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셔님과 승주나무님께서 관련 페이퍼를 쓰신 김에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도. 지난번에는 완전 진흙탕 되는 바람에 차분한 분위기에서 논의하기 힘들었다. 알라딘에서 2007년 1월경에 약 4일에 걸쳐서 '중복리뷰'논쟁이 일었는데, 사실 '중복리뷰'라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논제들이 뒤섞여있다. ('중복리뷰논쟁'보다는 '리뷰논쟁'으로 칭하는게 좀 더 명확하다.) 이걸 분리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한 논의가 계속 겉돌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어떤 사안들이 짬뽕되어있는지 분리해서 살펴보려 한다.


사안 1. 중복리뷰

이때 '중복리뷰'가 의미하는 바는, 인터넷 서점 두 곳 이상에 걸쳐서 같은 리뷰를 올리는 경우를 지칭한다. 다른 '중복리뷰'의 사례로, 같은 책에 대해서 다른 리뷰를 작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도 '중복리뷰'라고 칭할 수 있으므로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뒤의 사례는 여기서 제외한다.

중복리뷰가 논란이 되는 까닭은, 책을 구입하기 위해 여러 인터넷 서점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앞서 들렀던 인터넷 서점에서 읽었던 리뷰가 또 등장할 경우 '짜증'이 날 수가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중복리뷰는 '짜증'과 '불편'의 차원이지 '잘', '잘못'의 차원은 아니란 생각. 이와 관련해 이런 문제제기도 가능하다. 인터넷 공간에서 같은 콘텐츠가 중복됨으로써 다른 콘텐츠가 들어설 영역을 잡아먹어버린다는. 그러나 인터넷 공간은 개인메일처럼 용량이 한정되어 있는게 아니라 무한하므로 내가 두 번 올렸다 해서 다른 사람이 한번 더 올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복리뷰가 출판사들의 홍보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말도 있는데, 그걸 알고 있음에도 오히려 좋은 책 홍보하고, 안 좋은 책은 혹평함으로써 안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 없다. 내 리뷰가 객관적이기만 하다면. 게다가 내가 읽는 책들은 나온지 오래된 것인데도 리뷰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최근 목차와 저자, 역자만 보고 샀는데 내가 원하는 책이 아닌 것도 몇 권 있었고, 중복리뷰라도 안내되어 있었다면 구매결정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책 한 권 사기 위해서 여기저기 드나들지도 않을 뿐더러, 중복리뷰라도 이렇게 안내되어있다면 개인적으로 환영이다. 문제는 중복리뷰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서평이 객관적이냐 아니냐의 문제. 소외된 분야, 소외된 책에 대해서는 중복리뷰를 권장하는 바다.


사안 2. 공짜책

언젠가부터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공짜책 이벤트가 시작되었고, 지금은 다음, 네이버, 프리챌 등의 여러 책카페를 통해서 공짜책 이벤트가 확대되었다. 예전이야 공짜책 받아먹기 힘들다고 하지만, 지금은 공짜책 받으려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글쎄 서점들마다 책을 주는 기준이 다른거 같은데, 알라딘은 출판사에서 직접 선정한다고 들은 거 같고, 예스24는 본인이 확실히 아는데 신간서적이 나오면 예스24 내에서 회의를 거쳐서 책을 선정하고, 출판사에 의뢰를 한다. 할 생각이 있는지. 하겠다면 하는거고, 출판사가 안하겠다면 안한다. 실제로 책이 좋아서 하려고 했는데 안하겠단 출판사도 있었다고 들었다. 교보와 모닝, 인터파크, 리브로, 그외에 각 인터넷 책카페 들은 내가 잘 모르겠다. 기준이 다 다르고, 글을 잘 써야만 혹은 별을 많이 줘야만 다음에 공짜책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말은 별로 근거 없는 소리 같다. 어느 곳에서는 글발을 기준으로, 또 어느 곳에서는 별을 기준으로 나누기도 할테지만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란 말씀. 개인적으로 과거에 알라딘에서 공짜책 좀 받아봤는데, 책을 읽어보고 아닌 책에 대해서는 별 두개, 세개도 줘봤는데 다음에도 또 뽑아주더라는. (영 아닌 경우는 없었기에 별 하나 준 기억은 없다.)

다른 한편에서 공짜책 이벤트는 먼저 출판사에서 시작했지만, 이걸 받는 독자가 있기 때문에 계속 지속되고 있다, 따라서 독자가 이걸 거부하면 출판사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게 문제가 되는 데 대해서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봐야하는데, 자본력 있는 출판사들은 이런 이벤트 마케팅이 괜찮겠지만, 자본력 없는 출판사의 경우 이벤트가 힘든게 사실이다. 이런 소규모 자본력 없는 출판사들이 오래 버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출판계의 자정이 필요하고, 각각의 개인은 책을 좋아하는 일개 독자로서 이런 분위기 조성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 이건 아이엠엑스님이 일전에 리뷰논쟁과 관련해서 언급한 부분인데 일리있다. 하지만 모든 공짜책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걸 강요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고, 그 이유를 납득시키고 분위기를 조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이엠엑스님께서 이 이야길 하신 이후 - 그분은 소규모 만화 출판사에 다니는 걸로 알고 있는데 - 공짜책은 받지 않았다. 아이엠엑스님의 생각에 동의해 앞으로도 받지 않을 생각. (이 때 공짜책이라 함은, 개인적인 선물로 들어오거나 방출한 책을 주워먹거나 한 경우가 아닌 출판사 이벤트의 경우만을 지칭함.)

(* 이 부분에 있어서 생각이 다른 분들은 충분히 나와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

아  생각해보니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알고 있는 분이 저자인데 책을 줄 경우. 받지 않을 수는 없고, 책은 받지만, 내가 구입한 다른 책, 내가 모르는 다른 저자들의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모든 리뷰는 주관적이지만 - 평을 내리기로 한다. 지금껏 그래왔고.  친분 있는 사람의 책은 공짜로 받지 말고 사주자는 지인의 말씀은 끄덕끄덕. 이것도 역시 "잘/잘못"의 영역이 아니므로,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그러는게 좋지 않겠느냐, 그게 예의가 아니겠냐 정도로 받아들일 문제.


사안 3. 주례사 서평(비평)

주례사 서평이라 함은, 실제 그 책이 받아야 할 응당한 평가를 넘어서서 지나치게 칭찬과 찬사 일색인 리뷰를 지칭한다. 그 책이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넘어서서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하여, 혹은 친분이 없어도 공짜로 받은 책이라 하여 별 두개 줄 것을 네개, 다섯개 주는건, 아니지 싶다. 리뷰라는게 책읽은 사람의 주관적인 평가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책들은 비슷비슷한 문제점을 지적당하고, 비슷비슷한 평가를 받는다. 여행서나 소설 혹은 시라고 해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독자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제 3의  평가와 지나치게 차이가 날 경우에는 문제가 있다. 또다른 제 3자가 리뷰를 보고 책을 구입했을 경우, 속았다, 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 리뷰를 통해 해당 책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객관적으로 진술해줄 필요가 있다. 선물로 받은 책이든, 이벤트로 받은 책이든, 내가 산 책이든, 길거리에서 주운 책이든 상관없이 모든 책에 대해서 지금껏 객관적으로 평가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사안 4. 출간 전 리뷰

요즘 또 눈에 보이는 문제점이 출간 전 리뷰인데, 책이 아직 나오기도 전에 리뷰가 달리는 경우가 있다. 주로 신간서적에 몰리는 경향을 보이는데, 아마도 땡스투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대개의 출간 전 리뷰들은 읽어보면 알 수가 있다. 작성하는 사람도 대놓고 이 책 아직 안 읽어봤는데요 너무 기대돼요, 라고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출간 전 리뷰에 다량의 땡스투가 붙기마련인데 - 예전엔 추천수에 땡스투수가 포함되었지만 지금은 땡스투 숫자는 드러나지 않는다 - 글 작성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하겠지만, 이런 리뷰에 구매자들이 땡스투를 주지 않음으로써 예방이 가능하다. 인터넷 서점 측에서 출간 전 리뷰는 삭제하고 - 명백히 출간 전 리뷰인 것에 대해서만. 애매모호한 건 순전히 '추측'일뿐이므로 걸러내기 힘들다. - 서점 이용자들은 보는 족족 신고하는 식으로 일단 해결해야 할 듯 하다. 



* 추가 발언 및 정리

대략 이 정도의 사안으로 분류해볼 수 있는데, 때로는 몇 가지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중복리뷰이면서 주레사 서평이 함께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주례사 서평을 쓴 리뷰를 다른 곳에 옮겼을 때. 결국 주례사 서평으로 인해 한 곳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도 잘못된 안내를 해줄 수 있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건 중복 리뷰가 아니라 주례사 서평이다. 어떤 하나의 사건이 눈에 들어올 때는 이게 어디서부터 기인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단순히 중복리뷰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례사 비평을 한 서평을 중복해서 올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점이라면, 그 근본은 주례사 서평이지 중복리뷰가 아니다. 이를 '중복리뷰'라는 이름 하에 논의해서는 안된다. 출간 전 리뷰를 중복해서 올린 경우에도 마찬가지.

지난번 논쟁 이후 내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적용한 결론이 있는데,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난번 것에서 조금 수정되었다.

 첫째, 나는 iamx님의 출판계에 대한 우려과 고민을 받아들이고, 공짜책에 대해서는 중복리뷰를 올리지  않기로 한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 개인에게 국한된 사항일 뿐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겠다. (이때의 공짜책이란 선물로 받거나 길거리에서 줍거나 한 기타의 경우를 제외하고 오로지 이벤트로 받은 책만을 지칭한다. 공짜책은 현재 받고 있는게 없다.)
          
