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고속도로를 달릴 땐, 이상스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설렌다.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이정표가 있음에도 막막한 앞, 반대 차선을 달리는 끝없는 자동차의 행렬이 마법에 걸린 듯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곳. 우울하고 우울하여 동반자살이라도 하고픈 충동이 솟구치는. 내게 밤의 고속도로는 그런 곳이다. <소풍>을 떠난 여자와 남자의 불협화음이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동안 내 마음도 딱 그대로였다. 밤의 고속도로에서 꿈꿀 수 있는 건 이게 다라고. 어떤 이는 휴게소에서의 우동 한 그릇, 김밥 한 줄의 추억을 말하지만 내 기억에 그것은 바람 불거나 눈, 비 오는 날의 을씨년스러움이 전부다. 맛도 모르고 배를 채우고,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 갔다 와서는 비슷비슷한 차들 속에서 내가 타야할 차를 눈 부릅뜨고 찾아내는 고달픈 의무가 전부인.




<사육장 쪽으로>는 무시무시한 악몽 같은 소설이다. 절대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지독한 꿈에 밤새 시달리다가 일어났을 때의 오한처럼. 파산선고를 받은 가장의 하루는 지겨워 죽을 것 같다고 웅얼거리면서도 끝장을 내지 못하는 일상의 안온한 늪이다. 자동화된 기계처럼 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척척 해치우고, 가족보다 익숙한 상사와 동료와 부하와 빌딩숲과 풍경에서 마음의 평화와 충만함을 느끼는. 치매 걸린 노모와 사육장을 탈출한 개에 물린 아이라니. 병원이 있다는 곳은 그 불길한 사육장 쪽이다. 흐느끼는 아내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아이, 미친개들은 짖어대고, 자동차는 사육장으로 달려간다. 말도 안 돼. 비현실적이야. 이건 꿈이야. 깨야 해........ 그들은 과연 병원에 도착했을까. 

 

 

 

주구창창 번역소설만을 읽다가 만난 편혜영의 단편집은 신선하다 못해 놀랍다. 문장을 음미하며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투지를(?) 불태웠다는. 감질나는 이런 단편의 미덕에 새삼 감동을 받다니 이것도 나이듦인가. 이 소설집에서 인상깊었던 부분이라면 여자, 남자, 그, 아내, 아들, 조, 김, 박, 송 등으로 불리는 등장인물들의 익명성이다. 작품속의 인물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읽는 이의 감정은 얽매임이 없이 자유롭다. 쓸데없는 감정이입도 필요없고 굳이 얼굴을 만들어내는 불필요한 낭비도 하지 않는다. 삶은 결코 달콤하지 않다. 그럼에도 망각하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커 기억상실증 환자로 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어쩌면 소설가는 그렇게 잃어버린 어두운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기록하는 전달자일런지도 모르겠다.  






잘 계신가요?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잠깐 멈추었던 어느 오전이었어요.

반가운 이름에 잠깐 배시시 웃음이 나더군요.

어느 곳에서건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살아갈 청년을 오래오래 생각했어요.

선물 고마워요. 책이란 것은 단비와도 같이 서걱거리는 일상을 적셔주지요.

이 긴긴 열대야의 밤조차도 한 권의 서늘한 책에 비하면 우습네요.

상처가 되는 말과 사람 앞에서 때때로 흔들리더라도,

늘 강건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 291

이른바 문명인들은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악마는 인정하면서도 토착민들이 두려워하는 악마는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의 악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만, 토착민들의 악마는 번개와 같은 자연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문명인은 토착민의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을 문제삼는다. 우리가 야만인으로 규정한 우데헤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 유럽인보다 훨씬 너그럽다. 오히려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우데헤들은 결코 타인의 신앙을 경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듯,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신앙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데르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태껏 러시아 인이나 중국인의 신앙을 궁금해한 적이 없다. 자신이 중국인과 러시아 인의 삶을 이해할 수 없듯이, 그 신앙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데르수 우잘라. 이토록 선한 영혼이 또 있을까.

평생을 숲만 보며 숲을 사랑했던 사나이. 사냥꾼이자 파수꾼, 길잡이이며 호랑이와도 맞짱을 뜨는 귀여운 야만인인 그가 부르는 '사람'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모든 친근한 생명을 뜻한다. 그의 만물과 공존하고 배려하는 삶이 경이로운 것은 '문명'의 삶에 지치고 쩔어서일까. 이 극동 시베리아 탐사 기행의 애초의 목적은 전쟁을 위해서였지만, 고리드인 데르수 우잘라의 삶을 조명하면서 문명의 반대로서의 야만의 의미가 아닌 우리가 살아본 적 없는 태고적 순수시대에 대한 영광을 떠올리고 향수를 자극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싯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시를 발려먹고 먹이만을 집어먹을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싯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장이 꿰여져서 끌려가게 된다. 이 끌려감의 비극성을 또한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명랑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다. 돈과 밥을 위해서, 돈과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러니 돈을 벌어라. 벌어서 아버지한테 달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다 써라. 난 나대로 벌겠다. (p. 15)


