥 누기 전에 죽겠노라 그 이상 사는 건 상상도 못한다는 듯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말에 별소릴 다 하신다고 눈을 흘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할머니에게만은 절대 그런 날이 오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래서일까. 링거액을 맞으며 죽은 듯이 누워계시는 할머니가 낯설었다. 그 강하던 자존심과 청결에 대한 결벽증을 어디다 흘려두고 눕고 일어나고 앉는 동작에도 안간힘을 쓰시고 지척에 있는 화장실로의 거동은 어림도 없는 것이다. 결코 누구도 특히 할머니가 원치 않았던 길이건만 어느덧 그 길 위에 서 계신다. 기억을 갉아먹는 세월의 벌레가 있어 야금야금 할머니의 머릿속을 파먹는 것 같다. 그저 운이 나빠 넘어졌을 뿐 뼈나 머리에 아무 이상도 없노라고 병원에선 말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할머니가 아니시다. 마치 나쁜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다. 병원에서 지내는 이틀 동안 내내 그랬다.


어머니 옷갈피에는 어디서 난 건지 흔히 향비누라고 일컫는 냄새 좋은 세숫비누가 구메구메 들어 있었다. 화장품을 살 때 선물로 얹어주는 작은 향수병도 몇 개 마개가 헐겁게 잠긴 채 들어 있었다. 행여 늙은이 냄새가 날세라 그렇게 철저히 대비를 했던 것이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추레해지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어머니다운 자기 관리였다.  


소설 속의 어머니처럼 할머니도 서랍장의 옷 사이에 선물로 들어온 세숫비누를 까서 넣어두는 걸 좋아하셨다. 양말 한 짝도 대충 넣는 법이 없이 윤이 나도록 매만져서 반듯하고 정갈하게 정리정돈을 하셨다. 세탁한 빨래는 적당히 말랐을 때 걷어 구김을 펴고 손닿는 곳에 늘 걸레를 두고 닦고 또 닦으셨다. 골목 어귀에 버려지는 불법 쓰레기를 늘 손수 치우셨고 집 앞은 물론 길 가에 버려진 휴지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으셨다. 그랬던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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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22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짠합니다.
할머니 빨리 회복하시길 바랄게요.

겨울 2005-10-22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쉬이 일어나질 못하시네요.

로드무비 2005-10-27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세가 있으셔서......
 



 

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의 감회라니. 이게 어인 떡이냐. 속으로는 웃음을 감추고, 껄렁한 표정으로 책방 주인에게 얼마냐고 묻고, 가격을 흥정하고, 예상대로 거저나 다름없는 값에 낙찰을 본 후, 너무 좋아서 역시 속으로만 웃었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뭔가를 좋아해서 가지고 싶다고 해서 당장에 그것을 찾아다니는 열정이 부족한 나는 이렇게 우연찮게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가 진짜로 행복하다. 돌부리를 걷어찼는데 굴러가던 돌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오백 원짜리를 토했을 때랄까? 비유가 이상하네. 사바스 카페를 처음 접한 게 8년 전 쯤? 막 만화책의 재미에 빠져들 즈음이었다. 일본만화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되어 그 후 정신없이 온갖 만화를 다 읽기 시작했다. 가질 수만 있다면 꼭 가지고 싶은 만화 1순위였지만 막연히 구하기 쉽지 않은 만화려니 하고서 포기했는데, 이런 우연한 행운이 따라주다니. 아, 행복해서 죽을 지경이다.


아름다운 건 월요일의 아이

품위가 있는 건 화요일의 아이

울상을 짓는 건 수요일의 아이

여행을 떠나는 건 목요일의 아이

매력적인 건 금요일의 아이

고생하는 건 토요일의 아이

귀엽고 명랑하고 마음씨가 고운 건 일요일에 태어난 아이 


<목요일의 아이>라는 소설도 있었는데,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고 나름 심각한 대화도 나누고, 하나같이 모두 여행을 떠나는 목요일의 아이를 꿈꿨었는데. ‘마더구즈’의 노래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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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8-14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바스카페.. 너무 좋지요? ^^ 이 책 보면 저는 행복해지더라구요..
좋은 책 구하신거 축하드려요~

로드무비 2005-08-1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오래 전 운좋게 구했답니다.
우울과 몽상님이 좋아하시는 모습 보니 덩달아 기분 좋네요.^^

겨울 2005-08-1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로드무비님, 반갑습니다. ^^ 출판사에서 덤핑 처리한 책인지라 귀퉁이에 약간의 칼질을 당했지만 상태가 아주 양호합니다. 워낙 오래된 책이라 누렇게 색이 바랜 것은 감수하구요. 두 분 다 이 책을 가지고 계시다니, 기분이 두 배로 좋아집니다. ^^

딸기 2005-08-14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과몽상님, 오랜만인듯해요 :)

겨울 2006-08-3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딸기님! 그동안 귀차니즘 병에 시달리느라요. 오늘 말복인데 맛난 것 드셨나요? 전 토마토와 옥수수, 오이를 주식으로 삼아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방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습니다. 어젯밤, 만화책을 읽느라 잠을 못자서 정신이 몽롱한지라 마당가에 쑥쑥 자란 잡초를 뽑은 후 샤워를 하고 나서 낮잠이나 잘까 합니다. ^^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다.(p. 154)