  둘째, 내가 직접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는 대형출판사건 소형출판사건 상관없이 기존에 해오던대로 알라딘과 예스24에 중복리뷰를 올린다. 예스24에 올린 리뷰를 알라딘에 중복해서 올리는 것으로(나의 경우는 알라딘이 먼저고 예스24가 나중이지만) 땡스투를 받는다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나는 땡스투 제도 생기기전부터 해왔으니 '땡스투' 때문에 이 짓거리를 한다고 보면 안된다. 다만, 맨 위에 언급했듯이 "이 리뷰는 알라딘(교보, 예스24 등)에도 올렸습니다" 정도의 메세지는 붙이도록 한다.

 셋째, 출간 전 리뷰는 당연하거니와 주례사 비평도 지금까지 해오던대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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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7-08-19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주례사비평이란 말이 다가오는군요. 좋은글입니다.
저도 가끔 주례사를 날리곤 하는데...내심 가슴이 쓰리곤 합니다.

뽀송이 2007-08-1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비로그인 2007-08-19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은 저 서재에 적은것 그 이상도 이하도 ^^ 없을 것 같아요.
서로 다름을 인정한 외 나머지는 관심 안가지기로 했습니다. :)

승주나무 2007-08-2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부당한 평가를 받았을 때 가장 분노하는 법이다 - 볼떼르"
이번 논쟁이 건강한 논쟁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아요.
몇 가지 혐의, 그것도 몇몇 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같은 혐의를 명백한 사실인냥 호도하고,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석하고..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논쟁으로 만들어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더 이상 외풍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심스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

마늘빵 2007-08-20 09:28   좋아요 0 | URL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무시할 것은 무시하면 됩니다. :)

2007-08-20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0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20 22:05   좋아요 0 | URL
처음 뵙는듯 합니다. :) 말씀 잘 들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나온지 오래된 것인데도 리뷰가 아예 없는 경우] 는 그쵸. 리뷰가 고파요. -_- 누군가 써줘야하고 안내해줘야 하는데 없어요. 그런 책을 많이 보는지라 자주 경험. 역시 분명 영역은 다르죠. '잘/잘못' 의 영역과 '불편/짜증'의 영역. 구분해야겠습니다.

2007-08-21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말글빛냄 / 2007년 8월
품절


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 문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하다.
- 조너선 색스 -5쪽

<서문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폭력을 막는 단 하나의 훌륭한 해독제는 '대화'이다. 서로서로 자신의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타인의 두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서로의 연약함을 나누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대화이다. -16쪽

하버드 대학교의 정치 철학자 존 롤스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공적 이성'이다. 그것은 정치 논쟁에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해야만 우리가 - 선지자 이사야의 말을 빌리면 - "서로 변론"(이사야 1장 18절)할 수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서로 변론한다'는 생각은, 도덕적 언어가 붕괴하고 '나는 해야 한다'는 어법이 '나는 원한다', '나는 선택한다', '나는 느낀다'는 어법으로 바뀐 20세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의무는 우리가 서로 논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냥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시각을 강조하는 텔레비젼은 소리의 문화가 아니라 보기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미지는 언어보다 크게 말하고 감정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 결과 가장 시각적인 항의나 가장 목소리가 큰 분노의 외침, 극단적인 구호 등이 승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만약 대결은 뉴스가 되고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결의 문화를 갖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우리 자신의 소중한 능력을 앗아갈 것이다. 그 능력이란 우리와 문화와 믿음, 가치관, 이해관계 등이 충돌하는 사람들, 따라서 우리가 반드시 이야기를 걸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는 능력이다.-17-18쪽

"(종교가)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히 많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기에는 부족하다" (조나단 스위프트)-19쪽

종교는 불화의 원천일 수 있다. 또한 종교는 갈등 해결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전자다. 반면 종교를 갈등 해결에 사용하려는 시도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갈등과 반목을 해소할 수 있도록 인류의 연대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희망은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이제 위대한 종교들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그리고 평화의 필수 조건인 정의와 자비를 널리 퍼뜨리는 데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20쪽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 (헨리 메인 경)-26쪽

"종교에서 말하는 고통은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표현이자 그런 고통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학대받는 자들의 한숨이고 감정 없는 세상의 감정이며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 (칼 마르크스) -31쪽

어떤 사회에서도 하나의 제도가 본래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와 논리나 동력이 다른 주변 영역을 식민화할 때는 위험하다. 중세 시대에는 종교가 그런 경우였다. 18세기에는 과학이 그러했고 19세기와 20세기에는 정치가 그러했다. 21세기에는 시장이 그렇다. 화폐교환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의 거래에 대해서만 적합한 기제이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가족이나 공동체, 교단, 자발적인 모임 등 경제적 계산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인간관계이다. 이런 관계들은 시민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집단이지만, 소비 위주의 사회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39쪽

내가 알고 존경했던 만년의 이사야 벌린 경은 훌륭한 에세이 <자유의 두 개념>에서 자유주의적 신조의 핵심을 이제는 유명해진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한 바 있다.

"자기 신념의 상대적 타당성을 깨닫는 동시에 자기 신념을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야만인과 구별되는 문명인의 태도이다." 이는 대단히 고귀한 감정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가인 마이클 샌들은 이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념이 상대적으로만 타당하다면 그것은 끈질기게 옹호할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널리 반향을 얻은 물음이었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단지 서양 현대성의 관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을 퇴폐의 한 형태로서 거부하는 사람들을 내가 무슨 권리로 비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이 많은 가치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살해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자살 테러범을 내가 무슨 근거로 반대할 수 있겠는가? -43-44쪽

그것은 우리가 진리나 궁극적 실재를 찾기 위해서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하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특수성은 불완전한 것이고 오류와 편협과 편견의 원천인 반면, 진리는 추상적이고 시간을 초월하며 보편적이고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특수성이 전쟁을 낳는다면 진리는 평화를 낳는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갈등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45쪽

그러나 갈등의 시기에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그런 공통성이나 유사성이 아니다. 그 때에는 국외자에게는 사소한 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띠면서 이웃을 분열시키고 예전의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고 '작은 차이의 나르시즘'이라고 불렀다. 긴급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차이점이라 해도 정체성의 표지, 그래서 서로를 소원하게 하게 특징을 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통의 신학, 인류 보편의 신학 뿐만 아니라, 차이의 신학도 필요하다.-48-49쪽

하나의 문화가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한 체계에 인위적인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하나의 체계가 번창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비극에서 나온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세상에 공헌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공헌한 바는 하나같이 소중한 것이다. ... 중략 ... 차이가 전쟁으로 이어질 때는 쌍방 모두 패배한다. 거꾸로 차이가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는 양쪽 모두 승리하는 것이다.-50-51쪽

우리의 이야기와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 하며, 때로는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도 알아야 하고,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화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에 대한 논박에서 진리가 움터나온다는 소크라테스식 대화술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대화의 기술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해석하는 타자들을 용인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보편이 아니라 특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보편적인 문명이 서로 충돌하면, 세상이 흔들리고 많은 생명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많은 문화와 문명과 종교가 있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함께 살아갈 하나의 세상만 주었다. 그 세상은 줄곧 작아지고 있다.-51-52쪽

<세계화 속의 불만>

세계화는 통합시키는 만큼 분열시킨다.
분열의 원인은 지구의 통합을 촉진하는 원인과 동일하다.
- 지그문트 바우마 <세계화>-54쪽

20세기 초에 화이트헤드는 우리의 시간 경험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과거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나 늙었을 때나 별 변화가 없는 환경에서 살았다. 반면 "오늘날에는 변화의 시간이 한 사람의 일생보다 짧고" 앞으로는 더욱 짧아질 것이다.-56쪽

매튜 아놀드의 말을 빌리면, 마치 우리는 "하나는 이미 죽었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날 만큼 힘이 없는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이다. 현 상황의 특이성은 우리가 공통의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기 힘들 만큼 변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데 있다. 기술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우리의 도덕적 신념은 점점 더 갈피를 잃고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57쪽

"사실 우리는 도덕성의 시물라크르(환영)를 가지고 있고 도덕의 핵심용어들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론저긍로나 실천적으로나 도덕성을 이해하는 능력을 -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 상실하고 말았다." (알래스테어 매킨타이어)-65쪽

세계화 시대에서는 무엇이 행동의 주역인가? 서양에서 지난 반 세기 동안 점점 더 강조된 것은 두 가지 제도이다. 하나는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현재 자신에게 지워지는 책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다. 시장은 본래 도덕과 상관없이 거래를 하는 곳이고 가치가 아니라 가격을 다루는 곳이다. 다시 말해 시장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교환하는가에 대해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않는 교환의 장일 뿐이다. 한편 서양에서 정치는 우리가 공동으로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한 실질적인 도덕적 질문을 건너뛴 채 오직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더욱 더 절차적으로 관리적인 무엇이 되고 말았다. 존 롤스는 현대의 자유주의의 신조 가운데 하나인 이런 점을 두고 "선보다 정당함이 우선한다"고 지적했다.-68쪽

사람에 관련된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에느 부의 소유주와 생산자 사이에 접촉이 활발했다. 봉건 영주와 산업 자본가는 비록 피고용인을 착취하기는 했어도 그들의 복지에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 오늘날의 글로벌 엘리트들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별다른 교섭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과 같은 나라에 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상품을 사는 사람들, 특히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사람들과도 거의 접촉이 없는 편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다. 도덕적 책임은 단지 추상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서 움터나온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고 이 과정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것이다. 현대 생활의 비인격화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서 행동과 결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앗아갔고 이는 우리의 도덕감을 약화시켰다. -69-70쪽

간단히 말해서 시장은 빈부 격차만을 극대화 한 것이 아니다. 시자은 사회의 일원을 공통 운명으로 맺어주는 가족이나 지역 공동체와 같은 유대 관계를 파괴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나는 원한다'와 '나는 해야한다' 사이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도덕적 담론을 무력화했다. 시장은 집단적 의무로 묶인 위계를 개인적인 생활 방식과 취향을 누리는 슈퍼마켓으로 대체함으로써 공공선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허물었따. 여기서 공공선이란 공원에서부터 공공 서비스와 애국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거나 소유하거나 공유하지 않는 것들을 일컫는다. -71쪽

