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 - 대화의 역사
스티븐 밀러 지음, 진성록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2월
절판


대화가 만족스럽지 못한 주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에 의문이 제기될 경우에 수세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라고 몽테뉴는 말한다. "논증이 실패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소리와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자신을 추스를 생각은 없고 예의 없이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허약함과 취약성을 스스로 노출시킨다." -19쪽

"대화 중에 즐거워하거나 지각 있어 보이는 사람이 드문 이유 중 하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향해 오는 말에 대해 무슨 대답을 명쾌하게 내놓을까 궁리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더 깊이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얼굴에 관심의 표정이 살짝 실릴 정도로만 정신을 한번 가다듬고 주변을 살폅라. 그러면 그 순간 당신은 그들의 눈과 생각의 열차가 당신의 말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채 자신의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으려고 안달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라 로슈푸코)-20쪽

스위프트가대화에서 치유하기 힘든 잘못으로 꼽는 것은 두 가지다. 말하는 사람 본인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하나인데, 이 잘못을 스위프트는 현학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 가지 잘못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자르려고 드는 안달이며, 자신의 말이 잘렸을 때 느끼는 불쾌감"이다. 또한 "반박하고 부인하고 싶은 갈망과 거짓말을 하고 싶은 욕망"으로 고통 받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사고의 방랑'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어서 그때그때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위프트에 따르면 "이런 '홀림'에 빠져 고통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신병원의 광인만큼이나 대화에 부적격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21-22쪽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를 누린다는 개념은 오늘날엔 모든 의견이 똑같이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의견이 다 유효하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눠 갖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잦다. 나눈다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관대한 행동을 암시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경우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당신과 나눠 먹자고 내놓는 음식을 비판하는 행위가 무례한 것과 똑같이, 공유하는 어떤 생각을 비판하는 것도 또한 무례할 수 있다. 공유는 대화의 활기를 죽이는 셈이 된다. 대화 대신에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공유가 늘어나면 선의의 놀림이 줄어들 것이고 숨 막히게 만드는 공손 때문에 대화도 나른해질 것이다. -47-48쪽

교역과 대화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흄과 존슨에 따르면, 한 사회의 교역의 범위와 그 사회의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에 상관관계가 있다. <영국사>에서 흄은 교양 없는 (혹은 세련되지 않거나 점잖지 못한) 사회와 세련된 사회를 대비시킨다. 그가 말하는 교양 없는 사회는 농업이 주가 되는 사회를 뜻한다. 도시가 많지 않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시민들의 비율이 낮은 사회다. 흄의 <영국사>는 대부분 교역의 확장이 어떤 식으로 교양 없는 사회를 세련된 사회로 변화시켰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그의 표현대로, 사치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흄이 말하는 세련된 사회는 대화가 번성하는 사회이다. 사치는 대충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그 이상의 상업적 활동을 의미한다. -89쪽

존슨의 관점에서 보면 사치의 성장은 세 가지 방법으로 대화를 향상시킨다. 첫째, 사치의 성장은 종교적 광신의 비사교적인 열정을 식힌다. 서부의 섬들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계몽되지는 않았지만, 청교주의의 엄격함이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둘째, 사치의 성장은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여유를 가진 사람의 수를 늘려준다. "지성이 없으면 사람은 사교적이지 못하다. 그 사람은 단지 무리를 지어 살 뿐이다. 그런 곳에는 지성이 거의 없다. 모든 사람들은 일상의 노동에 얽매어 지낸다. 그리고 온 마음이 노동에 바쳐진다" 마지막으로, 사치의 성장은 더 많은 사람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은다. 그러면 거기에는 대화의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된다. 고지의 사람들은 "지금 그들의 특이함을 잃고 일반적인 공동체와 섞이려고 서두르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93쪽

에디슨은 상상의 즐거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것이 그 하나이고,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자연이든, 그림이든, 시속에 등장하는 것이든, 멋진 풍경들은 마음 뿐 아니라 신체에도 온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장면들은 또 상상력을 맑고 밝게 가꿔줄 뿐 아니라 비탄과 우울을 내쫓을 수도 있다. "거대한 산들과 높은 바위, 낭떠러지, 혹은 넓은 폭포"를 언급하면서, 에디슨은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자연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저 거친 장엄함을 보는 영향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라고 묻는다. 에디슨에 따르면, "끝 간데 없이 펼쳐지는 광경에 돌연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고, 그 광경들을 음미할 때 영혼에서 몹시 유쾌한 고요와 가슴 벅찬 경탄을 느끼게 된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는 영혼을 기쁘게 만든다"고 말한다.
풍경의 문학적 묘사 또한 영혼을 즐겁게 만든다고 에디슨은 주장한다. "풍경을 묘사한 글들은 독자의 마음 속에 은밀히 감춰져 있던 흥분과 열정을 흔들어 일깨우는 경향이 있다. <일리아드>를 읽는 것은 황무지와 자연 그대로의 늪, 거대한 숲, 제멋대로 생긴 바위와 낭떠러지가 엮어내는 다양한 풍경들이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곳을 여행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호머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장엄한 아이디어를 채워준다." -203-204쪽

"자연적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머문다. 반면 사회적 인간은 오직 자신의 밖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사는 방법만을 안다. 말하자면 사회적 인간은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끌어낸다."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208쪽