이 책은 에둘러 비유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게 아니다 라고 말한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서 하늘을 바라보기를 부끄럽게 만든다. 잘 못 알고 있는 것, 감추어진 진실, 허위의식, 가면을 집어던지라고 한다. 이제까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부끄럽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물 따위 쉽게 가볍게 흘리지 말라고 한다. 연민이라고 믿은 것이 혹여 쾌감이 아닌가를 묻는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섣불리 강한 척을 하거나 손가락 하나 내미는 것으로 동정의 의무를 다했노라 교만하지 말라 한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 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p. 167)


아프가니스탄 카불시의 한 화상병동을 취재한 방송을 보았다. 이제 막 열두 살이 된 소녀가 등유를 온몸에 들이부었다. 아버지에게 팔려 시집을 갔으나 남편과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분신을 기도했단다. 이웃의 남자가 주변을 맴돌며 관심을 보였다는 이유로 분신을 기도하여 전신에 화상을 입고 아프다고 소리치는 소녀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버지나 남편이 아닌 남자로부터의 그러한 행위는 강간과도 같다. 그래서 소녀는 순결을 잃었다고 믿으며 등유를 들이부은 것이다. 며칠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텔레비전의 그 이미지를 통해서 나는 내가 거기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안도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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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릇 불길하고 꺼림칙한 것. 하등하고 기괴하여 흔한 동식물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 여겨지는 것. 예로부터 사람들은 그 이형의 무리에 대해 두려움을 품어왔고 언제부턴가 이들을 한데 묶어 '벌레'라 칭하게 되었다.

오, 놀라워라. 이제 겨우 1권을 읽었을 뿐인데 묘하고도 묘한 만화다. 어째서 이런 만화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충사, 벌레를 다스리는 인간? 아니 벌레의 생성과 소멸에 박식한 인간이려나? 물론 여기서의 벌레는 현실에 실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망상 혹은 몽상에 있을 법한 벌레와 그 벌레와의 기생 혹은 침입으로 병든 인간을 찾아다니며 치유하고 다스리는 충사의 신비롭고도 매혹적인 이야기에 더위가 한발 물러선다. 충사라 불리는 킹코라는 인물의 성격은 잘 모르겠다. 이야기마다 슬쩍 끼어들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변인으로 서다. 만화로의 몰입을 유도하는 것은 짧은 얘기 속의 비운의 주인공들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기괴한 운명에 놓여져 있는 천진난만에 가까운 무표정의 어린아이를 보면서 어떻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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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7-19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세주판으로 4권까지 있잖습니까...ㅠ.ㅠ 어쩌자고 세주는 망해가지고~
이거 1년에 한권씩 나오는 책이예에요... 근데, 넘 재밌죠?

겨울 2005-07-20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날개님은 갖고 계시군요. 5권도 곧 나올 거래요.^^ 이런 책은 후다닥 읽어치우기가 아까워서 부러 느리게 읽어요. 4권까지 읽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종일 비 오시는 날, 비 맞으며 할까 생각하던 피사리를 오늘 서둘러 했습니다.

다 못하고 지쳐서 나와 논둑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사람 손이 닿은 곳은 한결 깨

해졌습니다.

벼를 거들고 잡초는 솎아버리는 이 일을 하면서 언제나 미안한 건 잡초도 엄연

한 생명이기 때문일 겁니다.

무논에서 심지 않아도 뿌리내리고 자리 잡아 자라는 생명들도 논의 주인이긴

합니다. 사람의 기준에 들지 못해 간단히 뿌리 뽑히는 잡풀들에서, 세상에서 뿌

리 뽑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눈에 들지 못해서, 이제 쓸모가 다해서 그만두어야 하는 사람들이 자

꾸 많아집니다. p 127

 

어머니가 생각난다. 종일 너른 논을 누비며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피를 뽑으셨지.

어린 내 눈에는 벼인지 피인지 구분이 안가서 대충 어림잡아 뽑아들고 논 밖으로 휙 휙 던져놓고는 잘했다는 칭찬받기를  기다렸지. 아무리 설명을 듣고 또 들어도 진짜와 가짜를 가리기는 쉽지 않았지. 아마도 멀쩡한 벼를 더 많이 뽑았을 텐데, 그래도 잘했다고 칭찬만 받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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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7-0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문신은 불행한 사람들의 가난한 그림이라는 신영복 교수님의 글귀가 겹쳐 떠오르네요.

로드무비 2005-07-10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의 눈에 들지 못해서, 쓸모가 다해서......
쓰라린 현실이죠.

겨울 2005-07-1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을 다투어 읽어치울 책이 아니기에 몇 개의 글들을 옮겨 적기를 했더니, 제대로 의미가 다가왔습니다.

아내가 오이 한 소쿠리 따오면서 방울토마토 몇 알 곁드려 왔다.
- 벌써 익었어요?
- 달다!
그렇게 자연은 쉼없다.
심은 수고는 잠깐이었는데 키워내는 긴 수고는 언제나 하늘의 몫이다.
오이 푸르고, 토마토 붉은 여름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