우리는 유일하게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며 '나는 어떤 이야기에 속하는가?'이다. 경제가 정치를 대체할 수 있고 사적 선택이 공공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적 상상력의 가장 원대한 희망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경제 자체는 '누구'와 '왜'라는 커다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는 거기에 대답을 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오늘날 종교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 이데올로기 저치는 아마도 죽고 말겠지만, 그것을 대체한 것은 '역사의 종언'이 아니라 정체성 정치다. -79쪽

정치는 차이가 있는 곳에 거주하지만, 종교는 그 차이를 뛰어넘는다. 종교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묶는다. 정치는 중재하고 조정한다. 정치에서 타협, 다의성, 외교, 공존 같은 종교의 관점에서는 악덕으로 보이는 덕목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81쪽

종교와 정치는 인간 조건의 서로 다른 측면에 말을 건다. 하나는 사람들을 공동체에 묶어주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차이를 평화롭게 중재한다. 20세기의 커다란 비극은 정치가 종교화되었을 때, 국가(파시즘)나 이론체계(공산주의)가 절대화되고 신격화되었을 때 생겨났다. 21세기는 반대 상황이 발생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즉, 정치가 종교화될 때가 아니라 종교가 정치화될 때다. 종교는 정치가 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공화국을 비판한 근거였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국가에 종교적 성격을 부여하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차이가 없으면 정치도 있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정치는 종교가 극복하려고 하는 것, 즉 의견의 다양성, 상충하는 이해관계, 복수성 등이 자리잡은 공간이다. 한때는 이러한 것들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필요했지만, 이제는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82쪽

<차이의 존엄 : 플라톤의 유령 몰아내기>

우리가 잘 아는 대답이 있다. 종교는 정체성에 관한 것이고 정체성은 배제하는 것이라는 대답이다. 모든 '우리'에는 우리와 같지 않은 사람들, 즉 '그들'이 있다. 혈족과 비혈족, 친구와 이방인, 형제와 남이 있고, 이러한 경계가 없다면 우리의 정체성도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은 무리의 일원이 아니면 생명을 지킬 수 없었던 인류사의 새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포식자가 우글거리는 세계에서 무리에 들어가지 못한 개인들은 생존이 불가능했다. 우리 내면에 깊이 잠재한 어떤 본능들은 이때부터 유쾌한 것이며, 그 본능들은 우리가 인간관계에 맺고 소속 집단에 애착과 충성심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성향을 '부족적'이라고 부른다.
-87-88쪽

유대교는 한 분인 하느님을 믿지만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 뿐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인류 전체의 하느님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려진 명령을 인류 전체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유대교에는 extra ecclesam non est salus, 즉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에 해당되는 교리가 없다. 오히려 고대의 유대 현인들은 "여러 민족의 경건한 자들은 다음 세상에서 제 몫을 얻으리라"고 설파했다. 실제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지 않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97-98쪽

마이클 왈저는 '얇은' 혹은 보편적인 도덕성보다 '두꺼운' 혹은 맥락으로 가득 찬 도덕성이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사회는 특수할 수 밖에 없다. 각각의 사회는 저마다 고유의 성원과 기억, 다시 말해서 제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사회 공통의 삶에 대한 기억까지 가지고 있는 성원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류는 성원만 있고 기억은 없는, 따라서 역사도 문화도 관습도 익숙한 생활방식도 축제도 사회적 재화에 대한 공동의 이해도 없는 집단이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갖는 게 당연하지만, 그 방식잉 하나일 수는 없다. 그러나 온갖 다양한 사회의 성원들은 인간이기에 서로의 다른 방식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의 도움 요청에 응답하고 서로에게서 배울 점은 배우며 - 때로는 - 다른 이들의 행진에 동참할 줄도 아는 것이다."

도덕적 배려의 보편성은 우리가 보편적인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게 아니라 특수한 존재가 되어야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부모가 되어 내 아이를 사랑할 줄 알게 된 다음에야 제 자식을 사랑하는 다른 부모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덕적 특수성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연대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각자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다음에야 인간의 연대성을 이해하게 된다.-106-107쪽

<통제 : 책임의 의무>

20세기 초반에 윌리엄 오그번은 '문화지체'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오늘날처럼 기술을 비롯한 물질문화가 통치 방법이나 사회 규범 같은 비물질 문화에 비해 빠르게 변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바깥 세계가 우리의 내부 세계(정신적, 정서적 반응)보다 빠르게 변할 때 우리의 환경은 당혹스럽고 위협적이다. 사회는 변화에 시간이 걸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125-126쪽

과거에는 엘빈 토플러가 '안정적인 사적 영역'이라고 부른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변화에 대처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삶에는 변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생 종사하는 직업이고 평생 지속되는 결혼 생활이며 평생 살아가는 장소이다. 이것들은 누구에게나 허용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희귀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경제적, 개인적, 지리적 연속성의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낯선 것에 대처할 힘을 주는 친숙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런 것을 찾아보기가 점점 더 힘든 실정이다.-127쪽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기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다. 시장이 교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인생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면, 의미 자체가 허물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상적인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순례자'에서 '여행자'로 변한 것이다. 사회는 점차 가정이 아니라 호텔을 닮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 상태, 아무에게도 진실한 애정을 갖지 않고 어느 누구의 진실한 애정도 받지 않는 상태, 아무와도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영속적인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상태에 접근하고 있다. 삶은 자아 너머의 보다 견고하고 영속적인 것과 점차 멀어지면서 점점 더 가벼워진다.-135-136쪽

인간관계가 정체성과 자존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은 그것이 계약과 시자 거래의 영역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이웃, 조언자들은 우리와 도덕적 호혜성으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좋을 때만이 아니라 나쁠 때도, 다시 말해 그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때가 아니라 그들이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듣기 싫은 충고를 해준다. 이런 면을 로버트 라이시가 인용하는 '개인 코치' 광고의 상품화된 우정과 비교해 보라.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 건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절친한 친구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함께 할 정도로 믿음이 가는 전문가입니까?" 이 수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다. 우리가 친구를 믿는 것은 우정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137-138쪽

"부자와 권력자를 부러워하고 숭배하다시피 하지만 가난하고 하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성향은 우리의 도덕감이 타락하게 된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애덤 스미스)-138쪽

우리한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우리의 통제력 바깥에 있다는 사실, 다시말해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우리가 절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자아의 좁아터진 영역 너머에 하나의 세상이 있고, 그 세상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역이 아니라 대상이다. 여기서 절망이 생긴다. -140쪽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예의를 갖추어서 내 의견을 정확히 전달하고(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이해시키고)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게 필요하다. 둘 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내 생각과는 다른 의견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이다. 논쟁에서는 한쪽이 승리하고 다른 한쪽이 패배하지만 애초의 의견을 바꾸지는 않는다. 대화는 어느 쪽도 패배하지 않지만 양쪽 다 변화한다. 이제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현실이 어떤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쪽도 애초에 가졌던 확신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대화가 아니다. 남의 의견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상대방도 - 내 의견에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면 - 그래야 한다는 걸 깨달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것이 다원 사회에서 공공도덕이 성립되는 방식이다. 즉 하나의 목소리가 앞장서거나 도덕 문제를 가정이나 지역 주민에게 일임하는 방식이 아니라, 차이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 이해하고 이해받으려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서만 공공도덕은 성립할 수 있다. -146-147쪽

'나'를 기꺼이 '우리'에 맞추어 형성하려는 태도에서 공동체가 이루어지듯, 사회 역시 개별 공동체의 '우리'가 기꺼이 다른 공동체들과 그들의 굳건한 믿음을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여야 이루어진다. 사회는 수많은 목소리가 들리는 대화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제적 힘이라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아니라 미래를 함께 써가는 공동 저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대화를 통해서다. 상대에 대한 존경과 열성이 담긴 대화, 한없는 공감과 이해가 필요한 대화야말로 차이의 존엄함이 다스리는 세상의 도덕적 형식이다.-147-148쪽

<공헌 : 시장 경제의 도덕>

시장 경제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역사에 기여한 것은 그것이 태곳적부터 전해 오는 인간의 싸움 본능을 억제하는 힘이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18세기에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예언했다. "상업의 자연스러운 영향은 평화를 안착시키는 데 있다. 무역을 하는 나라는 서로에게 의지한다. 한 나라가 파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면 다른 나라는 사는 데에서 이득을 본다. 모든 제휴와 연합은 상호 필요에 기반을 둔다. 지난 세기에 두 번에 걸친 대전쟁을 일으킨 유럽 국가들이 화폐 통합을 이룬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날드 매장이 있는 두 나라가 서로 전쟁한 경우가 없다는 이른바 '글로벌 아치'이론을 만들어냈다.-177-178쪽

<자선 : 사회 정의>

이(체다카)는 점유와 소유의 차이를 강조한 유대 신학에서 나온 개념이다. 궁극적으로 세상 만물의 주인은 창조주 하느님이다. 우리는 점유하고 있을 뿐 소유한 게 아니다. 하느님이 맡긴 것을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레위기>의 말씀이 명확한 사례다. "토지를 영영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잠시 머무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장 23절) 우리에게 절대적인 소유권이 있다면, 정의(억지로 주어야 하는 행위)와 자선(아량으로 베푸는 행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전자는 법률적으로 강제되는 의무이며, 후자는 도덕적인 의무, 자비와 연민의 촉구이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우리는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한 관리인에 불과하므로 신탁의 조건에 충실해야 하는데, 그 조건 중 하나가 우리가 가진 것의 일부를 궁핍한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는 다른 법체계에서 자선으로 간주되는 것이 법의 엄격한 요구 사항이며 필요할 때면 법정이 강제로 시행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체다카는 흔히 '사회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니 누구나 삶의 기본 요건을 갖추며 살아야 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진 자들은 잉여의 일부를 덜 가진 자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열망하던 사회, 즉 누구나 존엄한 삶을 살 기본 권리를 가지고 있고 모두가 하느님의 주권 아래 언약으로 맺은 공동체에서 평등한 시민이 되는 사회를 이루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다.-195-196쪽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의료 수단이 없는 사람은 막을 수 있는 병과 피할 수 있는 죽음의 희생자만 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반노예살이나 마찬가지인 채무 노동자, 억압적인 사회에 숨이 막히는 여자 어린이, 실질적인 벌이 수단이 없는 가난뱅이 노동자들은 행복이라는 면에서도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여기에는 기본적인 자유가 꼭 필요하다)이라는 면에서도 모든 걸 빼앗긴 이들이다. 책임 있는 삶에는 자유가 필요하다. (아마르티아 센)