소로는 대화의 세계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는 고독이 우리에게 진지한 독서의 시간을 안겨주기 때문에 대화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우리의 독서와 대화와 사고는 모두 매우 낮은 수준에 있다. 지능이 약한 존재에게나 어울릴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사교가 고독보다 덜 만족스럽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일은, 그 상대가 제아무리 훌륭한 존재일지라도, 금방 따분해지고 시큰둥해진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다. 지금까지 고독만큼 벗으로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교적 행위는 부담이라고 소로는 말한다. 그가 속한 비공식 클럽은 규칙 때문에 지루하게 다가온다. "자주 만나는 이 모임을 서로가 참아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과 에티켓, 공손함에 동의해야만 한다." 공손함은 그만한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그는 암시한다. 대화에서 상대방을 즐겁게 만드는 데 필요한 노력이 그 대화에서 끌어내는 혜택보다 더 크다는 뜻이다. -264-265쪽

반체제문화 이론가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훼손시킨다. 자신들이 허위의식으로 고통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비판자들은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면서도 마약 복용이 아닌 길을 강조했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말을 옮긴다. "집권 권력 구조가 개인의 의식만이 아니라 잠재의식과 무의식까지 조작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정말로 놀랍다" 허위의식이라는 개념은 대화에 가장 중요한 동등을 손상시킨다. 마르쿠제는 실제로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의식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과의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다." -306쪽

마르쿠제의 별이 기울던 1970년대에는, 프랑스 이론가 미셸 푸코가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하는 선봉에 섰다. 그는 마르쿠제의 허위의식과 비슷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체계'의 죄수라는 주장이다. 푸코가 말하는 진리체계란, 어떤 특정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에 의해 결정되는, 사물을 보는 방식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른 채 '진리체계'의 죄수가 되어버린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세뇌가 되었다는 것이다. -306-307쪽

죽기 직전에 한 어느 인터뷰를 보면, 푸코는 '진리체계'라는 자신의 개념이 대화를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듯하다. 이제 푸코는 알찬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진리체계'의 죄수가 아니라는 가정이 깔려야 한다고 암시한다. 달리 표현하면, 누구나 다 똑같은 수준의 의식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진지한 놀이에서는, 그리고 상호 해명의 작업에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 보면 각자의 권리가 그 토론에 내재해 있다."
몇몇 에세이에서 푸코는 '진실체계'라는 자신의 개념과 상충하는 아이디어를 한 가지 내놓았다. 그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각자 삶이 역사의 죄수라고 주장했다. "내가 하는 말은 객관적인 가치를 갖지 않는다. 나의 저작물 각각은 나 자신의 전기 중 일부분을 이룬다."
만약 모든 아이디어들이 각 개인의 진리라면, 거기에는 알찬 대화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아이디어의 교환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 화자(혹은 필자)는 오직 개인적인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청중(혹은 독자)은 "당신의 개인적인 진실을 나에겔 털어놓는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7-308쪽

"모뎀에서 모뎀으로 글을 쓸 때에는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당신에게 아주 편리한 축약어가 상대방에게는 무성의하고 당돌하게, 심지어 불쾌하게 비칠 수 있다. 약간의 경멸이 크게 확대될 수도 있다. 더없이 약한 암시도 꾸짖음처럼 들릴 수 있다. 미묘함과 아이러니, 풍자가 담긴 글이 상대방에게는 쿵하는 굉음으로 닿을 수도 있다."
(<당신이 나에게 보내다>, 패트리샤 T. 오코너, 스튜어트 켈러먼) -353쪽

"모든 이성적인 생명체에게는 무리를 짓고 사교를 하는 성향이 강하다."(흄)
"사람은 명예와 존엄을 노려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나 벌과 개미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까닭에 인간 사회에서는 시기와 증오가, 결과적으로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벌과 개미의 사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일에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다른 존재들을 위압할 수 있는 파워가 없기 때문이다."(홉스, <리바이어던>)-356-357쪽

상업의 확장이 대화의 세계를 넓혀줄 것이라고 흄이 주장했을 때, 그는 아마 틀린 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상업의 성장이 대화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상업이 대화 회피 장비들의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고, 그 결과 대화의 세계는 오히려 수축하는 것 같이 보인다.-362쪽

근본주의 기독교인들도 급진적인 이슬람에 가담하는 사람들과 공통점 몇 가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대화의 세계를 파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박해할 뜻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속적으로 성경을 들먹이고 한 가지 질문에는 두 개의 대답, 즉 하느님의 대답과 사탄의 대답 밖에 없다고 종종 말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대화의 적이다.-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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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포스터 정말 잘 만들었다. 영화의 장 장면을 캡쳐해놓은 것이기도 하지만, 이 포스터 한 장이 영화의 모든 생각들을 담아내고 있다고 봐도 좋다. 근두운 탄 손오공도 아니고 구름 위를 두둥실 떠나니는 천쪼가리와 단추로 만든 망아지 인형하며, 그 위에 탄 바람에 휘날리는 두 남녀는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사랑은 왜 꿈처럼 되지 않았을까요?" 사랑에 관한 꿈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한 남자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취직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오고, 옆집에 이사온 자신의 이름과도 비슷한 스테파니라는 한 여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전개된다.