김훈의 책을 읽으며 하는 딴 생각 중의 하나는 그에겐 아마도 딸이나 여자형제가 없지 않을까 라는 거다. 딸이 있었다면 형평성을 고려해서라도 글에서 보여주는 아들에 대한 편애가 불가능했을 테니까. 여자형제는 있더라도 위로 있는 누나가 아니라 여동생이거나.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는 그의 호통 속에는 가장으로서 짊어진 남보다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남자라고 해서, 가장이라고 해서 누구나가 그처럼 반듯하게 살진 못한다. 얼마나 엉터리 남자와 가장들이 많은 세상인가. 마누라와 자식을 버리고 때리는 남자들 부지기수다. 올곧게 밥벌이라는 숙명을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남자로서는 아름답지만 그렇지 못한 남자들에 대한 부끄러움도 가끔은 말했으면 좋겠다. 네가 다 써라. 나는 나대로 벌겠다. 아버지로서의 그가 너무 멋있어서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owup 2007-06-0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 네가 다 써라.
근데. 딸이 있답니다.^-^
딸은 영화 쪽 일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것도 참 묘합니다.-.-

겨울 2007-06-03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딸이 있었군요. 전 분명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게다가 영화 일을 한다니, 정말 의외입니다.
 

 

남성성의 본질이란 아마도 결핍일 것이다. 스스로 결핍이 아니라면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워할 리가 없을 것이다. 오입을 하고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는 남자들도 다 그 결핍 때문인 것이다. 나는 남자의 ‘특권’을 이 사회에 반납하고 싶다. 그리고 마누라보다 오래 살아서, 내 마누라가 죽을 때 마누라를 이 세상의 가장자리까지 배웅해 주고 싶다. (‘남자도 오래 살고 싶다’ p.43)

 

흥, 소리가 저절로 나는 글이다. 세상의 친부모, 시부모를 둔 자식들에게 물어보라. 누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느냐고. 자매들끼리의 얘기지만, 엄마가 병원에 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버지보다는 더 오래 사셔야 하는데, 라는 말이 탄식이 나온다. 아무리 마음에 사이가 좋지 않은 엄마라도 아버지보다는 함께 살기 낫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건강 체질이신 아버지에 비해 잔병을 달고 사는 엄마를 보는 시선은 위태롭다.




결혼해 사는 동생이 조만간 시골에 계신 시아버지를 모셔와 살아야할 모양인데, 가족이건 이웃이건 이구동성으로 시어머니도 아니고 어떻게 시아버지를 모시느냐다. 사실 성품 좋기로 소문 자자하신 분이고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만큼은 아닐 지라도 여동생과 시아버지와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입버릇처럼 장남은 아니지만 언젠가 모셔야겠다는 각오도 할 만큼 했고, 담배를 많이 피우신다는 것만 빼면 어지간히 까칠한 시어머니 보다야 백배는 낫다고 했으면서 막상 모셔야할 상황에 다다르자 말이 많다.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 이르도록 홀로 끼니를 끓여 드신 그동안의 고생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불편쯤이야 감수하는 게 당연하지 싶은데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해서 제가 무슨 순교자인 냥 군다.

말나온 김에 동생은 아주 열렬한 기독교도인데, 자칭 봉사활동이 지나쳐 교회업무로 인해 가정을 소홀히 할 정도다. 아이들보다 신앙생활을 우선 순위에 둘 때마다 몇 번 큰 소리로 다투기도 하고 적당히 자제하라는 충고를 거듭했는데, 이번 시아버지 건으로 다시 말이 나왔다. ‘그 교회에서는 연로한 시아버지를 빨리 모셔 효도하라’고 가르치는 일은 없느냐고 억지소리를 좀 했다.

종교가 없는 나는 가능하면  교회 얘기를 않는 주의지만 신앙의 유익함에 비례한 해악도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뭘 알고 하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어떻게 라는 방법의 문제겠지만 현대에서 교회라는 공간은 특히 요즘 텔레비전에 종종 등장하는 유명인이 목사로 있는 교회는 예배와 헌신이라는 신앙의 개념보다는 사교의 장 같은 번잡함이 먼저 떠오른다.

초기에는 동생의 부탁으로 이끌려 나가 신자등록을 했는데, 그 낯설음이라니.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 불시착한 이방인처럼 겉돌았다. 언제부터 우리나라 교회가 경건함이란 단어가 어색하리만치 소란스러워졌을까. 목청껏 외치는 기도소리, 찬양 소리, 마이크를 통해 쾅쾅 울리는 설교 소리, 농담과 현란한 비유들, 장식적이고 화려한 내부 인테리어,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클래식 악기들의 향연, 아, 정말이지 어지러운 곳이 아닐 수 없다.