센의 말은 절대적으로 옿다. 개인의 자유는 이사야 벌린이 '소극적 자유'라고 부른 것, 그러니까 제약에서 벗어난 없는 상태(성경의 초페쉬)를 뜻한다. 집단의 자유(성경의 체루트)는 그와 다르다. 무엇보다도 나의 자유는 너의 자유를 희생하여 얻는 게 아니다. 다수가 굶는 마당에 소수가 잘 사는 사회,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좋은 교육과 적절한 의료 혜택과 쾌적한 편의 시설을 누리는 사회는 자유로운 해방의 땅이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가 되려면 억압과 압제가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길을 막는 모든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198쪽

빈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그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는 최저 생활 수준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 율법에서 음식과 주거와 기본 가구나 결혼식 비용 등을 의미했다. 두 번째('그에게 없는 것')는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여기서 상대적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예전 생활 수준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이는 랍비들이 빈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열쇠가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사람에게는 단순한 물리적 욕구 이상의 심리적인 욕구가 있다는 인식이다. 가난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좋은 사회는 그런 수치를 겪지 않게 하는 사회다.-203쪽

체다카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선'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자의 선의에 달린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율법이 강제하는 의무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경제 원리에 의존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것은 시장 고유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자유 시장과 양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인용하는 조지 소로스의 말은 옳다.

"국제 무역과 세계 금융 시장은 부를 창출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평화 유지나 빈곤 완화, 환경 보호, 노동 조건 개선, 인권 보호와 같은 다른 사회적 요구, 일괄해서 '공공선'이라 불리는 것에는 신경 쓸 능력이 없다.-208쪽

극단적인 가난과 기아를 종식시키고 기본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막을 수 있는 질병에 맞서 싸우고 유아 사망률을 낮추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실패한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경제적 잉여를 개발도상국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 그리하여 체다카가 보여주는 것처럼 가난한 개인뿐만 아니라 가난한 국가의 존엄과 독립성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시급한 요청이다. 통신과 무역, 문화의 세계화는 인간의 책임도 세계화한다. 다수를 가난과 무지와 질병의 노예로 만드는 대가로 소수의 자유를 사는 일은 없어야 한다.-209-210쪽

<창조성 : 교육의 책무>

월터 J. 옹의 말을 빌리면 "글은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구술 문화에서는 지식의 전달이 언제나 인간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특정한 때에 특정 장소에서 화자와 청자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반면에 저자는 누가 자기 글을 읽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고 독자도 보통은 눈앞에 저자를 두고 구절마다 무슨 뜻인지 물어보며 글을 읽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의 모든 관행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글은 기억력의 상실과 수동적인 배움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논쟁을 낳는다. 양자가 만나서 결론에 이를 때까지 논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서로가 쓴 글에 대해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글은 추상화하는 경향이 크다. 말은 모든 인간 집단이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적인데 반해 글은 인공적이다. 게다가 규칙과 관례가 필요하며 이것들은 의식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러나 글은 추상적 사고를 촉진하고, 이야기의 반복으로만 과거를 알 수 있는 구술 문화로서는 불가능한 방법으로 과거를 고정시킬 수 있다. -219쪽

<협동 : 시민 사회와 그 제도>

계약이 자아에 관한 것이라면, 언약은 우리가 그 안에 정체성을 키우는 보다 큰 집단에 관한 것이다. 언약 안에서 '나'는 '우리'를 발견한다. 언약의 관계는 신뢰로 유지된다.-249쪽

언약은 이해관계나 이익에 따라 묶인 유대 관계가 아니다. 언약은 소속감으로 묶인 관계다.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우리'를 이룰 때 언약이 맺어진다. 언약은 제한이 없고 영속적이라는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언약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헌신의 의미를 수반하며, 어려운 상황에도 곁에 있어 주는 신의의 개념을 내포한다. 언약은 때로 자기희생을 요구한다.-251쪽

<보존 : 지속 가능한 환경>

"우리는 윤리가 전부라는 근본적인 원리를 배우고 있다. ... 우리는 - 철부지 아이가 아니라(옮긴이) - 언약이야말로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거룩한 맹세로써 그 언약을 지켜낼 필요성을 받아들인 어른이다. ... 우리의 유전적 본성을 기계의 도움을 빌린 추론에 내맡긴다면, 그리고 신이나 된 것처럼 착각해서 오래된 유산에서 벗어나와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의 윤리와 예술과 우리 자신의 의미를 그 기계적인 추론에만 맡긴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에드워드 윌슨 <통섭>) -284쪽

<화해 : 세상을 바꾸는 용서의 힘>

"핍박을 받은 모든 종교는 핍박을 가한다. 어떤 우연한 사건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핍박에서 벗어나자마자 자기를 핍박한 종교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

"(민족주의는) 보통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자존심이나 영토에 가한 상처의 산물(이다)" (이사야 벌린) -294쪽

정의는 죄를 개인적인 보복 행위(복수)로 앙갚음하지 않고 비개인적인 법적 절차(응보)에 따라 취급한다. 용서는 정의만으로는 피해자의 감저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저을 바탕으로 한다. 증거를 구하고 평결을 내리고 형을 선고해도 피해자의 마음에는 고통과 슬픔의 앙금이 남아 있다. 정의는 비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며 용서는 개인적인 도덕 질서의 회복이다. 정의는 잘못을 바로잡고, 용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한다.-307쪽

<희망의 언약>

언약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세 가지 점에서 계약과 다르다. 첫째, 언약은 특정한 조건과 상황에 제약되지 않는다. 둘째, 언약은 한계가 없고 오래 지속된다. 셋째, 언약은 다른 면에서는 서로 관련이 없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두 개인의 만남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언약은 '나'에게 정체성을 주는 '우리'에 관한 것이다. 계약에는 그것을 맺는 장소가 선행하지만, 언약은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무엇보다 근본적이다. 그것은 계약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인 상호성의 모형이다.-331-332쪽

"모든 진정한 언약은 도덕성의 기본적인 측면을 재진술하고 재확인한다. 자율적 의지 너머에 존재하는 판단의 원천에 대한 존경, 건설적인 자애심, 타인의 행복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특정 생활 방식의 원천을 수립한다. ... 그것은 추상적인 도덕이 아니다." (필립 셀즈닉) -332쪽

낙관은 상황이 나아지라라는 믿음이다. 희망은 우리가 힘을 합쳐 더 나은 상황을 맏늘 수 있다는 신념이다. 낙관이 수동적인 덕목이라면 희망은 능동적인 덕목이다. 낙관론자가 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338쪽

<옮긴이의 말>

부족주의와 보편주의는 둘 다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절대주의에 가깝다. 그러므로 지은이는 한편으로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주의(<문명의 충돌>)와 보편주의(<역사의 종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셈인데, 그 외줄타기의 이름이 바로 '차이의 존엄'이며 그 중심 논리는 '나도 옳고 너도 옳다'이다.

서양 근대 사상이 자랑하는 '관용'의 원칙과 비슷한 듯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옳다'라는 단언에 담긴 무게이다. 관용의 원칙은 '나는 옳다'는 확신보다는 '내가 틀린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더 바탕을 둔 가치이다. 이른바 데카르트의 '잠정적 도덕'의 논리이다. 그러나 지은이에 따르면 극단적인 부족주의가 만연하는 오늘날에는 그런 정도의 원칙만으로 부족하다. 관용의 원칙은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남의 일에 상관 않는 개인주의(혹은 냉소주의, 더나아가서는 허무주의)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종교적 열정의 폭풍우를 막기 위해서는 오직 그에 못지 않은 반대 열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옳다'는 확고한 가치관 위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여러 폐해들(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을 시정해야 한다는 확고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자신이 속한 유대교 전통에서 여러 가지 개념들(체다카, 언약, 시장친화적 태도 등)을 뽑아내고 풀어내면서,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자 시급하다고 본 인류의 대화에 참여한 것이리라. -351-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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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8-17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책 읽는 것 보다 이거 쓰는게 더 힘드셨겠어요 ㅎㅎ 공부하신다더니, 독서중에 시간 내신건가봐요 ^^

찬찬히 읽어보니, 저 책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끙 언제다읽지 -_-;; 책 소유욕도 병인데 말예요 ㅋㅋ

마늘빵 2007-08-17 15:16   좋아요 0 | URL
어 과외 안가고 뭐해요. 불량선생 :p
저 책 논문 관련해서 본건데, 약간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약간'말고 조금 더. 근데 주석정도에서 써먹을 부분도 있어서 일단 옮겨놨어요. 저 중에 몇 군데 써먹을 데가 있어보여서. 이거 치느라 힘들었어요. -_-
 


이와 관련해서 새로 페이퍼를 쓰기는 귀찮고, 히님 서재에 남겼던 댓글들을 모아 보관해두고 싶고 하여, 댓글들만 복사-붙이기 하려고 했는데, 이게 또 글창에서 안먹힌다. 주소를 링크하고 텍스트만 퍼다 이어놓는다. -_- 어떤 분 보니까 본인이 쓴 댓글을 페이퍼로 가지고 오시던데 이미 쓴 댓글은 그게 안되나보다.