  스테판은 꿈과 현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잠이란 것, 그리고 꿈이란 것은 지금의 나의 현실의 울분과 자신감 부족과 상상의 산물을 마음껏 재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적어도 스테판이 잠을 자고 있는 사이 그의 머리 속에선 참으로 다양한 생각들이 뭉글뭉글 피어나는 듯 하다. 인간의 뇌 구조를 대뇌와 소뇌 혹은 좌뇌와 우뇌로 나누지 않고 온갖 키워드의 집합으로 본다면, 스테판의 머리 속엔 '회사가기 싫다' '내가 달력 디자이너로 성공할 경우 수상소감을 뭐라고 하지' '내일 스테파니에겐 어떤 선물을 줄까' '사실은 스테파니보다는 조이가 얼굴은 더 이쁜데' '아까 스테파니에게 키스했던 것이 현실이었을까' 등등이 떠돌아다니고 있을 터.

* 하늘에서 두둥실도 모자라 이제는 배에 숲을 꾸미고 셀로판 바다위를 두둥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생은 어쩌면 행복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평소 눈을 뜨고 자는 나는 검은 눈동자가 왔다리갔다리 한다는 곁에 있는 누군가의 발언에 따르면 꿈을 꾸는 듯 한데 꿈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가끔 아주 가끔씩 깨어나기 직전에 아주 행복하고 황홀한 꿈을 꾸기도 하지만, 또 그것을 약간은 기억하기도 하지만, 아 그 단절의 아쉬움이란. 누구나 꿈 속에서는 바라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짝사랑하는 여자와 혹은 남자와 키스를 할 수도 있고, 가지고 싶은 값비싼 오디오를 가질수도, 자동차도 마음대로 몰 수 있고, 내가 사회적으로 이름을 떨쳐 많은 이들로부터 부러움과 칭송을 받을 수도 있다. 꿈과 현실의 구분이 어렵다면, 적어도 나는 현실 속에서도 꿈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거 아냐? 물론 그 정반대도 가능하지만, 스테판에겐 꿈이 현실은 아니고 현실은 꿈이 될 수 있는 듯 하다. 그의 엉뚱하고 황당한 행동들은 이를 증명해준다. 결코 누구도 현실 속에서 그만큼 엉뚱하고 황당하기란 어려우므로.

* 너네 지금 뭐하는거니. 응 이거 텔레파시 장치인데. 재밌어 해봐. 너 지금 야한거 보고 있지? 어캐 알았어?

  전혀 창의적인 일을 하지 않는 직장에서 나를 달달 볶는 그 배불뚝이 아저씨를 커다란 손으로 뭉개버릴 수도 있고, 별로 매력적이진 않지만 직장에 있는 그 여자상사와 사장실에서 욕탕을 설치하고 안에서 섹스를 할 수도 있고, 나를 무시한 사장놈을 창문으로 내다버려 거리의 청소부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아 스테파니. 스테파니. 스테파니를 빼먹을 순 없지. 나의 사랑. 나의 사랑. 오 나의 사랑. 스테파니.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어. 텔레파시 장치를 만들어, 1초 타임머신 장치를 만들어 그녀를 기쁘게 해줄테야. 아 그녀가 간직하고 있는 그 망아지. 그걸 달리게 할 수 있다면, 그녀가 돌아와 그걸 보고 즐거워한다면 그녀는 날 사랑하게 될거야. 하지만 어쩌니. 꿈속에서는 그렇게 잘 되던 것이 현실로 돌아오면 왜 이 지경인지. 나는 안돼, 안돼. 좌절. 우울. ORZ. 흙흙.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은 나에 대한 그녀의 좌절로 환원되고 사라은 실패했네. 에헤라디야.

   이 영화는 누구나 경험해 본 첫사랑의 느낌을 전해준다. 아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첫눈에 팍 필이 꽂혀버렸는데 어떻게 고백하지, 고백하면 그 다음은 어쩌지, 이런 멍청이 나의 고백을 받아주기나 할까. 아 너무 설레여 잠도 안와. 누가 내게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전수해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영화 속 스테판의 온갖 유치찬란하고 엉뚱한 생각과 행동들은 내가 그때 저질렀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하기 위해 몇날며칠을 편지를 썼다지웠다 썼다지웠다 아 글씨가 못생겨서 다시 쓰고 편지를 어떻게 전해주지, 학원에서 아무도 없을 때 전해줘야할텐데. 아 근데 그런 때가 거의 없잖아. 전해주고는 어쩌지. 용기있게 말도 건네 아니면 달랑 주고 빠져 등등의 이런 생각들. 나의 경험이다.

   영화 속 스테판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 귀엽고 깜찍하고 그런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저질러놓고 매번 후회하는 그이지만 그 시도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수면의 과학>은 처음 사랑에 빠진 그와 그녀들을 위한 영화이다. 그때 당신이 했던, 행동하고 후회했던 그것들이 당신만 그런것이 아니었단 사실을 일깨워주는 영화다. 공감공감. 로맨틱 코미디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정말 신선하고 유쾌한 상영시간 내내 실실 웃고 쪼개다 나오는,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닌, 그런 영화이다. 로맨틱 코미디에 대한 기존의 편견은 버려.

   하나.

   이 영화는 감독 본인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불행히도 아직까지 그 최고의 영화라는 <이터널 선샤인>을 보지 못했지만, 감독 개인의 프로필을 살며시 들여다보면, 그는 원래 밴드의 드러머였고, 이보다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더 유명해졌으며, 그의 뮤직비디오는 최초로 밴드의 연주 모습이 나오지 않는 유치뽕짝찬란한 초딩용 애니메이션과 같은 느낌을 주는 뮤직비디오였다고. 그러나 많은 밴드들이 그에게 뮤직비디오를 의뢰했고 그러다보니 직업이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이로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무한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영화에 재현시키기에 이른다. 그의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은 없지만 각각의 영화들이 감독의 상상력의 산물임을 증명해준다. 2008년에 개봉할 영화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에서는 이번 영화의 주연이었던 스테판 역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열연할 것이라 전해진다.