 교회에 대한 좋은 기억도 물론 있다. 서울에서 잠시 거주하던 시절. 지인을 통해 새문안교회를 잠시 다녔는데, 김동익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깜짝 놀랐다. 낮고 울림있는 목소리로 막힘없이 풀어나가시는 설교가 어찌나 멋지고 감동적이던지, 그곳에 계속 머물러 그 교회를 다녔다면 지금쯤 아무도 말리지 못할 기독교인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게 최초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이후, 아무리 명성이 대단한 교회라도 설교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서민이 선이고 귀족이 악인 것도 아니다. 가난뱅이가 선이고 돈 많은 놈이 악인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진보가 선이고 보수가 악인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반대도 아니다. 부자가 부자의 악덕에서 헤어나기 어렵듯이 가난뱅이에게도 가난뱅이의 악덕은 있다. 또 부자의 미덕이 있듯이, 가난뱅이의 미덕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면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p. 99)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6-01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되는 이야기에요. 난리법석, 시끌벅적, 사교의 장..
저도 그곳이 낯설고 이물감 느껴져요. 그래서인지 완전 이름만 기독교인이지요.

마법천자문 2007-06-0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컷들이 오입질을 하는 이유는 이기적 유전자의 번식 욕구 때문이고, 먹사들은 극히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전부 사기꾼들입니다.


아... 즐찾 줄어들면 어쩌려고 이런 댓글을... ㅎㅎ

겨울 2007-06-02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전자의 번식 욕구라 그거야말로 충분히 납득이 가는 걸요? 설마 이 정도로 즐찾이...



배혜경님. 참으로 민감한 얘기가 아닐 수 가 없는데요. 주변을 둘러봐도 교횔 다니는 사람 수가 훨씬 많아서 따 당하지 않으려면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돼요.
 

 

모기장을 샀다. 파란색과 연두색의 줄무늬는 몇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도 없다. 디자인도 근사하고 색도 예쁜 다른 것도 많았지만 내가 산 것은 구시대의 유물 같은 고전적인 스타일의 것이다. 한쪽 벽에 척 걸쳐놓고 나니 왜 이리 행복한 건지. 건강은 물로 환경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아늑해서 불면의 밤이 생길 리 없고, 무엇보다 여름다워서 좋다. 그래서 은근히 주변사람들을 부추겨 하나씩 장만하라고 유혹하는 중이다.  



집에서 슬프거나 따분할 때면 가볼 만한 곳이 공항이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것이 아니다. .... 그림,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발레를 감상하러 가듯이 공항을 감상하러 가는 것이다. (‘공항에 가기’ p.20)


공항으로의 산책이라니 별스럽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단, 저 글에, 공항이 집에서 가까울 때 가능하다는 단서가 붙었으면 좋겠다. 이 도시에선 공항은 어렵지만 전철역이나 기차역은 고려해볼만할지도.

까마득한 시절, 가족이나 집보다 친구와 밖이 좋았던 때, 먹고 놀다가 지치면 보통씨처럼 우리도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돌 벤치에 앉아 어디론가 떠나거나 돌아오는 혹은 마중하거나 배웅하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구경하고 앉아있는 것이다. 떠나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렵고 불안하기만 했던,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여행가방과 기차시간에 늦을까 종종거리는 걸음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그리고 혹여나 우리가 아는 누군가가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어림없는 기대감에 설레며. 정신없이 웃고, 놀고, 새로운 것을 찾아 다녔지만 뭘 해도 채워지지 않아 불안했던, 마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처럼 시리고 허전했던 때이다.

밤이 깊어 버스가 끊어지는 시간이 가까워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만큼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서의 유희는 달콤했다. 차비를 구걸하는 허우대 멀쩡한 청년들을 이상한 눈으로 흘기며 깔깔거리며 웃으며, 근처 노점에서 산 노란 귤을 쉼 없이 먹으며, 보내버린 철없고 유치찬란했던 20대였다.

훗날 단짝이었던 친구가 서울로 직장을 잡게 되면서 그렇게 소원하던 기차역에서의 배웅과 마중은 실현되었다. 서울역에 내려 까마득한 계단을 밟아 올라가면 손을 번쩍 들고 선 작은 그녀가 서 있었다. 우린 생이별을 한 자매처럼 팔짝팔짝 뛰며 눈물을 글썽였다.

배웅을 받고 돌아서는 순간은 또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돌이켜보니 내 눈물의 가장 서러웠던 기억은 전부 역에서였다. 역에서의 가슴이 미어지는 헤어짐의 순간들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며 혹은 기차에 올라 내가 사는 도시에 다다르기까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 당황했던 기억과 함께한다.

 

'동물원에 가기'는 얇디 얇은 책이다. 너무 얇아 억! 소리가 날 정도. 시작은 그렇다. 다섯 살 난 조카가 막판에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홀로, 처량히, 풍선까지는 아니지만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본격적인 동물 탐색에 나선 보통씨. 그런데 웬 걸, 시간이 갈수록 동물은 인간 같고 인간이 마치 동물처럼 느껴져 어지럽단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장식용 수집품도 아니고 살아있는 야생의 동물들이 눈을 껌벅이며 감정을 죽이고 좁은 울 안에서 불안해 하는 것을 보는 건 진짜 유쾌함과는 거리가 먼 경험이니까. 정해진 구역에서 먹고 자고 짝짓기를 하는 권태로운 동물의 일상을 동정하는 인간의 짓거리도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씁쓸한 비애를 안고 동물원을 나오면서도 그는 조만간 다시 또 오리란 예감을 한다. 닮은꼴을 통해 얻는 무언가를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