기사 : 훈련소 내 공중전화 통화제한 헌소제기
글 전문 : http://blog.aladin.co.kr/me/1493156


# 1

아프락사스 : 글쎄 생각이 좀 다릅니다. 일리 있는 제기라고 생각하는데요. 수업시간에 핸드폰 사용 제제하는 것과 군대 내에서 훈련시간 이후의 공중전화 사용 문제는 엄연히 다르죠. 비교하시려면 훈련시간 이후의 공중 전화 사용은 수업 이후의 핸드폰 사용과 비교해야 맞습니다. 군대에서 핸드폰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공중전화 제한을 완화하거나 풀어달라는건 크게 무리 없다고 봅니다. 군사기밀 유출하는 것도 아니고. 군사기밀 - 훈련소 위치나 기타 등등 - 의 유출이 걱정된다면 훈련병에게뿐 아니라 제대할때까지 제한해야 옳죠. 공중전화 사용 제제에 대해서 다른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군대가 먼저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Hee : 물론 왜 공중전화를 제한하느냐는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내용이고..
저 또한 훈련병 시절에 의문을 가졌던 부분입니다만..
흔히들 훈런소조교들이 하는 말 있잖습니까.
사회물좀 빼고 가야 된다고.
아직 사회의 그런 습속이 배어 있어서 상대적으로 군사기밀 유출의 위험이
자대배치를 받은 병사들보다 훈련병들이 더 높지요.
게다가 훈련소는 일반 부대들과는 성격이 다르잖아요.
일반 부대에서 일과시간이후의 공중전화 사용 제한은 없습니다.
각 부대들마다 관습에 따라 제한이 있기도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관습에 따라 제한을 두었다가 걸리면..
처벌을 받습니다.
횡설수설하는데..@_@
암튼 훈련소는 일반 부대와는 다른 또다른 특수한 군대조직이기 때문에..
훈련소란 존재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은,
이런 사안을 개별적으로 접근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암튼 제가 열받았던 건 최씨가 제기한 내용이
너무 허술하고 말같지도 않은 내용들로 가득차있어서 수업시간에 핸드폰 쓰게 해달라는 것같은 내용이라고 했지요;

아프락사스 : 단지 사회물을 빼기 위해서 더 엄격히 제한하는거라면 소위 말해 '군기'를 잡기 위한 것이지요? 헌데 억지로 강제로 제압하고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들도록 하려는거 같은데, 이거 안됩니다. 이런 방식과 태도가 군내부에서 자꾸 사고를 유발하는 겁니다. 그건 단지 사고를 일으키는 당사자의 문제라고 보긴 힘들죠. 사회물 빼고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을 만들기 위해 좀 더 엄격하게 제한한다? 또한 자대배치 받은 사람들에 비해 더 유출가능성이 높다?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유출할 사람은 훈련병이든 제대앞둔 병장이든 하려면 합니다. 오히려 훈련병이 더 쫄아있기 때문에 하기 힘들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Hee : 군기를 잡는 것과는 다른 부분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교사가 되려면 임용고시를 치던가 뭐 교육대학원을 나오던가 사범대를나오던가..
암튼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잖아요.
훈련소도 사회인이 군인이 되어가는 과정이지요.
하지만 군대는 사회와는 다른 조직이기 때문에..
학생에서 교사가 되는 과정과는 다른, 특수한 교육과정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 특수과정의 필요성이나 문제점은 단순히 상명하복 차원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과정이라도 교육은 필요하지요.
특수한 과정에는 더 특수한 교육이 필요하고, 훈련소의 통제는 그 교육의 연장선이라고 봅니다.
훈련병이 더 쫄아 있는 이유는 이런 통제가 강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이런 통제들이 풀려 버린다면 사회에서의 자유분방함이 몸에 그대로 남아 있는 훈련병이 더 심하지 않을까요..

아프락사스 : 모든 걸 다 받아들인다고 쳐도,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가져야 할 것은, "특수한 과정에 특수한 교육이 필요하고" 를 떠나서 훈련을 마친 뒤에 공중전화 사용하는 것이 과연 이러한 '특수한 과정'에 해가 되느냐 하는 것이겠죠. 이에 대해서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거죠. 

Hee : 아프님의 말씀은 제한을 푸는 것이 해가 되느냐시고..
저는 제한을 그 자체로 특수한 교육의 하나로 보는 거군요..
음....@_@;;

아프락사스 : 현재의 모든 제한들을, "특수한"이라는 수식어 아래 두었을 때 모든 것은 다 옳게 됩니다. 그런 논리에서라면, 좀 뜬금없는 이야기입니다만 멀리 나아가서는 5.18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수한" 상황이었고, 일개 병사였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시민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거죠. 

Hee : '특수한'이라는 수식어 앞에서 모두 옳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모두 그르게 보이기도 할 것 같아요..
음..그리고 일단 전 그 병사들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보고 있습니다..
전 518을 직접 겪어본 세대가 아니라 여전히 공부중이기에 그럴 지도 모르지만..;


아프락사스 : 보통 군대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변에서 보이는 특징이, "특수하니까" 입니다. 특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납된다는 방식이죠. 이런 논변은 군을 '비판의 성역'으로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5.18 의 경우에도, 그 병사들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죠. 영화에 나오는 대위와 같은 인물들도 있었을 겁니다. 이거 아닌데 하면서도 시민들을 죽이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죠.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또 그보다 더 작은 사태라 할지라도, 부정의한 또 불합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딴지에 대한 논의 자체를 허용해야 한다, 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풍토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고작 공중전화 문제이긴 합니다만, 아주 사소한 작은 것들도 마찬가지죠.

# 2

메피스토 : 사회가 발전하고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집단은 계속적인 진화를 거듭한다고 보고 싶습니다. 군대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먹구구식의 군대행정이 기본사회에서 여러가지 문화를 접하고 온 사람들에게 먹혀들기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군내부의 쇄신과 변혁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나라의 정치적 지정학적 특성상 그런 모습이 더디거나 힘겹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군은 보안과 위계는 어떠한 진화를 거치더라도 변함은 없을 듯 싶습니다. 정도의 강제성과 율법이 존재하는 집단이다 보니까요. 그리고 자주국가를 이룩하는 필수요소이기도 하고요. 사소한 실금 하나로 거대한 댐이 무너지듯이 어찌보면 저러한 개인들의 소원사항이 결국 단체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고 보여집니다. 아프님의 말씀엔 동의하나 최씨가 주장한 헌법소원의 내용은 너무 허술하고 비논리적으로 보이는군요. 그리고 군은 헌법이 우선이 아닌 군법이 우선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시의 경우 한 국가의 존망과 함께 개개인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법은 엄하고 강력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강력한 통제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집니다.

Hee : 제 생각도 군대는 일정수준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전시 뿐만 아니라 훈련상황에서도 개인 뿐만 아니라 동료들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기 때문에..
군대와 사회는 어느 정도의 구분이 필요하다고도 보구요.
최씨의 내용은 그런 구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열받아서 그냥 몇 자 끄적여봤습니다;;
 

아프락사스 : 메피스토님 / 음. 대략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군 내부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이 이렇게 옹호되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씨가 아직 학부생이고 분명 생각의 방향은 있는데, 그걸 정리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요(마치 그 나이때의 저를 보는듯), 헌법보다 군법이 우선시되어야 하는지는 잘모르겠습니다만, 기존의 군법이 '옳다'고 접고 들어가는건 문제있다고 봅니다. 군법의 항목에 대해서도 누군가 지적하고, 딴지걸어주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걸 건드릴 사람도 없을 뿐더러 비판이 들어서지 못하는 성역의 한 부분이죠.

이 부분에 있어서는, 특별히 훈련병에게만 전화통화시간을 제한해야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먼저 이에 대한 군의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의문을 제기하면 의문에 대한 적절한 답이 있어야지요. 그 이후에 들어보고 끄덕끄덕하면 문제 없는 것이고, 들어봤더니 일관성없이 멋대로더라 그러면 이에 대한 논의를 다시 해야지요. 

Hee : 저도 군대 있을 때 군법무관아저씨랑 몇개 물어본 거 밖에 없어서..
군법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암튼 그 아저씨의 말대로라면 군법은 처벌쪽에 무게가 있습니다.
처벌에 있어선 헌법보다 군법이 우선시되고..사회법과 더불어 이중처벌도 되지요..
암튼 중요한 건 요즘에는 헌법차원에서 군인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제 생각과 좀 다른 부분까지도 여론에 따라 바뀐 부분들도 많습니다.
아프님의 말씀처럼 누군가 지적하고 딴지 걸어주고 바뀌는 건 좋지만..
명백히 잘못된 것이 아닌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는 부분들까지
누군가의 딴지 때문에 바뀌어 버린다면..
메피님께서 말씀하신 가능성들이.. 단순히 걱정으로만 끝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내외부적으로 많은 반발이 있었던 걸 보면..
이번 일도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따라 상당히 많은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아프락사스 : 헌법보다 군법이 우선시되고, 사회법과 더불어 이중처벌도 된다는 것의 사실여부를 떠나서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먼저 제기되어야 합니다. 이런 논의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조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더라 라고 하는건, 아닙니다.

예전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훈련소에서 총 주고서 안받으면 2년(감옥), 또 주고 또 안받으면 2년 이런식으로 연장했다고 들었습니다. 군법이니까 어쩔 수 없다, 라고 할게 아니라, 불합리하고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누군가 나서서 의문을 제기하고 딴지를 걸어야 합니다. 지금은 저렇게까지 안하겠죠.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몇몇 분들의 목소리가 있었고, 군법무관들 중에도 잘못되었다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지금의 처우가 옳으냐 하면 이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논의를 해야지요.

딴지는 건다고 다 바뀌는게 아닙니다. 딴지를 걸면 일단 논의를 할 여지가 생겨나는거지요. 그런 다음에 논의 후에 어 잘못되었다, 싶으면 바꾸면 되는거고, 아니면 그냥 그대로 가면 되는거죠. 군대에 대해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문제삼을 수는 없습니다. 군대는 비판의 성역이 아닙니다.