2008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 _루디 루커 소설 원작
2007 <비 카인드 리와인드> _잭 블랙, 미아 패로 주연
2006 <수면의 과학> _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샬롯 갱스부르 주연
2005 <블록 파티>_샤펠, 모스 데프, 카니에 웨스트 등 뮤지션들
2004 <이터널 선샤인>아카데미 각본상 _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주연
2003 <감독의 작품: 미셸 공드리>DVD 출시
2001 <휴먼 네이쳐> _팀 로빈스, 패트리샤 아퀘트 주연

  둘. 여자들이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과 같은 남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캐릭터는 아닌데, 내가 볼 땐 너무 귀엽고 깜찍해서 볼따구라도 꼬집어주고 싶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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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1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짱꿀라 2007-01-01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리뷰를 읽으니 보고만 싶어지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7-01-01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감독은 뮤직비디오가 굉장히 유명하다네요. 보고 싶은 영환데 볼 수 있을런지-:)

마늘빵 2007-01-0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 이 영화 재밌습니다. 유쾌하고 시종일관 웃음짓다 나오는데 마냥 웃기기만 하는 영화도 아니에요.
산타님 / ^^ 네 기회되면 한번 보세요.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마음을 데려가는 인님 / 네 뮤직비디오로 굉장히 유명해졌다가 이제 영화 좀 건드려볼까 하고 이쪽으로 오게 됐다고 하네요. 자신의 무한한 상상력을 영화로 실현시켜보기 위해.

백년고독 2007-02-25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보았는데 재미있더라고요. ㅎㅎㅎ 왜 이런 영화가 좋을까요 ^^

마늘빵 2007-02-25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습니다. 씨네큐브 영화는 실망시킨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보더라도 무조건 일단 보고 봐요. 이런 영화관이 씨네큐브 밖에 없는게 안타깝습니다. 舊 허리우드와 現 스폰지하우스도 괜찮지만, 영화 고르는 안목은 씨네큐브가 훨 나은거 같아요. 시설도 그렇고.

독주가 2007-09-29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드리의 <휴먼네이처> 무척 재미있답니다..제가 몸에 털이 많아서인지 여주인공에게 확~~마음이 가더라구요.확실히 이 감독, 심각한 것을 안 심각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뛰어난 듯.

마늘빵 2007-09-29 09:05   좋아요 0 | URL
아 그 영화는 못봤어요. 음... 근데 저도 신체적 환경이 님과 비슷하겠군요. ㅋㅋ 공드리 좋아합니다. <이터널 선샤인>을 특히나...
 
술통
장승욱 지음 / 박영률출판사 / 2006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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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같이 술을 못하시는 사람과 그 같이 술을 잘 마시는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이 책과의 만남은. 술통 장승욱에게 있어 술이란 그의 인생으로 환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인생의 시작은 술로 시작하였고, 그의 인생은 끝고 술과 함께이지 않을까. 술이 이렇게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워 보이기는 처음이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술을 좋아라하는, 그러나 취향도 까다로운지라 어둡고 푹신한 자리에서 병맥주를 홀짝이길 좋아하는 나의 술인생은 그의 술인생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시작부터.   

  장승욱의 고등학교 학창시절은 술의 나날이었다. 공부는 또 어지간히 못해서 반에서 럭비선수 빼고는 꼴지를 달렸으며, 자존심이 있어서 아는 문제를 틀리게 하면서까지 꼴지를 하지는 못하는, 만년 꼴지 두번째인생을 살았다. 학교가 끝나면 술로 시작하여 잠이 들고, 술을 깨며 아침을 맞이하고, 학교에서 부족한 잠을 자고, 다시 또 술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의 하루는 학교가 끝나는 오후 5-6시경부터였다. 그런 그가 또 책은 어지간히 좋아해서 종로서적에서 소설을 비롯한 온갖 책들을 다 섭렵하고, 어찌어찌하여 또 운좋게 좋은 대학에 갔다. 또 운좋게 국어교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으나 운좋게 합격한 조선일보에 취직하고, 또 내팽켜지고 운좋게 방송사에 들어가 그답지 않게 몇년을 읅어먹다 때려치고 나와 자유인을 표방하며 살았다. 말이 좋아 자유인이지 그의 말마따나 백수다.

   "장승욱에게 있어서 술은,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있어서 술이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뭍에서 생활하는 동물들에게 공기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그리고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에게 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장승욱이라는 인간에게는, 술이 그와 같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숨을 쉬듯 술을 마시고, 물속을 헤엄치듯 술잔 속에서의 유영을 즐길 수가 있단 말인가? "?(페이퍼 편집자 김원) 

  그만큼 운좋았던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만큼 내공이 있으면서 겸손하기도 힘들 것이고, 그만큼 안정된 곳을 떠나 자유롭게 유랑하는 인생을 살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그만큼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인생 자체가 술과 함께인 삶이다. 하지만 불량청소년답게(?) 술로 시작한 하루하루의 삶은 그에게 이런저런 경험과 깨달음을 선사주기도 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정신멀쩡한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놈처럼 보이는 지하철에서 본 이쁜 여자 집앞까지 따라가 마냥 바라보다 오기와 같은 스토커짓은 취미요, 공중전화 부시기는 특기다. 그의 인생살이를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접하지 않고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망나니같은 짓도 많이 해봤단다. 뭐 싱겁게는(?) 옆에 같이 술마시는 여자한테 키스하기 이런거. 그러면서도 또 여자를 대함에 있어 나름의 철학같은 것이 있는지라 룸살롱 對 파트너 행동수칙 같은 것을 세워 취하더라도 꼭 이것만은 지키기도 했다.   

