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 - 대화의 역사
스티븐 밀러 지음, 진성록 옮김 / 부글북스 / 2006년 12월
절판


대화가 만족스럽지 못한 주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에 의문이 제기될 경우에 수세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라고 몽테뉴는 말한다. "논증이 실패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소리와 표정을 바꾼다. 그리고 자신을 추스를 생각은 없고 예의 없이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허약함과 취약성을 스스로 노출시킨다." -19쪽

"대화 중에 즐거워하거나 지각 있어 보이는 사람이 드문 이유 중 하나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향해 오는 말에 대해 무슨 대답을 명쾌하게 내놓을까 궁리하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더 깊이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얼굴에 관심의 표정이 살짝 실릴 정도로만 정신을 한번 가다듬고 주변을 살폅라. 그러면 그 순간 당신은 그들의 눈과 생각의 열차가 당신의 말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채 자신의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으려고 안달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라 로슈푸코)-20쪽

스위프트가대화에서 치유하기 힘든 잘못으로 꼽는 것은 두 가지다. 말하는 사람 본인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하나인데, 이 잘못을 스위프트는 현학이라고 부른다. 다른 한 가지 잘못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자르려고 드는 안달이며, 자신의 말이 잘렸을 때 느끼는 불쾌감"이다. 또한 "반박하고 부인하고 싶은 갈망과 거짓말을 하고 싶은 욕망"으로 고통 받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사고의 방랑'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어서 그때그때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위프트에 따르면 "이런 '홀림'에 빠져 고통 받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신병원의 광인만큼이나 대화에 부적격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21-22쪽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가질 권리를 누린다는 개념은 오늘날엔 모든 의견이 똑같이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의견이 다 유효하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자신들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나눠 갖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잦다. 나눈다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관대한 행동을 암시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경우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당신과 나눠 먹자고 내놓는 음식을 비판하는 행위가 무례한 것과 똑같이, 공유하는 어떤 생각을 비판하는 것도 또한 무례할 수 있다. 공유는 대화의 활기를 죽이는 셈이 된다. 대화 대신에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공유가 늘어나면 선의의 놀림이 줄어들 것이고 숨 막히게 만드는 공손 때문에 대화도 나른해질 것이다. -47-48쪽

교역과 대화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흄과 존슨에 따르면, 한 사회의 교역의 범위와 그 사회의 '반대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세상'의 크기에 상관관계가 있다. <영국사>에서 흄은 교양 없는 (혹은 세련되지 않거나 점잖지 못한) 사회와 세련된 사회를 대비시킨다. 그가 말하는 교양 없는 사회는 농업이 주가 되는 사회를 뜻한다. 도시가 많지 않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시민들의 비율이 낮은 사회다. 흄의 <영국사>는 대부분 교역의 확장이 어떤 식으로 교양 없는 사회를 세련된 사회로 변화시켰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그의 표현대로, 사치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흄이 말하는 세련된 사회는 대화가 번성하는 사회이다. 사치는 대충 기본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그 이상의 상업적 활동을 의미한다. -89쪽

존슨의 관점에서 보면 사치의 성장은 세 가지 방법으로 대화를 향상시킨다. 첫째, 사치의 성장은 종교적 광신의 비사교적인 열정을 식힌다. 서부의 섬들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계몽되지는 않았지만, 청교주의의 엄격함이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둘째, 사치의 성장은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여유를 가진 사람의 수를 늘려준다. "지성이 없으면 사람은 사교적이지 못하다. 그 사람은 단지 무리를 지어 살 뿐이다. 그런 곳에는 지성이 거의 없다. 모든 사람들은 일상의 노동에 얽매어 지낸다. 그리고 온 마음이 노동에 바쳐진다" 마지막으로, 사치의 성장은 더 많은 사람들을 한 곳으로 불러 모은다. 그러면 거기에는 대화의 기회가 더 많아지게 된다. 고지의 사람들은 "지금 그들의 특이함을 잃고 일반적인 공동체와 섞이려고 서두르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93쪽

에디슨은 상상의 즐거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는 것이 그 하나이고,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자연이든, 그림이든, 시속에 등장하는 것이든, 멋진 풍경들은 마음 뿐 아니라 신체에도 온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장면들은 또 상상력을 맑고 밝게 가꿔줄 뿐 아니라 비탄과 우울을 내쫓을 수도 있다. "거대한 산들과 높은 바위, 낭떠러지, 혹은 넓은 폭포"를 언급하면서, 에디슨은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자연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저 거친 장엄함을 보는 영향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라고 묻는다. 에디슨에 따르면, "끝 간데 없이 펼쳐지는 광경에 돌연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고, 그 광경들을 음미할 때 영혼에서 몹시 유쾌한 고요와 가슴 벅찬 경탄을 느끼게 된다." 그는 "아름다운 경치는 영혼을 기쁘게 만든다"고 말한다.
풍경의 문학적 묘사 또한 영혼을 즐겁게 만든다고 에디슨은 주장한다. "풍경을 묘사한 글들은 독자의 마음 속에 은밀히 감춰져 있던 흥분과 열정을 흔들어 일깨우는 경향이 있다. <일리아드>를 읽는 것은 황무지와 자연 그대로의 늪, 거대한 숲, 제멋대로 생긴 바위와 낭떠러지가 엮어내는 다양한 풍경들이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곳을 여행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호머가 자신의 독자들에게 장엄한 아이디어를 채워준다." -203-204쪽