Hee : 제가 군대에서 겪은 바로는..군대는 비판의 성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딴지를 걸면 잽싸게 바꾸어 버리는 존재였습니다.
[공교롭게 제가 군생활하는 동안 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들과 부대내의 자잘한 사건들이 많이 터졌습니다 -_-]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 바뀌어 버리니 또 다른 문제가 터지곤 했고..
전 그 부분을 우려하는 겁니다.
아프님과 제 생각이 다른 부분들은 논의를 하면서 좁히거나 이해를 하거나 할 텐데..
이번에 문제제기를 한 최씨의 내용은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들이고..
중요한 건 그런 허접한 내용에도 흔들리는 것이 군대였기에..우려를 하는 부분이지요..
암튼 군법은 잘 모르겠지만..이중처벌은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말씀하신 부분들은 공감이 가는 부분들이고 저도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_@


아프락사스 : 글쎄요. 저도 대대 인사과에 있어서 이런 행정적인 부분들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만, 군이 부랴부랴 서둘러 개선하고 움직이는 행태를 보이는건, 그나마 어떤 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지적이 정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군대는 비판의 성역으로 존재했고, 이제와서 서서히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 뿐이지요.

경계근무 중 누군가 자살을 했다, 아니면 소대원 전체를 향해 난사했다, 등의 사건이 터졌을 때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요.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총을 쏜 놈만을 질타하고 비난합니다. 나쁜새퀴, 뭐 저런 꼴통새퀴가 군대에 들어와서는. 이런 식이죠. 근데 그렇지 않죠. 문제가 왜 일어났는가를 고민하고, 그러다가 분대머시기 - 다행히도 용어를 다 까먹었다 - 도 만들고, 나와 다른 이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거겠죠.

누군가 지적한다고 군대가 무조건 행동을 바꾸지 않습니다. 지적이 옳기 때문에 바꾸는 겁니다. 그리고 바뀌어야 하는게 당연하고요.

아래 좌회전님 말씀처럼, 최씨의 헌소제기는 표현과 문장이 "세련"되지 못했을 뿐 내용은 받아들일만 하죠.

Turnleft : 저도 아프님 의견과 같습니다. 헌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아래 여러 실정법들이 그 법 자체의 논리에 따라 국민의 근본적인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상존하기 때문입니다. 님께서 주장하시는 바는 군대라는 집단의 맥락에서 옳은 것일 수는 있어도(여기에도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것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면 분명 문제제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람이 얼마나 세련되게 문제제기를 했느냐를 떠나서, 충돌하는 권리와 의무 사이에서 어떻게 조정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Hee : 충돌하는 권리와 의무 사이에서의 조정이라..
음..생각해봄직한 문제네요..@_@

아. 그리고 군대에서 다쳐서 손가락이 정상이 아닌 제 경험상,
군대는 일정수준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방심했다간 자기 몸 다치거나 죽는 건 둘째 치고 타인까지 위험하니까요..

메피스토 : 윽..원생이였습니까...원문을 보진 못했지만...어찌 원생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어찌 되었던... 이번 헌법소원은 판례를 남기는 것만큼이니만큼 법원에서 헌법소원자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 듯 싶습니다. 그래도..최대 수혜자는 최군이 될 듯 싶습니다.

멜기세덱 : 저는 예전에 훈련생의 흡연금지에 관해서도 비판적으로 페이퍼를 쓴 적이 있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헌소제기가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훈련소에서는 교육훈련이 목적이지, 사회격리가 목적은 아니니까요. 대한민국의 군대가 이런 구시대적 발상에서 얼른 깨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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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7-08-15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기사를 보면서 이번 헌소 제기가 처음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아니면 그간 언론에서 이슈화 시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훈련병들의 전화사용금지와 금연강요는 2대 악습이리가 생각합니다. 훈련병들의 공중전화 사용금지가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의 특성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헌소제기자가 주장하는 개인의 행복추구권 등에 반한다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라는 특수에 인간이라는 보편이 가려지는 한, 군개혁은 요원해 보입니다.

마늘빵 2007-08-15 23:38   좋아요 0 | URL
당연히 문제제기 되었어야 하는 것들이 이보다 더 많을겁니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심각한 것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다 겪는건데 유별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겠지요. 저런 놈은 영창에 미리 집어넣어야돼, 라고 퍼붓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제기가 어설플망정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건 아니라고 봅니다.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에 당연할까,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서 논의는 시작되고, 잘못된 것들은 바뀌기 마련이지요. 말씀하신대로 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군대라는 특수에 인간이라는 보편이 가려지는 한, 군개혁은 요원해 보입니다."

얼음장수 2007-08-16 03:43   좋아요 0 | URL
전역하시고도 시간이 꽤 흘렀을 텐데도 군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시는 모습이 인상적이네요. 대한민국의 예비역들은 보통 군문제에는 무관심하면서 술안주삼아 영웅담이나 늘어놓잖아요? 예비역이야말로 군대의 각종 악습과 사병인권문제에 대해 적극 발언하고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주체일 수 있을 텐데요. 아프님의 주장에서도 많은 걸 배웠지만, 예비역으로서 군문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느끼는 바가 큽니다. 군대 많이 좋야졌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좋아질 수 있는 것들로 가득한 곳이 군대인 것 같습니다.

마늘빵 2007-08-16 09:15   좋아요 0 | URL
제대한지 얼마 안되셨나봅니다. 군대와 관련된 문제에 관심 많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군대'라는게 미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고 또 종교와 같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잘 건드리려하지 않죠. 딴 이야기지만, 한겨레21의 신윤동욱 기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겁니다. 예전에 1999-2001년 정도에 열심히 구독했는데, 그때 군문제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고 문제제기하고 그랬거든요.

예비역들이 발언해야합니다. 군입대 전에 군대와 관련된 문제점을 지적했더니, 같이 논쟁하던 예비역 두 선배가 "군대가 갔다오고 그런 소리 해라"였습니다. 군대 가지 않아도, 여성이어도, 당연히 발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군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니까요. 더군다나 군대를 갔다왔다면 더더욱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동참해야하는데 오히려 대개는 군대를 감싸는 모양새를 보이죠.

바라 2007-08-1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예비역이세요. 아프락사스님. 저도 멋지진 않겠지만 얼릉 예비역이 되고 싶어요-_-

마늘빵 2007-08-16 15:02   좋아요 0 | URL
아 바라님이 지금 복무 중이신가요? 어서 예비역이 되시길. 이게 마음대로 되는건 아니지만. :)

얼음장수 2007-08-16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저도 한 100일 남긴 했습니다. 저도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해서 신윤동욱 기자가 쓴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마늘빵 2007-08-16 20:29   좋아요 0 | URL
지금은 아마 다른데 간걸로 알고 있는데. 씨네21로 갔나. 모르겠어요. 지난주에는 신윤동욱 기자 책도 냈던데.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인식이 미미할 때 한겨레21에서 신윤동욱 기자가 참 열심히 해줬습니다.

2007-08-19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9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치와 진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39
김선욱 지음 / 책세상 / 2001년 5월
절판


정치는 철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 현상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포착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 즉 이미 이성적으로 구성된 어떤 이론을 가지고 현상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무(無)이론적 태도로 관찰하여 그 현상의 가장 독특한 특성을 파악하려는 자세를 현상학적 태도라고 한다.-14쪽

동물에게도 다양한 욕구가 존재하지만 인간과 같은 복수성은 없다. 인간의 복수성은 인간 개체의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간은 모두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개성을 표출하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철저히 무시당할 때 견딜 수 없게 된다. 자신의 개성과 자존심을 철저히 배제하고 정치적 이해 관계를 위해 자신의 상전에게 봉사하는 사람을 비난하여 부르는 표현 중에 '주구(走拘)'라는 말이 있따.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동물과 같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행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를 드러내는 행동 간에 갈등이 일어남으로써 정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 밑줄그은이 주 : 인간의 복수성이란 인간 사이에 생겨나는 다양한 갈등 양상들을 일컫는다. 자존심, 명예, 열등감, 정의, 체면 등등의 것들.-23쪽

우리의 행위는 언어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와 언어 행위로 구별할 수 있다. 언어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는 행위의 의미가 본인이나 타인에 의해 해명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이 공동 생활에서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언어 행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없는 행위는 언어 행위에 의존하여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것은 결국 언어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이유에서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언어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9쪽

정치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양상에 속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밥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 인간의 노동과 작업이 인간의 삶에서 본질적인 모습인 것처럼, 개성을 표현하고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 생활을 하는 것도 인간 삶의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를 이해할 때, 정치는 인간이 살아가는 한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32-33쪽

공적 시선을 받지 마라야 할 것이란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 생리적 필요에 부합한 것 등이다. 밥하기, 밥먹기, 성행위 등과 같이 동물로서의 인간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은 공적인 시선 속에서 행해질 필요가 없다. 이런 활동은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즉 가정이 사적 영역으로 존재했다. 가정은 생존에 가장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 사적 경제의 차원에 해당하는 문제가 해결되는 장소였다. 따라서 가정 안에서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가부장의 권한이 절대적이었다. 경제 문제가 절실한 만큼, 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의 지도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가정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는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차적인 것이 경제활동이라는 사실에서, 경제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다.

* 밑줄그은이 주 : 위와 같은 의미의 사적 영역은 '고대'의 의미. 현대는 이와 달리 해석된다. -41쪽

한편 공적 영역은 아고라처럼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말한다. 이는 개인의 차이, 인간의 복수성을 핵심으로 하는 행위가 이루어진 장소였다. 개성을 드러내는 행위는 다른 사람이 보아주고 들어줄 때 의미가 있따. 이는 마치 무대에서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것과 같다. 관객이 있음으로써 배우의 연기가 의미 있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공동의 세계가 계속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치가의 드러내기 활동이 계속될 수 있고, 이를 통한 공동의 생활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41-42쪽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은 각각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위한 자리로서 마련된 것인데, 이런 구분이 필요한 것은 사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이 공적 영역을 파괴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중략 ...