  "원래 나에게는 내 나름의 룸살롱 對 파트너 행동수칙이 있다. 첫째, 반말을 하지 않는다(물론 말 자체를 거의 안하기도 하지만). 둘째 술은 두 손으로 받고, 두 손으로 따른다. 셋째 신체 접촉을 하지 않는다(나는 또한 누가 내 몸에 손 대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남의 손이 닿기만 해도 통증을 느낄 정도다. 그러니 남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정한 원칙이다). 나도 초년병 시절에는 몸이 됐든 마음이 됐든 파트너가 된 여자와 뭔가 소통을 해보려고 시도해 본적이 있다. 그러나 돈이 매개가 되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거기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 벽은 특히 술자리를 마치고 모두가 계산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실체를 또렷이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위와 같은 행동수칙을 정함으로써 더 높고 두꺼운 벽을 쌓아버리고 만 것이다."

    햐. 이러기도 쉽지 않을텐데 말이다. 아니 당하는 여자 섬뜩하게 첨본 여자를 집앞까지 쫓아가 - 그녀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지만 - 바라보다 오기는 취미면서, 또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 대개의 남자들이 여자를 또 좋아라하는 것과는 달리, 룸살롱은 가자면 어쩔 수 없이 가지만(물론 돈은 안내고) 가서도 비싼 돈주고 들인 여자를 건드리지도 않고 나오는 이 남자 어찌 보면 좋을꼬. (나는 갠적으로 룸살롱 안가봤다. 델구 가주는 사람도 없고,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 돈도 아깝다. 그 돈이면 살 수 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사람이 진정한 술꾼이 아닐까. 마냥 술을 좋아하고 술을 마신 뒤의 일은 나몰라라 하는 그런 망나니와는 다른 술을 마실 때의 酒道와 哲學이 있는 사람이다.   

  여기 실린 글들은 그가 월간 페이퍼에 '취생록'이라는 제목하에 연재해오던 술과 관련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간 연재한 글들의 집합인 이 책은, 그의 인생을 뒤돌아보게 해주는 자서전이기도 하다. 술과 관련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끌어모아 붙이고 쓰다보니 그의 인생을 풀어놓은 글이 되어버렸다. 그에게 있어 술의 역사는 장승욱의 역사이므로. 그의 글은 매우 재미있다. 그것은 글의 내용이 되는 그의 인생이 평범함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추억을 풀어놓는 손의 기술이 탁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5.16 쿠데타에 태어난 그는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었으니 나이도 먹을 만치 먹었다지만 그가 여기에 풀어놓은 술일기들은 아무래도 인생을 살아온 수치를 넘어섰다. 짧은 인생살이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생각을 했으며, 참으로 다양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언제나 술과 함께.   

    <술통>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자에게도,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자에게도, 술을 좋아하는 자에게도, 술을 매우 잘 마시는 자에게도 의미있는 책이다. 술을 떠나서는 인생의 다양성과 굴곡을 경험한 장승욱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그와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술을 함께는 술을 좋아하는 장승욱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나의 술인생과, 그의 술인생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한편 이 책은 매우 위험한 책이다. 술을 예찬하고 술과 함께 인생을 즐겨야만 진정한 삶을 산 것 같다. 그간 술취함에 두려워하고 기피했던 나로서는 인생을 제대로 산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준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술과 함께 인생을 하면 뭔가 달라질거야. 이런 결론.   

  444쪽의 꽤 두꺼운 분량의 책은 그 내용물이 전해주는 무게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무게감이란 것은 방대한 지식의 전달에서 오는 것도, 깊이있는 사색과 성찰에서 오는 것도 아니지만, 인생을 참 의미있게 살아가고자 한, 내 인생의 주인인 인생을 살아온 한 사람의 무게감에서 오롯이 전해온다.   

 "내 청춘이 아름답다고, 또는 아름다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름답기는커녕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내 청춘의 나날들. 청춘은 늘 내게 벗어 던지고 싶은 짐이었고, 갚을 수 없는 빚 같은 것이었으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거지같음'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춘을 본 적은 있다. 해가 뜨면 스러지고 말 풀잎 끝 새벽이슬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아름다워 안쓰럽기까지 했던 그런 청춘을 만난 적이 있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이 실제로, 즉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나는 이 추억 하나로 한 십년은 족히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덧붙이며. 이 책 중간중간 그의 지인들이 그간 관찰해온 장승욱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와 사색은 이 책을 더욱 아름답게, 그가 마신 술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시인이자 교수인 마광수, 소설가 원재길, 페이퍼 발행인 김원, 영화감독 김윤태, GQ 코리아 편집장 이충걸, 방송작가 윤은정, 주부 송현주, 서부고 교사 배재호 등등 그 중간필진의 타이틀만 해도 참으로 다양한 그의 인생살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슬픈 날은 술퍼, 술푼 날은 슬퍼. 2006년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순간 그는 또 어딘가에서 술을 푸고 있겠지. 새해에도, 그 후년에도, 매일매일 술과 함께 인생의 깊이를 더해갈 그에게 한 잔 권한다.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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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6-12-3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

마늘빵 2006-12-3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런. 장승욱씨는 그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을듯.

