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통
장승욱 지음 / 박영률출판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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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같이 술을 못하시는 사람과 그 같이 술을 잘 마시는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이 책과의 만남은. 술통 장승욱에게 있어 술이란 그의 인생으로 환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인생의 시작은 술로 시작하였고, 그의 인생은 끝고 술과 함께이지 않을까. 술이 이렇게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워 보이기는 처음이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지만 술을 좋아라하는, 그러나 취향도 까다로운지라 어둡고 푹신한 자리에서 병맥주를 홀짝이길 좋아하는 나의 술인생은 그의 술인생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시작부터.   

  장승욱의 고등학교 학창시절은 술의 나날이었다. 공부는 또 어지간히 못해서 반에서 럭비선수 빼고는 꼴지를 달렸으며, 자존심이 있어서 아는 문제를 틀리게 하면서까지 꼴지를 하지는 못하는, 만년 꼴지 두번째인생을 살았다. 학교가 끝나면 술로 시작하여 잠이 들고, 술을 깨며 아침을 맞이하고, 학교에서 부족한 잠을 자고, 다시 또 술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의 하루는 학교가 끝나는 오후 5-6시경부터였다. 그런 그가 또 책은 어지간히 좋아해서 종로서적에서 소설을 비롯한 온갖 책들을 다 섭렵하고, 어찌어찌하여 또 운좋게 좋은 대학에 갔다. 또 운좋게 국어교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으나 운좋게 합격한 조선일보에 취직하고, 또 내팽켜지고 운좋게 방송사에 들어가 그답지 않게 몇년을 읅어먹다 때려치고 나와 자유인을 표방하며 살았다. 말이 좋아 자유인이지 그의 말마따나 백수다.

   "장승욱에게 있어서 술은,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있어서 술이란,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뭍에서 생활하는 동물들에게 공기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그리고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에게 물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듯이, 장승욱이라는 인간에게는, 술이 그와 같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숨을 쉬듯 술을 마시고, 물속을 헤엄치듯 술잔 속에서의 유영을 즐길 수가 있단 말인가? "?(페이퍼 편집자 김원) 

  그만큼 운좋았던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만큼 내공이 있으면서 겸손하기도 힘들 것이고, 그만큼 안정된 곳을 떠나 자유롭게 유랑하는 인생을 살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그만큼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인생 자체가 술과 함께인 삶이다. 하지만 불량청소년답게(?) 술로 시작한 하루하루의 삶은 그에게 이런저런 경험과 깨달음을 선사주기도 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정신멀쩡한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놈처럼 보이는 지하철에서 본 이쁜 여자 집앞까지 따라가 마냥 바라보다 오기와 같은 스토커짓은 취미요, 공중전화 부시기는 특기다. 그의 인생살이를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접하지 않고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망나니같은 짓도 많이 해봤단다. 뭐 싱겁게는(?) 옆에 같이 술마시는 여자한테 키스하기 이런거. 그러면서도 또 여자를 대함에 있어 나름의 철학같은 것이 있는지라 룸살롱 對 파트너 행동수칙 같은 것을 세워 취하더라도 꼭 이것만은 지키기도 했다.   

  "원래 나에게는 내 나름의 룸살롱 對 파트너 행동수칙이 있다. 첫째, 반말을 하지 않는다(물론 말 자체를 거의 안하기도 하지만). 둘째 술은 두 손으로 받고, 두 손으로 따른다. 셋째 신체 접촉을 하지 않는다(나는 또한 누가 내 몸에 손 대는 것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남의 손이 닿기만 해도 통증을 느낄 정도다. 그러니 남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정한 원칙이다). 나도 초년병 시절에는 몸이 됐든 마음이 됐든 파트너가 된 여자와 뭔가 소통을 해보려고 시도해 본적이 있다. 그러나 돈이 매개가 되는 모든 관계가 그렇듯 거기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그 벽은 특히 술자리를 마치고 모두가 계산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 실체를 또렷이 드러낸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위와 같은 행동수칙을 정함으로써 더 높고 두꺼운 벽을 쌓아버리고 만 것이다."