생의 필요와 욕구를 해결하는 사적 영역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생의 필연성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고 인정된다. 필연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사적인 문제를 공적인 영역에서 다루게 되면, 필연성의 힘에서 그보다 약해 보이는 공적 문제들은 뒷전으로 물러나 앉게 된다. 자유의 문제보다 빵의 문제가 더욱 시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는 사적 영역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다.-42쪽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는 노예제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이 구체적인 생산 활동에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중세의 봉건제 사회는 영지 내의 생산활동 구조가 정치 구조와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적인 것과 구별되는 공적 영역에서 민주적 토론에 의한 정치 영역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중세의 봉건적 사회국조에서는 왕을 정점으로하는 수직적, 경제적 생산 관계가 곧 정치 관계를 의미한 것이다. -44-45쪽

현대에서는 사적 문제와 공적 문제의 구분이 불분명해졌고, 개인 생활에서 개인의 중요성까지도 변화되어 버렸다. 이제 오늘날 사적인 문제란 더 이상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프라이버시 문제로 전환되어 버렸다. 그러나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은, 사적인 관심과 보호 대상인 사유 재산이 공적 관심의 대상으로 전환되어버린 현상이다. 즉 경제 문제가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45쪽

자본은 재산과는 달리 소비를 통해 없어지지 않는 일종의 항구성을 갖고 있다. 자본의 항구성은 정적인 구조를 가지지 않고 과정의 특성을 가진다. 지속적으로 자본을 움직이는 과정을 유지하지 않으면 자본은 다시 소비되어 소멸하고 만다. 즉 돌고 도는 돈은 계속 돌려야 한다. 따라서 자본은 자기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과정을 수행하면서 우리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끌게 된다. 이로써 공적 관심이 자본 유지와 존속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지는 현상, 즉 공적 관심이 사적인 것에 몰두하게 되는 현상을 낳는다.-46쪽

사적인 것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왔다고 해서 공적인 것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공적 영역을 사적인 것을 위해 기능하는 것으로 전환시켜버리고, 이와 더불어 공적 영역에서만 가능한 인간의 복수성에 바탕을 둔 인간의 활동을 잠식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47쪽

정리하자면, 올바른 척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답을 끌어내는 부분이 사회적인 것이고, 이와는 달리 개성과 인간의 복수성이 드러나는 부분이 정치적인 것이다.-55쪽

철학은 확실한 진리의 준거를 가지고 정치 영역으로 들어오지만, 정치는 그러한 준거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진리의 준거가 존중되는 것은 사회적인 것에서이다. 준거와 기준이 존재하는 한 복수성은 존중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은 말을 잃어버릴 정도의 놀라운 경험에서 시작된다. 모든 언어 활동은 진리 발견 과정에서는 중요하지만 지닐 발견과 더불어 언어 활동은 중지된다. 진리가 등장하는 곳에서 정치적 인간인 쏘온 로곤 에콘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따라서 정치 영역은 진리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79쪽

정치가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이때의 진리 개념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관련된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세계의 배후에 진리의 세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이 연관된 진리 개념이다. 이러한 진리 개념은 흔히 말하는 진리 판별의 두 기준, 즉 대응설과 정합설 가운데 대응설의 근본 원리와 연결된다. 대응설이란 주장된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주장된 말의 진위를 검토하는 것이고, 정합설이란 주장된 내용 가운데 논리적인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가를 따지는 것, 즉 논리성에 대한 검토를 의미한다.-81쪽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이해가 아니라 대화 당사자 사이의 상호 이해이며, 이는 구체적인 대화 행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실제의 언어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행위에서는 사실상 두 가지 차원에서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첫째는 말하는 내용의 교환이다. 둘째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 당사자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후자는 세 가지 차원, 즉 말하는 사람의 진정한 의도, 말한 내용에 대한 말하는 사람의 입장, 그리고 이런 대화가 그 상황에 적합한지의 문제 등이다.

이 두 차원의 상호 작용을 검토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합의를 이룰 때, 세 차원에서 타당성의 검증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 밑줄그은 이 주 : '세 차원'이란, "첫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 "둘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내용이 실현 가능한 상황에 있는지를 따져볼 것", "셋째, 말을 들은 사람은 말한 사람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 말이 과연 적절하게 한 말인지를 문제삼을 것"을 지칭한다. 이는 하버마스의 형식 화용론을 요약한 것이다.-89쪽

동정은 특히 루소가 정치적 행위의 원리로 생각했던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성선설을 바탕에 두고 이러한 동정의 힘을 신뢰했다. 그러나 동정과 감정 이입에 의한 행동이 파괴적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동정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파시즘적인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변혁을 가능하게 한 혁명적 힘을 생각하면 그것이 차가운 이성적 합의보다는 정서적 합의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된다. 이는 연대가 이성보다 감정에 의한 것이라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 중략 ... 나아가 정치적 설득 또한 이성적 논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정치적 연대 또한 이성적 합의가 자동적으로 수반되지 않는 어떤 다른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성적인 것이 아니면 모두 감정적인 차원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공동 행위자를 결속하는 것은 감정의 직접적 일치가 아니라 참여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원리'이다. 이 원리란 위대성, 명예, 위엄, 영광, 평등, 공포, 불신, 증오와 같은 것들이다.-108-109쪽

시민의 판단이 이와 같은 세계적인 차원으로까지 관점이 확장되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시민이 판단을 내려본 후에야 알 수 있다. 실제로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함께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은 채, 선험적으로 판단의 타당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따라서 판단을 내리는 행위 자체는 바람직한 정치 영역의 보존과 정치적 삶을 통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험한 것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 것이다.

* 밑줄그은 이 주 : 마지막 줄 명언. 밑줄 쫙.-111쪽

세계적 연대의 싹은 시민이 내리는 정치적 판단에 이미 존재한다. 판단 자체가 지역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편파성을 극복함으로써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적 연대를 기능하게 하는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잘못되어 비판받을 것을 감수하고 행하는 판단 행위 그 자체다.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이 소통되게 하는 정치 영역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판단을 내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판단 불능이나 혼자 머리 속에서만 하는 판단으로는 인간적인 삶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 수 없으며 오히려 세계에서 소외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쏘온 로곤 에콘의 언어 사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대화하는 것만이 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117쪽

시민은 항상 확장된 사고를 통해 세계적 차원에서의 판단을 필요에 따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을 통해 형성된 시민의 공동 행위에 의해 정치가 이끌어져야 한다. 다수의 의지와 괴리된 법은 수정되어야 하고 저항을 받아야 한다. 시민의 준법 정신이 투철해야 하는 만큼 시민의 저항정신도 투철해야 한다. 맹목적인 법 준수와 판단의 중지는 간접적으로 제도적 폭력에 참여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121-122쪽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며, 법은 진리 자체가 아니다. 정치의 목적은 복수성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관점을 언어적 판단과 의견을 드러냄으로써 이룩되고, 이러한 의견과 판단을 제시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공적 영역, 즉 정치 영역이 소멸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은 의견과 판단을 제시해야 하고, 이렇게 제시하는 의견과 판단을 중심으로 공동 행위가 형성된다. 이 공동 행위가 곧 정치적 권력의 유일한 근거다. 법은 이 근거에 의존해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122쪽

[미주12]

"언어의 본질적 사용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문제는 항상 정치적이다." (한나 아렌트) -133쪽

[미주61]

그러면 폭력이 불합리한 사고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종종 폭력을 비합리성의 범주에 넣지만, 폭력 자체는 이성의 반의어가 아니다. 이성과는 무관하다. 폭력은 오히려 목적을 위한 '합리적' 계획하에 행사되기도 한다. 때때로는 격렬한 분노에서 비롯된다. 눈뜨고 볼 수 없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거나 목격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분노를 터뜨린다. 이 분노에 반대되는 것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몰이해일 뿐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분노를 억누르거나 없애려는 것은 비인간화를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이유는 폭력이 문제를 즉각적으로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이 효과적인 경우는, 마치 정당 방위로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처럼 아주 직접적이고 순간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폭력도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이 전략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사용될 때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될 뿐이다.-142쪽

[미주61]

폭력의 경우는 다른 정치적 행위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다. 즉 폭력은 본질상 수단적이기 때문에 폭력을 통해 의도된 목적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예측 불가능성은 폭력 행위에서 정당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때문에 어떤 좋은 목적이 폭력적 수단에 의해 산출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목적이 수단에 의해 다시 쉽게 압도되어버리는 것이 폭력이다.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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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방학이고 논문 준비한답시고 머리 아픈 책들 읽느라고 도서관엘 다닌다. 그래봐야 나는 책상에 진득하니 오래 못앉아있기 때문에 한 시간도 안되서 들락날락 하고, 도서관에 붙어있는 시간도 몇 시간 정도 밖에 안되지만, 그나마라도 안가는 것보다는 가는게 낫더라 라는 결론. 집구석에서 책읽는다고 책상에 앉아있지도 않고 쇼파에 비스듬히 껄렁하게 앉아 책 좀 읽다가 누워 잠들고 인터넷하고, 티비보고 이러느니 아예 아무 것도 없는 도서관으로 가는게 차라리 낫더라. 책읽는거 평소에 좋아하면서도 뭔가를 위해서 억지로 읽으면 또 거부감들고 하는 것이, 학자 체질은 아닌가보다. 한군데 붙어있는 성격이 못된다.