비로그인 2007-01-0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를 보곤 '허걱!!'이라는 소릴 냈던... 근데 님의 별 다섯 개를 보고 나니 읽고파졌어요..^^;;

마늘빵 2007-01-06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콸츠님 왜요? 술을 좋아해서, 아니면 장승욱이 좋아서? ㅋㅋ
 
술통
장승욱 지음 / 박영률출판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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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이 아름답다고, 또는 아름다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름답기는커녕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내 청춘의 나날들. 청춘은 늘 내게 벗어 던지고 싶은 짐이었고, 갚을 수 없는 빚 같은 것이었으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거지같음'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춘을 본 적은 있다. 해가 뜨면 스러지고 말 풀잎 끝 새벽이슬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아름다워 안쓰럽기까지 했던 그런 청춘을 만난 적이 있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이 실제로, 즉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나는 이 추억 하나로 한 십년은 족히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0쪽

장승욱에게 있어서 술은,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있어서 술이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뭍에서 생활하는 동물들에게 공기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그리고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에게 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장승욱이라는 인간에게는, 술이 그와 같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숨을 쉬듯 술을 마시고, 물속을 헤엄치듯 술잔 속에서의 유영을 즐길 수가 있단 말인가? (페이퍼 발행인 김원) -37쪽

술비 - 일찍이 조정권 시인은 비를 바라보는 마음의 형태를 일곱가지로 나눈 바 있지만, 술꾼들에게 비를 바라보는 마음이란 둘일 수가 없다. 비 내리는 날 술꾼이 술을 마시는 것은 빗방울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땅으로 떨어지는 이치와 다를 것이 없다. 술꾼들은 자기의 살과 피 속에 살고 있는 슬픔의 아이들을 불러내느 비의 호명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슬픔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모든 비는 똑같다. 술비인 것이다. -42쪽

인터뷰어 : 장승팔, 인터뷰이 : 고은 시인

시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시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시는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는 규정되지 않은, 어디에 가둘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왜 시를 쓰십니까?
비유하자면 나는 시라는 무기형을 선고받은 무기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는 나의 존재이유이며, 존재 증명입니다. 내가 시고, 시가 나입니다.

시인은 누구나 고갈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단 한번도 내 시의 샘이 마를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또 말라 본 적도 없습니다. 아마 나는 죽어서도 시를 쓰고 있을 것입니다.

시인으로서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내가 어떤 길을 가게 될지 나도 모릅니다. 다만 나는 시인으로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왔습니다. 문제가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내 삶에 문제가 없다면 아마 나는 사막에 가서라도 문제를 찾아 헤맬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스승이 있다면?
나에게 스승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굳이 얘기하자면 고대 그리스의 장님 시인 호메로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테와 중국의 시인 이백정도.

스스로 대표작을 꼽는다면?
어떻게 대표작이 있겠습니까. 오늘 쓰는 시 한 편이 대표작이랄 수 있겠지요. 남들은 '만인보'라고들 합디다만.
-129-130쪽

무덤: 무(無)에 덤을 붙은 것. 사람은 없음에서 태어나 죽음으로써 다시 없음으로 돌아간다. 결국 삶이란 없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통로일진대 없음인 죽음을 담는 무덤이야말로 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마장에 가는 말들>中)-219쪽

원래 나에게는 내 나름의 룸살롱 對 파트너 행동수칙이 있다. 첫째, 반말을 하지 않는다(물론 말 자체를 거의 안하기도 하지만). 둘째 술은 두 손으로 받고, 두 손으로 따른다. 셋째 신체 접촉을 하지 않는다(나는 또한 누가 내 몸에 손 대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남의 손이 닿기만 해도 통증을 느낄 정도다. 그러니 남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정한 원칙이다). 나도 초년병 시절에는 몸이 됐든 마음이 됐든 파트너가 된 여자와 뭔가 소통을 해보려고 시도해 본적이 있다. 그러나 돈이 매개가 되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거기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 벽은 특히 술자리를 마치고 모두가 계산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실체를 또렷이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위와 같은 행동수칙을 정함으로써 더 높고 두꺼운 벽을 쌓아버리고 만 것이다. -321-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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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31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통 이 작품 장정일이 쓴 서평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읽어본 만한 작품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프락시스님이 올려주신 밑줄긋기를 읽어보니 더욱 읽고 싶어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언어의 죽음
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이론과실천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처음 접하는 저자이지만 이쪽 방면에서는 세계적으로 꽤나 유명한 사람인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 복거일에게서 시작된 영어공용화 논쟁에 대한 관심은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영어공용화 논쟁은 많은 부분을 담아내고 있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세계시민주의, 언어 등등. 영어공용화에 대한 관심이 <언어의 죽음>으로 온 것은, 공용화된 이후의 이전의 언어에 대한 시각을 바라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접한 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며, 그 언어들이 매일같이 몇개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언어가 영어와 중국어, 프랑스어 등등의 다른 거대어들에 의해 잊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 이전에 저자는 <왜 영어가 세계어인가>를 통해 영어로 단일화되어가고 있는 세계적 추세와 다른 언어들의 소멸에 대한 메세지를 전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왜 영어는 세계어인가>에 대한 보충물이라고 말한다.