"자연적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머문다. 반면 사회적 인간은 오직 자신의 밖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사는 방법만을 안다. 말하자면 사회적 인간은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끌어낸다." (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208쪽

소로는 대화의 세계를 경멸하지 않는다. 그는 고독이 우리에게 진지한 독서의 시간을 안겨주기 때문에 대화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우리의 독서와 대화와 사고는 모두 매우 낮은 수준에 있다. 지능이 약한 존재에게나 어울릴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사교가 고독보다 덜 만족스럽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는 일은, 그 상대가 제아무리 훌륭한 존재일지라도, 금방 따분해지고 시큰둥해진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다. 지금까지 고독만큼 벗으로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사교적 행위는 부담이라고 소로는 말한다. 그가 속한 비공식 클럽은 규칙 때문에 지루하게 다가온다. "자주 만나는 이 모임을 서로가 참아줄 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과 에티켓, 공손함에 동의해야만 한다." 공손함은 그만한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그는 암시한다. 대화에서 상대방을 즐겁게 만드는 데 필요한 노력이 그 대화에서 끌어내는 혜택보다 더 크다는 뜻이다. -264-265쪽

반체제문화 이론가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훼손시킨다. 자신들이 허위의식으로 고통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비판자들은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면서도 마약 복용이 아닌 길을 강조했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의 말을 옮긴다. "집권 권력 구조가 개인의 의식만이 아니라 잠재의식과 무의식까지 조작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면 정말로 놀랍다" 허위의식이라는 개념은 대화에 가장 중요한 동등을 손상시킨다. 마르쿠제는 실제로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의식은 거짓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과의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다." -306쪽

마르쿠제의 별이 기울던 1970년대에는, 프랑스 이론가 미셸 푸코가 부르주아 사회를 비판하는 선봉에 섰다. 그는 마르쿠제의 허위의식과 비슷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체계'의 죄수라는 주장이다. 푸코가 말하는 진리체계란, 어떤 특정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에 의해 결정되는, 사물을 보는 방식을 의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른 채 '진리체계'의 죄수가 되어버린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세뇌가 되었다는 것이다. -306-307쪽

죽기 직전에 한 어느 인터뷰를 보면, 푸코는 '진리체계'라는 자신의 개념이 대화를 훼손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던 듯하다. 이제 푸코는 알찬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진리체계'의 죄수가 아니라는 가정이 깔려야 한다고 암시한다. 달리 표현하면, 누구나 다 똑같은 수준의 의식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진지한 놀이에서는, 그리고 상호 해명의 작업에서는, 몇 가지 측면에서 보면 각자의 권리가 그 토론에 내재해 있다."
몇몇 에세이에서 푸코는 '진실체계'라는 자신의 개념과 상충하는 아이디어를 한 가지 내놓았다. 그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각자 삶이 역사의 죄수라고 주장했다. "내가 하는 말은 객관적인 가치를 갖지 않는다. 나의 저작물 각각은 나 자신의 전기 중 일부분을 이룬다."
만약 모든 아이디어들이 각 개인의 진리라면, 거기에는 알찬 대화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아이디어의 교환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 화자(혹은 필자)는 오직 개인적인 진실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청중(혹은 독자)은 "당신의 개인적인 진실을 나에겔 털어놓는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07-308쪽

"모뎀에서 모뎀으로 글을 쓸 때에는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당신에게 아주 편리한 축약어가 상대방에게는 무성의하고 당돌하게, 심지어 불쾌하게 비칠 수 있다. 약간의 경멸이 크게 확대될 수도 있다. 더없이 약한 암시도 꾸짖음처럼 들릴 수 있다. 미묘함과 아이러니, 풍자가 담긴 글이 상대방에게는 쿵하는 굉음으로 닿을 수도 있다."
(<당신이 나에게 보내다>, 패트리샤 T. 오코너, 스튜어트 켈러먼) -353쪽

"모든 이성적인 생명체에게는 무리를 짓고 사교를 하는 성향이 강하다."(흄)
"사람은 명예와 존엄을 노려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나 벌과 개미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까닭에 인간 사회에서는 시기와 증오가, 결과적으로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나 벌과 개미의 사회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일에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다른 존재들을 위압할 수 있는 파워가 없기 때문이다."(홉스, <리바이어던>)-356-357쪽

상업의 확장이 대화의 세계를 넓혀줄 것이라고 흄이 주장했을 때, 그는 아마 틀린 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상업의 성장이 대화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상업이 대화 회피 장비들의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고, 그 결과 대화의 세계는 오히려 수축하는 것 같이 보인다.-362쪽

근본주의 기독교인들도 급진적인 이슬람에 가담하는 사람들과 공통점 몇 가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대화의 세계를 파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박해할 뜻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지속적으로 성경을 들먹이고 한 가지 질문에는 두 개의 대답, 즉 하느님의 대답과 사탄의 대답 밖에 없다고 종종 말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대화의 적이다.-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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