    햐. 이러기도 쉽지 않을텐데 말이다. 아니 당하는 여자 섬뜩하게 첨본 여자를 집앞까지 쫓아가 - 그녀가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지만 - 바라보다 오기는 취미면서, 또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시는 대개의 남자들이 여자를 또 좋아라하는 것과는 달리, 룸살롱은 가자면 어쩔 수 없이 가지만(물론 돈은 안내고) 가서도 비싼 돈주고 들인 여자를 건드리지도 않고 나오는 이 남자 어찌 보면 좋을꼬. (나는 갠적으로 룸살롱 안가봤다. 델구 가주는 사람도 없고, 별로 가고 싶지도 않고, 돈도 아깝다. 그 돈이면 살 수 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이런 사람이 진정한 술꾼이 아닐까. 마냥 술을 좋아하고 술을 마신 뒤의 일은 나몰라라 하는 그런 망나니와는 다른 술을 마실 때의 酒道와 哲學이 있는 사람이다.   

  여기 실린 글들은 그가 월간 페이퍼에 '취생록'이라는 제목하에 연재해오던 술과 관련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간 연재한 글들의 집합인 이 책은, 그의 인생을 뒤돌아보게 해주는 자서전이기도 하다. 술과 관련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끌어모아 붙이고 쓰다보니 그의 인생을 풀어놓은 글이 되어버렸다. 그에게 있어 술의 역사는 장승욱의 역사이므로. 그의 글은 매우 재미있다. 그것은 글의 내용이 되는 그의 인생이 평범함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의 추억을 풀어놓는 손의 기술이 탁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5.16 쿠데타에 태어난 그는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었으니 나이도 먹을 만치 먹었다지만 그가 여기에 풀어놓은 술일기들은 아무래도 인생을 살아온 수치를 넘어섰다. 짧은 인생살이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생각을 했으며, 참으로 다양한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언제나 술과 함께.   

    <술통>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 자에게도,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자에게도, 술을 좋아하는 자에게도, 술을 매우 잘 마시는 자에게도 의미있는 책이다. 술을 떠나서는 인생의 다양성과 굴곡을 경험한 장승욱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그와 나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술을 함께는 술을 좋아하는 장승욱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나의 술인생과, 그의 술인생을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한편 이 책은 매우 위험한 책이다. 술을 예찬하고 술과 함께 인생을 즐겨야만 진정한 삶을 산 것 같다. 그간 술취함에 두려워하고 기피했던 나로서는 인생을 제대로 산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준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술과 함께 인생을 하면 뭔가 달라질거야. 이런 결론.   

  444쪽의 꽤 두꺼운 분량의 책은 그 내용물이 전해주는 무게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무게감이란 것은 방대한 지식의 전달에서 오는 것도, 깊이있는 사색과 성찰에서 오는 것도 아니지만, 인생을 참 의미있게 살아가고자 한, 내 인생의 주인인 인생을 살아온 한 사람의 무게감에서 오롯이 전해온다.   

 "내 청춘이 아름답다고, 또는 아름다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아름답기는커녕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내 청춘의 나날들. 청춘은 늘 내게 벗어 던지고 싶은 짐이었고, 갚을 수 없는 빚 같은 것이었으며, 한마디로 말하자면 '거지같음'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춘을 본 적은 있다. 해가 뜨면 스러지고 말 풀잎 끝 새벽이슬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아름다워 안쓰럽기까지 했던 그런 청춘을 만난 적이 있다. '추억을 먹고 산다'는 것이 실제로, 즉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나는 이 추억 하나로 한 십년은 족히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덧붙이며. 이 책 중간중간 그의 지인들이 그간 관찰해온 장승욱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와 사색은 이 책을 더욱 아름답게, 그가 마신 술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시인이자 교수인 마광수, 소설가 원재길, 페이퍼 발행인 김원, 영화감독 김윤태, GQ 코리아 편집장 이충걸, 방송작가 윤은정, 주부 송현주, 서부고 교사 배재호 등등 그 중간필진의 타이틀만 해도 참으로 다양한 그의 인생살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슬픈 날은 술퍼, 술푼 날은 슬퍼. 2006년 12월 31일, 한해의 마지막 순간 그는 또 어딘가에서 술을 푸고 있겠지. 새해에도, 그 후년에도, 매일매일 술과 함께 인생의 깊이를 더해갈 그에게 한 잔 권한다.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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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6-12-31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

마늘빵 2006-12-3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런. 장승욱씨는 그건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을듯.

비로그인 2007-01-0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를 보곤 '허걱!!'이라는 소릴 냈던... 근데 님의 별 다섯 개를 보고 나니 읽고파졌어요..^^;;

마늘빵 2007-01-06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콸츠님 왜요? 술을 좋아해서, 아니면 장승욱이 좋아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