  "이에 나는 <왜 영어가 세계어인가>에 대한 일종의 보충서인 이 책을 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언어 손실에 대한 정보 부족 문제는 시급히 해결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인용한 여러 전문가 집단의 보고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인류의 언어 사상 중대한 순간에 와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언어의 죽음은 현실이다. 그게 문제가 되는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 책은 그렇다는 주장을 담고 있따.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이 책의 목표는 이제까지 알려진 사실을 제시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언어의 죽음은 정확히 무엇인가? 어떤 언어가 죽어가고 있는가? 언어는 왜 죽는가? - 그리고 왜 유독 그런 일이 일어나는 듯이 보이는가? 이 책에서는 세 가지 어려운 질문을 다루고 있다. 언어의 죽음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대응할 방법은 있는가? 대응해야 하는가? 두번째와 세번째 질문이 특히 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면밀하고 세심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 궁극적인 대답은 힘찬 '그렇다'와 '그렇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수두룩하다. 언어의 죽음 또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느끼지 못할 일이다. 우리는 만일 영어공용화가 선언된다면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 어느 소수의 사람들만이 느끼고 있는 그 절실함이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으므로. <언어의 죽음>은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1. 언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2. 언어의 죽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일까, 3. 언어는 왜 죽는가, 4.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5.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를 통해서 언어의 죽음을 기정사실로서 받아들이고, 그것이 왜 우리의 일상적 삶과 연계해 중요하며, 그렇다면 왜 일어나는지, 또 이를 방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어교체는 통상 (개인이나 집단이)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천천히 또는 갑자기 이동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위기 언어에 대한 글을 읽을 때 자주 보게 되는 용어 몇 가지를 더 소개한다. 언어손실은 개인이나 집단이 이전에 사용하던 언어를 더 이상 사용할 능력이 없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언어유지는 사람들이 한 언어를 계속 사용하는 상황을 말한다. 특별한 수단을 채택함으로써 유지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언어충성은 한 언어에 대한 위협이 인식되었을 때 그 언어를 보존하고자 하는 관심의 표현이다." (38쪽 각주)

   우리는 현재 언어유지 상태에 있지만, 영어공용화는 언어교체를 불러올 것이고, 언어교체는 곧 언어손실로 이어질 것이다. 언어유지 상태가 언어손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언어충성도가 그만큼 중요하게 된다. 굳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언어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있다.


  언어의 죽음

  전 세계적으로 언어분포는 대단히 불균등하다. 4% 정도가 유럽에, 그리고 15% 정도가 아메리카에, 31% 정도가 아프리카에, 50% 정도가 아시아와 태평양에 분포해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 언급한 국가는 언어가 가장 많인 분포되어 있는 나라들이고, 파푸아뉴기니나 인도네시아만 해도 전체의 25% 정도에 해당하는 ,1529가지 언어가 있다고 한다. 정말 어머어마한 숫자다. 한 국가나 대륙에만 해도 이만큼의 언어가 있다는 것이. 언어를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에 의존할까. 사실 정확히 어떤 것은 한개의 언어다, 라고 규정지을 만한 기준은 없다. 한국어의 경우 서울말과 경상도 사투리, 전라도 사투리는 각각의 언어가 아니라 한국어라는 범주안에들어가지만, 기준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더 나뉘어질수도 있다. 영어의 경우에는 경계가 더 모호해진다.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는 그렇다치고, 아시아 영어가 있고, 그 중에서도 일본식 영어, 필리핀식 영어가 존재한다. 분명히 같은 언어이지만 지역과 특색에 따라 서로 못알아듣는 경우도 발생한다. 데이비드 크리스털에 따르면 이런 경우 그 나라의 사회,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변화하고 달라지는 경우에는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꽤나 직접적인 통계와 자료를 통해 언어의 죽음을 논한다. 33쪽에 있는 표에 따르면 1억명 이상의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8가지이며, 이는 전체 언어의 0.13 %에 불과하다. 또 1천만엔서 9,900만이 사용하는 언어는 72가지이며, 이 또한 숫자에 비해서는 극히 적은 비율인 전체언어의 1.2%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라는 것이 이름만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저 8+72가지 안에 모두 속할 것이고, 그나마도 다 알지 못할 것일진대, 엄청나게 많은 언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언어들은 아주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고, 사라진다해도 그들의 절실함이 우리에게까지 진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언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엄밀한 사실이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들이 왜 사라지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언어를 보존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일이다.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렇게 기준을 세울 수 있다. 내가 이 언어의 마지막 생존자여서 누군가와 대화가 불가능하다면 나는 그저 언어의 기록물일 뿐이다. 내가 사라진다면 언어 또한 사라지는 것과 같다. 문서로 기록되지 않은 언어가 있다면, 그야말로 원주민들끼리의 입말만이 존재한다면 그 언어는 아예 애초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언어가 사라짐은 물론 언어의 존재 사실 조차도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인류의 비극이다. 하지만 이는 극단적인 경우이고(극단적이라고 해서 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이때의 극단은 비극과 연결된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라도 언어가 원래 언어를 사용했던 이들 다수에게서 사용되지 않는다면 그 언어는 죽어간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비록 문서로 기록되어있다하더라도 더 이상 언어가 쓰임을 받지 못한다면 죽은 것이다.