 대학원은 집에서 너무 멀고 - 가면 지쳐 - 그래서 집에서 가까운 학부 대학 도서관으로 가는데 느즈막히 출발해서 학교에 도착할 때쯤이면 점심시간이다. 들어갔다 다시나오는거보다 먹고 들어가는게 더 효율적이므로 점심을 인근 식당에서 해결한다. 대학 다니던 시절와 많이 달라져 있는 모습에 가끔씩 올 때마다 놀랐는데, 요새는 매일 가서 익숙하다. 없던 밥집도 생겼고, 좋아했던 어느 아늑한 밥집은 - 커피숍에 더 가까운 - 피씨방으로 대체되었고 해서 골고루 하나씩 들어가보는 중이다. 대개는 3000원에서 3500원 정도의 가격인데 - 예전엔 대부분 2500원이었는데 - 집구석에서 아침을 제외하고는 밥을 잘 안먹는지라 나가서 혼자있을 땐 밥을 챙겨먹는 편이다.

  순두부, 돌솥비빕밥이 주 식단이 되고, 가끔씩 부대찌개나 된장찌개, 새우볶음밥 등으로 메뉴를 자체적으로 넓히기도 한다. 일단은 한 가지 메뉴를 여러 집 먹어보고 그 메뉴를 먹을 때는 그 집을 택하려고 한다. 전에 있던 어느 식당은 순두부가 진짜 맛있었는데, 간판인 그대로고 아마 주인아주머니가 바뀐 듯 하다. 예전 맛을 기대하고 갔더니 맛이 다르더라. 순두부는 아직까지 다 고만고만하고, 참치돌솥 맛있는 집은 찾아냈다. 다음에는 일반 돌솥 비빔밥을 먹어봐야지.

  식당을 선택하는데 있어선 주위 입소문과 점심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있는가를 보고 판단하면 대개 맞아떨어지는데, 지금은 날 아는 사람들도 없고 혼자 다녀야하니 주위 입소문이라는건 제외하고, 식당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있는가를 가지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대충 사람이 많은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은 한번씩 들어가보면 왜 그런지 느낄 수 있다. 어제는 일부러 사람이 없는 집에 들어가봤는데, 역시나 주문을 했는데도 네. 라는 대답도 없고, 주문을 받은건지 안받은건지 알 수 없는데, 주방에서 두 아주머니 이야기하는걸 살짝 들은 바로는 알아들은 듯 하여 마냥 기다리고 있다. 어 근데 이 집엔 티비가 없다. 주로 혼자 오는 손님들이 많은 학교 식당엔 티비가 비치되어있어 밥이 나오기까지의 지루함과 밥을 먹으면서의 적적함을 달래주어야 하는데, 이런! 이것도 손님이 없음에 한 몫 한다.

 또, 밥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본 메뉴인 순두부가 나오기 전에 반찬과 밥을 먼저 주는데, 밥이 식도록 순두부가 나오지 않는다. 그럼 차라리 좀 늦더라도 밥이랑 순두부랑 같이 주는게 낫지 않을까. 어느 정도의 시간차라면 괜찮지만 반찬과 밥을 앞에 둔지 한참 되고서야 순두부가  나온다면 문제있다. 밥과 반찬, 순두부를 탁자에 올려놓는 것도 그렇다. 제 위치에 올려놓는게 아니라 일단 그냥 내 탁자 위에만 올려져있으면 된다는 방식. 밥과 반찬과 순두부가 있어야 할 제 위치를 벗어나 마음대로 가있다. 밥을 먹고 나갈 때도 안녕히 가세요, 이런 말도 없다. 그렇담 이 식당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단 하루 밥먹어본 경험만으로 이해가 간다.

p.s.  여러 식당을 전전하면서(?) 각 식당의 특징들을 살피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것도 혼자가니깐 가능한거지 여럿이 가면 사실 그런걸 생각하거나 느낄 새가 없다. 나는 혼자 밥먹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밥을 굶더라도 혼자서는 결코 밥을 먹지 않는데, 나는 혼자서 아주 잘 돌아다니고 잘 먹는다. 극장도 혼자가고, 밥도 혼자사먹고, 혼자 디비디방도 가봤다. 혼자함이 어색하지 않은데, 이게 너무 또 익숙해지면 안좋다. 둘이 되기  힘드니까. 혼자함이 어색하고 뻘쭘해야 그게 싫어서라도 둘이 되고 싶어한다. 그러니 필요할 때 적절히 혼자되기란 괜찮지만, 적당히 어색하고 뻘쭘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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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12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하하하
덧글 정말 맘에 드네 아프님 :)

마늘빵 2007-08-12 11:15   좋아요 0 | URL
태그 아님 P.S.? :)

비로그인 2007-08-12 11:22   좋아요 0 | URL
뱀발 ㅋㅋㅋ
귀엽고 대견스러워요 :)

Jade 2007-08-1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오래지 않아 "순두부 좋아", "돌솥도 좋아" 대신 "누구누구좋아" 쓰시는 날이 오시길 ㅎㅎ 아 명동은 안가세요? ^^

마늘빵 2007-08-12 11:56   좋아요 0 | URL
네? 명동이요? 크크. 우리은행이요? ㅎㅎㅎㅎㅎ

다락방 2007-08-1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 사진이 잔뜩 있을 줄 알았는데 글만 한가득이네요.으흐흐
저는 혼자 커피점도 잘 가고, 서점도 잘 가고, 영화관도 잘 가는데 이상하게 아직 혼자 밥은 못먹겠어요. 먹어보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흐음.

마늘빵 2007-08-12 11:57   좋아요 0 | URL
그거 못하는 사람 많아요. 딴거 다 해도 밥은 혼자 못먹는 사람. 제가 아는 어떤 사람도 배고픈데 굶더라고요. -_- 빵이라도 사다 먹지.

Mephistopheles 2007-08-12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건대정문(우리가 아는 소뿔은 후문)쪽에 있었던 엄마손분식이 기억에 남습니다.
맛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그 푸짐한 양...
남학생, 여학생 차별되는 밥그릇과 순두부를 시키면 작은 뚝배기가 아니라 중짜리 냄비에 하나가득 담겨져 나오는 순두부까지..그러면서 가격은 엄청 싸고..^^

마늘빵 2007-08-12 11:58   좋아요 0 | URL
학교 앞 식당들이 양이 많아요. 근데 그걸 또 배부르다고 남기자면 왠지 미안하고 그래서 배불러도 다 먹고 그러죠. 전 뱃 속이 양이 많진 않은데 꾸역꾸역 다 집어넣고 뚝딱 비운다는. :)

비로그인 2007-08-12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저희 회사 앞도 마땅히 먹을 게 없습니다. 식당은 많은데 몇년 다니다보니 그게 그거 같아요 그래도 식사는 국력이니 잘 먹으려고 합니다.

마늘빵 2007-08-12 23:05   좋아요 0 | URL
사발면님 제 서재에 첫걸음 해주셨군요. :) 계속 같은 곳에서 돌다보면 역시 질리게 마련인가봅니다. 저는 아주 오랫만에 이 근방에서 밥을 먹느라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비로그인 2007-08-12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맛있어도 미원많이 넣어서 그런 집도 있으니 잘드시고 다니세요. 전 회사근처 맛있다고 생각해서 3일 연속갔더니 3일째 되는날 미원과 설탕맛이 확 느껴져서 (제가 좀 느린지라. ^^;;;;) 실망했거든요. 글구요, 아줌마들은 혼자먹는 남자들에게는 잘해줘도 혼자먹는 여자들에겐 서비스가 별로. 그래선 그냥 전 혼자 먹을때에는 괜히 기분상할 필요 없는 패스트푸드나 패밀리레스토랑 가서 먹어요.

마늘빵 2007-08-12 23:07   좋아요 0 | URL
아 저는 그건 잘 구분 못하겠어요. -_- 그런쪽으로는 둔한가봐요. 그걸 어떻게 느끼는지. 음. 아줌마들 특별히 잘해주지도 않던데요? 그냥 남자면 밥 조금 더 주는거 같고 그런 정도. 근데 저는 밥 많이 먹는건 별론데... 근데 너구리님 패밀리레스토랑에 혼자 가신다고요? 저는 그건 못하겠던데...

비로그인 2007-08-12 23:28   좋아요 0 | URL
회사근처엔 패밀리레스토랑이라고 해도 직장인이 많아요. 그리고 님얼굴도 예쁘장하시니 한번 여장하고 가보세요, 차이가 나는지 =3=3=3=3

마늘빵 2007-08-12 23:43   좋아요 0 | URL
크하하하하핫. 머에요. 여장이라니요. 저는 여장하면 안어울립니다. :) 패밀리 레스토랑엘 어떤 분이 크리스마스 이브날 혼자 갔다고 들었는데, 점원이 자주 와서 말도 붙여주고 그러더래요. -_-

Kitty 2007-08-12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식당이랑 영화관은 절대 혼자 못가요.
혼자 식당 갈바에야 그냥 테이크아웃해서 먹어요 ㅠㅠ
다만 쇼핑은 절대 혼다 다닌다는.
누가 나때문에 기다리고 있으면 불편해서 뭘 못사거든요;;
그나저나 순두부랑 돌솥 먹고싶다........으앙 ㅠㅠ

마늘빵 2007-08-12 23:08   좋아요 0 | URL
키티님이 그런 유형이었군요. ^^ 저랑은 반대십니다. 쇼핑은 전 혼자서는 이상하던데... -_- 식당이랑 영화관은 혼자 잘 다녀도. 영화는 요새 혼자 보는 사람들 많아요. 그래서 더 어색하지 않아요.

비로그인 2007-08-1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건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혼자 디비디방도 가보셨군요.

마늘빵 2007-08-13 09:46   좋아요 0 | URL
흐흐. 네. :) 좀 어색하긴 했어요. -_- 좀 한적한 어떤데(?)는 아줌마가 여자 불러줄까요, 이러더라는. 저는 놀래서 아니요! 그랬죠.

sweetrain 2007-08-13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혼자서 패밀리 레스토랑도 종종 갑니다.
처음 혼자 갔을 때 어색할 줄 알았는데 안 어색하더라고요.

마늘빵 2007-08-13 19:51   좋아요 0 | URL
강적이군요! 그건 좀 전 힘들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