  언어는 왜 죽는가

  첫째, 한 언어의 사용자 수는 우선 자연재해로 인해 심각하게 줄어들 수 있다. 태풍, 지진, 해일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죽음을 당함으로써 언어 또한 사장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인도네시아의 경우 언어의 숫자는 엄청나다. 하나의 언어를 천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쓰는 경우는 허다하며, 그 아래의 숫자, 수십명, 수백명이서 사용하는 언어 또한 매우 많은 것이 사실이다. 충분히 언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위험이 될 수 있다.

  둘째, 문화흡수현상이다. 이는 "한 문화가 좀 더 지배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특성을 잃어 가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구성원들이 새로운 행동 양식과 습속을 받아들이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첫째보다는 이 두번째 현상에 가까울 것이다. 주변의 가까운 나라들에 의해 언어는 분명 감염되어가고 있지만, 이것은 우려할 바는 아니며, 더 두려운 것은 하나의 문화나 언어가 하나의 문화와 언어를 흡수통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크게 세가지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하나가 지배 언어의 압력이며, 두번째가 두개 언어를 병용하는 상태이고, 세번째가 원래 언어가 새 언어에게 자리를 내주는 상황이다. 바로 이것이 영어공용화에 있어서 복거일이 주장하는 바이고, 그의 주장대로라면 한국어는 소멸의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

  첫째, 점점 더 사멸 위험이 커지고 있는 언어에서 그 언어를 구조하려는 동기가 있다고 할 때, 그 언어으 ㅣ어떤 형태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야 하는가?

  둘째, 좀 더 넓은 관점의 문제가 있다. 토착민 공동체의 일부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는 토착 문화에 반드시 포함되는 부분인가? 그리고 거기에 어떤 종류의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

  첫째 문제에 대해서 저자는 공동체 전체의 정통성을 증진할 것을 요청한다. 새로운 낱말이나 발음, 문법형식 등 모든 것을 수용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고종석의 논리와 비슷하다. 언어의 진정한 생명은 변이의 폭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화를 수용하는 자세에서 찾을 수 있고, 변화하지 않는 언어는 죽은 언어 뿐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변화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문제에 있어선 언어를 문화의 일부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자기 조상의 언어를 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의 일원이라 믿고 또 외관과 행동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하나의 토착민 공동체 속에 그렇게나 많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어느 정도 정체성을 공유할 수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실제로 일부 보고에 따름녀 언어를 민족 정체성의 유력한 상징으로 바라보는 정도는 문화에 따라 다른 것 같다. "

  언어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문화가 지속될 것이라는 견해는 많다. "한편, 옛날이야기는 새로운 언어를 매개로 구연하는 일이 분명히 가능하고, 또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승과 지혜의 많은 부분 또한 새 언어로 설명과 논의가 가능하다. 다른 한편, 번역 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부분을 잃게 된다. 새로운 언어는 이야기가 지니는 온기와 정신을 그대로 전달해 주지 못할 것이고, 말의 응수도 잃게 되며, 일화나 농담도 그 재미가 빠져 버릴 것이다. 의례에서 사용되는 표현도 운율과 음률의 무게가 전과 같지 않을 것 것이다. 그러나 번역이 지니는 이런 한계는 잘 알려져 있고 모든 언어에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다. 프랑스 어로 번역된 작품을 통해 우리가 프랑스의 삶과 문화, 생각을 대단히 많이 배울 수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위기 언어의 문화적 무게를 그 언어를 교체해 들어가고 있는 지배 언어로부터 일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첫째, 위기 언어는 지배 언어 공동체 내에서 사용자들의 지위가 향상되면 발전을 보일 것이다. 둘째, 위기 언어는 지배 언어 공동체 내에서 사용자들이 상대적으로 부유해지면 발전을 보일 것이다. 셋째, 위기 언어는 지배 언어 공동체 내에서 사용자의 법적 권한이 강화되면 발전을 보일 것이다. 넷째, 위기 언어는 교육계 내에서 자리 잡은 사용자들이 많으면 발전을 보일 것이다. 다섯째, 위기언어는 사용자들이 자신의 언어를 글로 적을 수 있으면 발전을 보일 것이다. 여섯째, 위기 언어는 사용자들일 전자 기술을 활용할 수 있으면 발전을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은 데이비드 크리스털이 제시하고 있는 여섯가지 방안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에겐 그다지 먹힐 것 같진 않다. 우리는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위기언어'까지 도달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공용화 이후의 영어단일화가 이루어진다면 먼 훗날 가능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전 세계에서 매우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 중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으므로 당장의 앞날을 걱정하진 않아도 되지만, 영어공용화는 충분히 이에 위협을 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매우 학술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접하기 딱딱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쪽 방면에 관심이 있는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이며, 저자의 오랜 시간 공들인 언어의 죽음에 대한 지식과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글자크기가 작고 내용이 딱딱해 읽는데엔 시간과 정성을 쏟을 필요가 있다.  기회가 된다면 그의 <왜 영어가 세계어인가> 또한 접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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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0735 2006-12-28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가 또 하나의 논문이네요.;; ㅠ_ㅠ
아프락사스님 덕분에 영어공용화 논쟁에 관심을 한번 가져보려고 했어요. 지난번부터요. 마음이 더 끌리게 되면 <왜 영어가 세계어인가>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마늘빵 2006-12-28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길죠? ^^ 이쪽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관련 책들을 다 보고 있어요. 흐름이 끊기면 또 관심도 전환되기 마련인지라. 재밌어요. 이건 좀 학술적이긴 해요. 처음부터 접하기엔 흥미는 좀 떨어질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